6화(5,016자) · 강박
쌀알 도면
열다섯 개의 문 · 남시우
만 19세 이상 이용가
여준은 십오 년 동안 도면을 머릿속에만 두었다. 종이를 뺏긴 뒤로 그렇게 정했다. 머리에 있는 것은 아무도 못 뺏는다. 그런데 머리에 있는 것은 아무한테도 못 준다. 진서에게 문 열다섯을 말로 알려 주는 데 엿새가 걸렸다. 말은 순서대로만 간다. 도면은 한눈에 간다.
11월 11일 수요일, 여준은 도면을 바닥에 놓기로 했다.
재료는 밥알이었다. 십오 년 동안 모았다가 해마다 버리던 것. 이번에는 끝방에 온 뒤로 아흐레치를 버리지 않고 모았다. 식판마다 밥을 한 숟가락씩 남겼다. 말려서 단단해진 밥알은 쌀알처럼 하얗고 작았다. 매트리스 솔기에서 꺼내니 한 줌이 조금 넘었다.
여준은 침대를 벽 쪽으로 붙이고 방바닥 한가운데를 비웠다. 가로 삼 미터, 세로 이 미터 이십오. 그 바닥이 은혜요양원이 됐다. 손바닥 하나가 스무 걸음. 밥알을 한 알씩 놓아 벽을 그었다. 2병동 복도가 먼저 생겼다. 꺾이는 자리, 계단 셋. 끝방 두 칸과 그 사이 두 걸음짜리 틈. 그다음 본관. 식당, 예배실, 세탁실. 마당, 개 우리, 사무동, 정문.
문은 밥알 두 개를 세로로 세워 표시했다. 열다섯. 문마다 옆에 무엇이 필요한지 놓았다. 첫째 문 옆에는 머리카락 한 올, 열쇠. 둘째 방화문 옆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무겁기만 한 문이다. 셋째 옆에는 파랗게 물든 실 한 가닥. 예배 때 여준의 환자복 소매에서 뽑은 실을 국물에 적셔 두었다가 말린 것이었다. 여섯째 옆에는 반창고 조각. 번호 넷.
그리고 도면 전체에 경사를 넣었다. 여준은 금 간 컵을 도면 위 여기저기 놓아 가며 쟀다. 은혜요양원은 서쪽으로 쌀알 한 개씩 기울었다. 마당은 쌀알 두 개. 정문 앞 산길은 세 개. 물이 흐르는 쪽, 사람이 뛰면 빨라지는 쪽. 여준은 그 쪽을 밥알의 뾰족한 끝으로 가리켰다.
사흘이 걸렸다. 찬송 시간에만 했다. 스피커가 켜지면 무릎을 꿇고 밥알을 놓았고, 꺼지면 침대에 앉아 벽을 봤다. 틈 너머에서 진서가 매일 물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했느냐고. 여준은 방 이름을 댔다. 오늘은 세탁실. 오늘은 마당. 오늘은 개 우리. 진서는 개 이름을 물었다. 여준은 몰랐다. 진서가 이름을 지었다. 한 마리는 목사, 한 마리는 아멘. 여준은 그 이름을 듣고 사흘 만에 처음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밥알 하나를 떨어뜨렸다. 식당 자리였다. 식당이 한 알 좁아졌다. 여준은 그 알을 찾아 도로 놓았다.
11월 13일 금요일 오후 세 시 찬송 때, 도면이 끝났다. 정문 앞에 밥알 두 개를 세웠다. 열다섯째. 여준은 일어서서 도면을 내려다봤다. 무릎이 저렸다. 십오 년이 한 방바닥에 있었다. 가로 삼 미터에 십오 년. 쌀알 수백 개에 문 열다섯.
여준은 진서를 불렀다. 틈으로. 진서는 틈에 한쪽 눈을 댔다. 두 걸음 너머에서, 여준 방의 바닥이 비스듬히 보였을 것이다. 여준은 도면을 말로 따라가며 손가락으로 짚었다. 첫째부터 열다섯째까지. 진서는 한 번 들었다. 두 번 들었다. 세 번째에는 여준보다 먼저 말했다.
“일곱째는 세탁실 뒷문. 서쪽 벽. 문 밑이 벌어져 있음. 여덟째는 마당 쇠창살, 경첩 두 음.”
진서가 그 두 음을 불렀다. 이번에는 음이 맞았다.
찬송이 끝났다. 스피커가 꺼지는 딸깍 소리. 그리고 그 뒤에, 여준이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났다. 계단 세 개를 내려오는 구두 굽. 찬송 시간이 아니면 오지 않던 원장이, 찬송이 끝나자마자 왔다. 여준은 침대로 가지 않았다. 갈 시간이 없었다. 도면 앞에 서 있었다.
유리창에 원장의 얼굴이 떴다. 안경 너머 눈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오래 머물렀다. 원장은 도면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알아보는 데 삼 초가 걸렸다. 여준은 그 삼 초를 셌다.
열쇠 두 번. 문이 열렸다. 원장이 들어왔다. 김 보호사가 뒤따라 들어왔다. 원장은 문간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봤다. 도면의 정문 쪽이 원장의 구두 코 바로 앞이었다.
“형제님, 이게 뭐예요.”
“은혜요양원이오.”
원장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원장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을 여준은 십오 년 동안 두 번 봤다.
“잘 그리셨네. 측량 기사 출신이라 다르네. 여기가 예배실이고, 여기가 내 방이고.”
원장이 한 발 들어왔다. 도면 가장자리에서 잠깐 멈췄다. 발 디딜 자리를 고르는 것처럼. 구두가 정문을 밟았다. 밥알 두 개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 원장은 그 소리를 듣고 발을 비틀었다. 정문이 가루가 됐다.
“여기가 정문이네.”
한 발 더. 사무동.
“여기가 마당. 우리 개들.”
개 우리가 구두 밑에서 흩어졌다. 여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원장이 원하는 것을 주게 된다. 원장은 여준이 달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들면 강박이다. 달려들지 않아도 강박일 것이다. 여준은 어느 쪽이든 그 값을 셈에 넣었다. 그리고 달려들지 않는 쪽을 골랐다. 틈 너머에 진서가 있었다. 진서는 도면을 보지 못했다. 들었다. 세 번. 여준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원장은 도면을 끝까지 밟았다. 세탁실, 식당, 2병동 복도. 끝방 두 칸 앞에서 멈췄다. 틈을 표시한 밥알 두 줄. 원장은 그것을 오래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침대 쪽을 봤다. 벽에 붙은 침대. 원장이 김 보호사에게 턱짓을 했다.
“침대 치워 봐.”
여준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침대 앞을 막아섰다. 김 보호사가 여준의 팔을 잡았다. 여준은 팔을 빼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침대 쇠틀을 잡았다. 원장이 한 걸음 물러섰다. 구두 밑창에 밥알 가루가 묻어 하얬다.
“형제님, 흥분하셨네. 오늘은 좀 쉬세요.”
원장이 나가기 전에 김 보호사에게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했다. 김 보호사는 끝방 바닥을 쓸었다. 빗자루가 지나갈 때마다 밥알이 서걱거렸다. 부서진 것은 가루로, 안 부서진 것은 쓰레받기로. 김 보호사는 쓸다가 한 번 멈추고 쓰레받기 안을 들여다봤다. 쌀알 수백 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고는 쓰레받기를 들고 나갔다. 복도 쓰레기통에 쏟는 소리가 났다. 사흘 걸려 놓은 것이 삼 초 만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강박은 저녁 여섯 시에 시작됐다. 끝방 침대에 가죽 끈 넷. 손목 둘, 발목 둘. 가슴 끈은 원장이 직접 조였다. 열두 시간이라고 했다. 원장은 나가면서 말했다. 페인트는 내일 칠한다고. 벽이 삭았으니 새로 바르는 김에 그 밑도 보자고.
진서가 벽 너머에서 불렀다. 여준은 대답했다. 목은 묶이지 않았다. 여준은 누운 채로 천장을 봤다. 천장이 서쪽으로 기울어 보였다. 누워 있으면 기운 방이 더 기운다. 몸이 조금씩 서쪽으로 끌려갔다. 끈이 그것을 붙잡았다. 붙잡힌 채로 몸이 계속 끌려갔다. 여준은 그 힘의 방향을 셌다. 밤새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묶였던 날을 여준은 기억했다. 입원 이 주째. 편지를 쓰게 해 달라고 소리친 날. 그날 여준은 끈이 조여지는 동안 끝까지 소리를 질렀고, 소리를 지를수록 끈이 한 칸씩 더 조여졌다. 여섯 시간이 지나자 소리가 안 나왔다. 여덟 시간째에 여준은 천장의 얼룩을 세기 시작했다. 얼룩은 스물셋이었다. 그날부터 여준은 셌다. 셈은 묶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여준은 알았다. 칠 년 전 이 자리에서 누운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 벽 아래의 긁힌 줄이 왜 누운 높이였는지. 손목이 묶인 채로 손톱 끝만 벽에 닿는 높이.
진서가 틈으로 무언가를 밀었다. 여준의 손이 닿지 않았다. 진서는 그래도 밀었다. 수건이었다. 민재가 준 마흔한 번째. 수건 끝이 침대 다리에 걸렸다. 여준은 그것을 볼 수만 있었다.
밤 열한 시에 진서가 말했다.
“아저씨, 제가 셀게요. 지금부터. 아버지가 일곱에서 멈춘 거, 저 여기서 끝까지 외웠어요. 아저씨 대신 세요.”
진서는 셌다. 틈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로. 첫째, 끝방 문, 열쇠 두 번. 둘째, 계단 위 방화문, 잠기지 않고 무겁기만 함. 셋째, 2병동 입구, 파란 테이프. 진서는 열다섯까지 가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한 바퀴에 오 분. 여준은 누워서 들었다. 진서의 목소리가 도면이 됐다. 밟혀 가루가 된 도면이 벽 너머에서 다시 섰다.
새벽 두 시. 계단 세 개를 내려오는 발소리. 구두가 아니었다. 운동화. 열쇠 두 번. 문이 열렸다. 오상구였다. 순찰 시간이었다. 이천십구 년 이월 그날처럼.
상구는 침대 옆에 섰다. 한참. 손전등을 끄고. 여준은 어둠 속에서 상구의 숨소리를 들었다. 빨랐다. 상구의 손이 가슴 끈 버클로 갔다. 멈췄다. 칠 년 전 그 손이 한 일이었다. 끈 하나를 푸는 것. 그리고 그 하나 때문에 몸이 기울었다. 상구의 손이 버클 위에서 떨렸다.
상구는 가슴 끈을 풀지 않았다. 대신 손목 끈 둘을 한 칸씩 늦췄다. 발목 둘도 한 칸씩. 네 개를 똑같이. 여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그러고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서쪽. 여준이 끌려가는 쪽. 상구는 침대 쇠틀에 등을 대고 자기 몸으로 기운 쪽을 받쳤다.
“네 시까지 있을게요.”
상구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그때는 네 시에 왔어요. 두 시에 풀고 네 시에 왔어요. 그 두 시간 동안 저는 보호사실에서 잤어요.”
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구도 더 말하지 않았다. 틈 너머에서 진서가 셈을 멈췄다. 세 사람이 어둠 속에서 숨만 쉬었다. 끝방 바닥 여기저기에 밟히지 않은 밥알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복도 불빛이 문 밑으로 들어와 그중 하나를 비췄다. 둘째 문 자리였다. 잠기지 않고 무겁기만 한 문.
네 시가 됐다. 상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섯 시에도. 여섯 시, 원장이 오기 한 시간 전에 끈을 원래 칸으로 되돌리고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상구는 문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돌아봤다. 그리고 말했다. 딸 이름이 수민이라고. 이 학년이라고. 여준은 그 이름을 머릿속 도면 어디에도 넣지 않았다. 도면 바깥에 따로 두었다.
일곱 시 찬송이 켜졌다. 원장이 오기 전 마지막 소리였다. 틈 너머에서 진서가 속삭였다.
“아저씨, 그 사람 밤새 있었죠.”
“있었소.”
“바닥에 앉는 소리 났어요. 서쪽에.”
진서는 그 말을 하고 오래 말이 없었다. 찬송 한 곡이 다 지나갈 만큼. 그러고는 말했다.
“아버지 옆에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끈이 한 칸씩 늦춰져 있던 자리에 손목이 조금 덜 붉었다. 네 개가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