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6자)

케언스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2월 15일 아침⁠, 농장의 낡은 짐차는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었다⁠. 무건은 운전석에 앉아 깜빡이를 켜려다가 와이퍼를 켰다⁠. 마른 유리 위로 와이퍼가 끼익끼익 두 번 지나갔다⁠. 조수석의 솔래가 웃음을 터뜨렸고⁠, 뒷자리의 주홍은 웃지 않았다⁠. 주홍은 사흘째 웃지 않았다⁠. 솔래는 그것을 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이랑 반대예요⁠. 깜빡이가 오른쪽이에요⁠.⁠”

“⁠압니다⁠. 손이 아직 모릅니다⁠.⁠”

“⁠손이 모르는 게 많네요⁠, 비누 씨는⁠.⁠”

무건은 와이퍼를 끄고 깜빡이를 찾아 켰다⁠. 짐차는 농장 길을 내려가 큰길에 올랐다⁠. 케언스는 마리바에서 한 시간 거리의 바닷가 도시였다⁠. 고원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열대 숲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졌다⁠. 창을 내리자 젖은 이끼 냄새와 썩은 낙엽 냄새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숲 사이로 가끔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생각보다 초록빛이었다⁠.

솔래의 휴대전화에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구백 그루를 맡은 사람들이 묻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받을 수 있나요⁠?⁠」「⁠생망고는 언제 와요⁠?⁠」「⁠선물하려고 했는데⁠」 솔래가 처음 올린 안내문에는 12월 말부터 생망고를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으로 가는 생망고는 검역 처리를 거쳐야 했고⁠, 마리바 근처에서 한국 기준에 맞춘 열처리 시설은 케언스에 하나뿐이었다⁠. 전화로는 자리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 솔래는 직접 가서 다시 묻기로 했다⁠.

길가 주유소에서 주홍이 처음 입을 열었다⁠.

“⁠기름값 나눠 내요⁠. 한 사람당 이십일 달러 사십 센트요⁠. 왕복이면 사십이 달러 팔십⁠.⁠”

“⁠주홍 씨는 자기가 먹은 고기 파이 값도 나눠 낼 거죠⁠?⁠”

“⁠그건 제 개인 투자예요⁠.⁠”

주홍은 고기 파이를 반으로 갈라 하나를 무건에게 내밀었다가⁠, 무건이 손을 뻗기 전에 도로 거두어 제 입에 넣었다⁠. 무건은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솔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주홍이 다이어트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개를 반쯤 내려온 전망대에서 무건이 차를 세웠다⁠. 주홍은 뒷자리에서 고기 파이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솔래와 무건은 난간까지 걸어갔다⁠. 발밑으로 숲이 끝나고 사탕수수밭이 펼쳐졌고⁠, 밭 끝에 바다가 있었다⁠. 바람에서 소금 냄새가 났다⁠. 고원의 망고 냄새와는 다른⁠, 짜고 비린 냄새였다⁠.

“⁠솔래 씨는 왜 호주에 왔어요⁠? 회사 그만두고 바로요⁠?⁠”

“⁠엄마가 보냈어요⁠.⁠” 솔래는 난간에 팔을 걸쳤다⁠. “⁠그만두고 석 달을 방에서만 있었어요⁠. 엄마가 어느 날 비행기 표를 끊어 왔어요⁠. 너는 냄새 맡는 애니까 냄새 나는 데 가서 맡고 오라고요⁠. 엄마 말은 늘 이상한데 늘 맞아요⁠.⁠”

“⁠어머님이 솔래1⁠, 솔래2⁠, 솔래3 하신 분이죠⁠?⁠”

“⁠네⁠. 지금은 솔래4까지 있어요⁠. 아빠 거래요⁠.⁠”

무건이 웃었다⁠. 바람이 무건의 낡은 밀짚모자 챙을 들어 올렸다⁠.

“⁠무건 씨는요⁠? 손 보면 농사지으러 온 사람은 아닌데⁠.⁠”

무건은 바다 쪽을 오래 보았다⁠.

“⁠할아버지가 보냈습니다⁠. 직접 따 보고 오라고요⁠. 할아버지는 젊어서 과일 장사를 했어요⁠. 손으로 과일을 안 만져 본 사람은 과일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멋진 할아버지네요⁠. 우리 할아버지는 화투만 만졌는데⁠.⁠”

솔래가 웃자 무건도 따라 웃었다⁠. 무건은 웃으면서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 물집이 터져 있었다⁠.

*

검역 시설은 바닷가 산업 단지 끝에 있는 흰 창고였다⁠. 문을 열자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젖은 골판지 냄새⁠, 쇠 냄새⁠, 쪄진 과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열처리 방에서는 과일을 상자째 넣고 뜨거운 김으로 속까지 데웠다⁠. 과일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파리 알을 죽이는 방식이었다⁠. 처리가 끝난 상자들이 냉장 트럭으로 실려 나갔다⁠. 상자마다 같은 로고가 찍혀 있었다⁠. 운해의 붉은 구름 무늬였다⁠. 솔래는 지나가는 상자 하나에 코를 댔다⁠. 쪄진 골판지 냄새 밑에서 망고 냄새가 났는데⁠, 꼭지의 꿀 냄새가 아니라 풀 냄새였다⁠. 덜 익었을 때 따서 배 안에서 익히는 망고였다⁠. 한국 마트 진열대에서 솔래가 하루에 수백 번 맡던 냄새였다⁠.

시설 관리자는 키 큰 호주 여자였다⁠. 솔래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서 벽에 붙은 일정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12월부터 2월까지⁠, 날마다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번 철은 다 찼어요⁠. 시월에 한 회사가 통째로 예약했어요⁠. 돈도 미리 다 냈고요⁠.⁠”

“⁠통째로요⁠? 하루도 안 남았어요⁠?⁠”

“⁠하루도요⁠. 그 회사가 안 쓰는 날도 예약은 그 회사 거예요⁠. 미안해요⁠, 아가씨⁠. 나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솔래는 일정표를 올려다보았다⁠. 운해라는 영어 글자가 석 달 내내 줄지어 있었다⁠. 망고 철이 끝나는 날을 넘어 2월 끝까지였다⁠.

“⁠그 회사 사람⁠, 지금 여기 있어요⁠?⁠”

관리자가 사무실 안쪽 유리문을 가리켰다⁠. 채광필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솔래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채광필은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서 웃었다⁠.

“⁠연솔래 씨⁠. 케언스까지 오셨네요⁠. 주스 드릴까요⁠? 망고 주스 말고 오렌지 주스도 있습니다⁠.⁠”

“⁠석 달을 통째로 잡으셨어요⁠?⁠”

“⁠네⁠.⁠”

“⁠운해 망고만 처리해도 반도 안 차잖아요⁠. 나머지 날은 왜 잡으셨어요⁠?⁠”

“⁠예약은 장사입니다⁠.⁠” 채광필은 솔래에게 의자를 권하고⁠, 솔래가 앉지 않자 자기도 앉지 않았다⁠. “⁠저희는 시월에 돈 내고 잡았어요⁠. 그때 솔래 씨는 뭐 하셨죠⁠? 바나나 따셨죠⁠. 바나나 따신 거 잘못 아닙니다⁠. 다만 시월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자리를 갖는 겁니다⁠.⁠”

“⁠열 날만 파세요⁠. 두 배 드릴게요⁠.⁠”

“⁠안 팝니다⁠.⁠”

“⁠세 배요⁠.⁠”

“⁠솔래 씨⁠.⁠” 채광필은 처음으로 웃음을 거두었다⁠. “⁠제가 열 날을 팔면 솔래 씨 망고가 크리스마스에 한국에 도착하겠죠⁠. 구백 명이 사진을 올리겠죠⁠. 그러면 1월에 천팔백 명이 나무를 맡겠다고 하겠고요⁠. 그러면 사모님이 1월 31일에 마음을 바꾸실 겁니다⁠. 저는 그 열 날을 팔아서 우리 회사 농장을 잃습니다⁠. 세 배를 받아도 안 맞아요⁠.⁠”

솔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채광필의 계산이 틀린 데가 없었다⁠. 채광필은 다시 웃으며 노트북 옆에 놓인 오렌지 주스 병을 솔래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생망고 말고 뭘 보내시게요⁠? 사진이요⁠? 사진으로는 배가 안 부릅니다⁠. 구백 명한테 돈 돌려주실 때 연락 주세요⁠. 환불 수수료는 저희가 대 드릴 수도 있습니다⁠.⁠”

솔래는 주스를 받지 않았다⁠. 유리문을 밀고 나오면서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돌아보았다⁠.

“⁠팀장님⁠, 오렌지 주스 냄새 안 나요⁠. 뚜껑도 안 따셨잖아요⁠.⁠”

채광필이 주스 병을 내려다보았다⁠. 솔래는 대답을 듣지 않고 나왔다⁠.

*

시설 맞은편에는 함석지붕을 얹은 과일 가게가 있었다⁠. 바나나 송이와 파파야와 용과가 나무 상자에 쌓여 있었다⁠. 솔래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코가 먼저 알았다⁠. 달고 진한 냄새⁠, 햇볕에 졸여 놓은 냄새⁠. 계산대 옆 바구니에 비닐 봉지에 든 말린 망고가 쌓여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바구니를 툭툭 쳤다⁠.

“⁠우리 집 망고야⁠. 못생긴 놈들만 골라서 말렸지⁠. 사람들이 생망고보다 이걸 더 많이 사 가⁠. 생망고는 사흘이면 물러지지만 이건 석 달을 가거든⁠. 못생긴 놈이 오래 살아⁠.⁠”

주인 할아버지는 제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주홍이 뒤에서 작게 박수를 쳤다⁠.

솔래는 한 봉지를 사서 가게 앞에서 바로 뜯었다⁠. 주황빛 조각을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쫀득하고⁠, 씹을수록 꼭지에서 맡던 꿀 냄새가 혀 뒤로 퍼졌다⁠. 생망고보다 냄새가 진했다⁠. 물기가 빠진 자리에 냄새만 남은 것이었다⁠.

“⁠주홍 씨⁠.⁠”

주홍이 고개를 들었다⁠. 솔래는 말린 망고 한 조각을 주홍의 입에 넣었다⁠.

“⁠말린 망고는 생과일이 아니에요⁠. 열처리 방에 안 들어가도 돼요⁠. 한국에 가는 길이 달라요⁠. 가공식품 신고만 하면 돼요⁠. 회사에서 수입 과자 담당하던 동기가 있어요⁠.⁠”

주홍이 씹다가 멈췄다⁠.

“⁠그럼 말리면 되잖아요⁠. 구백 그루 걸 다⁠.⁠”

“⁠건조기가 있어야 해요⁠. 그것도 아주 큰 거⁠.⁠”

주홍의 눈이 커졌다⁠. 사흘 만에 처음 보는 눈이었다⁠.

“⁠누나⁠, 저 기계공학과예요⁠. 열교환기로 졸업 설계 했어요⁠. 건조기는 그냥 뜨거운 바람 나오는 상자예요⁠. 마리바는 햇볕이 공짜고요⁠.⁠” 주홍은 가게 처마 밑에 놓인 낡은 선풍기를 가리켰다⁠. “⁠햇볕으로 데운 공기를 저런 걸로 밀어 넣으면 돼요⁠. 전기도 반만 써요⁠. 아니⁠, 반의반만요⁠.⁠”

“⁠그걸 어디서 만들어요⁠?⁠”

“⁠만들 데는 제가 찾을게요⁠. 고물상에 함석이랑 선풍기 많아요⁠.⁠”

주홍은 말린 망고 봉지를 솔래의 손에서 가져가 두 조각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솔래는 주홍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오가는 것을 보았다⁠. 사흘 동안 웃지 않던 사람이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솔래는 잠깐 생각했다⁠. 생각은 말린 망고 냄새에 금방 묻혔다⁠.

*

무건은 가게로 건너가지 않았다⁠. 짐차를 빼러 주차장으로 갔다가 차 옆에 서 있는 채광필을 만났다⁠. 채광필은 시설 사무실의 뒷문으로 나와 있었다⁠. 손에는 아까의 오렌지 주스 병이 들려 있었다⁠. 뚜껑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본부장님⁠, 아까 그분 대단하시네요⁠. 주스 뚜껑까지 보시고⁠.⁠”

“⁠팀장님⁠, 열 날만 풀어 주세요⁠. 제가 승인하겠습니다⁠.⁠”

“⁠본부장님 승인으로는 안 됩니다⁠. 예산은 회장님 결재로 나간 겁니다⁠.⁠” 채광필은 주스 병을 짐차 보닛 위에 올려놓았다⁠. 병에 맺힌 물방울이 뜨거운 보닛에 떨어져 금방 말랐다⁠. “⁠그리고 본부장님⁠, 계획서 이십삼 쪽 기억나십니까⁠?⁠”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이 났다⁠. 서른두 장 가운데 회장이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몇 안 되는 쪽이었다⁠. 동그라미 옆에 할아버지의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장사를 아는 놈 글이다⁠.⁠」

“⁠‘⁠경쟁 출하 경로 차단⁠. 인수 대상 농장이 독자 판로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지역 내 검역 처리 시설을 수확 기간 동안 선점한다⁠.⁠’ 제가 외웠습니다⁠. 문장이 좋아서요⁠.⁠” 채광필의 목소리는 칭찬하는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저는 본부장님 계획서대로 하는 겁니다⁠. 한 글자도 안 바꿨습니다⁠.⁠”

무건은 보닛 위의 주스 병을 보았다⁠. 서울 사무실에서 이십삼 쪽을 쓰던 밤이 떠올랐다⁠. 창밖으로 한강 다리 불빛이 보였고⁠, 무건은 문장을 세 번 고쳐 썼다⁠. ‘⁠막는다⁠’를 ‘⁠선점한다⁠’로 바꾸고 나서야 마음에 들었다⁠. 막는다는 말은 사람이 하는 일 같았고⁠, 선점한다는 말은 시장이 하는 일 같았다⁠.

“⁠하나 더 전해 드릴 게 있습니다⁠. 회장님이 편주홍 씨 건을 들으셨습니다⁠. 칭찬하셨어요⁠. 이제야 사람을 쓸 줄 안다고요⁠.⁠” 채광필은 주스 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1월 31일입니다⁠, 본부장님⁠.⁠”

채광필이 사무실로 돌아갔다⁠. 무건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손이 또 와이퍼를 켰다⁠. 마른 유리 위로 와이퍼가 지나갔다⁠. 무건은 와이퍼를 끄지 않고 한참 보았다⁠. 길 건너 과일 가게 처마 밑에서 솔래가 말린 망고 봉지를 흔들며 손짓하고 있었다⁠. 입을 크게 벌려 무어라 외쳤는데 유리 너머로는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은 보였다⁠.

찾았어요⁠.

무건은 손을 들어 마주 흔들었다⁠. 와이퍼가 계속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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