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40자)

숫자로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30일 새벽 다섯 시⁠, 아치와 도티는 10번 줄을 걸었다⁠. 솔래는 7번 줄 사다리 위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이번 철 마지막 수확을 앞둔 아침이었다⁠. 10번 줄의 나무들은 폭풍에 꺾인 가지를 잘라 낸 자리마다 하얀 칠을 하고 있었다⁠. 아치가 둥치를 하나씩 손바닥으로 쳤다⁠. 도티는 아치보다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줄 끝에서 아치가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바람이 말소리를 7번 줄까지 실어 왔다⁠.

“⁠팔아라⁠.⁠”

도티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넣었으니까 당신이 팔아라⁠. 나는 구덩이만 기억하겠다⁠. 내가 판 구덩이가 마흔여섯 해 동안 안 무너졌다는 거⁠.⁠”

도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치 옆으로 가서 팔짱을 끼었다⁠. 둘은 줄 끝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솔래는 사다리 위에서 망고를 따다 말고 한참 손을 멈췄다⁠. 꼭지에서 진이 떨어져 손목을 타고 흘렀다⁠. 솔래는 씻지 않았다⁠. 진이 닿은 자리가 따끔거렸다⁠. 석 달 동안 수없이 덴 자리라 이제는 붉어지지도 않았다⁠. 솔래는 따끔거리는 손목을 그대로 두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마지막 수확의 첫 망고였다⁠. 꼭지에서 꿀 냄새가 짙었다⁠.

*

정오⁠, 포장 창고는 선별대를 벽으로 밀어 놓고 가운데에 긴 탁자를 놓았다⁠. 지붕의 뚫린 자리는 방수포로 덮었다⁠. 방수포 틈으로 햇빛이 몇 줄기 들어와 탁자 위에 떨어졌다⁠. 탁자 한편에 회장과 채광필이 앉았다⁠. 맞은편에 아치와 도티⁠, 솔래와 무건이 앉았다⁠. 주홍은 노트북을 들고 솔래 뒤에 섰고⁠, 레 할머니와 개빈은 탁자 끝에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피커들과 회관 부엌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탁자를 둘러쌌다⁠. 마고는 선별대 위에 걸터앉았다⁠. 버터는 탁자 밑에 누웠다⁠. 정확히 회장과 아치 사이였다⁠.

회장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금이 벗겨진 낡은 시계였다⁠. 청과시장에서 처음 산 시계라고⁠, 무건이 솔래에게 귀띔했다⁠.

“⁠말해라⁠.⁠”

솔래가 종이 한 장을 회장 앞에 밀었다⁠. 무건과 주홍이 사흘 밤을 새운 종이였다⁠. 솔래는 첫 줄부터 읽었다⁠. 사십이만 달러⁠. 나무 맡기로 들어온 돈⁠. 아침바구니가 아홉 줄 물량을 미리 사는 돈⁠. 남은 팔만 달러⁠.

“⁠팔만은 어디서 나오냐⁠?⁠”

“⁠지금 나와요⁠.⁠”

솔래는 휴대전화를 탁자 가운데 세웠다⁠. 라이브 단추를 눌렀다⁠. 한국은 오전 열한 시였다⁠. 화면에 순자네 망고가 떴다⁠. 주홍이 아침에 찍어 둔 영상을 띄운 것이었다⁠. 접속한 사람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오백⁠, 천⁠, 이천⁠.

“⁠안녕하세요⁠. 마리바 펜로즈 농장이에요⁠. 오늘은 나무 대신 탁자를 보여 드릴게요⁠.⁠”

솔래는 카메라를 돌려 탁자 맞은편을 비췄다⁠. 회장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 댓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헐 운해 회장⁠」「⁠진짜임⁠?⁠」「⁠할아버지 망고 맛있어요⁠?⁠」「⁠회장님 라면 잘 먹고 있어요⁠」

회장은 화면을 보고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솔래는 카메라를 다시 자기에게 돌렸다⁠.

“⁠다들 이틀 전에 물어보셨죠⁠. 내년에도 같은 나무 맡을 수 있느냐고⁠, 미리 내도 되느냐고요⁠. 오늘 받아요⁠. 지금 받아요⁠. 다음 철 거요⁠. 이 돈이 모이면⁠, 이 농장이 다음 철에도 펜로즈 농장으로 남아요⁠.⁠”

댓글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다시 쏟아졌다⁠.

「⁠보냈어요⁠」「⁠퇴사 기념수 내년 거 입금⁠」「⁠솔래1 솔래2 솔래3 솔래4 다 냈다 엄마가⁠」「⁠저 사실 운해 나무 맡았었는데 환불하고 이쪽으로 옴⁠」「⁠할렐루야 내년 거 교회에서 모아서 보냄⁠」「⁠영숙이 냉동 내년 것도 냉동⁠」

도티가 휴대전화로 은행 앱을 열었다⁠. 숫자가 바뀌었다⁠. 바뀌고⁠, 또 바뀌었다⁠. 도티는 화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숫자를 보았다⁠. 회장도 보았다⁠. 이만⁠, 사만⁠, 육만⁠. 주홍이 노트북으로 같은 숫자를 계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십 분 만에 숫자는 칠만을 넘었다⁠. 칠만 오천⁠. 칠만 구천⁠.

팔만 이천⁠.

창고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프랑스 청년이었다⁠. 대만 커플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레 할머니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노인은 탁자 너머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탁자 밑에서 버터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회장의 구두에 턱을 올렸다가 아치의 장화에 턱을 올렸다가 다시 누웠다⁠. 마고가 선별대 위에서 중얼거렸다⁠. 저 개는 아직도 편을 못 골랐네⁠.

주홍이 솔래의 어깨너머로 속삭였다⁠.

“⁠누나⁠, 지금 라면으로 하면 몇 봉지인지 말해도 돼요⁠?⁠”

“⁠안 돼요⁠.⁠”

“⁠네⁠. 그냥 많아요⁠. 엄청 많아요⁠.⁠”

채광필이 손을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만 짚겠습니다⁠.⁠”

창고가 조용해졌다⁠. 채광필은 도티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이 팔만 이천은 다음 철 망고 값입니다⁠. 다음 철에 망고를 못 보내면 돌려줘야 하는 돈이에요⁠. 다시 말해 빚입니다⁠. 펜로즈 농장은 지금 은행 빚을⁠, 아니 저희 빚을⁠, 한국 사람 이천 명에게 진 새 빚으로 갚으시겠다는 겁니다⁠.⁠” 채광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음 철에 폭풍이 또 오면요⁠? 두 해 전처럼 나무 삼백 그루가 꺾이면요⁠? 그때는 이천 명에게 돌려줄 돈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때 이 농장을 또 사러 와야 할 겁니다⁠. 이번에는 더 싸게요⁠.⁠”

솔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채광필의 말이 맞았다⁠. 라이브 화면에서 댓글이 계속 올라갔다⁠. 채광필의 영어를 알아들은 누군가가 「⁠팀장 말 맞는 말인데⁠」라고 썼고⁠, 바로 밑으로 「⁠그래도 냄⁠」「⁠폭풍 오면 또 냄⁠」이 이어졌다⁠.

회장이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채광필이 입을 닫았다⁠.

“⁠채 팀장 말이 맞다⁠.⁠” 회장은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가씨 숫자도 맞다⁠. 둘 다 맞으면 장사는 조건으로 한다⁠.⁠”

회장은 아치를 보고⁠, 도티를 보고⁠, 마지막으로 솔래를 보았다⁠.

“⁠선매권은 거둔다⁠. 빚 문서는 내가 쥐고 있되⁠, 다섯 해로 나눠서 받는다⁠. 이자는 은행 반값이다⁠. 미리 받은 팔만 이천은 빚 갚는 데 쓰지 말고 영감 통장에 둬라⁠. 다음 철 폭풍 오면 그 돈으로 이천 명한테 망고를 보내⁠. 그건 내가 정한 조건이 아니라 장사꾼이 지키는 순서다⁠.⁠”

도티가 숨을 들이마셨다⁠. 솔래가 옮기는 동안 아치의 손이 탁자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대신 팔만은 다른 데서 낸다⁠. 10번부터 12번 줄을 내가 산다⁠. 이제 유기농 자격도 없는 땅이니 시세대로 산다⁠. 그 땅은 운해 농장이 된다⁠. 개빈네 땅이랑 붙여서⁠.⁠” 회장은 개빈을 보았다⁠. 개빈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펜로즈 농장 아홉 줄이랑 이 동네 작은 농장들 유기농 물량은 운해가 다섯 해 동안 산다⁠. 제값으로⁠. 검역 시설도 열어 준다⁠. 채 팀장⁠, 네 팀이 맡아라⁠. 물량이 생기니 팀은 안 없어진다⁠.⁠”

채광필이 회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솔래는 채광필이 숨을 내쉬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마지막 조건⁠.⁠” 회장이 솔래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가씨가 서울로 온다⁠. 운해 유기농 사업을 맡는다⁠. 나무 맡기는 운해 이름으로 한다⁠. 운해 한 그루⁠. 반값 말고 제값으로⁠. 이천 명을 이만 명으로 만들어라⁠. 이 동네 냄새를 한국 전체에 팔아라⁠.⁠”

창고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라이브 댓글만 빠르게 올라갔다⁠. 「⁠서울 온대⁠」「⁠솔래 님 운해 가요⁠?⁠」「⁠가지 마요⁠」「⁠가요 성공해요⁠」

“⁠내일 정오까지 대답해라⁠. 선매 기한이 내일이니까⁠.⁠” 회장은 일어났다⁠. “⁠조건 하나라도 안 받으면⁠, 나는 계약서대로 한다⁠.⁠”

*

회장의 차가 떠나기 전⁠, 채광필이 창고 앞에서 솔래를 불러 세웠다⁠. 흰 사륜구동차 문을 열어 둔 채였다⁠. 운전석 햇빛 가리개에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교복 입은 여자아이가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저는 졌으니까요⁠.⁠”

“⁠팀장님 팀은 살았잖아요⁠.⁠”

“⁠솔래 씨 덕분에 산 겁니다⁠. 그래서 더 고맙다고 못 합니다⁠.⁠” 채광필은 햇빛 가리개의 사진을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제 딸이 솔래 씨 라이브를 봅니다⁠. 저한테 그러더군요⁠. 아빠 회사가 나쁜 편이냐고⁠. 대답을 못 했습니다⁠.⁠”

“⁠지금은 뭐라고 하실 거예요⁠?⁠”

“⁠다섯 해 동안 제값 주고 사는 편이라고 하죠⁠.⁠” 채광필은 차에 올라탔다가 창문을 내렸다⁠. “⁠솔래 씨⁠, 내일 정오입니다⁠. 날짜는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차가 떠났다⁠. 솔래는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서 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저녁이었다⁠. 엄마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뒤에서 생선 장수가 떨이를 외쳤다⁠.

“⁠엄마⁠, 서울 오래⁠. 운해에서⁠. 팀장 자리 준대⁠.⁠”

“⁠라이브 봤다⁠. 영숙이가 소리 질렀다⁠. 솔래 서울 온다고⁠.⁠”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엄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생선 장수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너 냄새 나는 데 가서 맡고 오라고 했지⁠. 냄새 파는 데 가라고 했냐⁠?⁠”

솔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웃었다⁠. 웃다가 목이 메었다⁠.

“⁠엄마 말은 늘 이상해⁠.⁠”

“⁠늘 맞지⁠. 고등어 두 마리 샀다⁠. 끊는다⁠.⁠”

*

해 질 녘⁠, 주홍은 선별대 끝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창고는 텅 비었다⁠. 탁자도 치웠다⁠. 솔래가 빈 상자를 쌓고 있었다⁠.

“⁠누나⁠, 가요⁠?⁠”

“⁠모르겠어요⁠.⁠”

“⁠제가 계산해 봤는데요⁠.⁠” 주홍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니다⁠. 이번엔 계산 안 할게요⁠. 계산하면 누나가 가야 되는 걸로 나와요⁠. 그게 싫어서요⁠.⁠”

솔래는 상자를 쌓다가 웃었다⁠. 주홍도 웃었다⁠. 주홍이 녹색 개미 한 마리를 집어 솔래에게 내밀었다⁠. 솔래는 받아서 꽁무니를 혀끝에 댔다⁠. 레몬 맛이었다⁠. 석 달 만에 처음 먹어 보는 개미였다⁠.

“⁠진짜 레몬 맛이네요⁠.⁠”

“⁠거봐요⁠. 공짜예요⁠.⁠”

*

밤 열 시⁠, 7번 줄 첫 나무 아래에 솔래와 무건이 앉았다⁠. 반딧불이 여전히 날았다⁠. 솔래는 멜빵바지 주머니 속의 쪼그라든 망고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조건 다 좋아요⁠. 농장은 살고⁠, 팀장님 팀도 살고⁠, 레 할머니네도 살고⁠. 세 줄만 빼고요⁠. 그리고 나무 맡기 이름만 빼고요⁠.⁠”

“⁠이름만이 아니에요⁠.⁠” 무건이 말했다⁠. “⁠솔래 씨가 서울 가서 맡으면 솔래 씨 거예요⁠. 할아버지는 좋은 걸 보면 사시지만⁠, 산 걸 망가뜨리지는 않으세요⁠. 이천 명이 이만 명이 됩니다⁠. 이 동네 냄새를 한국 전체가 맡아요⁠. 제가 서른두 장으로 못 한 걸 솔래 씨가 해요⁠.⁠”

“⁠그럼 무건 씨는요⁠?⁠”

“⁠저는 여기서 땁니다⁠. 서울엔 못 가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정하셨어요⁠.⁠” 무건은 손바닥을 펴 솔래에게 보였다⁠. 반딧불이 하나가 손바닥 위를 지나갔다⁠. “⁠레 할머니가 다음 철에도 시급 주신대요⁠. 영감님이 아직 비누라고 부르시지만⁠, 사다리는 고쳐 박을 줄 알아요⁠.⁠”

“⁠무건 씨가 여기 있고 제가 서울 가면요⁠?⁠”

무건은 대답하기 전에 오래 숨을 쉬었다⁠. 송진 냄새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서울 가요⁠. 가서 해요⁠. 솔래 씨는 냄새를 맡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한 동네 말고⁠, 한 나라를요⁠.⁠”

솔래는 무건을 보았다⁠. 무건은 솔래를 보지 않고 7번 줄 끝을 보았다⁠. 줄 끝 어둠 속에서 할렐루야 나무의 잘린 가지 자리가 하얗게 빛났다⁠. 솔래는 주머니 속의 망고를 꽉 쥐었다⁠. 쪼그라든 껍질이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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