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72자)

해 뜰 녘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차무겸

자정이 지나자 눈이 그쳤다⁠. 구름이 걷히고 별이 나왔다⁠. 별이 나오면 추워졌다⁠. 두름은 밭둑 꺼진 자리에서 네 발을 벌리고 버텼다⁠. 발밑 얼음이 몸 무게에 눌려 조금씩 녹았다가 다시 얼었다⁠. 발굽 사이로 찬 기운이 올라와 배까지 닿았다⁠.

몇 걸음 옆에서 구릉이 버티고 있었다⁠. 구릉은 해 질 녘부터 한 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등에 쌓인 눈이 얼어 껍데기처럼 굳었다⁠.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떨리는데 무너지지 않았다⁠.

두름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꾸르륵⁠, 하고 길게⁠. 밤 산이 조용해서 비탈 끝까지 들렸다⁠. 나뭇가지 위의 다람쥐들이 킥킥거렸다⁠.

“⁠돼지 배다⁠!⁠”

“⁠돼지 배가 산신령 하겠대⁠!⁠”

두름은 배에 힘을 주었다⁠. 배가 한 번 더 울었다⁠. 이번에는 고라니들까지 웃었다⁠. 봄비 품의 새끼들이 따라 웃다가 봄비한테 핥였다⁠.

두름은 웃음소리 속에서 깨달았다⁠. 배가 고팠지만 춥지 않았다⁠. 할머니 고구마 껍질이 두 해 동안 붙여 준 살이 두름을 덮고 있었다⁠. 구릉의 몸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털 밑이 바로 뼈였다⁠.

바윗돌 위에서 산신령이 코를 골다가 깼다⁠.

“⁠누가 떠났냐⁠?⁠”

“⁠아무도요⁠.⁠”

까마귀가 대답했다⁠. 산신령은 다시 코를 골았다⁠. 반 시간 뒤에 또 깼다⁠.

“⁠누가 떠났냐⁠?⁠”

“⁠아무도요⁠.⁠”

새벽 두 시쯤 비탈 위에서 무언가 굴러 내려왔다⁠. 도토리 한 알이었다⁠. 도토리는 눈 위를 통통 튀어 두름 코앞에서 멈췄다⁠. 비탈 위 바위 밑에서 다리 다친 새끼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봄비가 새끼 목덜미를 물어 도로 끌어당기는 것이 보였다⁠.

산신령이 한쪽 눈을 떴다⁠.

“⁠먹는 건 된다⁠. 떠나지만 않으면⁠.⁠”

두름은 도토리를 내려다보았다⁠. 코끝에 닿을 거리였다⁠. 다람쥐 도토리 반 알 냄새⁠, 새끼 침 냄새가 났다⁠. 두름의 배가 다시 꾸르륵 울었다⁠. 두름은 도토리를 먹지 않았다⁠. 코끝으로 살짝 밀어 비탈 쪽으로 굴려 보냈다⁠. 도토리는 몇 뼘 굴러가다 눈에 박혀 멈췄다⁠.

“⁠너 먹어⁠. 나보다 네가 더 고프잖아⁠.⁠”

다리 다친 새끼가 한참 도토리를 보다가 절뚝절뚝 내려와 물고 올라갔다⁠. 구릉이 새끼를 곁눈으로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달이 산 위로 기울었을 때 구릉이 입을 열었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동생이 쇠줄에 감긴 밤⁠. 나는 무리를 데리고 능선에 있었다⁠.⁠”

두름은 숨을 죽였다⁠.

“⁠동생이 불렀다⁠. 처음엔 크게 부르고⁠, 나중엔 작게 불렀다⁠. 새벽까지 불렀다⁠. 나는 능선에서 다 들었다⁠. 내려가지 않았다⁠. 사람 집 개가 짖었고⁠, 쇠 냄새가 났다⁠. 내려가면 무리가 다 감길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를 데리고 산 뒤로 넘어갔다⁠.⁠”

구릉의 콧김이 별빛 속에서 하얗게 흩어졌다⁠.

“⁠등불은 해 뜰 녘에 왔다⁠. 나는 그것도 능선에서 봤다⁠. 동생은 내가 두고 간 거다⁠. 영감이 아니라 내가⁠.⁠”

“⁠그래서 맹세하셨어요⁠?⁠”

“⁠다시는 무리를 사람 밭 앞에서 굶겨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금줄 앞에서 돌아서는 일은 그날로 끝이라고⁠.⁠”

두름은 구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릉은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찢어진 귀 끝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저는 젖병을 물었어요⁠.⁠”

두름이 말했다⁠.

“⁠아궁이 앞 고무 대야에서요⁠. 할머니가 우유를 데워서 손목에 떨어뜨려 보고 줬어요⁠. 손목에 파스 냄새가 났어요⁠. 할머니는 밤에 세 번 일어났어요⁠. 할아버지는 대야 옆에 연탄 화로를 갖다 놨고요⁠. 연지가 이름을 지어 줬어요⁠.⁠”

구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해마다 동짓날 산신각에 감자를 갖다 둬요⁠. 이번 동지에도 갔어요⁠. 등에 지고요⁠. 제가 냄새를 맡았어요⁠.⁠”

구릉의 귀가 움찔했다⁠.

“⁠그 감자⁠.⁠”

구릉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마다 동지 무렵 산신각 앞에 감자 한 자루가 있었다⁠. 내 어미 때부터 있었다⁠. 마흔 겨울은 될 거다⁠. 우리 무리는 그 감자로 섣달을 넘겼다⁠. 그래서 저 집 밭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감자 자루에서 나는 냄새가 저 밭 냄새였으니까⁠. 그 봄에는 감자가 다 떨어지고 동생이 배가 불러서⁠…⁠…⁠.⁠”

구릉의 말이 끊겼다⁠. 바윗돌 위에서 산신령이 눈을 반쯤 떴다⁠.

“⁠어험⁠. 나도 좀 먹었다⁠.⁠”

“⁠예⁠?⁠”

“⁠감자⁠. 해마다 몇 알씩⁠. 곶감만 먹고는 못 산다⁠.⁠”

다람쥐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일제히 산신령을 노려보았다⁠. 산신령은 모르는 척 다시 눈을 감았다⁠.

*

새벽 다섯 시에 마을 방송이 켜졌다⁠. 박하사탕 깨무는 소리가 없었다⁠. 이장이 사탕을 깜빡할 만큼 급했다⁠.

“⁠아⁠, 아⁠! 이장입니다⁠! 돼지가 없어졌습니다⁠! 잔칫상 돼지가 헛간에서 없어졌습니다⁠! 보신 분 바로 연락 주세요⁠! 까만 거⁠, 백오십육 킬로⁠!⁠”

마을 개들이 한꺼번에 짖었다⁠. 집집마다 불이 켜졌다⁠. 얼마 뒤 고샅에 손전등 불빛 둘이 흔들리며 내려왔다⁠. 불빛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마을을 가로지르고⁠, 노부부 집 앞을 지나⁠, 감자밭으로 들어왔다⁠.

이장과 현장소장이었다⁠. 이장 손에 끊어진 밧줄 토막이 들려 있었다⁠. 뒤에서 털모자를 쓴 연지가 뛰어왔다⁠. 연지 뒤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왔고⁠, 할머니가 행주를 쥔 채 따라왔다⁠.

손전등 불빛이 밭둑을 훑었다⁠. 밭둑 위에 흑돼지 한 마리가 네 발을 벌리고 서 있었다⁠. 몇 걸음 옆에 등에 눈이 얼어붙은 커다란 멧돼지가 서 있었다⁠. 둘 다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불빛이 비탈로 올라가자 나무 사이에서 눈이 수십 쌍 빛났다⁠.

현장소장이 한 발 물러났다⁠.

“⁠이장님⁠. 저거 멧돼지예요⁠. 옆에 가지 마세요⁠.⁠”

“⁠멧돼지는 멧돼지고⁠, 돼지는 회사 돼지잖아요⁠!⁠”

이장이 밧줄 토막을 쥐고 밭둑으로 다가왔다⁠. 두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금줄에서 발이 떨어졌다⁠. 이장이 두 걸음 앞까지 왔다⁠. 박하 냄새 대신 입 냄새가 났다⁠.

연지가 이장 앞으로 뛰어들었다⁠.

“⁠건드리지 마요⁠.⁠”

“⁠연지야⁠, 비켜⁠.⁠”

“⁠해 뜰 때까지만⁠. 해 뜰 때까지만 건드리지 마요⁠.⁠”

“⁠해 뜨면 뭐⁠?⁠”

“⁠몰라요⁠. 그냥 해 뜰 때까지만요⁠.⁠”

현장소장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장님⁠, 안전기원제가 열 시고 발파가 열두 시예요⁠. 열 시 전에만 상에 올리면 됩니다⁠. 해 뜨는 게 일곱 시 반이니까⁠…⁠…⁠.⁠”

“⁠소장님은 지금 그게 계산이 돼요⁠?⁠”

“⁠저는 공정표대로 사는 사람이라서요⁠.⁠”

이장이 연지 어깨 너머로 두름을 보았다⁠. 옆의 멧돼지를 보았다⁠. 비탈의 눈들을 보았다⁠. 이장이 밧줄 토막을 쥔 손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야⁠. 돼지가 멧돼지랑 나란히 서서 꼼짝을 안 해⁠.⁠”

할머니가 밭둑 아래에서 두름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두름 이름을 불렀다⁠. 두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고개가 돌아갔다⁠. 고개가 돌아가면 몸이 따라갔다⁠. 두름은 앞만 보았다⁠. 할머니 행주 냄새가 등 뒤에서 왔다⁠.

“⁠두름아⁠, 춥다⁠. 들어가자⁠. 들어가서 고구마 먹자⁠.⁠”

할머니가 한 번 더 불렀다⁠. 연지가 할머니 팔을 붙잡았다⁠.

“⁠할머니⁠, 해 뜰 때까지만⁠.⁠”

“⁠해 뜨면 뭐가 되노⁠?⁠”

“⁠나도 몰라⁠. 근데 두름이 그러래⁠.⁠”

“⁠돼지가 언제 그러대⁠?⁠”

“⁠얼굴이 그래⁠.⁠”

할머니가 두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보더니 행주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밭둑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는 더 부르지 않았다⁠.

*

비탈 위에서 개가 짖었다⁠.

넷이었다⁠. 능선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엽사들이 큰 발파 전에 산을 비우려고 동트기 전부터 올라와 있었다⁠. 개들이 바위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봄비가 새끼 넷을 품고 엎드린 바위였다⁠.

봄비가 일어났다⁠. 새끼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리 다친 새끼가 뛰지 못하고 바위 밑에 주저앉았다⁠.

구릉의 온몸이 떨렸다⁠. 이번에는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구릉의 앞발 하나가 금줄 위에서 들썩였다⁠. 두름은 구릉의 발을 보았다⁠. 구릉은 발을 내려놓았다⁠. 다시 들썩였다⁠.

밭둑 아래에서 할아버지가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금줄을 넘었다⁠. 사람에게 금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밭둑 위 비탈을 올라갔다⁠. 무릎이 눈에 빠졌다⁠. 지팡이를 꽂고 몸을 끌어 올렸다⁠. 개들이 바위에 닿기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바위 앞에 닿았다⁠. 할아버지가 바위와 개들 사이를 막았다⁠. 등 뒤에 줄무늬가 바랜 새끼 넷과 봄비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거둬라⁠! 개 거둬라⁠! 여기는 내 산이다⁠! 내 밭 위에서 총 쏘지 마라⁠!⁠”

검은 개가 할아버지 앞에서 멈췄다⁠. 이빨을 드러냈다⁠. 할아버지는 물러나지 않았다⁠. 지팡이 끝이 개 코앞에서 떨렸다⁠. 능선에서 엽사 목소리가 내려왔다⁠.

“⁠어르신⁠! 비키세요⁠! 위험해요⁠!⁠”

“⁠니가 비켜라⁠! 내 산이다⁠!⁠”

한참 뒤 휘파람이 길게 울렸다⁠. 검은 개가 이빨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개 넷이 능선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든 채 바위 앞에 서 있었다⁠. 숨이 하얗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위 밑의 새끼들을 보지 않았다⁠. 보는 것이 무서운 사람처럼 앞만 보았다⁠.

구릉이 할아버지를 보았다⁠. 해 뜰 녘에 등불을 들고 왔던 사람이었다⁠. 두 해 뒤 해 뜰 녘에 지팡이를 들고 구릉의 새끼들 앞에 와 있었다⁠.

*

능선이 붉어졌다⁠.

구릉이 고개를 돌려 두름을 보았다⁠. 밤새 처음으로 몸을 비틀었다⁠. 등의 얼음 껍데기가 갈라져 떨어졌다⁠.

“⁠내 맹세는 무리한테 한 거다⁠.⁠”

구릉의 목소리는 밤새 한 말 중에 가장 조용했다⁠.

“⁠산신령은 무리 편을 못 든다⁠. 다람쥐 편도 들어야 하고⁠, 고개 너머 놈들 편도 들어야 하고⁠, 저 영감 편도 들어야 한다⁠. 나는 그거 못 한다⁠. 나는 내 새끼 편만 든다⁠.⁠”

“⁠구릉⁠…⁠…⁠.⁠”

“⁠두 고랑⁠.⁠”

구릉이 감자밭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영감 밭 끝 두 고랑⁠. 그거는 받아 내라⁠. 네 어미 몫이다⁠.⁠”

햇살이 능선 위로 한 줄 넘어왔다⁠. 구릉이 앞발 하나를 금줄에서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내려놓지 않았다⁠. 뒷발이 따라 들렸다⁠. 구릉은 금줄 너머 비탈로 내려갔다⁠. 산신령이 바윗돌 위에서 눈을 떴다⁠.

“⁠구릉이 먼저 떠났다⁠.⁠”

산신령의 목소리가 산 전체에 퍼졌다⁠. 햇살이 밭둑을 타고 내려와 두름의 등에 닿았다⁠.

*

두름은 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몸은 그대로였다⁠. 발밑 얼음도 그대로였다⁠. 찢어진 귀도 그대로 아팠다⁠.

연지가 두름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가⁠, 눈이 흔들렸다⁠. 연지 눈이 두름 얼굴 위를 미끄러져 지나갔다⁠. 두름 뒤의 산을 보고⁠, 두름 옆의 빈 밭둑을 보았다⁠. 연지가 입을 벌렸다⁠.

“⁠두름아⁠?⁠”

이장이 손전등을 떨어뜨렸다⁠. 손전등이 눈 위를 굴러 두름 발굽 앞에서 멈췄다⁠. 불빛이 두름의 발굽을 비췄다⁠. 이장은 불빛 속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못 본 얼굴이었다⁠.

“⁠어디 갔어⁠? 방금 여기 있었잖아⁠. 방금⁠!⁠”

현장소장이 안전모를 벗었다⁠. 할머니가 밭둑 아래에서 행주를 떨어뜨렸다⁠.

연지가 밭둑으로 올라왔다⁠. 두름이 서 있는 자리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두름의 코앞에서 멈췄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연지는 손을 더 뻗지 않았다⁠. 손을 내려 밭둑의 눈을 짚었다⁠. 두름의 앞발 바로 옆이었다⁠. 밤새 몸 무게에 눌린 눈이 발굽 넷 모양으로 꺼져 녹아 있었고⁠, 아직 따뜻했다⁠.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해 뜰 녘 ·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