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49자)

브리즈번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3일 새벽⁠, 케언스 공항의 출발 대기실은 에어컨이 너무 셌다⁠. 솔래는 말린 망고 견본 스무 봉지가 든 상자를 무릎에 올리고 앉아 있었다⁠. 비행기 표는 도티가 끊어 주었다⁠. 솔래가 두 번 거절하자 도티는 표를 출력해 솔래의 숙소 문틈에 끼워 놓았다⁠. 「⁠거절하면 버터가 먹어요⁠」라고 적힌 쪽지와 함께였다⁠.

탑승 안내가 나올 무렵 누군가 옆자리에 앉았다⁠. 망고 냄새가 먼저 왔다⁠. 무건이었다⁠. 무릎 위에 솔래와 똑같은 상자를 두 개 올려놓았다⁠.

“⁠냉동 망고 견본입니다⁠. 아이스팩 넣었습니다⁠. 레 할머니가 싸 주셨어요⁠.⁠”

“⁠따라오라고 안 했는데요⁠.⁠”

“⁠짐꾼입니다⁠. 짐이 많아서요⁠.⁠”

솔래는 상자 두 개를 보았다⁠. 하나는 솔래가 들 수 있는 무게였고⁠, 둘은 아니었다⁠. 솔래는 대답하지 않고 탑승권을 꺼냈다⁠. 무건의 탑승권에는 솔래 바로 뒤 좌석 번호가 찍혀 있었다⁠.

비행기는 작았다⁠. 무건은 좌석에 앉으려다 무릎이 앞 의자에 닿아 한참 자세를 바꾸었다⁠. 결국 다리를 통로 쪽으로 비스듬히 내밀었고⁠, 지나가던 승무원의 카트에 정강이를 받혔다⁠. 솔래는 앞자리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비행기가 뜨고 나서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솔래 씨⁠, 안전띠가 안 풀립니다⁠.⁠”

“⁠아직 풀 때 아니에요⁠.⁠”

“⁠아니요⁠, 매는 것도 아직 못 했습니다⁠.⁠”

솔래는 몸을 돌려 무건의 안전띠를 대신 채워 주었다⁠. 버클 끼우는 소리가 났다⁠. 손을 거두면서 솔래는 무건이 일등석 말고는 타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솔래의 휴대전화에는 비자 앱이 열려 있었다⁠. 브리즈번에 가 있는 이틀은 시골 농장 일로 치지 않았다⁠. 여든여덟 날 가운데 쉰여섯 날⁠. 이틀이 빠지면 1월 31일에도 이틀이 모자랐다⁠. 솔래는 앱을 닫았다⁠. 이틀은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걱정할 것이 줄을 서 있어서⁠, 이틀은 맨 뒤에 세웠다⁠. 솔래는 창밖을 보았다⁠. 구름 아래로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

브리즈번 전시장은 거대한 유리 상자였다⁠. 안에 들어서자 원두 볶는 냄새와 새 카펫 냄새가 섞여 밀려왔다⁠. 부스가 수백 개였다⁠. 호주 소고기⁠, 뉴질랜드 키위⁠, 태즈메이니아 연어⁠. 천장에 매달린 화면에서는 호주 농산물 수출이 해마다 늘고 있다는 영상이 되풀이되었다⁠. 한국 바이어들이 명찰을 달고 통로를 오갔다⁠.

운해 부스는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가장 컸다⁠. 벽 하나를 다 덮는 사진 속에 반듯한 망고 나무 줄이 끝없이 이어졌고⁠, 사진 위에 붉은 글씨가 떠 있었다⁠. 「⁠한 그루 망고 — 호주 고원의 햇살 냄새를 당신의 식탁에⁠」 부스 안에서는 직원들이 시식용 망고를 깍둑썰기해 이쑤시개에 꽂아 나눠 주었다⁠. 솔래는 지나가며 한 조각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풀 냄새였다⁠.

아침바구니 부스는 통로 끝⁠, 기둥 옆에 있었다⁠. 크지 않았다⁠. 솔래는 부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한 번 쉬었다⁠. 탁자 뒤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십 대⁠, 금테 안경⁠, 솔래가 회사를 그만두던 날 회의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신선식품 본부장이었다⁠.

“⁠연 대리⁠?⁠”

“⁠이제 대리 아니에요⁠. 펜로즈 농장 피커예요⁠.⁠”

본부장은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라이브 봤어⁠. 망고 판다며⁠? 우리 회사 앞에서 유기농 얘기를 하는 거⁠, 용기는 여전하네⁠.⁠”

“⁠앉아도 될까요⁠?⁠”

본부장이 손짓했다⁠. 솔래는 의자에 앉아 말린 망고 봉지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를 뜯어 본부장 앞에 밀었다⁠.

“⁠드셔 보세요⁠. 꼭지 냄새 맡으시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신입 때 저한테 가르쳐 주신 게 본부장님이에요⁠.⁠”

본부장은 한 조각을 집어 냄새를 맡고 입에 넣었다⁠. 오래 씹었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좋아⁠. 진짜 유기농 맛이야⁠. 그런데 연 대리⁠, 네가 우리 회사 그 사건 때 회의실에서 뭐라고 했는지 사람들이 다 기억해⁠. 딱지는 유기농인데 냄새는 비료라고⁠. 네가 맞았어⁠. 그래서 네가 나갔지⁠.⁠” 본부장은 망고 봉지를 손끝으로 밀어 솔래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지금 너랑 거래하면 우리가 그때 틀렸다는 걸 회사 밖에서 인정하는 거야⁠. 그건 내 자리 문제가 아니라 회사 문제야⁠.⁠”

“⁠그래서 안 사시겠다는 거예요⁠?⁠”

“⁠가격이 안 맞아서 안 산다는 거야⁠. 운해가 반값에 나무를 팔고 있어⁠. 소비자는 냄새보다 가격을 먼저 봐⁠. 그 사건 때 내가 배운 게 그거야⁠.⁠”

솔래는 대답하지 못했다⁠. 본부장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수확 첫날 채광필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던 것처럼⁠.

*

무건은 부스 밖 기둥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솔래가 나오자 무건은 노트북을 펼쳐 내밀었다⁠. 화면에 표가 떠 있었다⁠. 맨 위에 운해식품 열대과일 사업부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 원가 담당 동기한테 받았습니다⁠. 어젯밤에요⁠.⁠”

솔래는 표를 읽었다⁠. 운해의 한 그루 망고는 나무 한 그루당 운해가 내는 비용보다 사만 원 넘게 싸게 팔리고 있었다⁠. 팔수록 손해였다⁠. 표 아래에 짧은 메모가 있었다⁠. 「⁠경쟁 상품 정리 후 2월부터 정상가 전환 예정⁠」

“⁠반값은 2월까지예요⁠. 솔래 씨 나무 맡기가 무너지면 운해는 값을 다시 올립니다⁠. 그리고 이거⁠.⁠” 무건이 다음 장을 넘겼다⁠. 운해 광고에 쓰인 나무 사진의 촬영지 목록이었다⁠. “⁠광고 속 나무들은 유기농이 아닙니다⁠. 광고에는 유기농이라는 말이 없어요⁠. 햇살 냄새라고만 했죠⁠. 거짓말은 아닌데⁠, 사람들은 유기농인 줄 압니다⁠.⁠”

솔래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무건을 보았다⁠.

“⁠이거 회사 자료잖아요⁠.⁠”

“⁠네⁠.⁠”

“⁠이거 넘기면 무건 씨는요⁠?⁠”

“⁠제가 넘긴 겁니다⁠. 제가 넘겼다고 하셔도 됩니다⁠.⁠”

무건은 노트북을 덮어 솔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노트북 겉면이 무건의 손바닥 때문에 따뜻했다⁠.

*

아침바구니 부스로 돌아가는 길에 운해 부스 앞을 지나야 했다⁠. 깍둑썰기한 망고를 나눠 주던 직원들 사이에서 채광필이 나왔다⁠. 오늘은 넥타이까지 맸다⁠. 채광필은 솔래의 품에 안긴 노트북을 보고⁠, 기둥 옆의 무건을 보고⁠, 다시 노트북을 보았다⁠.

“⁠연솔래 씨⁠, 브리즈번까지 오셨네요⁠. 망고 드셔 보셨습니까⁠? 저희 거요⁠.⁠”

“⁠풀 냄새 나던데요⁠.⁠”

“⁠배 안에서 익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꿀 냄새가 납니다⁠.⁠” 채광필은 웃었다⁠. “⁠그 노트북⁠, 무거우시죠⁠? 우리 회사 거라서요⁠.⁠”

솔래는 노트북을 더 꽉 안았다⁠.

“⁠제 거예요⁠.⁠”

“⁠안에 든 건 아니시죠⁠.⁠” 채광필은 목소리를 낮췄다⁠. “⁠솔래 씨⁠, 하나만 말씀드리죠⁠. 회사 자료를 밖으로 들고 나간 사람은 회사에서 끝납니다⁠. 손자여도요⁠. 솔래 씨가 그 자료를 쓰시면⁠, 솔래 씨가 본부장님을 끝내시는 겁니다⁠. 그래도 쓰시겠습니까⁠?⁠”

솔래는 채광필의 눈을 보았다⁠. 채광필은 협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계산이 끝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솔래는 기둥 옆을 돌아보았다⁠. 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솔래만 보이게⁠.

“⁠쓸 거예요⁠.⁠”

“⁠그러시죠⁠. 저도 회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채광필은 이쑤시개에 꽂힌 망고 한 조각을 솔래에게 내밀었다⁠. 솔래가 받지 않자 자기 입에 넣었다⁠. “⁠1월 31일입니다⁠.⁠”

*

솔래는 아침바구니 부스로 돌아갔다⁠. 본부장이 다른 바이어와 이야기하다가 솔래를 보고 눈썹을 올렸다⁠. 솔래는 다시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본부장님⁠, 운해 반값은 3월이면 없어요⁠. 운해가 팔수록 손해 보는 값이에요⁠. 작은 농장들이 무너지면 값이 다시 오르고요⁠. 그때 깨끗한 유기농 공급처를 가진 회사가 하나 있으면⁠, 그 회사는 사건 전 손님들을 다 돌려받아요⁠.⁠”

본부장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표의 맨 위를 보고⁠, 솔래를 보고⁠, 기둥 뒤에 서 있는 무건을 보았다⁠. 운해 회장 손자의 얼굴은 본부장도 알았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말씀 못 드려요⁠.⁠”

“⁠말 안 해도 되겠네⁠.⁠” 본부장은 안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한참 생각했다⁠. “⁠좋아⁠. 한 철 물량⁠, 마리바 농장들 말린 망고하고 냉동 망고 다 사 줄게⁠. 값은 네가 부른 값의 팔 할⁠. 대신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1월 중순에 인증 기관 정기 심사가 있지⁠? 그거 깨끗하게 통과해⁠. 농장 흙에서 화학 비료가 한 점이라도 나오면 없던 일이야⁠. 우리 회사가 유기농 때문에 두 번 망할 수는 없어⁠.⁠” 본부장은 솔래가 처음 내민 망고 봉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일 끝나면 돌아와⁠. 유기농 담당 팀장 자리 만들어 줄게⁠. 네 코가 필요해⁠.⁠”

솔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본부장이 내민 의향서에 서명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펜을 놓는 순간⁠, 손금 사이에서 냄새가 올라왔다⁠. 3주 전에 씻고 또 씻은 손이었다⁠. 냄새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났다⁠. 12번 줄 끝⁠, 마지막 세 그루 밑의 젖은 흙 냄새가⁠.

*

호텔 방은 둘이었다⁠. 무건이 따로 잡았다⁠. 저녁 여덟 시⁠, 솔래는 방에서 엄마와 영상 통화를 했다⁠. 엄마는 동네 목욕탕 앞 평상에 앉아 있었고⁠, 뒤로 영숙 이모와 순자 이모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딸⁠, 계약했냐⁠?⁠”

“⁠반쯤요⁠.⁠”

“⁠반쯤이면 했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근데 너 옆방에 누구 있냐⁠? 아까 문 두드리는 소리 났다⁠.⁠”

솔래가 대답하기 전에 문이 다시 두드려졌다⁠. 솔래가 휴대전화를 든 채 문을 열자 무건이 냉동 망고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아이스팩을 갈아 끼웠다고 했다⁠. 화면 속에서 세 사람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그 손이다⁠!⁠」「⁠손이다 손⁠!⁠」「⁠망고 손⁠!⁠」

무건은 상자를 든 채 화면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엄마가 무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총각⁠, 손이 많이 상했네⁠. 우리 딸이 부려 먹었지⁠?⁠”

“⁠제가 자원했습니다⁠.⁠”

“⁠말도 곱게 하네⁠. 영숙아⁠, 냉동 그거 저 총각이 싼 거래⁠.⁠”

영숙 이모가 다시 울었다⁠. 솔래는 통화를 끊고 문을 닫으려다⁠, 무건이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서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셔츠 등판이 땀에 젖어 있었다⁠. 아이스팩을 사러 시내 끝까지 걸어갔다 온 등이었다⁠.

*

밤 아홉 시⁠, 브리즈번 강가의 산책길은 사람이 많았다⁠. 강 건너 고층 건물들이 물 위에 불빛을 길게 늘어뜨렸다⁠. 솔래와 무건은 한 걸음 거리를 두고 걸었다⁠. 주홍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 건조기 세 번째 거 완성 레 할머니가 이름 붙임 ‘⁠주홍이⁠’ 기계 이름이 저랑 같아서 헷갈림⁠」 솔래는 화면을 무건에게 보여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팀장 자리 주겠다고 했죠⁠?⁠”

“⁠들었어요⁠?⁠”

“⁠입 모양으로요⁠. 케언스에서 배웠습니다⁠.⁠”

솔래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거두었다⁠.

“⁠심사요⁠. 1월 15일이래요⁠.⁠”

“⁠압니다⁠.⁠”

“⁠만약에요⁠.⁠” 솔래는 걸음을 멈추고 난간을 잡았다⁠. 강물에서 진흙 냄새가 올라왔다⁠. “⁠만약에 흙에서 뭐가 나오면요⁠?⁠”

무건은 솔래를 보았다⁠. 솔래는 강을 보았다⁠. 무건이 무언가 물으려고 입을 열었을 때 솔래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무건은 묻지 않고 따라 걸었다⁠. 솔래가 빨리 걸으면 무건도 빨리 걸었고⁠, 솔래가 멈추면 무건도 한 걸음 뒤에서 멈췄다⁠. 한 걸음은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강 건너 불빛이 두 사람 사이의 물 위에서 흔들렸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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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채온2026.11.01· 9화

    「거절하면 버터가 먹어요」 쪽지 진짜 귀여워요. 버터가 개 이름이죠?

    • 연채온작가2026.11.01

      네, 농장의 늙은 개예요. 비행기 표도 먹을 기세라 솔래가 결국 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