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29자)
비누 손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트럭이 돌아간 지 나흘째, 아치와 도티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은 버터가 날랐다. 아침 식탁에서 아치가 버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주인한테 소금 좀 달라고 해라” 하면, 도티가 버터의 귀에 대고 “네 주인 손 닿는 데 있다고 해라” 하고 대답했다. 버터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꼬리를 흔들었고, 식탁 밑에 떨어지는 베이컨을 혼자 다 먹었다. 피커들은 식빵을 씹으며 웃음을 참았다. 대만 커플의 남자는 웃음을 참다가 우유를 코로 마셨다. 프랑스 청년은 휴대전화 번역기에 버터의 이름을 넣고 ‘중재자’라고 바꿔 불렀다. 버터는 어느 이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베이컨만 기다렸다.
솔래는 휴대전화를 식탁 가운데 내려놓았다. 메시지가 쉬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다. 7번 줄 마흔 그루를 맡은 사람들이 친구를 데려오고, 친구들이 또 친구를 데려왔다. 「저도 한 그루 남은 거 없어요?」「회사 팀원 다섯 명이 한 그루씩 하고 싶대요」「아이 이름으로 하나 맡을 수 있나요」 솔래는 화면을 아치 쪽으로 밀었다.
“할아버지, 농장 전체로 열어도 될까요?”
아치는 휴대전화를 보지 않고 버터를 보았다.
“네 주인한테 물어봐라. 땅 문서에 이름 쓴 사람이 누군지.”
도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10번부터 12번 줄은 빼야 해요. 계약서에 시험 구역으로 묶여 있어요. 나머지 아홉 줄은 열어요.”
“아홉 줄이면 구백 그루쯤이에요.”
“구백 그루요.” 도티가 남편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 아버지 나무도 들어가요.”
아치는 식빵을 반으로 찢어 버터에게 주었다. 버터가 받아먹는 동안 아치는 일어나서 장화를 신었다. 문을 나가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이상한 이름 붙이면 도로 뺀다. 그건 그대로다.”
솔래는 12번 줄을 빼자는 도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이블 밑에서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흘 동안 몇 번을 씻은 손이었다.
*
새벽 다섯 시, 솔래는 사다리 꼭대기에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 무건이 아래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각도를 잡았다. 첫 화면은 7번 줄 첫 나무, 순자네 망고였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막 머리를 내밀었고, 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망고 껍질의 솜털까지 보이게 했다.
「와 진짜 새벽이네」「거기 몇 시예요?」「호주 지금 여름이라면서요 부럽」
“여기는 지금 다섯 시고요, 한국은 네 시예요. 다들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야근 중」「아기 수유 중」「님 보려고 알람 맞춤」
솔래는 망고 하나를 집어 꼭지를 화면 가까이 댔다.
“냄새를 보여 드릴 수가 없어서 아쉬운데요. 꼭지에서 송진 냄새가 나고, 밑에서 꿀 냄새가 올라오면 익은 거예요. 이건 딱 오늘 따야 하는 애예요.”
꼭지를 꺾었다. 하얀 진이 한 방울 맺혔다. 솔래는 망고를 거꾸로 들어 화면에 보였다. 댓글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진 나오는 거 처음 봐」「ASMR 해 주세요 꺾는 소리」 솔래는 사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카메라 감독님도 냄새 한번 맡아 보실래요?”
솔래가 망고를 내밀었고, 무건이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솔래는 무건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빼앗아 무건을 향해 돌렸다. 화면 가득 무건이 잡혔다. 밀짚모자 그늘 아래 땀에 젖은 얼굴, 망고를 쥔 하얀 손, 코끝에 댄 꼭지.
「헐」「손 주인 얼굴 공개」「망고보다 남자가」「밀짚모자 오빠 분양은 안 하나요」
무건이 고개를 들었다. 망고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솔래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낚아채 붉은 단추를 눌렀다. 방송이 끊겼다. 사다리가 흔들렸고, 솔래는 가지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얼굴은 안 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잖아요. 칠 분 만에 천 명 들어왔어요.”
“그래도 안 됩니다.”
솔래는 사다리를 두 칸 내려와 무건과 눈높이를 맞췄다.
“얼굴에 빚 있어요?”
“비슷한 게 있습니다.”
무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솔래는 무건이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아까 화면 속에서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집에서 모르게 왔어요. 여기 있는 줄 알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은 찍으셔도 됩니다. 얼굴만 빼 주세요.”
솔래는 한참 무건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돌려받았다. 땅에 떨어진 망고를 주워 꼭지 냄새를 맡았다. 껍질이 조금 터졌지만 냄새는 그대로였다.
“알았어요. 대신 손 출연료는 없어요.”
“네.”
“그리고 다음에 휴대전화 뺏으면 진짜 호스 가져올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빌려서.”
무건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솔래는 무건의 웃음소리가 라이브에 안 잡힌 것이 아까웠다.
*
방송은 끊겼지만 칠 분은 남았다. 누군가 칠 분짜리 영상을 잘라 숏폼 앱에 올렸다. 「호주 망고 농장 새벽 라이브 카메라 감독 얼굴 공개 순간」 하루 만에 조회수가 사십만을 넘었다. 솔래가 연 구백 그루는 사흘 만에 다 맡겨졌다.
엄마는 교회 여전도회에 서른 그루를 돌렸다. 「딸 이번 주 헌금 대신 망고 했다 목사님도 한 그루 이름은 할렐루야」 솔래는 아치에게 할렐루야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기쁘다는 뜻’이라고 옮겼고, 아치는 그건 둔다고 했다.
도티는 사무실에서 은행 앱을 열었다. 솔래가 맡긴 돈을 매일 저녁 한꺼번에 보냈다. 도티는 숫자를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끓였다. 두 잔을 끓여 하나는 창고 쪽으로 걸어가 수확 보조차를 고치던 아치 옆에 놓고 왔다. 아치는 찻잔을 보고, 버터를 보고, 찻잔을 들었다. 버터는 나흘 만에 처음으로 아무 말도 나르지 않았다.
포장 창고에서는 마고가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웃 농장 사람들이었다. 「그 한국 아가씨 우리 농장 나무도 맡길 수 있대?」 마고는 받는 전화마다 솔래를 바꿔 주겠다고 했다가, 솔래가 사다리 위에 있다고 하면 다시 걸겠다는 답을 들었다. 개빈네 농장에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개빈네는 이미 팔렸다.
*
주홍은 이틀 동안 무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볼 수는 있었다. 숙소 계단에서, 수확 보조차 옆에서, 저녁 식탁 맞은편에서 무건은 늘 있었다. 주홍은 무건을 보지 않으려고 개미집을 들여다보거나 환율 앱을 열었다. 호주 달러가 또 올랐다. 다른 날 같으면 하루 종일 떠들 일이었다.
라이브 영상이 사십만을 넘은 밤, 주홍은 침대에 누워 댓글을 끝까지 내렸다. 수천 개 가운데 하나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근데 이 사람 운해 회장 손자랑 똑같이 생겼는데. 작년 운해 신년회 사진이랑 비교해 봐요」
주홍은 검색창에 운해 신년회를 쳤다. 사진은 쉽게 나왔다. 무대 위에 백발의 회장이 서 있었고, 회장 옆에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사진 아래 설명이 있었다. 「배석곤 회장과 손자 배무건 전략기획실 과장」 주홍은 휴대전화를 얼굴 가까이 댔다. 머리 모양이 달랐고, 밀짚모자가 없었다. 손은 똑같았다. 마이크를 쥔 하얀 손.
주홍은 일어나서 반바지를 입었다.
*
무건은 물탱크 뒤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주홍이 다가가자 무건은 전화를 끊고 돌아보았다. 물탱크 밑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콘크리트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쇠 냄새가 났다. 주홍은 휴대전화 화면을 무건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신년회 사진이었다.
“본부장님이세요, 과장님이세요?”
무건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과장입니다. 본부장은 채 팀장님이 부르는 말이고요.”
“트럭 돌려보낸 것도 과장님이죠? 제가 들었어요. 제가 쓴 계약서라고 하신 거.”
“네.”
“그럼 누나가 지키겠다고 뛰어다니는 농장, 과장님 회사가 사는 거네요.”
“네.”
“그 계획서도 과장님이 쓰셨고요?”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주홍은 알았다. 주홍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떨려서 주머니 입구를 두 번 놓쳤다.
“누나한테 말할 거예요.”
“말씀하세요.”
주홍이 무건을 보았다. 무건의 얼굴은 화가 나 있지도, 겁을 먹고 있지도 않았다. 무건은 물탱크에 등을 기대고 잠깐 하늘을 보다가 다시 주홍을 보았다.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만 들어 주세요. 운해 해외조달팀에 1월에 자리가 하나 납니다. 호주 법인 정규직입니다. 제가 추천할 수 있어요.” 무건의 목소리는 숫자를 말할 때처럼 고르게 이어졌다. “2월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2월이 지나면 주홍 씨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저 매수하시는 거예요?”
“네.”
주홍은 웃음이 나왔다. 무서울 때마다 나오는 웃음이었다. 물탱크 밑 웅덩이에 두꺼비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가 나갔다.
“과장님, 저 여섯 번 떨어졌어요. 서류에서 세 번, 면접에서 세 번요. 마지막 면접에서 면접관이 물었어요. 왜 이 회사여야 하냐고. 대답을 못 했어요. 아무 회사나 붙고 싶었거든요.”
“압니다. 자기소개를 그 순서로 하셨잖아요.”
“그걸 기억하세요?”
“사람이 처음 하는 말은 잘 기억합니다.”
주홍은 한참 물탱크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대답하지 않고 숙소로 걸어갔다. 계단을 오르다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솔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솔래는 내일 새벽 라이브에서 할 말을 소리 내어 연습하고 있었다. 「오늘은 7번 줄 스무 번째 나무, 퇴사 기념수가 주인공이에요.」
*
무건은 주홍이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물탱크 뒤에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채광필에게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채광필이 받았다. 채광필은 케언스의 호텔에 묵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팀장님, 해외조달팀 1월 자리 하나, 편주홍 씨로 올려 주세요. 제 추천입니다.”
“숙소에 계신 그 공대생 말씀이십니까?”
“네. 저를 알아봤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꺼졌다.
“본부장님이 직접 사람을 사셨네요.” 채광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회장님이 들으시면 좋아하시겠습니다. 이제야 회사 일을 하신다고요.”
“회장님께는 말하지 마세요.”
“그건 약속 못 드립니다. 대신 추천은 내일 아침에 올리겠습니다. 인사팀이 오늘 밤에 확인 메일을 보내도록 하죠. 마음 바뀌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무건은 물탱크 밑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뛰어든 두꺼비가 돌아와 있었다. 2층 창문에서는 솔래의 연습하는 목소리가 아직 흘러나왔다. 「퇴사 기념수는요, 망고가 서른두 개 달렸어요. 회사 다닐 때보다 결실이 좋아요.」 무건은 결실이라는 말에 혼자 웃다가, 웃는 얼굴 그대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오늘따라 손바닥이 끈적였다. 망고 진도 아니고 땀도 아니었다.
*
주홍은 제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다. 한 시간 뒤 휴대전화가 떨렸다. 운해식품 인사팀 이름으로 온 메일이었다. 「해외조달팀 채용 추천 확인 — 편주홍 님, 회신 부탁드립니다」 주홍은 메일함을 열었다. 위에서부터 여섯 통이 차례로 보였다. 「귀하의 역량은 훌륭하나」「아쉽게도 이번에는」「다음 기회에」 여섯 통 위에 새 메일이 한 통 있었다.
주홍은 답장 창에 손가락을 댔다. 여섯 통의 제목이 화면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