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526자)
절반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2월 24일 아침 여섯 시, 무건의 여행 가방이 숙소 현관 계단 위에 놓여 있었다. 무건이 싼 것이 아니었다. 아치가 2층 끝방에 올라가 옷장을 비우고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셔츠 네 벌과 바지 두 벌과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무건이 잠옷 바람으로 계단을 내려왔을 때 아치는 가방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피커들은 아침 먹던 식빵을 손에 든 채 창문에 붙었다.
“영감님.”
“비누 짐이다. 들고 가라.”
무건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맨 위에 밀짚모자가 얹혀 있었다. 창고 못에서 얻어 쓴 모자였다.
“이 모자는 영감님 겁니다.”
“그건 가져가라. 내 집에 네 냄새 밴 건 하나도 두기 싫다.”
“영감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무건은 맨발로 계단 끝에 멈췄다. “제가 수확은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피커로요. 시급 받는 일꾼으로요.”
아치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마당 끝까지 갔다.
“네 할아비 회사가 내 땅 사러 왔는데, 너는 내 땅에서 시급을 받겠다고? 내 나무에 손대지 마라. 그 손으로 내 아버지 나무를 만지면 나무가 아프다.”
무건은 더 묻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모자를 쓰고, 맨발로 마당을 걸어가 신발을 신었다. 농장 길을 내려가는 무건의 뒤를 버터가 따라갔다. 아치가 휘파람을 불었다. 버터는 돌아보았다가 다시 무건을 따라갔다. 아치가 한 번 더 휘파람을 불었다. 버터는 무건이 농장 문을 나설 때까지 따라갔다가, 문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무건이 큰길 모퉁이를 돌자 그제야 버터는 돌아왔다.
“배신자.”
아치는 버터에게 그렇게 말하고, 버터의 머리를 오래 쓰다듬었다.
*
주홍은 계단 중간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세 번째 묶는 끈이었다. 솔래가 계단을 내려오다 멈추자 주홍은 끈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라이브 날 밤부터요.”
“이 주 동안 나랑 망고 썰면서, 건조기 만들면서, 다 알고 있었네요.”
“네.”
솔래는 계단 난간을 쥐었다. 도티의 부엌을 엿들을 때 쥐었던, 페인트 벗겨진 난간이었다.
“왜요?”
“누나는 모르잖아요.” 주홍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다. 대신 빨라졌다. “우리 부모님 치킨집 작년에 문 닫았어요. 가게 보증금 빼서 빚 갚고, 아빠는 지금 대리운전 해요. 저 서류 떨어질 때마다 아빠가 대리 한 건 더 뛰어요. 저 여기 와서 번 돈 다 집에 보내요. 개미 먹는 거 웃기려고 먹는 거 아니에요.”
솔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주홍은 일어나서 계단 두 칸 위에 있는 솔래와 눈높이를 맞췄다.
“누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옳은 말 하고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요. 저는 옳은 말 하고 그만둘 회사도 없어요. 처음으로 붙었어요. 운해요. 우리 아빠가 운해 라면 먹으면서 대리 기다려요.”
“그래서 무건 씨 입을 막아 줬어요?”
“네. 근데 저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 했어요.” 주홍은 말을 뱉고 나서 스스로 놀란 얼굴을 했다. “안 했다고요. 그냥 그렇다고요.”
솔래는 주홍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 끝에서 돌아보았을 때 주홍은 다시 계단에 앉아 운동화 끈을 풀고 있었다. 네 번째로 묶으려고.
*
크리스마스 한낮, 마리바의 기온은 37도였다. 도티는 해마다 하던 대로 피커들에게 점심을 차렸다. 마당의 큰 나무 그늘에 탁자를 붙이고, 차가운 새우와 구운 햄과 망고 샐러드를 올렸다. 디저트는 머랭 위에 생크림과 망고를 얹은 파블로바라는 호주 케이크였다. 대만 커플이 종이 왕관을 나눠 주었고, 프랑스 청년은 산타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캐럴을 불렀다. 아치는 왕관을 거절하다가 도티가 씌워 주자 가만히 있었다.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아무도 비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솔래의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렸다. 한국은 크리스마스 오전이었다. 처음에는 사진 요청인 줄 알았다. 「솔래1 크리스마스 모자 씌워 주세요」 같은. 그다음부터는 달랐다.
「운해에서 나무 분양 시작했던데 같은 거예요?」「운해 거는 한 그루 9만 9천 원이던데요」「반값이면 환불 되나요?」
솔래는 주홍이 보낸 기사 주소를 열었다. 「운해식품, 열대과일 ‘한 그루 망고’ 출시… 해외 직영 농장 나무 분양」 사진 속 나무는 줄이 반듯했고 잎이 지나치게 짙었다. 비료를 넉넉히 먹은 초록이었다. 광고 문구도 있었다. 「호주 고원의 햇살 냄새를 당신의 식탁에」 솔래는 화면을 내리다가 손을 멈췄다. 수확 첫날 채광필이 한 말이었다. 냄새는 광고에 넣으면 돼요.
오후 세 시까지 환불 요청이 여든일곱 건 들어왔다. 솔래는 하나도 미루지 않고 다 돌려주었다. 엄마의 메시지는 저녁에 왔다.
「딸 운해 반값이라고 영숙이가 그쪽으로 간다길래 엄마가 말렸다 영숙이 나무는 솔래 친구 나무라고 너 솔래 친구 아니냐 했더니 영숙이가 울었다 영숙이 거 냉동 그대로 해라」
솔래는 파블로바 접시를 앞에 놓고 웃다가 울었다. 아치가 왕관을 쓴 채 솔래 앞으로 냅킨을 밀었다.
*
마을 모텔 7호실은 에어컨이 덜컹거렸다. 무건은 침대 대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에 망고 상자가 세 개 쌓여 있었다. 아침마다 모텔 문 앞에 상자가 하나씩 놓였다. 보낸 사람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상자에서 꿀 냄새가 짙게 났다. 레 할머니네 망고였다. 상자 안에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썰어서 회관으로 가져와. 공짜로 재워 줄 데는 없지만 공짜로 시킬 일은 많아.」 무건은 칼과 도마를 모텔 주인에게 빌렸다.
망고를 썰다가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울 번호였다. 무건은 칼을 내려놓고 손을 바지에 닦은 뒤 받았다.
“망고 냄새 아직 나냐?”
할아버지 배석곤 회장의 목소리였다. 여든하나라고는 믿기지 않게 짧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납니다.”
“채 팀장이 그러더라. 네가 계획을 고친다고. 남의 집 영감한테 쫓겨났다고.”
“네.”
“잘했다.” 무건은 숨을 멈췄다. 회장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쫓겨나 본 놈이 장사를 한다. 나도 청량리에서 리어카 끌다가 세 번 쫓겨났다. 그런데 무건아, 쫓겨나고 나서 무슨 계산을 하느냐가 장사다. 고친 계산 들고 와라. 숫자로 나를 이기면 들어 준다.”
전화가 끊겼다. 무건은 칼을 다시 들었다. 망고 씨에 붙은 살을 발라 입에 넣었다. 레 할머니 말대로 씨 옆이 제일 달았다. 무건은 노트북을 열고, 서울의 원가 담당 동기에게 메일을 썼다. 「열대과일 사업부 작년 실제 원가 자료 부탁합니다. 회장님 보고용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반만 사실이었다.
*
12월 27일 저녁, 무건이 농장 문 앞에 와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무건은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마을 모텔에 묵는다고 했다. 손에는 노트북과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버터가 먼저 알아보고 뛰어가 무건의 발치에 앉았다. 솔래는 수확 상자를 내려놓고 문까지 걸어갔다. 둘은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안 들어왔습니다.”
무건은 종이를 내밀었다. 손으로 쓴 숫자가 빼곡했다. 맡겨진 나무, 맡긴 값, 말린 망고와 냉동 망고를 보내는 비용, 환불 여든일곱 건, 이웃 농장 몫. 맨 아래 한 줄에 두 번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펜로즈 농장 나무 구백 그루에서 1월 31일까지 들어올 돈을 다 모아도 빚의 절반입니다. 절반을 조금 못 넘어요. 환불이 더 나오면 더 내려가고요.”
“그걸 알려 주러 왔어요?”
“아니요. 나머지 절반 얘기를 하러 왔습니다.” 무건은 두 번째 종이를 펼쳤다.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적힌 안내문이었다. 「한국 식품 수입 바이어 상담회 — 2028년 1월 4일, 브리즈번 컨벤션 센터」 “한국 유통 회사 바이어들이 호주 농산물을 사러 옵니다. 그중에 아침바구니가 있어요.”
솔래는 안내문을 받지 않았다. 아침바구니는 솔래가 그만둔 회사였다.
“거기 가서 저를 내보낸 사람들한테 망고를 팔라고요?”
“아침바구니가 지금 유기농 공급처를 새로 찾고 있습니다. 가짜 유기농 사건 뒤로 소비자들이 떠났어요. 깨끗한 공급처가 필요합니다. 솔래 씨 말을 안 들은 사람들이, 지금은 솔래 씨 같은 사람을 찾고 있어요.” 무건은 종이를 문기둥에 대고 펼쳐 보였다. “한 철 말린 망고 물량을 미리 사 주면 나머지 절반이 됩니다. 제가 다시 해 봤어요. 열한 번째는 맞았습니다.”
솔래는 무건의 손을 보았다. 종이를 쥔 손가락 마디에 망고 물이 노랗게 배어 있었다. 모텔에서도 무언가를 썰고 있었던 것이다. 솔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왜 도와요? 회사는요? 할아버지는요?”
“회사가 이기는 계산도 해 봤습니다. 서울에서 서른두 장으로 했어요. 그 계산에는 이 동네가 없었습니다.” 무건은 버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여기 와서 다시 해 보니까, 이 동네가 들어가면 회사가 지는 계산이 나와요. 둘 다 맞는 계산입니다. 어느 계산을 고를지는 제가 정해야 하고요.”
“정했어요?”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래는 손을 뻗어 안내문을 받았다. 무건의 손끝과 닿지 않게 종이 귀퉁이만 쥐었다.
“용서한 거 아니에요.”
“압니다.”
“이 종이만 받은 거예요.”
“네.”
솔래가 돌아서 걸어갔다. 버터는 따라가지 않고 무건의 발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솔래가 휘파람을 불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솔래는 아치가 왜 버터를 배신자라고 불렀는지 알았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주홍은 마을 끝 주유소의 간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채광필이 앉았다. 채광필 앞에는 커피가, 주홍 앞에는 채광필이 사 준 고기 파이가 놓여 있었다. 주홍은 파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입사 서류입니다. 사인만 하시면 1월 2일부터 출근입니다.”
채광필이 봉투에서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근로 계약서였다. 다른 한 장은 짧은 영어 문서였다. 맨 위에 진술서라고 적혀 있었다. 주홍은 천천히 읽었다. 「나는 2027년 12월 초, 펜로즈 농장 주인 아치 펜로즈가 12번 줄에 요소 비료를 뿌리는 것을 보았다.」
주홍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이거 본 적 없는데요.”
“본 걸 쓰시라는 게 아닙니다.” 채광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1월에 인증 기관 심사가 있습니다. 12번 줄 흙을 파 보면 요소가 나올 겁니다. 나올 것을 미리 쓰시라는 거죠. 나오면 인증 기관은 누가 뿌렸는지 묻습니다. 그때 이 종이가 대답합니다. 농장 주인이 뿌렸다. 그러면 농장 전체가 유기농 자격을 잃고, 한국 사람 이천 명한테 판 유기농 나무가 다 가짜가 됩니다.”
주홍은 파이에서 올라오는 고기 냄새를 맡았다. 속이 불편해졌다.
“흙에서 요소가 왜 나와요? 트럭은 돌아갔잖아요.”
“트럭이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채광필은 웃지 않았다. “주홍 씨, 정규직은 서류 한 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주홍 씨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1월 2일입니다.”
채광필은 볼펜을 계약서 위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주홍은 혼자 남았다. 볼펜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진술서를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주유소 형광등 밑으로 날벌레가 모여들었다. 주홍은 휴대전화를 꺼내 아빠에게 메시지를 썼다. 「아빠 나 붙었어」 보내지 않고 지웠다. 다시 썼다. 「아빠 오늘 대리 몇 건 했어?」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세 건 너는 망고 많이 땄냐」
주홍은 답장하지 않고 고기 파이를 반으로 갈랐다. 김이 올라왔다. 반쪽을 오래 들고 있다가, 먹지 않고 접시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