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26자)

7번 줄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농장 사무실은 창고 옆에 붙은 함석지붕 방이었다⁠. 문을 열자 홍차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도티 펜로즈는 책상 앞에서 주전자에 물을 붓고 있었다⁠. 일흔이라는데 흰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손등에 망고 진에 덴 옛 흉터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솔래가 문간에 서자 도티는 묻지도 않고 찻잔 하나를 더 꺼냈다⁠.

“⁠어제 창고 일 들었어요⁠. 마고가 다 말해 줬어요⁠. 한국 아가씨가 회사 사람한테 망고를 들이밀었다고⁠.⁠”

“⁠죄송해요⁠. 끼어들 일이 아니었는데⁠.⁠”

“⁠아니요⁠. 우리 영감이 거기 있었으면 호스를 들었을 거예요⁠.⁠”

도티는 찻잔을 밀어 주고 책상 서랍을 반쯤 열었다⁠. 은행 이름이 찍힌 봉투가 한 뭉치 들어 있었다⁠. 몇 장은 뜯지도 않았다⁠. 도티는 서랍을 다시 닫았다⁠. 서랍 손잡이에 손때가 까맣게 앉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었다 닫은 서랍이었다⁠.

“⁠두 해 전에 열대 폭풍이 지나갔어요⁠. 나무 삼백 그루가 꺾였고⁠, 다시 심고 키우느라 빌렸어요⁠. 작년에는 비가 너무 안 왔고요⁠. 빚이 빚을 낳더라고요⁠. 사십이만 달러예요⁠. 1월 31일까지⁠.⁠”

“⁠아치 할아버지도 아세요⁠?⁠”

“⁠빚이 있는 건 알아요⁠. 얼마인지는 몰라요⁠. 알면 그 사람 심장이 먼저 멈출 거예요⁠.⁠”

솔래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혀가 데었다⁠. 창밖으로 7번 줄이 보였다⁠. 아치가 등에 분무 통을 지고 나무 사이를 걷고 있었고⁠, 버터가 아치의 뒤를 따랐다⁠. 어제 무건이 셔츠 주머니에 넣던 망고가 떠올랐다⁠. 따서 상자에 넣지 않고 제 주머니에 넣은 망고⁠.

“⁠사모님⁠, 한국에는 물건보다 경험에 돈을 쓰는 사람이 많아요⁠. 망고 한 상자보다 내 나무에서 딴 망고 한 상자에 더 쓰는 사람들이요⁠. 사진 받고⁠, 이름 붙이고⁠, 자라는 거 보고요⁠.⁠”

“⁠나무를 팔자는 거예요⁠?⁠”

“⁠맡기자는 거예요⁠. 나무는 여기 그대로 있고요⁠. 한 철 동안 한 그루씩 맡아 주는 사람한테 돈을 미리 받고⁠, 그 나무에서 딴 망고를 보내 주는 거예요⁠.⁠”

도티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남편을 한참 보았다⁠.

“⁠우리 영감한테 직접 말해 봐요⁠. 호스 조심하고⁠.⁠”

*

7번 줄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아치가 등에 진 분무 통에는 물고기와 해초를 삭혀 만든 액비가 들어 있었다⁠. 화학 비료를 못 쓰는 유기농 농장의 거름이었다⁠. 솔래가 설명을 시작하자 아치는 분무기를 멈추지 않고 들었다⁠. 솔래가 맡긴다는 말을 세 번째 할 때 아치가 몸을 돌렸다⁠.

“⁠내 아버지가 심은 나무를 한국 사람들한테 팔라고⁠?⁠”

“⁠파는 게 아니에요⁠. 맡기는 거예요⁠.⁠”

“⁠돈 받고 넘기면 파는 거지⁠.⁠”

“⁠나무는 여기 있어요⁠. 망고만 가요⁠.⁠”

아치는 분무 통을 내려놓고 둥치 옆에 감아 둔 호스를 집었다⁠. 수도꼭지는 버터가 앞발로 밟고 있는 자리에 있었다⁠. 아치가 턱짓을 하자 버터가 비켜섰고⁠, 아치가 꼭지를 돌렸다⁠. 찬물이 솔래의 멜빵바지 무릎에 쏟아졌다⁠.

“⁠할아버지⁠!⁠”

“⁠더위 먹은 소리를 하니까 식혀 주는 거다⁠.⁠”

솔래는 피하지 않았다⁠. 물을 정강이에 맞은 채 둥치에 손을 짚었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뜨거웠다⁠.

“⁠이 줄 나무가 몇 살이에요⁠?⁠”

아치는 대답 대신 물줄기를 솔래의 운동화로 옮겼다⁠.

“⁠일흔 살쯤 됐죠⁠? 할아버지랑 동갑이죠⁠? 이 나무들이 내년에도 이 냄새로 열리려면 1월 31일을 넘겨야 해요⁠. 할아버지가 호스로 막을 수 있는 건 저 하나예요⁠. 은행은 못 막아요⁠.⁠”

물줄기가 멈췄다⁠. 아치는 호스를 쥔 손을 내리고 7번 줄 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마흔 그루였다⁠. 한참 뒤 아치가 입을 열었다⁠.

“⁠이 줄만이다⁠. 마흔 그루⁠. 사흘 안에 다 안 맡겨지면 그만둔다⁠.⁠”

“⁠네⁠.⁠”

“⁠나무는 한 그루도 이 땅을 못 떠난다⁠. 그리고 맡긴 놈들이 붙이는 이름⁠, 내가 다 읽는다⁠. 이상한 이름 붙이면 도로 뺀다⁠.⁠”

솔래는 젖은 운동화로 철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세 시⁠, 포장 창고의 낡은 라디오에서 지역 방송이 흘러나왔다⁠. 진행자는 올해 우기가 늦게 오고 대신 세게 온다는 기상청 전망을 읽었고⁠, 이어서 국제 비료 가격이 반년 사이 또 올랐다는 소식을 읽었다⁠. 마고가 라디오를 손바닥으로 탁 쳐서 껐다⁠. 비료 값이 오르면 큰 농장들이 작은 농장을 사들인다는 것이 마고의 계산이었다⁠. 지난달에는 길 건너 개빈네 농장이 팔렸다고 했다⁠. 산 사람은 한국 회사였다⁠.

창고 뒷문 밖에서 도티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솔래는 빈 상자를 쌓으러 나갔다가 도티의 등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스피커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브리즈번에서 회사를 다닌다는 펜로즈 부부의 아들 닐이었다⁠.

“⁠엄마⁠, 그냥 팔아요⁠. 아빠 나이가 일흔셋이에요⁠. 폭풍 한 번 더 오면 그때는 땅값도 못 받아요⁠.⁠”

“⁠네 아버지한테 그 말 직접 해 봐라⁠.⁠”

“⁠아빠는 내 말 안 들어요⁠. 망고 말만 듣지⁠.⁠”

도티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돌아서다 솔래와 눈이 마주쳤고⁠, 도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빈 상자 하나를 받아 들었다⁠.

“⁠닐은 착한 애예요⁠. 계산이 빠른 애라서 그렇지⁠.⁠”

솔래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도티는 차를 끓이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해가 기울 무렵⁠, 솔래는 숙소 냉장고에서 꺼낸 알레르기 약 두 알을 무건에게 내밀었다⁠. 무건의 팔뚝은 오늘 아침보다 더 붉었고⁠, 손목 안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긁었죠⁠?⁠”

“⁠안 긁었습니다⁠.⁠”

“⁠손톱 밑에 피 묻었는데요⁠.⁠”

무건은 손톱을 내려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약을 삼키고 물을 반 병이나 마셨다⁠. 솔래는 무건의 손목을 잡아 물집 옆에 연고를 다시 발랐다⁠. 무건의 맥이 손끝에 빠르게 닿았다⁠. 더위 때문이라고⁠, 솔래는 생각했다⁠.

*

점심시간에 솔래는 휴대전화로 첫 나무를 찍었다⁠. 화면 속 나무는 그냥 초록 덩어리였다⁠. 다시 찍어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무건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해 봐도 될까요⁠?⁠”

무건은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나무 밑으로 들어가 누웠다⁠. 땅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햇빛 앞에 망고 하나가 매달린 장면을 잡았다⁠. 이어서 솔래의 손이 꼭지를 꺾는 순간을 가까이서 찍고⁠, 진을 씻는 물통의 거품을 찍고⁠, 마지막으로 망고를 쥔 자기 손을 화면 가운데 두고 천천히 돌렸다⁠. 붉게 덴 팔뚝은 화면 밖으로 빼냈다⁠. 삼십 초짜리 영상이 나왔다⁠. 솔래는 두 번 돌려 보았다⁠.

“⁠사진 배웠어요⁠?⁠”

“⁠취미로 조금요⁠.⁠”

“⁠값은 얼마로 할까요⁠? 한 철에 십오만 원 생각했는데⁠.⁠”

무건이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접었다⁠.

“⁠한 그루에서 나오는 망고가 상자로 여섯이에요⁠. 그중 맡긴 사람한테 보낼 건 두 상자로 잡고⁠, 나머지는 원래대로 팔고요⁠. 보내는 비용이 상자당 이만 원은 넘을 거고⁠, 검역 처리비가 따로 붙고요⁠. 십오만 원이면 남는 게 거의 없어요⁠. 이십만 원은 받으셔야 합니다⁠.⁠”

솔래가 무건을 빤히 보았다⁠.

“⁠계산이 왜 이렇게 빨라요⁠?⁠”

“⁠경영학 수업을 들었어요⁠. 교양으로⁠.⁠”

주홍이 개미집을 들고 끼어들었다⁠.

“⁠저는 계산을 더 빨리 해요⁠. 이십만 원이면 라면이 이백오십 봉지예요⁠.⁠”

“⁠주홍 씨⁠, 그건 한국 라면값이고요⁠.⁠”

“⁠그러니까 한국 분들한테는 라면 이백오십 봉지를 포기하고 망고 나무를 맡으시라는 거죠⁠. 저는 못 해요⁠. 저는 라면 편이에요⁠.⁠”

*

밤 아홉 시⁠, 솔래는 영상을 세 군데에 올렸다⁠. 엄마가 들어가 있는 동창 단톡방⁠, 전 직장 동기들 단톡방⁠, 그리고 반년 동안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자기 계정이었다⁠. 「⁠호주 마리바 펜로즈 농장⁠, 일흔 살 된 유기농 망고 나무 마흔 그루를 한 철 맡아 주실 분을 찾아요⁠. 이름은 맡으신 분이 붙여 주세요⁠. 아침마다 나무 사진을 보내 드려요⁠.⁠」

엄마의 답이 일 분 만에 왔다⁠.

「⁠엄마가 세 그루 이름은 솔래1 솔래2 솔래3⁠」

「⁠엄마 그건 이름이 아니라 번호야⁠」

「⁠영숙이 두 그루 순자 한 그루 순자 이름은 순자네 망고⁠」

전 직장 동기들 방은 한 시간 동안 조용하다가 열 시가 넘어 터졌다⁠. 「⁠선배 살아 있었네요⁠」「⁠호주 가서 망고 팔아요⁠?⁠」「⁠한 그루요 이름은 퇴사 기념수⁠」「⁠저도요 이름은 연봉 협상 실패⁠」 솔래가 그만둘 때 아무 말 없던 동기들이었다⁠. 솔래는 이름을 하나씩 옮겨 적다가 웃음이 터져 휴대전화를 이불에 엎어 놓았다⁠.

자정 무렵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영상 속 손이 너무 예뻐서 왔어요⁠」「⁠망고 말고 저 손 분양은 안 하나요⁠」 솔래는 손 이야기만 하는 댓글들을 무건에게 보여 줄지 말지 잠깐 고민하다가 화면을 껐다⁠.

새벽 다섯 시⁠, 사다리를 지고 7번 줄로 나가기 전에 솔래는 숫자를 확인했다⁠. 마흔 그루가 모두 맡겨져 있었다⁠. 사흘이 아니라 여덟 시간이었다⁠.

계단 밑에서 장화를 신던 주홍이 솔래의 화면을 넘겨다보고 비명을 질렀다⁠. 숫자보다 댓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주홍은 손 분양 댓글을 소리 내어 읽고는⁠, 막 계단을 내려오던 무건의 손을 낚아채 불빛에 비춰 보았다⁠.

“⁠비누 씨⁠, 이 손으로 나무 마흔 그루 팔았어요⁠. 저는 이 손으로 이력서 여섯 장 냈다가 다 떨어졌는데요⁠.⁠”

“⁠팔았다기보다는⁠, 맡긴 거라고 들었습니다⁠.⁠”

“⁠거봐요⁠, 말투까지 합격자 말투야⁠.⁠”

무건은 손을 빼내 주머니에 넣었다⁠. 솔래는 무건이 처음으로 귀까지 빨개지는 것을 보았다⁠. 덴 자리도 없는 귀였다⁠.

아치는 7번 줄 첫 나무 앞에서 솔래가 내민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돋보기를 꺼냈다⁠. 영어로 옮겨 적은 이름들을 한 줄씩 읽었다⁠. 순자네 망고⁠, 솔래1⁠, 퇴사 기념수⁠. 연봉 협상 실패에서 아치가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냐⁠?⁠”

“⁠월급 올려 달라고 했다가 못 받았다는 뜻이에요⁠.⁠”

아치는 한참 웃다가 돋보기를 접었다⁠.

“⁠이건 둔다⁠. 이 나무가 제일 잘 열리는 나무다⁠. 월급 대신 망고라도 많이 받아야지⁠.⁠”

*

같은 시각⁠, 무건은 숙소 뒤 물탱크 그늘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탱크 아래로 새는 물에서 쇠 냄새가 났다⁠. 수화기 너머 채광필의 목소리는 서울의 사무실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본부장님⁠, 손이 나왔더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 망고 영상이요⁠. 회장님 비서실에서 돌았습니다⁠. 운해 열대과일팀이 호주 농장을 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회장님이 영상을 직접 보셨습니다⁠.⁠” 채광필은 잠깐 말을 끊었다⁠. “⁠손 보시고 바로 아셨답니다⁠. 저건 내 손주 손이다⁠, 굳은살이 없어서⁠.⁠”

무건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덴 자리에 물집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서울에서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인사하러 오면 얼굴보다 손을 먼저 잡았다⁠. 손바닥을 엄지로 한 번 쓸어 보고⁠, 아무 말 없이 놓았다⁠. 무건은 할아버지의 엄지가 무엇을 찾는지 오래 몰랐다⁠.

“⁠회장님 말씀 그대로 전해 드립니다⁠. 남의 나무 팔아 주라고 보낸 거 아니다⁠. 1월 31일까지 그 농장을 운해 것으로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본부장님⁠, 모레 새벽에 시험 트럭이 들어갑니다⁠. 계약서에 세 줄까지 흙 시험을 할 수 있게 돼 있어요⁠. 10번부터 12번 줄입니다⁠.⁠”

무건이 대답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물탱크 너머 7번 줄에서 솔래가 아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며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나무 마흔 그루를 다 끌어안는 시늉이었다⁠. 무건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사다리를 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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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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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가자리2026.10.31· 2화

    도티 할머니 손등에 망고 진 흉터가 점점이 있다는 묘사에서 농장 일이 얼마나 고된지 바로 느껴져요.

    • 연채온작가2026.11.01

      망고 진은 맨살에 닿으면 데인 것처럼 일어나요. 도티 손등은 쉰 해 농장 일의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