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02자)

잔칫날

잔칫상 돼지가 산신령 시험에 붙었다 · 차무겸

해가 능선 위로 다 올라오자 산신령이 바윗돌에서 내려왔다⁠. 밭둑까지 걸어와 두름 앞에 앉았다⁠. 사람들은 아직 밭둑 아래에서 웅성거렸다⁠. 아무도 늙은 개를 보지 못했다⁠. 이제 두름도 보지 못했다⁠.

“⁠어험⁠. 이제 네 거다⁠.⁠”

“⁠뭘 하면 돼요⁠?⁠”

“⁠먼저 금줄⁠. 금줄은 산신령이 긋는다⁠.⁠”

산신령이 밭둑 끝으로 걸어가더니 뒷다리 하나를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눈 위에 노란 줄이 한 뼘 생겼다⁠.

“⁠이렇게⁠.⁠”

“⁠…⁠…오줌이요⁠?⁠”

“⁠산신령 일이 다 거룩한 줄 알았냐⁠. 예순 해 동안 새벽마다 이 밭둑을 오갔다⁠. 무릎이 다 나갔다⁠.⁠”

비탈 위 나뭇가지에서 다람쥐들이 고개를 돌렸다⁠. 봄비가 새끼들 눈을 앞발로 가렸다⁠. 두름은 귀까지 뜨거워졌다⁠.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이 처음으로 다행이었다⁠.

밭둑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 이장은 손전등을 주워 들고 밭둑을 세 번 오르내렸다⁠. 발자국은 밭둑 위에서 끊겨 있었다⁠. 들어간 발자국만 있고 나간 발자국이 없었다⁠. 이장은 끊어진 밧줄 토막을 쥔 채 고샅으로 내려갔다⁠. 현장소장이 산을 한 번 올려다보고 따라갔다⁠.

연지가 할머니 팔을 붙잡고 밭둑을 내려왔다⁠.

“⁠할머니⁠, 두름이 없어졌어⁠. 내 눈앞에서⁠. 진짜야⁠. 해가 닿으니까 없어졌어⁠.⁠”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밭둑을 돌아보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산신령님이 데려가셨나 보다⁠.⁠”

연지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맞는 말을 했다⁠. 아무도 몰랐다⁠. 두름만 알았다⁠. 할아버지는 비탈에서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다 밭둑 꺼진 자리 앞에서 오래 멈췄다⁠. 쇠줄이 놓였던 자리였다⁠. 할아버지는 거기에 지팡이 끝을 한 번 꽂았다가 뽑았다⁠.

*

열 시⁠, 회관 앞마당 천막 아래에 안전기원제 상이 차려졌다⁠. 시루떡과 북어와 사과와 배가 줄을 맞춰 놓였고⁠, 막걸리 사발이 셋이었다⁠. 상 한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돼지머리 자리였다⁠. 상 뒤에 「⁠터널 공사 안전기원 마을 잔치⁠」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천막 옆 솥 두 개는 불을 안 땐 채 식어 있었다⁠.

두름은 천막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녀도 아무도 비키지 않았다⁠. 할머니 둘이 두름 옆구리에 엉덩이를 대고 수군거리다가 따뜻하다며 서로 쳐다보았다⁠. 두름은 소쿠리에서 부추전 한 장을 물었다⁠. 전이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지자 전 부치던 할머니가 뒤집개를 떨어뜨렸다⁠.

“⁠전이 어디 갔노⁠?⁠”

“⁠바람이 가져갔나 보다⁠.⁠”

“⁠바람이 전을 먹나⁠.⁠”

이장이 마이크를 쥐고 상 앞에 서 있었다⁠. 박하사탕을 두 개 깨물었다⁠. 현장소장이 양복 위에 안전모를 쓰고 이장 옆에 서 있었다⁠. 회사 사람 넷이 뒤에 줄지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천막을 둘러쌌다⁠. 노부부와 연지가 맨 앞에 있었다⁠.

“⁠형님⁠. 돼지 어디 숨겼어요⁠?⁠”

이장이 마이크를 켠 채 말했다⁠. 온 골짜기가 들었다⁠.

“⁠헛간 밧줄이 가위로 잘려 있었어요⁠. 부엌 가위요⁠. 연지가 한 거 다 압니다⁠. 아침에 밭둑에 멀쩡히 서 있던 돼지가 눈 깜짝할 새에 없어진 것도 이상하고요⁠. 형님네 식구들이 짜고 산에 감춘 거 아니에요⁠?⁠”

현장소장이 수첩을 폈다⁠.

“⁠회사 규정상 계약금은 돌려받고⁠, 위약금이 붙습니다⁠. 저도 위에 보고를 해야 해서요⁠.⁠”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연지가 앞으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귀퉁이가 뜯긴 봉투를 꺼냈다⁠.

“⁠제가 끊었어요⁠. 가위로요⁠. 제가 풀어 줬어요⁠.⁠”

“⁠어디 있는데⁠?⁠”

“⁠산에요⁠.⁠”

연지가 봉투를 현장소장에게 내밀었다⁠.

“⁠계약금 오십⁠, 위약금 칠십이에요⁠. 백이십⁠.⁠”

현장소장이 봉투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지팡이 하나가 소장 손 앞을 막았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로 봉투를 연지 쪽으로 밀어 놓고⁠, 이장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았다⁠. 할아버지는 마이크를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입을 너무 가까이 댔다⁠. 확성기에서 귀를 찢는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개들이 짖었다⁠.

할아버지가 마이크를 조금 떼었다⁠.

“⁠약조를 깬다⁠.⁠”

천막 아래가 조용해졌다⁠.

“⁠내가 깬다⁠. 손녀가 깬 거 아니다⁠. 계약금은 내가 돌려준다⁠.⁠”

할아버지가 바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터널 공사 현장⁠」이 찍힌 봉투였다⁠. 월요일에 보낸다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봉투를 현장소장 손에 쥐여 주었다⁠.

“⁠위약금은 내가 갚는다⁠. 감자 팔아서⁠. 손녀 돈은 손녀 거다⁠.⁠”

현장소장이 봉투와 빈 상을 번갈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수첩을 덮었다⁠.

“⁠위약금은 됐습니다⁠. 돼지머리 없이 고사 지내는 현장도 많아요⁠. 요새는 저금통 올립니다⁠.⁠”

현장소장이 회사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회사 사람이 화물차로 뛰어가더니 분홍색 돼지 저금통을 들고 왔다⁠. 저금통이 빈 상 한가운데 놓였다⁠. 마을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장만 웃지 않았다⁠. 이장이 마이크를 도로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가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형님⁠, 마이크 주세요⁠. 그거 회관 거예요⁠.⁠”

“⁠국유림 얘기 할까⁠?⁠”

할아버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려는 시늉을 했다⁠. 이장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장이 손을 거두고 박하사탕을 하나 더 깨물었다⁠. 연지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하나 더 있다⁠.⁠”

할아버지가 산을 보았다⁠.

“⁠우리 밭둑 감자 움은 열어 둔다⁠. 거기 감자는 산 몫이다⁠. 그리고 올해부터 우리 밭 끝 두 고랑은 안 캔다⁠. 산에 빚이 있다⁠.⁠”

“⁠형님⁠, 멧돼지 밥 주게요⁠?⁠”

이장이 마이크 없이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팔을 잡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할머니 목소리도 온 골짜기에 퍼졌다⁠.

“⁠나도 마흔 해 갚았다⁠.⁠”

“⁠뭐를⁠?⁠”

“⁠동짓날마다 산신각에 감자 한 자루씩⁠.⁠”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았다⁠.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렸다⁠.

“⁠그게 니였나⁠.⁠”

“⁠그럼 산신령이 감자를 캐나⁠.⁠”

천막 아래가 웃음으로 무너졌다⁠. 연지가 웃다가 울었다⁠. 울다가 또 웃었다⁠. 두름은 천막 기둥 옆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았다⁠. 둘 다 두름을 보지 못했다⁠. 두름은 둘의 냄새를 오래 맡았다⁠. 짚과 쇠⁠, 행주와 파스⁠. 처음 빚과 다음 빚이었다⁠.

연지가 마이크를 받았다⁠.

“⁠할아버지⁠. 나 대출받을게⁠. 내 빚이야⁠. 내가 갚을게⁠.⁠”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연지 손에서 종이를 받아 갔다⁠. 연지가 다시 뽑아 온 대출 신청서였다⁠. 할아버지가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종이를 상 모서리에 대고 동의 칸에 이름을 썼다⁠. 글씨가 삐뚤었다⁠. 탄광에서 굳은 손이었다⁠.

*

안전기원제는 돼지 저금통 앞에서 지냈다⁠. 현장소장이 절을 두 번 하고 만 원짜리를 저금통 구멍에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장씩 넣었다⁠. 할머니는 오천 원을 넣었다⁠. 이장은 지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천막 밖 고샅에 늙은 누렁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수염이 허옜다⁠. 입에 곶감 하나를 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개를 보았다⁠. 이번에는 다들 보았다⁠.

“⁠어디 개가 곶감을 물고 다니노⁠?⁠”

할머니가 말했다⁠. 늙은 개는 할머니를 한 번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회사 화물차 한 대가 고샅 끝에 서 있었다⁠. 동해 쪽 공장으로 자재를 가지러 가는 차였다⁠. 늙은 개는 화물칸에 뛰어오르려다 한 번 미끄러졌다⁠. 두 번째에 올라갔다⁠. 현장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네 개예요⁠? 데려가도 돼요⁠?⁠”

아무도 자기 개라고 하지 않았다⁠. 화물차가 출발했다⁠. 늙은 개가 화물칸 끝에 엎드려 곶감을 씹으며 멀어졌다⁠. 두름은 고샅 끝까지 따라가 화물차가 고개를 넘는 것을 보았다⁠. 곶감 냄새가 바람에 실려 한참 남았다⁠.

*

열두 시에 산 너머에서 큰 발파가 터졌다⁠.

땅이 길게 울었다⁠. 나뭇가지마다 눈이 쏟아졌다⁠. 회관 천막이 출렁였고 돼지 저금통이 상 위에서 굴렀다⁠. 할머니들이 저금통을 붙잡았다⁠.

능선 위로 짐승들이 넘어왔다⁠. 고라니가⁠, 너구리가⁠, 오소리가⁠, 멧돼지가⁠. 고개 하나가 통째로 뚫린 골짜기에서 넘어온 냄새들이 비탈을 덮었다⁠. 셀 수 없었다⁠.

회관 마당에서 연지가 능선을 가리켰다⁠.

“⁠할머니⁠, 저기 봐⁠. 짐승이 저렇게 많아⁠?⁠”

마을 사람들이 천막 밖으로 나와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엽사들이 총을 멘 채 서로 얼굴을 보았다⁠. 이장이 마이크를 켰다가⁠, 할 말을 못 찾고 도로 껐다⁠. 현장소장은 상 위의 돼지 저금통을 두 손으로 붙들고 능선을 보았다⁠. 두름은 밭둑으로 갔다⁠.

구릉이 감자 움 앞에 와 있었다⁠. 금줄은 아직 옛 자리에 있었다⁠. 구릉 뒤에 무리와 봄비와 새끼 넷⁠, 고개 너머 짐승들이 엎드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침에 열어 둔 움에서 감자 냄새가 났다⁠.

“⁠두 고랑이다⁠. 맹세의 반도 안 된다⁠.⁠”

“⁠다람쥐 자리도 있어요⁠. 산 전체에요⁠. 눈 밑에⁠.⁠”

“⁠눈 녹으면⁠?⁠”

“⁠그때는 칡이요⁠. 옆 칡이 얼지 않게 파는 법 알아요⁠. 제가 얼려 봐서요⁠.⁠”

구릉이 콧김을 세 번 짧게 끊어 뿜었다⁠. 멧돼지의 웃음이었다⁠.

“⁠봄에 보자⁠, 산신령⁠.⁠”

봄비가 새끼들을 데리고 두름 앞으로 왔다⁠. 다리 다친 새끼가 이제 덜 절었다⁠. 봄비가 두름 냄새를 맡았다⁠.

“⁠비누 냄새가 없어졌어요⁠.⁠”

“⁠사람 눈에서 없어지면 비누 냄새도 없어지나 봐요⁠.⁠”

“⁠산 냄새만 나요⁠. 우리 냄새요⁠.⁠”

두름은 빚을 세어 보았다⁠. 할머니의 젖병과 할아버지의 짚⁠, 연지의 가위⁠, 봄비의 새끼⁠, 다람쥐 도토리 반⁠, 이장의 장뇌⁠, 구릉의 칡⁠, 어미의 젖⁠. 갚은 것도 있었고 못 갚은 것도 있었다⁠. 남은 것은 산 하나였다⁠. 비탈을 덮은 짐승 냄새 하나하나가 이제 두름이 먹여야 할 입이었다⁠. 두름은 산신령이 되고 나서 빚이 가장 많아졌다⁠.

두름은 밭둑을 따라 걸었다⁠. 감자 움을 지나고⁠, 밭 끝 두 고랑을 지나⁠, 세 번째 고랑 앞에서 멈췄다⁠. 뒷다리 하나를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비탈의 다람쥐들이 고개를 돌렸고⁠, 봄비가 새끼들 눈을 가렸다⁠. 두름은 고랑 하나를 따라 끝까지 걸었다⁠. 새 금줄이었다⁠. 금줄 뒤로 감자 움과 두 고랑이 산 편에 들어갔다⁠.

구릉이 앞발로 새 금줄 앞의 눈을 한 번 긁었다⁠. 코가 맵지 않았다⁠. 구릉은 감자 움으로 내려갔다⁠. 새끼들이 먼저 들어갔고⁠, 딸들이 들어갔고⁠, 맨 마지막에 구릉이 들어갔다⁠.

*

해 질 녘 할머니가 고구마 껍질 한 바가지를 들고 우리로 왔다⁠. 판자 문은 염소가 반을 먹었고⁠, 우리 안은 비어 있었다⁠. 짚만 두름 모양으로 눌려 있었다⁠. 연지가 판자에 걸터앉아 대출 신청서를 무릎에 펴 놓고 있었고⁠, 염소가 판자 너머에서 종이를 노려보았다⁠.

“⁠할머니⁠, 거기 아무도 없어⁠.⁠”

“⁠안다⁠.⁠”

“⁠근데 왜 줘⁠?⁠”

“⁠두 해 묵은 버릇이다⁠.⁠”

할머니는 빈 여물통 앞에 쪼그려 앉아 고구마 껍질을 부었다⁠.

두름은 여물통 앞에 서 있었다⁠. 할머니 손목에서 파스 냄새가 났다⁠. 두름은 고구마 껍질 한 조각을 물었다⁠. 여물통에서 껍질 한 조각이 없어졌다⁠. 할머니가 바가지를 든 채 멈췄다⁠. 한 조각이 또 없어졌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바가지를 기울여 껍질을 마저 부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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