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82자)

새벽 트럭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새벽 네 시 반⁠, 솔래를 깨운 것은 엔진 소리보다 냄새였다⁠. 경유 타는 냄새가 열어 둔 창으로 들어왔다⁠. 피커들이 쓰는 트랙터는 다섯 시 전에 시동을 거는 일이 없었다⁠. 솔래는 멜빵바지 끈을 한쪽만 걸친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언덕 위 농장 길로 전조등 두 쌍이 올라가고 있었다⁠. 앞의 것은 흰 사륜구동차였고⁠, 뒤의 것은 짐칸에 커다란 하얀 물탱크를 실은 트럭이었다⁠. 탱크 옆구리에는 길 건너 개빈네 농장 이름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붙어 있었다⁠.

트럭은 10번 줄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솔래는 풀밭을 가로질러 달렸다⁠. 이슬에 젖은 풀이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트럭이 12번 줄 입구로 꺾어 들어가려는 순간⁠, 솔래는 두 팔을 벌리고 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전조등이 얼굴에 쏟아졌다⁠. 트럭이 급하게 멈췄고⁠, 물탱크 속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햇볕에 그을린 호주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비켜⁠. 일하러 왔어⁠.⁠”

“⁠여기 유기농 농장이에요⁠. 뭘 뿌리러 오셨어요⁠?⁠”

“⁠흙 시험⁠. 난 시킨 대로 뿌리기만 해⁠.⁠”

앞의 사륜구동차 문이 열리고 채광필이 내렸다⁠. 이 시간에도 셔츠 단추가 손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채광필은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전조등 앞에 펼쳐 들었다⁠.

“⁠연솔래 씨였죠⁠? 계약서 칠 조입니다⁠. ‘⁠매수 예정자는 계약 기간 동안 농장 안 세 줄 이내에서 토양 시험을 할 수 있다⁠.⁠’ 10번부터 12번 줄로 정했고요⁠. 비료가 수확량을 얼마나 올리는지 미리 봐야 사는 사람도 값을 매기죠⁠.⁠”

“⁠그 세 줄에 비료 뿌리면 이 농장 유기농 인증이 흔들려요⁠. 세 줄만 따로 떼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바람 불면 옆 줄로 날아가고⁠, 비 오면 흙으로 흘러가요⁠.⁠”

“⁠그건 인증 기관이 정할 일이죠⁠. 나머지 아홉 줄은 그대로 두잖아요⁠.⁠”

“⁠나머지 아홉 줄 망고 받기로 한 한국 사람이 마흔 명이에요⁠. 유기농이라고 하고 받은 돈이에요⁠.⁠”

채광필은 종이를 접으며 웃었다⁠.

“⁠그럼 그분들한테는 아홉 줄에서 따 드리면 되겠네요⁠. 7번 줄은 안 건드립니다⁠. 약속드리죠⁠.⁠”

트럭 앞바퀴 아래에서 물소리가 났다⁠. 버터였다⁠. 붉은 개가 트럭 앞바퀴에 한쪽 다리를 들고 길게 볼일을 보고 있었다⁠. 운전석의 남자가 욕을 했다⁠. 뒤따라 뛰어온 주홍이 반바지 차림에 칫솔을 문 채 버터를 향해 엄지를 들었다⁠.

“⁠잘했다⁠, 버터⁠. 이건 무지출 저항이야⁠.⁠”

*

전조등 사이로 아치가 걸어왔다⁠. 잠옷 위에 장화만 신었고⁠, 손에는 둘둘 만 호스를 들었다⁠. 호스 끝은 어디에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버릇처럼 들고 나온 것이었다⁠.

“⁠누가 내 땅에 기름 냄새를 뿌려⁠?⁠”

채광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종이를 다시 펼쳤다⁠. 영어로 천천히⁠, 정중하게 칠 조를 읽었다⁠. 아치는 돋보기가 없어 종이를 팔 길이만큼 떼어 놓고 보았다⁠. 맨 아래 서명란에서 아치의 눈이 멈췄다⁠. 낯익은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게 굴린 D⁠, 끝을 길게 끄는 펜로즈의 e⁠.

“⁠이게 언제 거요⁠?⁠”

“⁠삼 주 전입니다⁠. 사모님이 저희 사무실까지 직접 오셨어요⁠. 케언스까지 운전해서요⁠.⁠”

아치는 종이를 채광필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손에 쥔 채 몸을 돌려 언덕 아래 집으로 걸어갔다⁠. 호스가 땅에 끌려 따라갔다⁠. 솔래는 트럭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아치의 등을 보다가⁠, 주홍에게 눈짓을 했다⁠. 주홍이 칫솔을 문 채 솔래가 비운 자리로 가서 대신 두 팔을 벌렸다⁠.

“⁠제가 막을게요⁠. 저 몸무게 육십이 킬로예요⁠. 트럭이 이기겠지만 기분은 제가 이겨요⁠.⁠”

*

부엌 창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솔래는 현관 계단 아래까지만 따라가서 멈췄다⁠. 안에서 찻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도티는 남편이 들어오기 전부터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이 서명했어⁠?⁠”

“⁠했어요⁠.⁠”

“⁠나한테 한마디도 없이⁠?⁠”

“⁠당신한테 말하면 당신은 은행에 호스를 들고 갔을 거예요⁠.⁠”

식탁 위로 종이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우리 아버지 나무야⁠, 도티⁠.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그 줄을 심었어⁠. 내가 물을 날랐다고⁠.⁠”

“⁠알아요⁠. 그 얘기를 오십 년 들었어요⁠.⁠” 도티의 목소리는 커지지 않았다⁠. “⁠그럼 10번 줄은요⁠? 10번⁠, 11번⁠, 12번은 누가 심었어요⁠?⁠”

부엌이 조용해졌다⁠. 솔래는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페인트 벗겨진 자리가 까슬하게 닿았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심었잖아요⁠. 당신이 구덩이를 파고 내가 묘목을 넣었어요⁠. 그 세 줄을 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야 당신 아버지 나무가 1월까지 시간을 벌어요⁠.⁠” 도티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은행 편지가 마흔한 통 왔어요⁠. 당신은 한 통도 안 열었어요⁠. 내가 다 열었어요⁠.⁠”

한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고⁠, 아치가 뒷문으로 나갔다⁠. 솔래가 창 너머로 보니 도티는 남편이 나간 문을 보지 않았다⁠. 끓는 주전자를 불에서 내리고⁠, 찻잎을 넣고⁠, 잔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남편의 자리 앞에 놓았다⁠. 식탁 위에 계약서가 펼쳐진 채 남아 있었다⁠. 도티는 계약서를 접지 않고⁠, 남편의 찻잔을 계약서 위에 올려놓았다⁠. 찻잔 바닥이 서명 자리를 덮었다⁠. 솔래는 계단 난간에서 손을 떼고⁠, 소리 나지 않게 트럭 앞으로 돌아갔다⁠.

*

무건은 트럭 뒤편⁠, 물탱크 그늘에 서 있었다⁠. 솔래가 집으로 내려간 사이 숙소에서 나와 언덕을 올라온 참이었다⁠. 채광필이 무건을 보자 사륜구동차 뒤로 걸어왔다⁠. 둘은 전조등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마주 보았다⁠. 트럭 엔진은 여전히 돌았고⁠, 경유 냄새가 둘 사이를 채웠다⁠.

“⁠본부장님⁠, 시작하겠습니다⁠. 해 뜨기 전에 끝내야 피커들이 안 봅니다⁠.⁠”

“⁠오늘은 안 됩니다⁠.⁠”

“⁠계약서에 있는 권리입니다⁠.⁠”

“⁠압니다⁠. 제가 쓴 계약서니까요⁠.⁠” 무건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지금 뿌리면 인증 기관이 1월 정기 심사 전에 농장 전체를 다시 봅니다⁠. 인증이 통째로 날아가면 인수하고 나서 유기농 꼬리표로 팔 물량도 날아가요⁠. 계획서 십구 쪽에 있는 수익 절반이 그 꼬리표에서 나옵니다⁠. 인수 끝나고 뿌려도 늦지 않습니다⁠.⁠”

채광필은 무건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계획서에는 시험 결과가 있어야 회장님이 가격을 정하신다고 쓰셨잖습니까⁠?⁠”

“⁠제가 고치겠습니다⁠.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채광필은 대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운전석의 남자에게 걸었다⁠. 짧은 영어가 오갔다⁠. 트럭 엔진 소리가 한 번 높아졌다가 후진 경보음으로 바뀌었다⁠.

물탱크 반대편⁠, 그늘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홍이 칫솔을 입에 문 채 굳어 있었다⁠. 트럭이 왜 물러나는지 보려고 돌아왔다가 들은 것이었다⁠. 본부장님⁠. 제가 쓴 계약서⁠. 회장님⁠. 주홍은 칫솔을 빼다가 치약 거품을 셔츠에 떨어뜨렸다⁠. 무건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주홍은 풀밭에 주저앉아 버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버터가 주홍의 얼굴에 묻은 치약을 핥았다⁠.

*

트럭이 언덕 아래로 사라지자 피커들이 하나둘 박수를 쳤다⁠. 대만 커플이 솔래를 끌어안았고⁠, 프랑스 청년은 트럭이 남긴 바퀴 자국에 대고 무어라 프랑스 말로 외쳤다⁠. 솔래는 웃었다⁠.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렸다⁠. 「⁠솔래1 오늘 사진은요⁠?⁠」「⁠순자네 망고 잘 있니⁠」「⁠퇴사 기념수 어제보다 망고 커졌어요⁠?⁠」 해가 산등성이에 걸리기 시작했다⁠. 솔래는 사진을 찍으러 7번 줄로 가기 전에⁠, 혼자 12번 줄로 들어갔다⁠.

12번 줄은 농장에서 가장 젊은 줄이었다⁠. 둥치가 7번 줄의 절반쯤이었고⁠, 나무 사이 풀이 짧았다⁠. 솔래는 이 줄의 나무를 하나씩 지나며 걸었다⁠. 퇴비 냄새⁠, 풀 냄새⁠, 이슬 냄새⁠. 마지막에서 세 번째 나무쯤에서 솔래의 걸음이 멈췄다⁠.

지린 냄새였다⁠.

아주 얇았다⁠. 이슬 냄새에 섞여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솔래는 쪼그려 앉아 나무 밑동의 흙을 손가락으로 집어 코에 댔다⁠. 젖어 있었다⁠. 이슬에 젖은 흙과는 달리 손끝이 미끈거렸다⁠. 마지막 두 그루 밑도 같았다⁠. 전 직장에서 유기농 딱지가 붙은 상자를 열었을 때 맡은 냄새와 같았다⁠. 요소 비료였다⁠.

트럭은 12번 줄에 들어오지 못했다⁠. 솔래가 막았다⁠. 그런데 냄새는 여기 있었다⁠. 솔래가 언덕을 뛰어오르기 전⁠, 네 시 반보다 이른 시간에 누군가 이 줄 끝을 반대편 길로 들어와 먼저 뿌리고 나간 것이었다⁠.

솔래는 젖은 흙을 쥔 손을 펴지 못했다⁠. 말하면 아치가 알았다⁠. 아치가 알면 인증 기관에 알려야 했다⁠. 인증 기관이 오면 농장 전체를 다시 볼 것이고⁠, 다시 보는 동안 유기농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다⁠. 마흔 명에게 받은 돈은 유기농 나무에 대한 돈이었다⁠. 솔래는 한국에서 그만두던 날을 떠올렸다⁠. 딱지와 냄새가 다르다고 말했던 날⁠, 솔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상자를 고치지 않고 솔래를 고쳤다⁠.

솔래는 일어나서 운동화 끝으로 마른 풀과 낙엽을 끌어다 젖은 흙을 덮었다⁠. 세 그루 밑을 다 덮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냄새는 손금 사이에 남았다⁠. 솔래는 7번 줄로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첫 나무 사진을 찍었다⁠. 해가 막 잎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순자네 망고⁠, 오늘도 잘 있어요⁠.⁠」 전송을 누르는 손가락에서 지린 냄새가 났다⁠.

*

한낮의 7번 줄은 35도였다⁠. 아치는 아침 내내 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수확 보조차는 마고가 몰았다⁠. 솔래와 무건은 나란히 붙은 두 사다리에서 망고를 땄다⁠. 무건은 이제 꼭지를 거꾸로 들 줄 알았다⁠. 팔뚝의 붉은 자국 위로 소매를 내려 단추까지 채웠고⁠, 손목에는 솔래가 빌려준 고무줄을 감았다⁠. 진이 소매 속으로 흘러들지 않게 막는 피커들의 요령이었다⁠.

“⁠아침에 트럭은 왜 돌아갔을까요⁠?⁠”

솔래가 먼저 물었다⁠. 무건은 꼭지를 꺾다가 손을 멈췄다⁠.

“⁠누가 전화를 한 것 같던데요⁠.⁠”

“⁠채 팀장한테 누가 전화를 해요⁠? 사장님이 그만하라고 했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무건은 망고를 물통에 담그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솔래는 무건의 옆얼굴을 보았다⁠. 밀짚모자 그늘 아래로 땀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솔래는 고맙다는 말을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건이 놓친 망고 하나를 대신 따서 무건의 바구니에 넣었다⁠.

사다리 아래에서 주홍이 수확 상자를 끌고 지나갔다⁠. 평소 같으면 개미집을 흔들며 농담을 던졌을 주홍이 오늘은 무건의 사다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솔래 앞에 들이밀었다⁠. 한국 경제 뉴스 머리기사였다⁠. 「⁠운해식품 열대과일 사업부 세 해 연속 적자⁠… 해외 농장 직접 인수 검토⁠」

“⁠누나⁠, 운해 진짜 급한가 봐요⁠. 직원이 사백 명이래요⁠. 사백 명이면 제가 떨어진 회사 여섯 군데 다 합친 것보다 많아요⁠.⁠”

“⁠그래서 남의 농장을 사겠다고⁠?⁠”

“⁠사백 명 입장에서는 남의 농장이 아니라 내 월급이죠⁠.⁠”

주홍은 한마디만 던지고 상자를 끌고 갔다⁠. 솔래는 사다리 위에서 한참 주홍의 등을 보았다⁠. 옆 사다리의 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와 그늘이 사라졌다⁠.

저녁에 솔래는 비누로 손을 세 번 씻었다⁠. 손톱 밑까지 솔로 문질렀다⁠. 수건에 손을 닦고 코에 대 보았다⁠. 비누 냄새 밑으로⁠, 아주 얇게⁠, 아침의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새벽 트럭 ·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