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22자)

동짓날 언 땅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차무겸

동짓날 새벽 산신 바위 앞은 짐승으로 가득했다⁠. 이틀 전보다 두 배는 많았다⁠. 고개 너머에서 넘어온 고라니들이 바위 둘레 나무 사이에 빽빽이 서 있었고⁠, 낯선 너구리들이 이쪽 너구리들과 굴 자리를 두고 으르렁거렸다⁠. 바위 아래 비탈에는 처음 보는 멧돼지 무리가 엎드려 있었다⁠. 맨 앞의 수컷은 한쪽 눈이 하얗게 멀어 있었다⁠. 털에 시멘트 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었고⁠, 몸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우리도 시험 칩니다⁠.⁠”

외눈 수컷이 바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산신령이 곶감을 씹다가 멈췄다⁠.

“⁠어험⁠. 첫날 해 뜰 때 선 놈만 친다⁠.⁠”

“⁠그런 말씀은 없었다던데요⁠.⁠”

“⁠까마귀야⁠, 내가 그런 말 안 했냐⁠?⁠”

“⁠안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했다⁠.⁠”

외눈 수컷이 콧김을 뿜었지만 더 따지지는 않았다⁠. 따질 힘이 없어 보였다⁠. 무리 새끼들이 수컷 배 밑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두름은 수컷 무리의 냄새를 맡았다⁠. 굶은 냄새였다⁠. 위장이 비면 짐승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구릉의 무리보다 더 시큼했다⁠.

산신령이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째 판은 땅 파기다⁠. 산 너머 사람들이 산에 구멍을 뚫고부터 물이 빠졌다⁠. 이쪽 산샘 셋 가운데 둘이 말랐다⁠. 능선 밑 마른 샘 자리로 가라⁠. 언 땅을 파서 물길을 다시 여는 놈이 이긴다⁠. 물이 한 모금이라도 솟으면 그놈 판이다⁠.⁠”

*

마른 샘 자리는 능선 바로 밑이었다⁠. 능선 너머가 공사판이었다⁠. 비탈 끝에 철망 울타리가 길게 처져 있었고⁠, 울타리 너머 골짜기 바닥이 허옇게 깎여 있었다⁠. 노란 굴착기 두 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컨테이너 몇 채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산 한가운데에 검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구멍 둘레를 시멘트가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이 터널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두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냄새로는 알았다⁠. 경유와 시멘트와 화약⁠. 함바 식당 굴뚝에서는 밥 짓는 김과 돼지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공사판 사람들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컨테이너 문이 열리고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 둘이 나왔다⁠. 하나가 능선을 올려다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야⁠, 저기 봐⁠. 멧돼지 떼다⁠. 고라니도 엄청 많네⁠.⁠”

“⁠어제 발파하고 저 난리야⁠. 소장님이 군청에 전화했대⁠. 사냥꾼 온대⁠.⁠”

“⁠그럼 저것들 다 잡는 거야⁠?⁠”

“⁠다는 못 잡지⁠. 우리 식당 통만 안 엎으면 되지⁠.⁠”

두름은 사람 말을 알아들었다⁠. 옆에 엎드린 구릉의 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사람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올라오자 딸들은 귀만 쫑긋거리다 말았다⁠. 두름은 옮겨 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험 중이었다⁠. 사냥꾼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땅을 파지 않고 도망갈 것이었다⁠.

두름은 사냥꾼 이야기를 뱃속에 넣어 두었다⁠. 뱃속이 무거웠다⁠.

구릉은 공사판을 보지 않았다⁠. 마른 샘 자리 둘레를 한 바퀴 돌더니⁠, 바위 하나 옆에 멈췄다⁠.

“⁠여기다⁠. 내가 새끼 때 여기서 물을 먹었다⁠. 물은 바위 밑에서 솟았다⁠.⁠”

구릉이 엄니를 언 땅에 박았다⁠. 흙이 돌처럼 쪼개졌다⁠. 구릉의 딸들이 둘레에 엎드려 지켜보았다⁠. 봄비는 새끼들을 데리고 조금 떨어진 울타리 밑에 있었다⁠. 새끼들이 울타리 너머 밥 냄새에 코를 박고 있었다⁠.

두름은 구릉을 따라 바위 옆을 파지 않았다⁠. 구릉 기억이 맞을 수도 있었다⁠. 두름은 기억이 없었다⁠. 대신 코가 있었다⁠. 두름은 마른 샘 자리 둘레를 천천히 돌면서 언 땅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흙냄새는 다 같았다⁠. 차갑고 비리고 쇠 맛이 났다⁠. 열 걸음을 돌았을 때 한 자리에서 냄새가 조금 달랐다⁠. 이끼가 젖을 때 나는 냄새가 아주 엷게 올라왔다⁠. 구릉이 판 바위에서 세 걸음 아래였다⁠.

두름은 거기에 코를 박았다⁠. 코끝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칡을 파다 갈라진 자리였다⁠. 두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도 냄새는 맡아졌다⁠. 피 냄새 사이로 젖은 이끼 냄새가 한 겹 더 짙어졌다⁠. 두름은 앞발로 흙을 뒤로 차내며 코를 밀었다⁠.

해가 능선 위로 올라왔다⁠. 구릉의 구멍은 벌써 두름의 무릎 깊이였다⁠. 두름의 구멍은 발목 깊이였다⁠. 두름의 코에 언 흙이 얼음처럼 엉겨 붙었다⁠. 두름은 재채기를 했다⁠. 얼음 조각이 콧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구경하던 고라니 하나가 웃다가 옆 고라니한테 뿔로 받혔다⁠.

“⁠집돼지 코가 얼었다⁠.⁠”

구릉의 딸 하나가 킥킥거렸다⁠. 두름은 코를 제 앞다리 겨드랑이에 묻었다⁠. 겨드랑이는 따뜻했다⁠. 코가 녹자 다시 팠다⁠.

무릎 깊이가 되자 흙이 물렀다⁠. 젖은 이끼 냄새가 물 냄새로 바뀌었다⁠. 차갑고 비리지 않은⁠, 쇠 맛이 빠진 냄새였다⁠. 한 뼘이었다⁠. 두름은 확신했다⁠. 한 뼘만 더 파면 물이 솟았다⁠.

울타리 밑에서 비명이 터졌다⁠.

*

새끼 멧돼지의 비명은 높고 길었다⁠. 두름은 고개를 들었다⁠. 봄비의 새끼 하나가 울타리 기둥 옆에서 뒷다리를 허공에 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뒷다리에 가는 쇠줄이 감겨 있었다⁠. 쇠줄 한쪽 끝이 땅에 박힌 말뚝에 매여 있었다⁠. 함바 식당 쓰레기를 노리는 멧돼지를 잡으려고 누군가 놓아둔 올무였다⁠.

봄비가 새끼에게 달려가 쇠줄을 물고 당겼다⁠. 새끼의 비명이 더 높아졌다⁠. 당길수록 고리가 조여 들었다⁠.

“⁠당기지 마라⁠!⁠”

구릉이 구멍 속에서 소리쳤다⁠. 머리를 들지 않은 채였다⁠.

“⁠당기면 조인다⁠! 물지 마⁠! 가만있어⁠!⁠”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봄비가 울부짖었다⁠. 구릉의 딸들이 일어나 울타리로 달려갔지만 쇠줄 앞에서 맴돌기만 했다⁠. 구릉은 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엄니가 흙을 찍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어미⁠! 와 주세요⁠!⁠”

“⁠이 판을 이기면 새끼 백이 산다⁠. 가만있으라 했다⁠!⁠”

두름은 자기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물 냄새가 한 뼘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한 뼘이면 이겼다⁠. 이기면 판이 둘이었다⁠. 두 판이면 자리였다⁠.

새끼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짧게 끊겼다⁠. 숨이 모자라는 소리였다⁠.

두름은 구멍에서 뛰어나왔다⁠.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울타리 밑에 닿았다⁠. 쇠줄 냄새가 확 끼쳤다⁠. 녹과 새 쇠와 사람 손의 기름 냄새⁠. 봄비가 두름을 보고 물러났다⁠. 두름은 쇠줄을 건드리지 않았다⁠. 쇠줄이 시작하는 말뚝으로 갔다⁠. 말뚝은 나무였고 언 땅에 깊이 박혀 있었다⁠. 사람은 말뚝을 박고 쇠줄을 매었다⁠. 말뚝이 빠지면 쇠줄은 버틸 데가 없었다⁠.

두름은 말뚝 둘레에 코를 박았다⁠. 언 땅이 코끝의 갈라진 자리를 다시 찢었다⁠. 두름은 피 맛을 삼키며 팠다⁠. 말뚝 둘레를 동그랗게⁠, 할머니 더덕 캐듯이⁠. 흙을 뒤로 차내고 또 팠다⁠. 말뚝이 기우뚱했다⁠. 두름은 말뚝 밑동을 어깨로 밀었다⁠. 백오십육 킬로그램이 말뚝 하나에 실렸다⁠. 말뚝이 언 땅에서 쑥 뽑혀 나왔다⁠.

쇠줄이 풀렸다⁠. 고리가 헐거워졌다⁠. 새끼가 버둥거리다가 뒷다리를 빼냈다⁠. 봄비가 새끼를 품으로 끌어당겨 핥았다⁠. 뒷다리 털에 피가 조금 배어 있었다⁠. 새끼는 절뚝거리면서도 봄비 젖을 찾았다⁠. 젖은 말라 있었다⁠. 새끼는 그래도 물었다⁠.

능선 밑에서 물소리가 났다⁠.

물소리는 작았다⁠. 언 흙 사이로 무언가 퐁⁠, 하고 솟는 소리였다⁠. 구릉의 구멍에서 흙탕물이 한 모금 솟아 고였다⁠. 구릉이 흙탕물에 코를 박았다가 들었다⁠. 코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바위 위에서 산신령이 내려다보았다⁠.

“⁠둘째 판은 구릉이다⁠.⁠”

멧돼지 무리가 한꺼번에 콧김을 뿜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고라니들이 발을 굴렀고 외눈 수컷의 무리까지 콧김을 뿜었다⁠. 물이었다⁠. 판이 누구 것이든 물이 솟았다⁠.

“⁠한 판씩이다⁠. 셋째 판은 잔칫날 전날 밤이다⁠. 해 질 녘부터 해 뜰 녘까지⁠. 버티기다⁠.⁠”

산신령은 할 말을 마치고 다시 엎드렸다⁠.

*

구릉이 울타리 밑으로 내려왔다⁠. 코끝에 아직 흙탕물이 묻어 있었다⁠. 구릉은 봄비 품의 새끼를 한참 맡았다⁠. 뒷다리의 피 냄새를 맡고⁠, 뽑힌 말뚝을 맡고⁠, 마지막으로 두름의 찢어진 코를 맡았다⁠.

“⁠내 새끼 일에 집돼지가 끼었다⁠.⁠”

“⁠네⁠.⁠”

“⁠이걸로 나한테 빚 지웠다고 생각하지 마라⁠.⁠”

“⁠빚 아니에요⁠. 제가 갚은 거예요⁠. 칡이요⁠. 어젯밤에 제가 얼린 칡⁠.⁠”

구릉이 두름을 보았다⁠. 콧김이 한 번 나왔다가 멈췄다⁠. 웃음도 아니고 화도 아니었다⁠. 구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 능선 밑 물구멍으로 올라갔다⁠. 무리를 불러 한 모금씩 마시게 했다⁠. 새끼들부터⁠, 그다음 딸들⁠, 맨 마지막에 구릉이 마셨다⁠.

봄비가 두름 곁에 남았다⁠. 새끼를 품은 채 눈을 들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저 이제 빚졌어요⁠.⁠”

“⁠빚 아니라니까요⁠.⁠”

“⁠빚이에요⁠. 어미는 그렇게 말해도 저는 알아요⁠.⁠”

두름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빚이 하나 줄면 하나가 늘었다⁠. 이번에는 남이 두름에게 진 빚이었다⁠. 받을 것과 갚을 것이 엉키기 시작했다⁠.

두름은 뽑힌 말뚝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말뚝을 파낸 구멍 밑바닥에서 냄새가 하나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 맡는 냄새였다⁠. 흙냄새와 비슷한데 더 달고⁠, 더 쓰고⁠, 더 오래된 냄새⁠. 코 안쪽이 저릿했다⁠.

두름은 할머니 부엌 텔레비전을 떠올렸다⁠. 지난여름 저녁마다 할머니는 산에서 약초 캐는 사람들 이야기를 틀어 놓았다⁠. 화면 속 남자가 이끼 낀 비탈에서 뿌리 하나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심봤다⁠. 할머니가 부채질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저거 한 뿌리가 오백만 원이란다⁠. 두름은 오백만 원을 기억했다⁠. 오백만 원이면 이백만 원보다 많았다⁠.

텔레비전에서 들은 냄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화면 속 남자가 뿌리를 들고 코에 댔을 때의 얼굴은 기억했다⁠. 두름은 말뚝 구멍 밑을 조심스럽게 팠다⁠. 더덕보다 더 조심했다⁠. 흙을 한 겹씩 걷었다⁠. 가는 잔뿌리가 실처럼 드러났다⁠. 몸통은 사람 손가락 하나만 했고⁠, 다리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줄기 밑동에 빨간 실이 한 바퀴 묶여 있었다⁠.

두름은 빨간 실이 무엇인지 몰랐다⁠. 할머니가 고추 말릴 때 쓰는 실과 비슷했다⁠. 두름은 뿌리를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씹지 않았다⁠. 숨도 코로만 쉬었다⁠.

*

마을에 내려왔을 때 해가 중천이었다⁠. 동짓날은 정선 장이 서는 날이었다⁠. 할머니와 연지는 팥과 찹쌀을 사러 아침 버스로 장에 나갔고⁠, 할아버지는 회관 천막 치는 데 불려 가 있었다⁠. 집이 비어 있었다⁠. 닭들만 횃대에서 두름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갔다 와⁠?⁠”

“⁠산이요⁠.⁠”

“⁠또⁠? 엿새 남았는데⁠?⁠”

“⁠나흘이요⁠.⁠”

두름은 부엌문 앞 댓돌에 뿌리를 내려놓았다⁠. 더덕 놓던 자리였다⁠. 빨간 실이 위로 오게 놓았다⁠. 그러고는 거름 더미 밑으로 기어들어 우리로 돌아왔다⁠. 코끝에서 피가 멎지 않아 짚에 동그란 자국이 났다⁠. 두름은 짚 위에 엎드려 할머니를 기다렸다⁠.

해 질 녘 버스가 멈췄다가 떠나는 소리가 났다⁠. 팥 냄새와 장터 국밥 냄새를 묻힌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연지가 찹쌀 봉지를 안고 뒤따랐다⁠. 할머니가 부엌문 앞에서 멈췄다⁠.

장바구니가 땅에 떨어졌다⁠. 팥이 마당에 쏟아졌다⁠. 할머니는 줍지 않았다⁠. 두 손으로 뿌리를 받쳐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온 골짜기가 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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