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59자)

이기면 못 본다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차무겸

연지는 봉투를 부엌 식탁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가 헛간에서 들어와 장갑을 벗다가 봉투를 보았다⁠. 장갑 한 짝이 손에 매달린 채로 멈췄다⁠.

“⁠두름 팔아⁠?⁠”

“⁠잔칫상에 올린다⁠. 이장한테 약조했다⁠.⁠”

“⁠내 등록금 때문에⁠? 나 대출받는다고 했잖아⁠.⁠”

“⁠빚은 안 된다⁠.⁠”

“⁠나라에서 빌려주는 거야⁠. 이자도 얼마 안 돼⁠. 졸업하고 갚으면 돼⁠.⁠”

“⁠니 에미가 빚 갚느라 서울 식당에서 십 년을 서서 일했다⁠. 너까지는 안 된다⁠.⁠”

두름은 창틀에 앞발을 올린 채 유리에 코를 대고 있었다⁠. 콧김에 유리가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지기를 되풀이했다⁠. 부엌 냄새가 창틈으로 새어 나왔다⁠. 들기름에 감자 지지는 냄새였다⁠. 할머니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감자전을 뒤집고 있었다⁠.

“⁠두름은 할머니가 키웠잖아⁠.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해⁠?⁠”

연지가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뒤집개로 감자전 한 장을 떠서 연지 입에 밀어 넣었다⁠.

“⁠먹고 말해라⁠.⁠”

연지가 뜨거운 감자전을 입에 문 채 눈을 부릅떴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약조는⁠…⁠…⁠.⁠”

할머니가 할아버지 입에도 감자전을 밀어 넣었다⁠. 할아버지는 하던 말을 감자전과 같이 씹었다⁠. 부엌이 한동안 조용했다⁠. 들기름 튀는 소리만 났다⁠.

두름의 입에서 침이 흘러 창틀을 적셨다⁠. 감자전은 우리까지 오지 않았다⁠. 싸움이 날 때마다 할머니는 사람 입을 막았고⁠, 막는 감자전은 늘 사람 몫이었다⁠.

연지가 감자전을 삼키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안 보내⁠. 두름 안 보낼 거야⁠.⁠”

“⁠봉투 도로 넣어라⁠. 월요일에 그 돈 니 등록 예치금으로 보낼 거다⁠.⁠”

할아버지는 장갑 한 짝을 마저 벗어 식탁에 올려놓고 나갔다⁠. 할아버지가 지나간 자리에 짚과 쇠 냄새가 한참 남았다⁠. 할머니가 감자전 한 장을 접시에 담아 연지 앞에 놓았다⁠. 연지는 먹지 않았다⁠. 할머니가 접시를 들고 창가로 왔다⁠. 창문이 열리고 감자전이 우리 안으로 떨어졌다⁠.

“⁠너도 먹어라⁠. 너는 아무 잘못 없다⁠.⁠”

두름은 감자전을 먹었다⁠. 뜨겁고 미끈하고 짰다⁠. 할머니 손 냄새가 났다⁠. 빚이 하나 더 늘었다⁠.

*

오후 내내 두름은 짚 위에서 돈을 세었다⁠. 이백만 원이 얼마인지 알아야 했다⁠. 할머니는 가을에 감자를 상자에 담아 팔았다⁠. 한 상자에 이만 원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백만 원은 감자 백 상자였다⁠. 두름은 백까지 세어 보려고 했다⁠. 스물까지는 셌다⁠. 멧돼지 무리를 세어 봐서였다⁠. 스물을 넘어가자 머릿속에서 감자가 굴러다녔다⁠. 두름은 처음부터 다시 셌다⁠. 세 번째로 처음부터 셀 때 잠이 들었다⁠.

“⁠백 상자는 무리야⁠.⁠”

닭 한 마리가 횃대에서 말했다⁠. 두름이 눈을 떴다⁠.

“⁠제가 잠꼬대했어요⁠?⁠”

“⁠감자⁠, 감자⁠, 감자 하더라⁠. 스물한 번까지 갔어⁠.⁠”

해가 기울 무렵 연지가 담요를 들고 우리로 왔다⁠. 판자 문 빗장을 풀고 들어와서는 두름 옆구리에 등을 대고 털썩 누웠다⁠. 열여덟 살 봄에도 이렇게 누웠다⁠. 두 해 전 봄의 두름은 연지 무릎만 했다⁠. 지금은 연지가 두름 옆구리에 반쯤 파묻혔다⁠.

“⁠할아버지 고집은 아무도 못 꺾어⁠. 할머니도 못 꺾어⁠. 엄마도 못 꺾었어⁠.⁠”

연지가 담요를 끌어 올려 얼굴을 덮었다⁠. 담요 밑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나 돈 있어⁠. 얼마인지는 너한테도 안 말해⁠. 서울 가서 방 얻을 돈이야⁠. 근데 그거 내놓으면 나 서울 가서 잘 데가 없어⁠.⁠”

두름은 숨을 크게 쉬었다⁠. 옆구리가 부풀었다가 꺼지자 연지 머리가 같이 오르내렸다⁠. 연지가 담요를 걷고 두름 목덜미에 코를 댔다⁠.

“⁠너 산 냄새 나⁠. 낙엽 냄새⁠. 어제 진짜 산에 갔구나⁠.⁠”

연지는 한참 두름의 목덜미를 맡았다⁠. 할머니가 부엌문 앞에서 저녁 먹으라고 불렀을 때 연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두 번 부르고 나서야 연지는 담요를 개켜 두름 등에 덮어 주고 나갔다⁠. 담요에서 딸기 핸드크림 냄새가 밤새 났다⁠.

마을 방송이 지직거렸다⁠. 박하사탕 깨무는 소리가 먼저 나왔다⁠.

“⁠아⁠, 아⁠. 이장입니다⁠. 산 너머 터널 공사 현장에서 알려 왔습니다⁠. 모레부터 발파 시험이 있으니 쿵 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시랍니다⁠. 소 키우는 집은 소가 놀랄 수 있으니 외양간 문 단단히 걸어 두시고요⁠. 아⁠, 그리고 잔치 때 쓸 천막은 회사에서 다 쳐 준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이상⁠, 이장이었습니다⁠.⁠”

방송이 꺼지고 나서 산 너머에서 정말로 쿵⁠, 소리가 한 번 넘어왔다⁠. 모레가 아니었다⁠. 처마 고드름 하나가 떨어져 댓돌에서 부서졌다⁠. 닭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퍼덕였다⁠. 염소만 꿈쩍하지 않고 판자를 씹었다⁠.

*

밤이 되자 우리 안에 곶감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산신령이 판자를 지나 들어오고 있었다⁠. 판자 사이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판자를 그냥 지나왔다⁠. 연기가 문틈을 지나듯이⁠.

산신령은 들어오기 전에 처마에 들렀다⁠. 할머니가 실에 꿰어 매단 곶감 줄에서 두 개를 빼서 입에 물고 있었다⁠. 닭들이 비명을 지르려다 서로의 부리를 날개로 막았다⁠.

“⁠어험⁠. 앉아라⁠.⁠”

두름은 앉아 있었다⁠. 산신령은 두름 옆 짚더미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늙은 개 냄새와 곶감 냄새와 찬바람 냄새가 났다⁠.

“⁠첫 판 잘했다⁠. 그래서 일러 주러 왔다⁠. 이 자리를 받으면 받는 날 해가 뜨는 대로 사람 눈에서 사라진다⁠.⁠”

“⁠사라져요⁠?⁠”

“⁠나를 봐라⁠.⁠”

부엌문이 열렸다⁠. 닭장이 소란스러워서 할머니가 손전등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털신을 끌며 우리 앞까지 왔다⁠. 손전등 불빛이 짚더미를 훑었다⁠. 산신령의 허연 수염 위를 지나갔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못 본 얼굴이었다⁠. 대신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곶감 냄새가 나노⁠?⁠”

할머니가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곶감 줄 끝에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할머니가 혀를 찼다⁠.

“⁠연지 이것이⁠. 서울 가면 곶감 하나 못 먹는다고 밤에 몰래 빼 먹었네⁠.⁠”

할머니는 우리 판자를 한 번 흔들어 보고 돌아갔다⁠. 산신령이 곶감을 마저 씹었다⁠.

“⁠봤지⁠. 할멈은 나를 못 본다⁠. 바람 냄새로나 맡지⁠. 네가 자리를 받으면 영감도 할멈도 그 계집애도 너를 못 본다⁠. 안 보이는 돼지는 잔칫상에 못 오르고⁠.⁠”

두름은 짚을 씹었다⁠. 짚이 목에 막혀 기침이 났다⁠.

“⁠그럼 할아버지는 계약금을 물어 줘야겠네요⁠.⁠”

“⁠그렇겠지⁠.⁠”

“⁠등록금은요⁠?⁠”

“⁠그건 사람 일이다⁠.⁠”

“⁠산신령이 되면 뭘 하는데요⁠?⁠”

“⁠산 짐승을 먹인다⁠. 금줄을 지킨다⁠. 아픈 놈⁠, 죽어 가는 놈 냄새를 남보다 먼저 맡는다⁠. 겨울에는 눈이 어디에 얼마나 쌓일지 맡고⁠, 봄에는 어느 골짜기 물이 먼저 풀릴지 맡는다⁠. 다 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첫 판이 냄새다⁠.⁠”

“⁠그럼 저 잘할 수 있겠네요⁠.⁠”

“⁠먹는 냄새만 맡으면 못 한다⁠.⁠”

두름은 할 말이 없었다⁠. 오늘 하루 맡은 냄새의 절반이 먹을 것이었다⁠.

“⁠지면요⁠?⁠”

“⁠지면 잔칫상에 오르는 거고⁠. 구릉이 내 자리를 받아 금줄을 걷겠지⁠. 저놈은 한 말은 지키는 놈이다⁠.⁠”

산신령이 하품을 했다⁠. 이빨이 몇 개 안 남은 잇몸이 드러났다⁠.

“⁠왜 저를 받아 주셨어요⁠? 구릉 말대로 저는 우리 돼지인데요⁠.⁠”

“⁠해 뜰 때 선 놈은 다 친다고 했으니까⁠. 나도 우리 짐승이었고⁠. 그리고⁠…⁠…⁠.⁠”

산신령의 말이 끊겼다⁠. 두름이 기다렸다⁠. 산신령이 코를 골았다⁠. 두름이 산신령 옆구리를 코로 밀었다⁠. 산신령이 눈을 번쩍 떴다⁠.

“⁠어디까지 했냐⁠?⁠”

“⁠그리고⁠, 까지요⁠.⁠”

“⁠그리고 곶감이 맛있다⁠.⁠”

산신령은 일어나 판자를 지나 나갔다⁠. 나가는 길에 처마에서 곶감 하나를 더 뺐다⁠.

*

산신령이 가고 나서 산에서 콧김 소리가 내려왔다⁠. 멧돼지 소리였다⁠. 두름을 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메운 구멍은 돌이 촘촘해서 코가 들어가지 않았다⁠. 두름은 우리 반대편 구석으로 갔다⁠. 판자 너머에 거름 더미가 붙어 있었다⁠. 거름 더미는 겨울에도 김이 났고 밑의 흙은 얼지 않았다⁠. 두름은 거름 냄새를 참으며 코를 박았다⁠. 흙이 따뜻하고 물렀다⁠. 순식간에 판자 밑이 뚫렸다⁠. 빠져나온 두름의 등에 거름이 한 덩이 얹혀 있었다⁠.

밭둑에 구릉이 와 있었다⁠. 금줄 바로 너머⁠, 산 쪽으로 한 발짝 떨어진 자리였다⁠. 구릉은 금줄에 코를 대려다 재채기를 하고 물러났다⁠. 뒤에 봄비가 새끼들을 끼고 엎드려 있었다⁠.

“⁠냄새 한번 고약하다⁠.⁠”

“⁠거름이요⁠.⁠”

“⁠네 냄새 말고⁠. 저 늙은 개 오줌⁠.⁠”

구릉이 밭둑을 따라 길게 깔린 금줄을 턱으로 가리켰다⁠. 두름은 금줄 바로 앞⁠, 마을 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냄새 줄 하나가 있었다⁠.

“⁠흥정하자⁠. 다음 판에서 져라⁠.⁠”

“⁠지면요⁠?⁠”

“⁠금줄 걷을 때 네 집 밭은 빼 주마⁠. 영감 할멈 감자는 한 알도 안 건드린다⁠. 내가 무리 앞에서 약속하마⁠.⁠”

“⁠다른 집 밭은요⁠?⁠”

“⁠다른 집은 사람이 많다⁠. 사람 많은 집 감자 움은 감자가 썩어도 모른다⁠.⁠”

두름은 마을을 돌아보았다⁠. 산비탈에 붙은 집 열몇 채 가운데 불 켜진 창이 셋이었다⁠. 이장네 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면 저는 잔칫상에 올라가요⁠.⁠”

“⁠안다⁠. 사람 우리 돼지는 원래 그렇게 끝난다⁠. 네 영감은 돈을 받고⁠, 그 계집애는 학교에 간다⁠. 네가 바라는 거 아니냐⁠? 빚 갚는 거⁠.⁠”

구릉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두름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코끝으로 언 흙을 긁었다⁠.

“⁠이기면 넌 사라진다⁠. 네가 그렇게 갚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눈에서⁠. 그 계집애는 학교를 못 간다⁠. 영감은 회사에 돈을 물어 준다⁠. 그리고 네가 산신령이 되면 이 산 짐승을 다 먹여야 한다⁠. 금줄을 안 걷고 무슨 수로⁠?⁠”

봄비 품에서 새끼 하나가 낑낑거렸다⁠. 봄비가 새끼를 핥았다⁠. 핥아도 새끼는 그치지 않았다⁠. 배가 고픈 소리였다⁠. 두름은 이 소리를 알았다⁠. 할머니 젖병을 기다리던 새벽에 아궁이 앞에서 자기가 내던 소리였다⁠.

“⁠저 먹으라고 할머니가 남긴 감자 두 자루가 움에 있어요⁠.⁠”

두름이 말했다⁠. 구릉이 콧김을 뿜었다⁠.

“⁠두 자루로 스무 마리가 겨울을 나냐⁠?⁠”

“⁠아니요⁠.⁠”

“⁠그러니 져라⁠.⁠”

두름은 오래 앉아 있었다⁠. 등에 얹힌 거름에서 김이 올라갔다⁠. 이윽고 두름이 일어났다⁠.

“⁠이길 겁니다⁠.⁠”

구릉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찢어진 귀까지⁠.

“⁠그리고 이백만 원어치를 캐 올 겁니다⁠. 할아버지가 저 대신 받을 돈을 제가 캐다 드릴 거예요⁠. 그러면 제가 사라져도 연지는 학교에 가요⁠.⁠”

구릉이 웃었다⁠. 콧김을 세 번 짧게 끊어 뿜는 것이 멧돼지의 웃음이었다⁠.

“⁠산에서 캔 걸 사람한테 갖다 바치겠다고⁠? 그건 우리 거다⁠. 네가 한 뿌리 캐 가면 내 새끼 하루 먹을 게 없어진다⁠.⁠”

“⁠그럼 그것도 갚을게요⁠.⁠”

“⁠뭐로⁠?⁠”

두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릉이 몸을 돌렸다⁠. 무리를 데리고 어둠 속 비탈로 올라갔다⁠. 봄비가 맨 뒤에서 걸음을 늦췄다⁠.

“⁠정말 캐 올 거예요⁠?⁠”

“⁠네⁠.⁠”

“⁠여기서 조금 위에 더덕 냄새가 나요⁠. 바위 밑에요⁠. 어미는 쓴 거라고 안 먹어요⁠.⁠”

봄비는 할 말만 하고 무리를 따라 사라졌다⁠. 두름은 금줄 앞에서 코를 들었다⁠. 바람이 비탈 위에서 내려왔다⁠. 흙냄새 사이에 쌉싸름한 냄새가 한 가닥 섞여 있었다⁠. 두름은 금줄을 넘었다⁠. 콧등이 매웠고 앞발이 언 비탈을 디뎠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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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린독자2026.10.31· 3화

    할아버지가 빚은 안 된다고 하는 장면에서 울컥했어요. 연지 편도 할아버지 편도 못 들겠어요.

    • 차무겸작가2026.10.31

      둘 다 두름을 아끼는데 아끼는 방법이 다를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