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88자)

꼭지 냄새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새벽 다섯 시 반⁠, 연솔래는 사다리 위에서 망고 꼭지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송진처럼 매운 냄새 밑으로 단내가 얇게 깔려 있었다⁠. 이만하면 딸 때였다⁠. 꼭지를 손가락 한 마디쯤 남기고 꺾자 하얀 진이 방울져 맺혔고⁠, 솔래는 망고를 거꾸로 들어 수확 보조차의 물통에 담갔다⁠. 세제를 푼 물이 진을 씻어 냈다⁠. 수확 보조차는 트랙터 뒤에 긴 팔과 물통을 단 기계였고⁠, 피커 여섯이 팔 양옆에 붙어 따라 걸었다⁠.

퀸즐랜드 북쪽 고원의 농사 마을 마리바⁠, 펜로즈 농장의 수확 첫날이었다⁠. 열두 줄로 늘어선 망고 나무가 천이백 그루 남짓이었고⁠, 줄 사이 풀밭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를 넘기도 전에 휴대전화 날씨 앱은 「⁠26도 · 오후 최고 36도⁠」를 띄웠다⁠. 솔래는 목에 두른 땀수건으로 턱을 훔치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아⁠.⁠”

옆 사다리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어젯밤 숙소에 새로 들어온 한국 남자⁠, 배무건이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흰 셔츠에⁠, 창고 못에 매달려 있던 낡은 밀짚모자를 얻어 썼다⁠. 무건은 방금 딴 망고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는데⁠, 꺾은 꼭지에서 솟은 진이 손목을 타고 팔뚝 안쪽까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꼭지를 위로 들면 안 돼요⁠. 거꾸로요⁠, 거꾸로⁠.⁠”

“⁠거꾸로 들고 있었는데요⁠.⁠”

“⁠지금 하늘 보고 있잖아요⁠, 꼭지가⁠.⁠”

무건이 망고를 내려다보았다⁠. 꼭지가 해를 향해 있었다⁠. 무건은 망고를 천천히 뒤집었지만⁠, 진은 이미 다 쏟아진 뒤였다⁠.

솔래는 사다리를 내려가 무건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트랙터 뒤 물통 옆에 비누와 물병이 있었다⁠. 팔뚝 안쪽이 벌써 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솔래는 물을 붓고 비누 거품을 내어 진이 흐른 자리를 따라 문질렀다⁠. 망고 진에서는 소나무 껍질을 벗겼을 때 같은 냄새가 났다⁠. 손끝에 닿는 무건의 손바닥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첫마디에만 펜을 오래 쥔 자리가 살짝 단단했다⁠.

“⁠옻 같은 거예요⁠. 오늘 밤에 가려울 거예요⁠. 긁으면 더 번지고요⁠.⁠”

“⁠알겠습니다⁠.⁠”

“⁠여기 처음이죠⁠? 다른 농장은 어디 있었어요⁠?⁠”

“⁠처음입니다⁠. 농장도⁠, 호주도요⁠.⁠”

무건은 대답하면서 솔래의 손을 보지 않고 물통 속에서 떠오르는 망고들을 보았다⁠. 망고는 세제 물에 반쯤 잠겨 천천히 돌았다⁠.

뒤에서 개가 짖었다⁠. 붉은 털의 목양견 버터가 줄 사이를 뛰어오고⁠, 농장 주인 아치 펜로즈가 지팡이 대신 전지가위를 들고 뒤따라왔다⁠. 일흔셋이라는데 걸음은 솔래보다 빨랐다⁠. 아치는 무건의 붉은 팔을 보고⁠, 솔래가 쥐고 있는 무건의 손바닥을 보고⁠, 혀를 찼다⁠.

“⁠이야⁠, 이 손 봐라⁠. 비누로만 쥐어 본 손이네⁠. 너 오늘부터 비누다⁠.⁠”

무건이 솔래를 보았다⁠. 솔래는 웃음을 참으며 옮겨 주었다⁠.

“⁠손이 고와서 비누래요⁠. 오늘부터 이름이 비누래요⁠.⁠”

“⁠제 이름은 무건입니다⁠.⁠”

아치는 무건의 영어를 다 듣고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비누⁠. 오늘 하루 버티면 이름 바꿔 주지⁠.⁠”

*

오전 열 시⁠, 수확 보조차가 망고를 가득 싣고 포장 창고로 돌아가자 피커들도 새참을 먹으러 따라 들어갔다⁠. 창고 안에서는 망고 냄새가 공기처럼 떠다녔다⁠. 세척대에서 물이 흐르고⁠, 선별대 위로 망고가 굴러가고⁠, 끝에서는 열여섯 개들이 상자가 하나씩 닫혔다⁠. 창고 반장 마고가 선별대 앞에서 손뼉을 쳤다⁠.

“⁠새로 온 사람⁠? 나는 마고야⁠.⁠”

“⁠망고요⁠?⁠”

무건이 되물었고⁠, 선별대에 서 있던 대만 커플과 프랑스 청년이 한꺼번에 웃었다⁠. 마고는 이 농장에서 망고를 망고라고 부르는 사람과 마고를 망고라고 부르는 사람이 일 년에 서른 명은 넘는다고 했다⁠.

선별대 맨 끝에서 편주홍이 손을 흔들었다⁠. 솔래와 같은 숙소를 쓰는 스물아홉 살 남자였다⁠. 공대를 나와 한국에서 취업에 여섯 번 떨어지고 워홀 2년째라고 했는데⁠, 처음 만난 날 자기소개도 이 순서였다⁠. 주홍은 망고나무 가지에서 떼어 온 잎사귀 뭉치를 들고 있었다⁠. 잎사귀를 실로 엮은 듯 둥글게 말아 놓은 개미집이었다⁠. 주홍은 거기서 녹색 개미 한 마리를 집어 꽁무니를 혀끝에 댔다⁠.

“⁠레몬 맛이에요⁠. 단백질이고요⁠. 공짜예요⁠.⁠”

“⁠주홍 씨⁠, 그거 오늘 몇 마리째예요⁠?⁠”

“⁠세지 마요⁠. 세면 간식이 아니라 식사가 돼요⁠.⁠”

무건이 개미집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정말로 한 마리를 맛보았다⁠.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주홍은 신이 나서 무건의 어깨를 두드렸다⁠.

“⁠환영합니다⁠. 마리바 짠테크 동호회 첫 회원이세요⁠.⁠”

솔래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엄마였다⁠.

「⁠딸 망고는 많이 땄나 엄마는 오늘 영숙이랑 등산 왔다 사진 보내라 망고 말고 너⁠」

솔래는 땀범벅인 얼굴로 사진을 찍지 않고 망고 사진만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너는⁠」 솔래는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비자 앱에는 다른 숫자가 떠 있었다⁠. 세컨드 비자를 받으려면 시골 농장에서 여든여덟 날을 일해야 했고⁠, 솔래는 바나나 농장에서 스무 날⁠, 여기서 열나흘을 채웠다⁠. 쉰넷 날이 남아 있었다⁠. 망고 철이 끝나는 1월 말과 거의 같은 날이었다⁠.

*

오후 두 시⁠, 흰 사륜구동차 한 대가 흙먼지를 끌며 농장 사무실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마흔 중반쯤이었고⁠, 이 더위에 남색 면바지를 입고 소매 긴 셔츠의 단추를 손목까지 채웠다⁠. 한 손에는 서류 봉투를⁠, 다른 손에는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들었다⁠. 흙 시료를 뽑는 막대였다⁠. 남자는 사무실에서 도티 펜로즈와 삼십 분을 이야기하고 나와 곧장 포장 창고로 들어왔다⁠.

“⁠한국 분들 계시죠⁠? 반갑습니다⁠. 운해식품 해외조달팀장 채광필입니다⁠.⁠”

선별대에 있던 한국 피커는 셋이었다⁠. 주홍은 운해라는 말에 허리를 폈고⁠, 솔래는 망고를 상자에 넣던 손을 멈췄다⁠. 무건은 선별대 맨 안쪽에서 등을 돌린 채 상자를 접고 있었다⁠. 운해는 한국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었다⁠. 라면도⁠, 즉석밥도⁠, 마트 과일 코너의 수입 열대과일도 운해였다⁠.

채광필은 선별대를 따라 걸으며 망고를 하나씩 들어 보았다⁠. 이 농장 망고는 약을 치지 않아서 껍질에 검은 점이 박힌 것이 많았다⁠. 채광필은 점박이 망고 하나를 들어 불빛에 비춰 보더니 웃었다⁠.

“⁠이게 상품이에요⁠? 한국 마트에선 이거 진열도 못 해요⁠.⁠”

“⁠껍질 보고 사는 분들한텐 그렇겠죠⁠.⁠”

솔래의 말이 먼저 나갔다⁠. 채광필이 솔래를 돌아보았다⁠.

“⁠그럼 뭐 보고 삽니까⁠?⁠”

솔래는 채광필의 손에서 망고를 받아 들고 과도로 꼭지 둘레를 얕게 돌려 땄다⁠. 즙이 손목으로 흘렀다⁠. 솔래는 망고를 채광필의 코앞에 내밀었다⁠.

“⁠껍질 말고 꼭지를 맡아 보세요⁠.⁠”

채광필은 잠깐 망설이다가 코를 댔다⁠. 눈썹이 한 번 움직였다⁠. 송진 냄새 뒤로 꿀 같은 단내가 밀려왔을 것이다⁠. 솔래는 채광필의 눈썹을 보고 이겼다고 생각했다⁠.

“⁠좋네요⁠. 냄새 좋습니다⁠.⁠”

채광필은 손수건을 꺼내 코끝을 닦았다⁠.

“⁠그런데 냄새로 은행 빚은 못 갚아요⁠. 이 농장⁠, 1월 31일까지 은행에 사십이만 달러를 넣어야 합니다⁠. 못 넣으면 우리가 사기로 했고요⁠. 사모님이 다 아세요⁠.⁠”

창고 안의 물소리만 남았다⁠. 대만 커플이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솔래를 보았다⁠. 솔래는 영어로 옮기지 않았다⁠.

“⁠사면 뭘 하시는데요⁠?⁠”

“⁠농사를 제대로 짓죠⁠. 유기농으로는 나무 한 그루에서 이만큼 나와요⁠.⁠” 채광필이 두 손으로 상자 하나 크기를 그렸다⁠. “⁠비료 제대로 주고 약 제대로 치면 두 배가 나옵니다⁠. 점도 없고요⁠. 국제 망고 시세가 세 해째 떨어지는데 반만 따는 농사를 누가 합니까⁠?⁠”

“⁠그럼 이 냄새는요⁠?⁠”

“⁠냄새는 광고에 넣으면 돼요⁠. ‘⁠호주 고원의 햇살 냄새⁠.⁠’ 우리 마케팅팀이 잘 씁니다⁠.⁠”

채광필은 선별대 위의 망고들을 한 번 둘러보고⁠, 한국 피커 셋을 차례로 보았다⁠. 마지막에 솔래를 보며 말했다⁠.

“⁠아⁠, 여든여덟 날 채우시는 분들 계시죠⁠? 2월부터는 서명을 우리가 합니다⁠. 새 주인이 다 서명해 드릴지는 장담 못 하고요⁠. 잘 생각들 해 보세요⁠. 1월 31일입니다⁠.⁠”

채광필은 창고를 나가다가 선별대 맨 안쪽에서 걸음을 늦췄다⁠. 상자를 접던 무건이 고개를 숙였다⁠. 채광필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솔래는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지만⁠, 같은 한국 사람끼리 하는 인사로 여겼다⁠.

*

해가 기울 무렵⁠, 솔래와 무건은 7번 줄 끝에서 마지막 수확 상자를 채웠다⁠. 7번 줄은 농장에서 가장 오래된 줄이었다⁠. 둥치가 어른 허리보다 굵었고⁠, 가지마다 녹색 개미가 잎을 말아 집을 지어 놓았다⁠. 무건은 오후 내내 말이 없다가 사다리를 내려오면서 물었다⁠.

“⁠아까 그분 말⁠, 틀린 데가 있었습니까⁠? 반만 나온다는 거요⁠.⁠”

“⁠없어요⁠. 진짜 반쯤 나와요⁠.⁠”

“⁠그럼 왜 그렇게 화를 내셨어요⁠?⁠”

솔래는 상자 뚜껑을 덮다 말고 망고 하나를 집어 무건에게 내밀었다⁠. 무건이 받아 들자 솔래는 꼭지를 가리켰다⁠. 무건이 코를 대고 오래 맡았다⁠.

“⁠한국에서 과일 고르는 일을 했어요⁠. 하루에 몇백 상자씩 꼭지 냄새만 맡았어요⁠. 유기농 딱지 붙은 상자도 맡았고요⁠.⁠” 솔래는 땀수건을 풀어 손을 닦았다⁠. “⁠딱지는 유기농인데 냄새는 아닌 상자가 있었어요⁠. 그거 말했다가 그만뒀어요⁠.⁠”

“⁠냄새가 달랐습니까⁠?⁠”

“⁠비료 냄새가 났어요⁠. 지린 냄새⁠.⁠”

무건은 망고를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버터가 줄 끝에서 짖었고⁠, 아치가 트랙터 위에서 비누는 오늘 이름을 못 바꾼다고 소리쳤다⁠. 무건은 망고를 상자에 넣지 않고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

밤 열 시⁠, 피커들이 사는 집은 기둥 위에 올린 낡은 나무 집이었다⁠. 우기에 물이 차오를 때를 대비해 바닥을 사람 키만큼 띄워 놓았고⁠, 바닥 밑에서는 두꺼비가 울었다⁠. 무건은 2층 끝방 침대에 앉아 팔뚝에 연고를 발랐다⁠. 오후보다 붉은 기가 넓게 번져 있었다⁠. 연고 냄새 밑에서 망고 진 냄새가 아직 났다⁠. 씻어도⁠, 비누로 다시 씻어도 빠지지 않는 냄새였다⁠.

현관 계단에서 웃음소리가 올라왔다⁠. 솔래와 주홍이 맥주 한 캔을 반씩 나누어 마시며 개미를 몇 마리까지 먹어도 되는지 다투고 있었다⁠. 주홍은 하루 서른 마리면 닭 가슴살 하나라고 우겼고⁠, 솔래는 닭 가슴살 계산을 누가 했느냐고 따졌다⁠. 무건은 창문을 닫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본부장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회장님께서 첫날 보고를 기다리십니다⁠. 계약서는 사모님 서명본 그대로 받아 왔습니다⁠. 채광필 드림⁠」

무건은 답장을 쓰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 화면에 파일 하나가 있었다⁠. 「⁠펜로즈 농장 전환 계획 — 운해식품 전략기획실 배무건⁠」 서른두 장짜리 문서였다⁠. 땅값과 나무 수⁠, 유기농을 접고 화학 비료로 바꿨을 때의 수확량⁠, 세 해 안에 열대과일 사업부 적자를 메우는 길이 표와 그래프로 들어 있었다⁠. 서울에서 쓸 때는 한 글자도 틀린 데가 없는 문서였다⁠.

무건은 맨 뒤 빈 페이지를 열고 커서를 깜박이게 두었다⁠. 오늘 하루 딴 망고는 백예순 개였다⁠. 솔래는 같은 시간에 사백 개 넘게 땄다⁠. 무건은 두 숫자를 나란히 적으려다 손을 멈추고⁠, 키보드 위에 올린 제 손등의 냄새를 맡았다⁠. 송진 냄새 밑으로 아주 희미하게⁠, 비누 냄새가 났다⁠. 솔래가 쥐고 문지르던 자리였다⁠.

계단 아래에서 주홍이 소리쳤다⁠.

“⁠비누 씨⁠! 개미 드시러 안 내려와요⁠?⁠”

무건은 노트북을 덮지 않은 채 일어났다⁠. 화면에서 커서가 계속 깜박였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