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95자)

예순 해 묵은 뼈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차무겸

산신령이 코를 고는 사이 짐승들이 흩어졌다⁠. 고라니들은 겅중겅중 뛰어 골짜기 아래로 갔고⁠, 너구리 한 쌍은 썩은 참나무 둥치로 기어들었다⁠. 구릉은 뛰지 않았다⁠. 무리를 다섯씩 묶어 비탈에 가로로 늘어세우더니 한 줄씩 위로 올려 보냈다⁠.

“⁠코를 땅에 박고 걸어⁠. 한 발에 한 번씩 맡아⁠. 이상한 거 나오면 소리 질러⁠.⁠”

멧돼지들이 눈을 밀며 올라갔다⁠. 줄이 지나간 자리마다 눈이 뒤집혀 검은 흙이 드러났다⁠. 두름은 입을 벌린 채 구경했다⁠. 우리 안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솜씨였다⁠. 산 하나를 빗질하듯 훑고 있었다⁠.

두름도 코를 눈에 박았다⁠. 박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눈 밑에 냄새가 너무 많았다⁠. 언 칡뿌리⁠, 썩은 낙엽⁠, 지난가을 떨어진 다래⁠, 들쥐 오줌⁠, 노루 똥⁠, 쇠붙이 녹⁠, 누가 버린 소주병⁠. 우리 안에는 냄새가 열 가지쯤 있었다⁠. 산에는 셀 수가 없었다⁠.

두름은 먼저 다래를 먹었다⁠. 얼어서 사각거렸다⁠. 다음에는 참나무 밑에서 도토리 몇 알을 찾아 먹었다⁠.

“⁠그거 내 거야⁠!⁠”

다람쥐 하나가 나뭇가지 위에서 꼬리를 세웠다⁠. 두름은 입을 다물고 도토리를 삼켰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갚을게요⁠.⁠”

“⁠돼지가 뭘 갚아⁠!⁠”

두름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빚이 하나 늘었다⁠. 다람쥐 도토리 세 알⁠.

골짜기 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봄비가 새끼 넷을 데리고 눈을 헤집고 있었다⁠. 봄비는 무리 줄에 끼지 않았다⁠. 새끼들이 자꾸 주저앉아서였다⁠. 두름을 보자 봄비가 코를 쳐들었다⁠.

“⁠아까 그 비누 냄새⁠. 우리 집에서 쓰는 거예요⁠?⁠”

“⁠할머니가 여름에 저를 씻길 때 쓰는 거예요⁠. 빨랫비누요⁠.⁠”

“⁠씻어요⁠? 돼지를요⁠?⁠”

봄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름의 옆구리를 맡았다⁠. 새끼 하나가 따라 맡더니 재채기를 했다⁠. 봄비가 새끼 콧등을 핥았다⁠.

“⁠얘네는 사흘째 제대로 못 먹었어요⁠. 고개 너머 샘이 말랐대요⁠. 사람들이 산에 구멍을 뚫고부터 물이 빠졌대요⁠. 저 너머 짐승들이 자꾸 이쪽으로 넘어와요⁠. 도토리는 벌써 다 주워 먹었고요⁠.⁠”

두름은 입안에 남은 도토리 맛을 혀로 밀어 넣었다⁠. 다람쥐 도토리 세 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봄비가 새끼들을 몰아 비탈을 내려가며 한 번 돌아보았다⁠.

“⁠고구마 껍질은 무슨 맛이에요⁠?⁠”

두름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달고 미끈하고 할머니 손 냄새가 나는 맛이라고 말하면⁠, 저 새끼들 배가 더 고파질 터였다⁠.

해가 능선 위로 한 뼘 올라왔다⁠. 위쪽 비탈에서 멧돼지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녹슨 냄비가 나왔다⁠. 다음에는 사람 장화 한 짝이 나왔다⁠. 산신령이 바위 위에서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저었다⁠. 구릉은 냄비도 장화도 버려두었다⁠.

두름은 눈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먹을 것을 따라가면 끝이 없었다⁠. 산신령이 묻었으니 산신령 입으로 묻었을 것이다⁠. 개는 입으로 묻고 앞발로 덮었다⁠. 두름은 바위 위의 누렁개를 다시 맡았다⁠. 곶감⁠, 늙은 개⁠, 잇몸 냄새⁠. 그리고 아주 밑바닥에 한 가닥⁠, 다른 냄새가 깔려 있었다⁠. 새우젓과 장작 연기와 삶은 고기⁠. 작년 가을 이장네 잔치 날 사흘 동안 바람에 남아 있던 냄새였다⁠.

두름은 일어났다⁠. 산에서 잔치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났다⁠. 비탈 위⁠, 멧돼지 줄이 아직 닿지 않은 자리에서⁠, 아주 오래 묵은 잔치 냄새가 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

산신각은 바위에서 마흔 걸음쯤 위에 있었다⁠. 기와가 반쯤 내려앉았고⁠, 문짝 하나는 떨어져 눈 속에 누워 있었다⁠. 마루 위에 북어 꼬리와 빈 막걸리 병⁠, 다 뜯긴 감자 자루가 놓여 있었다⁠. 두름은 감자 자루를 맡았다⁠. 비어 있는데도 감자 냄새가 진했다⁠. 자루 입구에 할머니 손 냄새가 묻어 있었다⁠. 행주와 들기름과 파스⁠. 두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가 산신각에 올 일이 없었다⁠.

잔치 냄새는 마루 밑에서 올라왔다⁠. 두름은 마루 앞 언 흙에 코를 박고 파기 시작했다⁠.

돼지 코는 끝이 납작하고 단단했다⁠. 코끝으로 흙을 들이받고⁠, 들어 올리고⁠, 옆으로 밀었다⁠. 두름은 언 땅이 이렇게 단단한 줄 처음 알았다⁠. 감자밭 흙은 가을에 파던 흙이라 물렀다⁠. 여기는 한 번 밀 때마다 코끝이 얼얼했다⁠. 두름은 재채기를 하고 다시 박았다⁠. 앞발로 흙을 뒤로 차내면서⁠, 마루 밑으로 머리부터 기어들었다⁠.

마루 밑은 어두웠다⁠. 거미줄이 귀에 감겼다⁠. 잔치 냄새가 가까워졌다⁠. 두름이 한 번 더 코를 밀었을 때⁠, 반대편 어둠에서 흙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콧김이 훅 끼쳐 왔다⁠. 썩은 도토리와 진흙⁠.

“⁠너냐⁠?⁠”

구릉이었다⁠. 마루 뒤편으로 파고 들어와 있었다⁠. 둘의 코가 마루 밑 한가운데에서 한 뼘을 두고 마주쳤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산신령이 곶감을 좋아한다⁠. 곶감은 볕 안 드는 데 묻는다⁠. 산에서 볕 안 드는 데는 여기다⁠.⁠”

구릉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팠다⁠. 구릉의 코는 두름의 코보다 길고 좁았다⁠. 엄니가 언 흙을 쪼개는 소리가 마루를 울렸다⁠. 두름보다 두 배는 빨랐다⁠. 두름도 팠다⁠. 둘이 파낸 흙이 마루 밑 가운데에 쌓여 서로의 얼굴에 튀었다⁠.

구릉의 엄니에 무언가 딱 부딪혔다⁠. 구릉이 흙을 걷어 냈다⁠. 작은 항아리 주둥이가 나왔다⁠. 구릉이 항아리를 입에 물고 뒤로 빠져나갔다⁠. 단내가 마루 밑에 확 퍼졌다⁠. 곶감이었다⁠.

두름은 따라 나가지 않았다⁠. 잔치 냄새는 항아리에서 나지 않았다⁠. 아직 밑에서 났다⁠. 두름은 구릉이 판 자리에서 한 뼘 옆으로 비켜 다시 코를 박았다⁠. 흙이 달라졌다⁠. 더 단단하고 더 차가웠다⁠. 오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흙이었다⁠.

코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돌이 아니었다⁠. 돌은 차갑기만 했다⁠. 이것은 차가운데 냄새가 있었다⁠. 두름은 흙을 핥듯이 밀어 내고 입으로 물었다⁠. 길쭉했다⁠. 두름은 그것을 문 채 엉덩이부터 뒷걸음질로 마루 밑을 빠져나왔다⁠.

*

바위 앞에 짐승들이 다시 모였다⁠. 구릉이 먼저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산신령이 눈을 뜨고 항아리 냄새를 맡더니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어험⁠. 내 곶감이다⁠. 작년 가을에 묻은 거다⁠. 잘 찾았다⁠.⁠”

구릉 무리가 콧김을 뿜었다⁠. 산신령이 항아리 주둥이에 코를 박았다가 빼냈다⁠.

“⁠그런데 내가 찾으라고 한 건 이게 아니다⁠.⁠”

“⁠뭘 찾으라고 하셨는데요⁠?⁠”

“⁠예순 해 된 거⁠.⁠”

“⁠처음에 그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구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산신령이 귀를 긁었다⁠.

“⁠안 했냐⁠? 까마귀야⁠, 내가 안 했냐⁠?⁠”

“⁠안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했다⁠.⁠”

두름이 물고 온 것을 바위 앞에 내려놓았다⁠. 흙이 묻은 누런 뼈였다⁠. 짐승 다리뼈 하나⁠. 한쪽 끝이 이빨 자국으로 둥글게 닳아 있었다⁠.

산신령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늙은 다리가 휘청거렸다⁠. 산신령은 뼈 앞에 엎드려 한참 동안 냄새를 맡았다⁠. 꼬리가 천천히 흔들리다가 멈췄다⁠.

“⁠이거다⁠.⁠”

짐승들이 웅성거렸다⁠. 고라니 하나가 물었다⁠.

“⁠그게 뭔데요⁠?⁠”

“⁠돼지 뼈다⁠. 잔칫상 돼지⁠.⁠”

두름은 등 털이 바늘처럼 일어났다⁠. 산신령은 뼈에 턱을 얹었다⁠.

“⁠예순 해 전에 나는 저 아래 마을 개였다⁠. 광산에서 사람이 많이 내려오던 때라 잔치가 자주 있었다⁠. 하루는 잔칫상 밑에 엎드려 있다가 상에서 떨어진 돼지 다리를 물고 산으로 뛰었다⁠. 맞을 게 무서워서 못 돌아갔다⁠. 겨울을 산에서 났다⁠. 그다음 겨울도⁠. 그러다 보니 여기 있더라⁠.⁠”

“⁠그럼 산신령님도 원래는⁠…⁠…⁠.⁠”

“⁠우리 짐승이었지⁠.⁠”

산신령이 구릉을 보았다⁠. 구릉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신령이 두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 냄새를 어떻게 알았냐⁠?⁠”

“⁠잔치 냄새를 알아서요⁠. 작년에 맡았거든요⁠.⁠”

“⁠잔칫상에 오를 놈이라 코가 그쪽으로 열렸나 보다⁠.⁠”

산신령이 껄껄 웃었다⁠. 혼자 웃었다⁠.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첫 판은 집돼지가 이겼다⁠.⁠”

멧돼지 무리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구릉이 무리를 향해 콧김을 한 번 뿜자 소리가 그쳤다⁠. 구릉은 항아리를 앞발로 산신령 앞에 밀어 놓고 두름 앞으로 걸어왔다⁠.

“⁠한 판이다⁠. 남은 건 두 판⁠.⁠”

“⁠네⁠.⁠”

“⁠다음 판에 내 새끼들이 보고 있을 거다⁠. 그래도 네 코가 오늘처럼 열리는지 보자⁠.⁠”

구릉이 돌아서 비탈을 내려갔다⁠. 무리가 뒤따랐다⁠. 봄비가 맨 뒤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새끼들이 봄비 다리 사이로 두름을 훔쳐보았다⁠. 두름은 모르는 척 눈을 굴렸다⁠. 해가 벌써 높았다⁠. 산 너머에서 굴착기가 땅을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왔다⁠.

*

두름은 금줄을 넘어 감자밭을 가로질렀다⁠. 이랑마다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뛰면 배가 출렁거렸다⁠. 출렁거리는 배를 안고 우리 뒤로 돌아갔을 때⁠, 두름은 멈췄다⁠.

할아버지가 구멍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삽을 들고⁠, 입김을 길게 뿜으면서⁠. 할아버지 발밑에 두름이 판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구멍에서 시작한 돼지 발자국이 감자밭을 지나 밭둑을 넘어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돌아온 발자국이 나간 발자국 위에 겹쳐 있었다⁠. 숨길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두름을 내려다보았다⁠. 두름의 코끝에는 산신각 마루 밑 흙이 시커멓게 묻어 있었고⁠, 귀에는 거미줄이 감겨 있었다⁠.

“⁠산에 갔다 왔나⁠.⁠”

“⁠네⁠.⁠”

두름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귀에는 꿀⁠, 하고 들렸다⁠. 할아버지는 산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산 밑 밭둑까지 갔다가 돌아온 발자국이 아니었다⁠. 금줄 너머 눈 덮인 비탈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발자국이었다⁠. 할아버지는 삽을 내려놓고 밭둑에서 돌을 주워 왔다⁠. 주먹만 한 돌을 구멍에 하나씩 넣었다⁠. 하나 넣고 흙을 덮고 밟고⁠, 또 하나 넣고 밟았다⁠. 탄광에서 무너진 갱도를 메우던 손이라 빈틈이 없었다⁠.

“⁠엿새만 참아라⁠. 엿새⁠.⁠”

뒤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연지가 패딩 점퍼를 잠옷 위에 걸치고 나와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엿새가 뭔데⁠? 엿새 뒤에 뭐 있어⁠?⁠”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삽을 들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연지가 두름을 보았다⁠. 두름은 연지를 보았다⁠.

“⁠너 어디 갔다 왔어⁠? 얼굴이 왜 그래⁠?⁠”

두름은 산신령 시험 첫 판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연지는 웃으며 두름의 코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꿀꿀거리지 말고⁠. 배고파서 나갔지⁠? 할머니한테 고구마 더 달라고 해 줄게⁠.⁠”

*

아침나절 할머니는 부엌에서 감자를 깎았고⁠, 연지는 커피 믹스에 넣을 설탕을 찾아 찬장을 뒤졌다⁠. 우리는 부엌 창 바로 밑이었다⁠. 두름은 창틀에 앞발을 올리고 유리에 코를 댔다⁠. 콧김에 유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부엌 냄새가 유리 틈으로 새어 나왔다⁠. 감자 진⁠, 가스 불⁠, 그리고 새 종이와 남의 지갑 냄새⁠.

“⁠할머니⁠, 설탕 어딨어⁠?⁠”

“⁠위 칸⁠.⁠”

연지가 위 칸 문을 열었다⁠. 설탕 통 옆에 흰 봉투가 세워져 있었다⁠. 연지가 봉투를 집었다⁠. 봉투에 찍힌 「⁠터널 공사 현장⁠」 글씨가 유리 너머로 두름에게도 보였다⁠. 연지가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만 원짜리 열 장이었다⁠.

“⁠할머니⁠, 이게 뭐야⁠?⁠”

할머니의 칼이 멈췄다⁠. 감자 껍질이 도마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봉투를 든 채 부엌문을 열고 나와 우리 앞으로 왔다⁠. 판자 틈에 종이 한 조각이 끼어 있었다⁠. 어제 염소가 먹다 남긴 전단 끄트머리였다⁠. 「⁠잔치에 모두 오세요⁠」 연지가 종이 조각을 빼 들고 봉투와 번갈아 보았다⁠. 엿새 뒤가 동지 지나 첫 토요일이었다⁠.

연지가 판자 앞에 쪼그려 앉아 두름과 눈을 맞췄다⁠.

“⁠두름아⁠. 이거 너야⁠?⁠”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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