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86자)

마지막 나무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31일 새벽 다섯 시⁠, 7번 줄에 남은 망고는 마흔 번째 나무에 달린 열한 개가 다였다⁠. 솔래는 사다리를 마흔 번째 나무에 세웠다⁠. 줄 맨 끝⁠, 개빈네 땅과 맞닿은 자리였다⁠. 다른 나무들보다 키가 작고 가지가 낮았다⁠. 이 나무만 이름표가 가지 안쪽 깊숙이 매달려 있어서 솔래는 석 달 동안 한 번도 이름표를 똑바로 본 적이 없었다⁠. 맡은 사람의 아침 사진도 보내 달라는 말이 없었다⁠.

솔래는 가지를 헤치고 이름표를 끌어냈다⁠. 코팅한 종이가 햇빛에 반짝였다⁠. 영어로 한 낱말이 적혀 있었다⁠.

「⁠SOAP⁠」

비누였다⁠.

솔래는 사다리 위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줄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무건이 사다리를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레 할머니네 아침 수확 전에 펜로즈 농장 마지막 수확을 도우러 온 참이었다⁠. 솔래가 이름표를 흔들자 무건이 걸음을 멈췄다⁠.

“⁠이거 무건 씨죠⁠?⁠”

“⁠들켰네요⁠.⁠”

“⁠언제요⁠?⁠”

“⁠첫날 밤⁠, 마흔 번째로요⁠. 새벽 네 시 반에 넣었습니다⁠. 사흘이 아니라 여덟 시간이었던 날이요⁠.⁠” 무건은 사다리를 내려놓고 밀짚모자를 벗었다⁠. “⁠사진은 안 받았습니다⁠. 매일 아침 제 눈으로 봤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이름 다 읽었는데요⁠. 비누면 바로 뺐을 텐데⁠.⁠”

뒤에서 장화 소리가 났다⁠. 아치가 버터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아치는 솔래 손의 이름표를 보더니 혀를 찼다⁠.

“⁠그건 둔다고 했다⁠.⁠”

“⁠알고 계셨어요⁠?⁠”

“⁠돋보기로 다 읽었다⁠. 이 나라에 비누라고 나무 이름 붙일 놈이 하나밖에 더 있냐⁠.⁠” 아치는 마흔 번째 나무의 둥치를 손바닥으로 쳤다⁠. “⁠이 나무가 제일 늦게 익는다⁠. 제일 늦게 오는 놈한테 맞는 나무다⁠.⁠”

솔래와 무건은 마흔 번째 나무의 마지막 망고 열한 개를 둘이서 땄다⁠. 솔래가 꼭지를 맡고⁠, 무건이 꺾었다⁠. 무건은 진이 떨어지기 전에 망고를 뒤집었다⁠. 열 개를 바구니에 넣고⁠, 열한 번째는 무건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솔래는 보고도 모른 척했다⁠.

수확 보조차가 마지막 망고를 싣고 포장 창고로 떠났다⁠. 마고가 창고 문 앞에서 종을 울렸다⁠. 이번 철이 끝났다는 종이었다⁠. 피커들이 사다리를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대만 커플은 다음 주에 남쪽 섬 태즈메이니아의 체리 농장으로 간다고 했고⁠, 프랑스 청년은 아직 아무 데도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레 할머니네 농장을 자꾸 돌아보았다⁠. 레 할머니는 내년에도 오면 시급을 올려 주겠다고 했다⁠. 프랑스 청년은 대답 대신 망고를 똑같은 두께로 써는 시늉을 했다⁠.

*

아침 여덟 시⁠, 도티가 농장 사무실에서 솔래를 불렀다⁠.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세컨드 비자에 필요한 여든여덟 날을 확인하는 고용주 서명 서류였다⁠. 도티는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여든여섯 날이에요⁠. 브리즈번 이틀⁠, 폭풍 날 하루⁠, 심사 날 하루가 빠졌어요⁠. 그 가운데 둘은 거짓말로 채울 수 있어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솔래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여든여섯⁠. 이틀이 모자랐다⁠. 이틀만 채우면 한 해를 더 이 나라에 있을 수 있었다⁠. 이틀을 거짓말로 채우면⁠, 솔래는 딱지와 냄새가 다른 상자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거짓말은 안 할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도티는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은행 편지를 넣던 서랍이었다⁠. 오늘은 은행 편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 이틀은 영감한테 일을 받아요⁠. 망고는 끝났지만 일은 안 끝났어요⁠.⁠”

*

정오⁠, 7번 줄 첫 나무 아래에 접이식 탁자 하나가 놓였다⁠. 순자네 망고의 그늘이었다⁠. 회장은 탁자 한편에 앉았다⁠. 채광필이 서류 봉투를 들고 회장 뒤에 서 있었다⁠. 솔래는 맞은편에 앉았다⁠. 아치와 도티⁠, 무건과 주홍⁠, 레 할머니가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에 앉았다⁠. 끼어들지 말자고 아침에 정했다⁠. 솔래 혼자 대답하기로 했다⁠.

회장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 정각이었다⁠.

“⁠말해라⁠.⁠”

“⁠세 줄은 파세요⁠. 시세대로 사 주세요⁠.⁠” 솔래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손등에 진에 덴 자국이 갈색으로 점점이 박혀 있었다⁠. “⁠빚을 다섯 해로 나누는 것도 받을게요⁠. 아홉 줄이랑 동네 농장들 물량을 운해가 다섯 해 동안 제값에 사 주시는 것도요⁠. 검역 시설 여는 것도요⁠. 다 받아요⁠. 고맙습니다⁠.⁠”

“⁠나머지 둘⁠.⁠”

“⁠서울은 안 가요⁠. 그리고 나무 맡기는 운해 이름으로 안 해요⁠.⁠”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뒤에 서 있던 채광필이 서류 봉투를 고쳐 쥐었다⁠.

“⁠조건 하나라도 안 받으면 계약서대로 한다고 했다⁠.⁠”

“⁠들었어요⁠. 그럼 계약서대로 하세요⁠.⁠” 솔래는 숨을 고르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러면 회장님은 세 줄 대신 열두 줄을 사세요⁠. 그런데 어제 다음 철 값을 미리 낸 이천 명은 조건을 달았어요⁠. 펜로즈 농장이 펜로즈 농장으로 남을 때만 쓰라고요⁠. 운해 땅이 되면 돌려 달래요⁠. 댓글에 다 있어요⁠. 사모님이 아침에 다 읽으셨어요⁠.⁠”

솔래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놓고 회장 앞으로 밀었다⁠. 화면 가득 댓글이 이어져 있었다⁠. 「⁠펜로즈 아니면 환불⁠」「⁠운해 되면 환불해 주세요 라면은 계속 먹을게요⁠」「⁠솔래 님 없으면 안 맡음⁠」

“⁠회장님 숫자에서 이천 명을 빼 보세요⁠. 열두 줄을 다 가지시면 나무는 늘어도 맡는 사람은 없어요⁠. 회장님이 서울에서 만드실 유기농 사업에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어요⁠. 운해 이름이 아니라 이 동네 이름을 보고 온 사람들이요⁠.⁠”

회장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끝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아가씨는 운해한테 뭘 주냐⁠? 다 받기만 하냐⁠?⁠”

“⁠물량을 드리죠⁠. 아홉 줄이랑 동네 농장들 거요⁠. 한국에 파는 건 운해가 하세요⁠. 말린 거⁠, 냉동⁠, 생망고까지요⁠. 운해 상자에 넣으셔도 돼요⁠. 대신 상자에 이 동네 이름이랑 나무 이름을 넣어 주세요⁠. 운해 한 그루 말고⁠, 순자네 망고⁠, 퇴사 기념수⁠, 할렐루야요⁠.⁠” 솔래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회장님 코가 필요하시면 제가 가끔 서울에 맡으러 갈게요⁠. 출장비는 망고로 받고요⁠.⁠”

회장은 웃지 않았다⁠. 대신 첫 나무의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이번 철 망고는 다 땄고⁠, 가지 끝에 다음 철 꽃눈이 작게 맺혀 있었다⁠. 회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가장 낮은 가지의 잎을 하나 따서 손바닥에 비볐다⁠. 코에 댔다⁠. 오래 맡았다⁠.

“⁠채 팀장⁠.⁠”

“⁠네⁠, 회장님⁠.⁠”

“⁠선매권 포기 서류⁠.⁠”

채광필이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미리 준비해 둔 종이였다⁠. 솔래는 채광필이 포기 서류를 들고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채광필은 솔래의 눈을 보고 아주 작게 어깨를 올렸다⁠. 날짜를 마지막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른 날짜도 준비해 둔다는 얼굴이었다⁠.

회장은 서명했다⁠. 서명란의 글씨는 커다랗고 모났다⁠. 회장은 펜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무건을 돌아보았다⁠.

“⁠무건아⁠.⁠”

무건이 일어났다⁠.

“⁠다섯 해 뒤에 숫자 들고 와라⁠. 이 동네 숫자⁠. 그때 내가 살아 있으면 들어 주마⁠. 지분은 못 돌려준다⁠. 네가 버린 거다⁠.⁠”

“⁠네⁠.⁠”

“⁠손은 계속 그렇게 해 둬라⁠.⁠”

회장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7번 줄을 걸어 나갔다⁠. 첫 나무 앞에서 멈추더니 이름표 하나를 손끝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순자네 망고⁠. 회장은 이름표를 놓고 나갔다⁠. 버터가 회장을 농장 문까지 따라갔다가⁠, 이번에는 바로 돌아왔다⁠.

회장의 차가 큰길로 사라진 뒤에도 솔래는 탁자 앞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가 풀려 있었다⁠. 아치가 그늘에서 걸어와 솔래 옆으로 왔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둘둘 만 호스가 들려 있었다⁠. 아치는 호스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라⁠. 받아 둬라⁠.⁠”

“⁠호스를요⁠?⁠”

“⁠내 아버지가 쓰던 거다⁠. 나는 이걸로 사람을 식혔다⁠. 너는 이걸로 나무를 식혀라⁠. 내년에도 덥다⁠.⁠”

솔래는 호스를 끌어안았다⁠. 고무 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석 달 전 이 호스에서 무릎으로 쏟아지던 찬물이 떠올랐다⁠. 솔래는 수확 둘째 날 아침에 젖은 운동화로 철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마른 운동화였다⁠. 도티가 그늘에서 찻잔 두 개를 들고 왔다⁠. 하나를 솔래 앞에⁠, 하나를 아치 앞에 놓았다⁠. 무건과 주홍과 레 할머니의 몫은 없었다⁠. 레 할머니가 투덜대자 도티는 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왔다⁠.

*

오후⁠, 주홍이 회관 부엌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레 할머니네와 이웃 농장 네 곳⁠, 펜로즈 농장이 함께 주는 월급이었다⁠. 일은 건조기와 냉동고와 운해 검역 시설까지 가는 물류를 맡는 것이었다⁠. 회사 이름은 없었다⁠. 계약서 맨 위에는 레 할머니가 손으로 쓴 제목이 붙어 있었다⁠. 「⁠마리바 나무 맡기 — 건조기 담당 정규직⁠」

“⁠정규직이에요⁠?⁠”

“⁠평생 쓸 거니까 정규직이지⁠.⁠” 레 할머니가 말했다⁠. “⁠대신 개미는 그만 먹어⁠. 회사 사람이 개미 먹으면 손님이 놀라⁠.⁠”

주홍은 펜을 쥐고 오래 앉아 있다가 서명했다⁠. 사진을 찍어 아빠에게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합격 축하 아들 대리 오늘 쉰다⁠」

*

2월 2일 아침⁠, 솔래와 무건은 9번 줄과 10번 줄 사이에 철조망을 쳤다⁠. 아치가 준 일이었다⁠. 솔래의 여든일곱 번째 날과 여든여덟 번째 날이었다⁠. 무건은 쇠말뚝을 박고⁠, 솔래는 철사를 당겼다⁠. 아치는 트랙터 위에서 줄이 비뚤어졌다고 세 번 소리쳤고⁠, 세 번 다 맞았다⁠.

해가 높아지자 철조망 너머 10번 줄에서 운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왔다⁠. 개빈이 맨 앞에 있었다⁠. 등에 분무 통을 진 사람들이 나무 밑에 무언가를 뿌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철조망을 넘어왔다⁠. 지린 냄새였다⁠. 솔래가 석 달 전 12번 줄 끝에서 처음 맡았던 냄새였다⁠. 이번에는 숨길 것이 없었다⁠. 솔래는 코를 찡그렸다⁠. 철조망 너머에서 개빈이 솔래를 보고 손을 들었다⁠. 솔래도 손을 들었다⁠.

점심때 도티가 철조망까지 찻주전자와 서류를 들고 왔다⁠. 아치가 트랙터에서 내려왔다⁠. 탁자가 없었다⁠. 아치는 무건에게 등을 돌려 대라고 했다⁠. 무건이 허리를 숙였고⁠, 아치는 무건의 등에 서류를 대고 서명했다⁠. 여든여덟 날⁠. 펜 끝이 셔츠를 뚫고 등을 찔렀는지 무건이 작게 신음했다⁠.

“⁠참아라⁠, 비누⁠. 등은 아직 고운가 보다⁠.⁠”

“⁠네⁠, 등은 아직 비누입니다⁠.⁠”

솔래는 서류를 받아 들고 한참 보았다⁠. 도티의 동글동글한 D와는 다른⁠, 모나고 비뚤어진 아치의 글씨였다⁠. 도티가 솔래의 어깨를 한 번 쥐고 찻잔을 건넸다⁠. 차에서 망고 잎 냄새가 났다⁠. 도티가 다음 철 꽃눈 옆의 늙은 잎을 따서 넣은 차였다⁠.

마지막 말뚝을 박고 나서 무건은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이 갈라져 있었다⁠. 굳은살이 터진 자리에 흙이 박혔고⁠, 손등에는 진에 덴 자국이 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 처음 숙소에 왔던 밤의 손과는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무건은 셔츠 주머니에서 망고 하나를 꺼냈다⁠. 마흔 번째 나무의 열한 번째 망고였다⁠. 이틀 동안 주머니에서 익어 껍질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무건이 망고를 내밀었다⁠. 갈라진 손바닥 위에 망고가 놓였다⁠. 솔래는 손을 뻗기 전에 고개를 숙여 꼭지에 코를 댔다⁠. 철조망 너머에서 비료 냄새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이쪽 7번 줄에서 송진 냄새가 왔다⁠. 손바닥 위의 꼭지에서 꿀 냄새가 올라왔다⁠. 솔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무건의 손바닥째 망고를 두 손으로 감쌌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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