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67자)

마지막 장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2월 23일 오후⁠, 무건은 2층 끝방 책상 앞에 앉아 계획서 이십삼 쪽을 열어 놓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매미가 울었다⁠. 서른두 장짜리 문서의 맨 뒤에 무건은 지난 사흘 동안 새 장을 하나 붙였다⁠. 제목은 「⁠다른 길 — 계약 재배⁠」였다⁠. 농장을 사는 대신 마리바의 작은 유기농 농장들과 여러 해짜리 구매 계약을 맺는 방안이었다⁠. 표가 아직 비어 있었다⁠. 수확량은 솔래가 매일 저녁 적어 두는 숫자를 빌려 왔지만⁠, 운해가 내야 할 가격을 적으려면 서울의 원가 자료가 필요했다⁠. 무건은 커서를 깜박이게 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본부장님⁠, 오늘 설명회 연단에 같이 서 주십시오⁠. 회장님 지시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계획을 쓴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신뢰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무건은 답장을 썼다⁠. 「⁠못 갑니다⁠. 계획을 고치는 중입니다⁠.⁠」

답은 바로 왔다⁠. 「⁠그럼 제가 혼자 하겠습니다⁠. 계획서는 고치시기 전 판으로 하겠습니다⁠.⁠」

무건은 노트북을 덮었다⁠. 덮고 나서 다시 열었다⁠. 새로 붙인 장을 지우지 않고 저장 단추를 눌렀다⁠.

*

저녁 여섯 시 반⁠, 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연기가 올랐다⁠. 기다란 철판 위에서 소시지 수십 개가 굴러다녔고⁠, 양파 볶는 냄새가 큰길까지 흘러갔다⁠. 철판 앞에서 집게를 쥔 사람은 개빈이었다⁠. 운해의 붉은 구름 무늬가 박힌 앞치마를 둘렀다⁠. 식빵 한 장에 소시지 하나⁠, 양파 한 줌⁠, 토마토소스 한 줄⁠.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렸다⁠. 솔래가 이 주 동안 회관 부엌에서 본 얼굴들이 거의 다 있었다⁠.

주홍은 소시지를 세 개째 먹고 있었다⁠.

“⁠주홍 씨⁠, 그거 운해 소시지예요⁠.⁠”

“⁠소시지는 죄가 없어요⁠. 그리고 한 개에 삼 달러짜리를 세 개 먹었으니까⁠, 저는 운해한테서 구 달러를 받아 낸 거예요⁠.⁠” 주홍은 네 번째 소시지를 집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아니⁠, 받아 낸 건 아니고요⁠.⁠”

주홍은 손을 거두고 솔래를 보지 않은 채 휴지로 입을 닦았다⁠. 솔래는 주홍이 소시지를 남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공짜 앞에서 손을 멈추는 주홍은⁠, 솔래가 아는 주홍이 아니었다⁠. 솔래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가 회관 안에서 마이크 시험하는 소리가 나서 입을 다물었다⁠.

회관 문 앞으로 아치와 도티가 함께 걸어왔다⁠. 크리스마스 셔츠를 입은 아치는 버터를 데리고 왔고⁠, 도티는 아치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트럭이 왔던 새벽 이후 두 사람이 나란히 마을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레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고⁠, 도티가 마주 흔들었다⁠. 아치는 철판 앞의 개빈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개빈이 내민 소시지를 받지 않고 지나갔다⁠. 버터는 받았다⁠.

*

회관 안은 사람으로 꽉 찼다⁠. 무대 위에 하얀 화면이 내려와 있었고⁠, 채광필이 마이크를 들고 화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영어는 매끄러웠다⁠. 화면에 마리바의 지도가 떴고⁠, 작은 농장들이 붉은 점으로 찍혀 있었다⁠. 점이 열여섯 개였다⁠. 레 할머니네도⁠, 펜로즈 농장도⁠, 지난주 회관 부엌에 왔던 다섯 농장도 다 점이었다⁠.

“⁠운해식품은 이 농장들을 시세보다 이 할을 더 얹어 사겠습니다⁠. 팔고 싶은 분만 파시면 됩니다⁠. 판 분들께는 관리인 자리를 드립니다⁠. 개빈 씨처럼요⁠. 빚은 사라지고⁠, 월급은 생기고⁠, 땅에서 떠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관 안이 웅성거렸다⁠. 앞줄의 한 노인이 옆 사람에게 이 할이면 얼마냐고 물었다⁠. 솔래의 귀에도 들렸다⁠. 노인의 옆자리에서 레 할머니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 할 얹어 줘도 내 무릎은 안 바뀌어⁠. 관리인 하면 아침마다 운해 사람한테 무릎 아프다고 보고해야 돼⁠.⁠”

몇 사람이 웃었다⁠. 웃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뒷줄의 젊은 부부는 휴대전화 계산기를 두드렸고⁠, 창가의 노인은 채광필이 나눠 준 안내문을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솔래는 접히는 종이 소리를 들었다⁠. 개빈네 농장에서 났던 종이 소리와 같은 소리일 것이었다⁠. 채광필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비료를 바꿨을 때 나무 한 그루당 수확량이 두 배로 오르는 그래프였다⁠.

솔래가 손을 들었다⁠. 채광필은 솔래를 보고 웃으며 마이크로 솔래를 가리켰다⁠. 솔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프에 냄새는 없네요⁠.⁠”

몇 사람이 웃었다⁠. 채광필도 웃었다⁠.

“⁠냄새는 그래프에 안 그려집니다⁠.⁠”

“⁠검역 시설은요⁠? 케언스 시설을 석 달 통째로 잡으신 것도 그래프에 없어요⁠. 이 동네 작은 농장들이 생망고를 한국에 못 보내게 막으신 거잖아요⁠. 팔고 싶은 분만 파시라면서⁠, 안 팔 길은 다 막으셨어요⁠.⁠”

회관이 조용해졌다⁠. 레 할머니가 팔짱을 끼었다⁠. 채광필은 화면을 한 번 보고 솔래를 다시 보았다⁠.

“⁠막은 게 아니라 먼저 잡은 겁니다⁠. 장사에서는 같은 말이죠⁠. 솔래 씨는 이 동네 나무 이천 그루를 한국 사람들한테 맡기셨어요⁠. 그것도 먼저 잡은 겁니다⁠. 솔래 씨가 먼저 잡은 것을 저희가 막으면 솔래 씨는 화가 나시겠죠⁠. 저희가 먼저 잡은 것을 솔래 씨가 막으면 저희도 화가 납니다⁠.⁠” 채광필은 마이크를 다른 손으로 옮겼다⁠. “⁠다만 저희는 솔래 씨와 달리⁠, 이 계획을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 계획은 저희 회사에서 마리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썼습니다⁠. 지난 삼 주 동안 직접 이 동네에서 망고를 딴 사람입니다⁠.⁠”

채광필이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마지막 장이 떴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두 줄이었다⁠.

「⁠펜로즈 농장 및 마리바 지역 전환 계획⁠」 「⁠작성 — 운해식품 전략기획실 배무건⁠」

“⁠본부장님⁠, 올라오시죠⁠.⁠”

회관 안의 얼굴들이 하나씩 뒤를 돌아보았다⁠. 맨 뒷줄 벽 옆에 무건이 서 있었다⁠. 밀짚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솔래는 무건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화면의 이름을 보고⁠, 이름을 다시 읽고⁠, 세 번째 읽을 때 회관 바닥이 발밑에서 기울었다⁠.

무건이 통로를 걸어 무대 앞까지 왔다⁠. 무대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채광필이 내미는 마이크도 받지 않았다⁠. 무건은 무대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다시 채광필을 올려다보았다⁠.

“⁠팀장님⁠, 고치기 전 판이네요⁠.⁠”

“⁠고치신 판은 회장님 결재가 안 났습니다⁠.⁠”

“⁠제가 썼습니다⁠.⁠” 무건은 마이크 없이 말했다⁠. 목소리가 회관 뒤까지 닿았다⁠. “⁠이 계획서⁠, 제가 썼습니다⁠. 검역 시설을 잡자는 것도 제가 썼습니다⁠. 이십삼 쪽에 있습니다⁠.⁠”

회관 안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의자 끄는 소리⁠, 혀 차는 소리⁠, 누군가 욕하는 소리⁠. 채광필은 무대 위에서 소란을 다 듣고 나서 마이크를 다시 입에 댔다⁠.

“⁠하나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희와 함께 일할 분이 또 계십니다⁠. 펜로즈 농장에 계신 편주홍 씨가 1월부터 운해 호주 법인 해외조달팀 정규직으로 입사하십니다⁠. 본부장님 추천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주홍 씨⁠.⁠”

회관 뒤편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홍의 손에 들려 있던 소시지 빵이었다⁠. 솔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주홍이 바닥의 소시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홍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버터가 다가가 소시지를 물고 갔다⁠.

아치가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버터를 불러 문으로 걸어 나갔다⁠. 도티는 남편을 따라 일어서다가 통로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건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비누⁠.⁠”

도티는 한마디만 남기고 남편을 따라 나갔다⁠.

*

회관 주차장에서 아치는 짐차 문을 열어 놓고 버터를 태우고 있었다⁠. 솔래가 다가가자 아치는 문을 붙잡은 채 솔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알았냐⁠?⁠”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칠십삼 년을 살아도 비누 냄새를 못 가렸어⁠.⁠” 아치는 버터의 엉덩이를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았다⁠. “⁠내일 아침에 비누 짐 싸라고 해라⁠. 내 집에서 재울 수 없다⁠.⁠”

“⁠할아버지⁠.⁠”

“⁠네가 내 편 들어 준 거 안다⁠. 이번엔 내 편 들지 마라⁠. 아무 편도 들지 마라⁠.⁠”

도티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도티는 창문을 내리고 솔래에게 손짓을 했다⁠. 솔래가 다가가자 도티는 낮게 말했다⁠.

“⁠나도 몰래 서명했어요⁠. 그 사람도 몰래 썼고요⁠. 몰래 한 사람끼리는 미워하기가 어렵네요⁠.⁠”

짐차가 떠났다⁠. 붉은 미등이 큰길 끝에서 꺾였다⁠. 솔래는 주차장에 혼자 남아 회관을 돌아보았다⁠. 창으로 개빈이 철판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주홍은 보이지 않았다⁠.

*

밤 열 시⁠, 7번 줄에는 불이 없었다⁠. 솔래는 첫 나무⁠, 순자네 망고 아래에 앉아 있었다⁠. 반딧불이 몇 마리가 잎 사이를 날았다⁠. 낮의 열기가 땅에서 올라왔고⁠, 나무껍질에서 송진 냄새가 났다⁠. 발소리가 났다⁠. 솔래는 누구인지 알았다⁠. 냄새로 알았다⁠. 망고 진과 비누와 소시지 연기⁠.

무건이 줄 입구에 멈췄다⁠.

“⁠들어가도 됩니까⁠?⁠”

“⁠여기서 말해요⁠.⁠”

무건은 들어오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첫 나무는 순자네 망고⁠, 두 번째는 솔래1⁠, 세 번째는 퇴사 기념수였다⁠. 나무마다 가지에 코팅한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아치가 돋보기를 쓰고 하나하나 읽고 허락한 이름들이었다⁠. 솔래는 이름표들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무엇부터 물을지 골랐다⁠.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럭⁠, 무건 씨가 돌려보냈죠⁠?⁠”

“⁠네⁠.⁠”

“⁠왜요⁠?⁠”

“⁠인증이 날아가면 인수하고 나서 유기농으로 팔 물량도 날아갑니다⁠. 계획서 수익의 절반입니다⁠.⁠”

“⁠그것도 계산이었네요⁠.⁠”

“⁠반은요⁠.⁠”

“⁠나머지 반은요⁠?⁠”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딧불이 하나가 무건의 밀짚모자 챙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케언스에서도 알았어요⁠? 제가 채 팀장한테 세 배 준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무건 씨 문장을 읊고 있었던 거⁠?⁠”

“⁠알았습니다⁠.⁠”

“⁠영상 찍어 준 거⁠, 값 계산해 준 거⁠, 망고 썬 거⁠, 다 알면서 한 거예요⁠?⁠”

“⁠네⁠.⁠”

“⁠주홍 씨는요⁠? 주홍 씨 입 막은 것도요⁠?⁠”

“⁠제가 했습니다⁠. 2월까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자리를 걸고요⁠.⁠”

솔래는 일어났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지 않았다⁠. 무건과 솔래 사이의 나무 세 그루가 한꺼번에 바람에 흔들렸다⁠.

“⁠한 번은 아니라고 해요⁠. 하나라도요⁠.⁠”

무건은 솔래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 나서 셔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쪼그라든 망고 한 알이었다⁠. 껍질이 갈색으로 말라 주름이 졌고⁠, 꼭지만 처음 모양 그대로였다⁠. 수확 첫날 해 질 무렵⁠, 솔래가 꼭지를 맡아 보라며 내밀었던 망고였다⁠. 무건은 셔츠를 갈아입을 때마다 망고를 새 셔츠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다 맞아요⁠.⁠” 무건은 쪼그라든 망고를 손바닥에 올려 솔래 쪽으로 내밀었다⁠. “⁠계산도 맞고요⁠. 나무 맡기로는 1월 31일까지 빚을 다 못 갚아요⁠. 제가 매일 솔래 씨 숫자로 다시 해 봤습니다⁠. 열 번 했는데 열 번 다 모자랐어요⁠.⁠”

솔래는 망고를 받지 않았다⁠.

“⁠제 나무에서 나가요⁠.⁠”

무건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솔래가 다시 말하지 않자 무건은 망고를 첫 나무의 가장 낮은 가지⁠, 두 갈래로 갈라진 틈에 끼워 놓았다⁠. 그리고 줄 입구에서 뒷걸음으로 두 걸음 물러난 뒤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솔래는 가지 틈의 망고를 보았다⁠. 손을 뻗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마른 망고가 가지 사이에서 조금 흔들렸다⁠. 꼭지에서는 아직 냄새가 났다⁠. 아주 희미한⁠, 송진과 꿀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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