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15자)

폭풍 경보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10일 아침 일곱 시⁠, 피커들의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울었다⁠. 기상청 경보였다⁠. 「⁠열대 저기압 사이클론 경보 — 내일 밤 케언스 북쪽 해안 상륙 예상⁠, 내륙 고원에 강한 바람과 폭우⁠」 사이클론은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대 폭풍이었다⁠. 두 해 전 펜로즈 농장의 나무 삼백 그루를 꺾은 것도 사이클론이었다⁠. 솔래는 화면을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치는 아침 식탁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남은 걸 다 딴다⁠. 내일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망고는 아직 이번 철의 삼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익은 망고는 땅에 떨어져 터지고⁠, 덜 익은 망고는 가지째 꺾여 나갔다⁠. 떨어진 망고는 상품이 아니었다⁠. 솔래는 맡은 사람들의 나무 이름을 떠올렸다⁠. 순자네 망고⁠, 퇴사 기념수⁠, 할렐루야⁠. 이름이 붙은 나무들에 달린 망고가 내일 밤이면 땅에 있을 것이었다⁠.

“⁠사람이 모자라요⁠. 피커 여덟에 할아버지랑 사모님이면 열이에요⁠. 나무가 구백 그루예요⁠.⁠”

“⁠레네 사람들이 온다⁠. 회관 부엌 사람들도 온다고 했다⁠.⁠”

“⁠그래도 모자라요⁠.⁠”

아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래는 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무건 씨도 불러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도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치가 처음으로 솔래를 똑바로 보았다⁠.

“⁠비누를⁠?⁠”

“⁠비누 손이 지금은 비누 손이 아니에요⁠. 회관 부엌에서 매일 망고를 썰었어요⁠. 사다리도 탈 줄 알아요⁠. 하루에 사백 개 따요⁠. 할아버지보다 많이 따요⁠.⁠”

“⁠내 나무에 손대지 말라고 했다⁠.⁠”

“⁠나무에 손대는 게 아니라 망고를 구하는 거예요⁠. 내일 밤이면 다 땅에 떨어져요⁠. 그 사람 할아버지 회사가 바라는 게 그거예요⁠.⁠”

아치는 오래 앉아 있었다⁠. 버터가 식탁 밑에서 아치의 무릎에 턱을 올렸다⁠. 아치는 버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만이다⁠. 내일 해 지면 다시 문밖이다⁠.⁠”

*

무건은 이십 분 만에 왔다⁠. 모텔에서 뛰어왔는지 숨이 차 있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소매를 손목까지 내려 고무줄로 묶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아치는 무건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사다리 하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무건은 사다리를 메고 4번 줄로 갔다⁠.

한낮의 농장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레 할머니가 손자 셋을 데려왔고⁠, 회관 부엌의 여자들이 바구니를 들고 왔다⁠. 마고는 포장 창고의 선별대를 두 줄로 늘렸다⁠. 대만 커플은 사다리 하나를 둘이서 오르내렸고⁠, 프랑스 청년은 따면서 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망고 잎이 뒤집히며 은빛 뒷면을 보였다⁠.

해 질 무렵⁠, 큰길 건너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운해 작업복을 입은 개빈이었다⁠. 개빈은 펜로즈 농장 문 앞에서 오래 멈춰 있다가⁠, 레 할머니가 손짓하자 들어와 사다리 하나를 들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솔래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운해 농장 일이 끝나고 온 것이었다⁠. 개빈은 레 할머니네 손자들 옆에서 말없이 땄다⁠. 솔래는 개빈이 꼭지를 꺾을 때마다 망고를 코에 대는 것을 보았다⁠. 운해 농장에서는 하지 않는 버릇일 것이었다⁠.

“⁠왜 왔어요⁠?⁠”

솔래가 묻자 개빈은 사다리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떨어진 망고 냄새가 싫어서⁠. 우리 아버지 농장에서 두 해 전에 맡았어⁠. 나무 밑에 망고가 썩는 냄새⁠. 그 냄새 맡고 나서 팔기로 했어⁠.⁠”

개빈은 더 말하지 않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솔래도 더 묻지 않았다⁠. 개빈의 사다리 밑에 놓인 바구니에는 운해 로고가 찍혀 있었고⁠, 바구니 안에는 펜로즈 농장 망고가 쌓여 갔다⁠. 바구니가 차면 개빈은 아무 말 없이 펜로즈 농장 수확 보조차로 날랐다⁠.

4번 줄에서는 아치가 무건의 사다리 밑을 지나다가 멈췄다⁠. 무건의 바구니가 벌써 세 번째로 차 있었다⁠. 아치는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꼭지를 하나하나 보았다⁠. 진이 한 방울도 껍질에 묻지 않았다⁠.

“⁠비누⁠, 네 할아비가 리어카 끌었다고⁠?⁠”

“⁠네⁠. 청과시장에서요⁠.⁠”

“⁠그럼 망고 따는 손은 네 할아비 손이구나⁠. 네 손은 아니고⁠.⁠”

“⁠아직은요⁠.⁠”

아치는 콧방귀를 뀌고 걸어갔다⁠. 세 걸음쯤 가다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사다리 다리 하나가 흙에 덜 박혔다⁠. 고쳐 놔라⁠. 비 오면 넘어간다⁠.⁠”

무건이 내려다보니 사다리 왼쪽 다리가 젖은 흙에서 들떠 있었다⁠. 무건은 사다리를 고쳐 박았다⁠.

해가 지자 트랙터와 짐차의 전조등을 줄마다 켰다⁠. 피커들은 이마에 손전등을 달았다⁠. 주홍의 손전등에는 날벌레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주홍은 입을 다물고 땄다⁠. 입을 벌리면 벌레가 들어왔다⁠. 레 할머니가 주홍을 보고 웃었다⁠.

“⁠너는 개미에 이어 날벌레까지 먹는구나⁠.⁠”

“⁠이건 의도하지 않은 단백질이에요⁠, 할머니⁠.⁠”

밤 열 시⁠, 첫 빗방울이 떨어졌다⁠. 굵고 뜨거웠다⁠. 한낮 내내 달궈진 흙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자 땅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마른 흙과 풀과 망고 진이 한꺼번에 젖는 냄새였다⁠. 솔래는 사다리 위에서 젖은 흙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옆 사다리에 무건이 올라와 있었다⁠. 무건은 따는 속도가 빨랐다⁠. 꼭지를 거꾸로 꺾고⁠, 진이 떨어지기 전에 망고를 뒤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손등에 덴 자국이 몇 개 더 있었다⁠.

“⁠솔래 씨⁠, 이거요⁠.⁠”

무건이 망고 하나를 건넸다⁠. 솔래의 바구니가 무건의 사다리에 더 가까웠다⁠. 솔래가 받으려고 손을 뻗었고⁠, 무건의 장갑 낀 손과 솔래의 맨손이 망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았다⁠. 비가 두 손 위로 떨어졌다⁠. 솔래는 망고를 받아 꼭지 냄새를 맡았다⁠. 딱 오늘 딸 망고였다⁠.

“⁠고마워요⁠.⁠”

무건은 대답하지 않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무건의 귀가 다시 빨개져 있었다⁠.

*

자정⁠, 포장 창고는 빗소리로 가득했다⁠.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사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주홍은 선별대 끝에서 상자를 접다가⁠, 창고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채광필이었다⁠. 우비를 입고 있었다⁠. 운해가 사들인 개빈네 농장도 오늘 밤 망고를 따는 중이었고⁠, 채광필은 길 건너를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주홍은 접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주유소에서 받은 봉투였다⁠.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근로 계약서와 진술서⁠. 둘 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팀장님⁠.⁠”

채광필이 주홍을 보았다⁠. 빗물이 우비 끝에서 떨어졌다⁠.

“⁠사인하셨습니까⁠? 1월 2일이 지났는데요⁠.⁠”

“⁠안 했어요⁠. 돌려드리려고요⁠.⁠”

주홍은 봉투를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채광필의 손을 향해 내밀었으니 주머니 입구를 놓칠 일도 없었다⁠. 채광필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주홍 씨⁠, 아버님 대리운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주홍의 손이 멈췄다⁠.

“⁠그건 어떻게 아세요⁠?⁠”

“⁠회사가 사람을 쓸 때는 다 압니다⁠. 정규직이면 아버님이 대리 안 하셔도 됩니다⁠. 이 종이 한 장이면요⁠.⁠”

빗소리가 더 커졌다⁠. 주홍은 봉투를 선별대 위에 내려놓았다⁠. 망고들 사이에 봉투가 놓였다⁠. 주홍은 입을 열었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번에는 웃음을 삼켰다⁠.

“⁠팀장님⁠, 우리 아빠 운해 라면 좋아해요⁠. 대리 기다리면서 컵라면 먹어요⁠. 운해 거요⁠.⁠” 주홍은 숨을 들이마셨다⁠. “⁠근데 우리 아빠가 컵라면 먹으면서⁠, 아들이 남의 집 영감님 화학 비료 뿌렸다고 거짓말해서 들어간 회사 라면 먹는 거⁠, 저는 싫어요⁠. 내일부터 아빠한테 라면 바꾸라고 할 거예요⁠. 비싼 걸로요⁠. 제가 사 드릴 거예요⁠.⁠”

“⁠무슨 돈으로요⁠?⁠”

“⁠망고 따서요⁠.⁠”

채광필은 한참 주홍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선별대 위의 봉투를 집어 우비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깝네요⁠. 주홍 씨 같은 사람이 회사에 필요한데⁠.⁠”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인하는 사람이 필요하신 거잖아요⁠.⁠”

채광필은 대답하지 않고 창고를 나갔다⁠. 빗속으로 흰 사륜구동차의 불빛이 멀어졌다⁠. 주홍은 선별대를 붙잡고 서 있다가⁠, 다리가 풀려 상자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마고가 지나가며 주홍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 주었다⁠.

*

새벽 네 시⁠, 7번 줄의 망고는 거의 다 땄다⁠. 남은 것은 가장 높은 가지 끝의 몇 개뿐이었다⁠. 비는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되풀이했다⁠. 아치는 첫 나무⁠, 순자네 망고 아래에서 전지가위로 꺾인 잔가지를 잘라 내고 있었다⁠. 솔래가 사다리를 내려와 아치 옆으로 갔다⁠. 젖은 땀수건이 목에 무겁게 감겨 있었다⁠.

“⁠할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치는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트럭 오던 날이요⁠. 12번 줄 끝 세 그루 밑에서 냄새를 맡았어요⁠. 요소 비료 냄새요⁠. 트럭이 오기 전에 누가 반대편 길로 들어와서 뿌리고 간 거예요⁠.⁠”

가위질이 멈췄다⁠.

“⁠그날 바로 말씀드렸어야 했어요⁠. 근데 말하면 인증 기관에 알려야 하고⁠, 알리면 농장 전체를 다시 볼 거고⁠, 그동안 유기농이라는 말을 못 쓰잖아요⁠. 나무 맡기가 막 시작됐을 때였어요⁠. 그래서 낙엽으로 덮었어요⁠.⁠”

아치가 몸을 돌렸다⁠. 손전등 불빛이 아치의 얼굴 아래에서 올라왔다⁠. 솔래는 아치가 화를 내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호스를 들 때의 얼굴과는 달랐다⁠.

“⁠한 달이냐⁠?⁠”

“⁠네⁠.⁠”

“⁠한 달 동안 너는 한국 사람 이천 명한테 내 땅을 유기농이라고 팔았냐⁠? 알면서⁠?⁠”

“⁠나머지 아홉 줄은 진짜 유기농이에요⁠. 12번 줄은 맡기에 안 넣었어요⁠.⁠”

“⁠흙은 줄을 안 가린다⁠. 비 오면 흐른다⁠. 네가 처음에 그 회사 놈한테 한 말이다⁠.⁠” 아치는 전지가위를 바닥에 던졌다⁠. 젖은 흙에 가위가 박혔다⁠. “⁠네가 숨긴 건 냄새가 아니다⁠. 나다⁠. 내 땅에 뭐가 묻었는지 땅 주인한테 숨긴 거다⁠. 도티가 서명 숨긴 거랑 뭐가 다르냐⁠?⁠”

솔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르지 않았다⁠. 빗방울이 나뭇잎에서 모여 둘 사이로 떨어졌다⁠.

줄 입구에서 손전등 하나가 뛰어왔다⁠. 주홍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였다⁠.

“⁠영감님⁠! 누나⁠!⁠” 주홍은 숨을 몰아쉬며 둘 앞에 멈췄다⁠. “⁠채 팀장이 저한테 진술서를 줬어요⁠. 영감님이 12번 줄에 요소 비료 뿌리는 걸 봤다고 쓰라고요⁠. 심사 때 흙에서 나올 거라고⁠, 나오면 그 종이로 영감님이 뿌린 걸로 하겠다고요⁠. 저 사인 안 했어요⁠. 방금 돌려줬어요⁠.⁠”

아치는 주홍을 보고⁠, 솔래를 보았다⁠.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바닥에 박힌 가위를 뽑아 들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뿌리고⁠, 내가 뿌린 걸로 하려고 했다⁠?⁠”

“⁠네⁠.⁠”

“⁠증거는⁠?⁠”

주홍도 솔래도 대답하지 못했다⁠. 솔래가 맡은 냄새는 증거가 아니었다⁠. 낙엽으로 덮은 흙은 이미 한 달 동안 비를 맞았다⁠.

솔래의 휴대전화가 울었다⁠. 주홍의 것도⁠, 아치의 셔츠 주머니에 든 것도 울었다⁠. 기상청이었다⁠. 「⁠경로 변경 — 사이클론이 남서로 방향을 틀어 오늘 오후 마리바 고원에 직접 영향⁠, 즉시 대피 준비⁠」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7번 줄 끝 어딘가에서 나무 꺾이는 소리가 났다⁠.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아치가 고개를 들었다⁠. 솔래도 들었다⁠. 소리는 7번 줄 끝⁠, 할렐루야 나무가 있는 자리에서 났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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