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36자)

빚 문서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21일 아침 아홉 시⁠, 농장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도티가 받았다⁠. 솔래는 사무실 문간에서 말린 망고 상자에 주소를 붙이다가 도티의 얼굴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도티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상대는 마리바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펜로즈 부부와 서른 해를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팔았다고요⁠? 우리 빚을요⁠?⁠”

도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래가 들어가 옆에 앉았다⁠.

“⁠은행이 우리 빚 문서를 팔았대요⁠. 어제 오후에⁠. 은행끼리는 그런 걸 사고판대요⁠. 빚 받을 권리를요⁠.⁠” 도티는 찻주전자를 보지 않았다⁠. 차를 끓이지 않았다⁠. “⁠산 사람이 운해래요⁠.⁠”

삼십 분 뒤 흰 사륜구동차가 왔다⁠. 채광필은 서류 봉투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와 도티 앞에 멈췄다⁠. 솔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채광필은 도티에게 고개를 숙이고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솔래는 옮기지 않아도 되었다⁠. 도티는 다 알아들었다⁠.

“⁠이제 1월 31일에 돈을 받을 사람은 은행이 아니라 저희입니다⁠. 날짜는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은행은 일부만 받아도 기다려 줄 수 있었지만⁠, 저희는 일부는 받지 않습니다⁠. 전부 아니면 계약대로입니다⁠.⁠”

“⁠회장님이 시킨 거예요⁠?⁠”

솔래가 한국말로 물었다⁠. 채광필은 솔래를 보았다⁠. 처음으로 웃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했다⁠.

“⁠아닙니다⁠. 제 판단입니다⁠. 어제 회장님이 사모님께 허리를 숙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동네 영감님 손을 보고 웃으셨다고도 들었고요⁠.⁠” 채광필은 서류 봉투를 도티 앞에 내려놓았다⁠. “⁠솔래 씨⁠, 회장님이 흔들리시면 해외조달팀은 없어집니다⁠. 열대과일 사업부가 접히면 저희 팀 스무 명이 제일 먼저 나갑니다⁠. 그중 열두 명이 애가 있습니다⁠. 저도 있고요⁠. 저는 회장님이 흔들리시기 전에 문을 닫아 두는 겁니다⁠.⁠”

“⁠그럼 이건 팀장님 싸움이네요⁠.⁠”

“⁠처음부터 제 싸움이었습니다⁠. 솔래 씨가 몰랐을 뿐이죠⁠.⁠” 채광필은 문으로 걸어가다 돌아보았다⁠. “⁠1월 31일입니다⁠. 이번엔 진짜로요⁠.⁠”

차가 떠난 뒤에야 도티는 주전자를 불에 올렸다⁠. 솔래는 도티의 손이 떨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찻잎이 반쯤 바닥에 쏟아졌다⁠.

*

1월 21일 저녁 일곱 시⁠, 케언스 바닷가 호텔의 맨 위층이었다⁠. 무건은 문 앞에서 손을 바지에 두 번 닦고 초인종을 눌렀다⁠. 회장이 직접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채광필도 비서도 없었다⁠. 창밖으로 저녁 바다가 보였다⁠. 탁자 위에 망고 두 개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운해 농장 것⁠, 하나는 펜로즈 것이었다⁠. 회장이 어제 아침 7번 줄에서 직접 딴 것이었다⁠.

“⁠앉아라⁠.⁠”

무건이 앉았다⁠. 회장은 맞은편에 앉지 않고 창가로 갔다⁠.

“⁠채 팀장이 그 영감네 빚 문서를 샀다⁠. 알고 왔냐⁠?⁠”

“⁠네⁠. 도티 사모님이 솔래 씨한테⁠, 솔래 씨가 저한테요⁠.⁠”

“⁠나는 오늘 아침에 알았다⁠.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나무라지도 않을 거다⁠. 내가 키운 놈은 시키지 않아도 한다⁠. 그게 내가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다⁠.⁠” 회장은 창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제 그 빚 문서는 내 거다⁠. 무건아⁠, 묻는다⁠.⁠”

무건은 탁자 위의 망고를 보았다⁠.

“⁠서울로 돌아와라⁠. 카드도 집도 지분도 돌려준다⁠. 너는 원래 자리로 간다⁠. 그러면 나는 그 빚 문서를 영감한테 돌려주마⁠. 기한을 한 해 늘려서⁠. 한 해면 그 아가씨 나무 맡기로 갚을 수 있겠지⁠. 너도 계산해 봤을 거다⁠.⁠”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해 보았다⁠. 한 해면 갚을 수 있었다⁠. 나무 맡기와 아침바구니와 다음 철 수확을 합치면 한 해 안에 갚고도 남았다⁠. 무건이 서울로 가면 농장이 살았다⁠. 숫자가 그렇게 말했다⁠.

“⁠솔래 씨는요⁠?⁠”

“⁠그 아가씨도 서울로 오면 된다⁠. 내가 자리를 줬다⁠. 너는 회사에서⁠, 그 아가씨는 유기농 사업에서⁠. 둘이 서울에서 같이 망고를 팔면 되지⁠.⁠” 회장은 펜로즈 망고를 집어 무건에게 내밀었다⁠. “⁠다 이기는 계산이다⁠. 영감도 이기고⁠, 아가씨도 이기고⁠, 너도 이긴다⁠. 나는 손자를 찾고⁠.⁠”

무건은 망고를 받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바닥이 위로 오게⁠.

“⁠할아버지⁠, 청량리에서 쫓겨나신 날 리어카에 사과가 세 개 남았다고 하셨죠⁠.⁠”

“⁠그랬다⁠.⁠”

“⁠그 사과를 남이 줬으면⁠, 할아버지는 지금 회장이 아니셨을 거예요⁠.⁠”

회장의 손이 망고를 든 채 멈췄다⁠.

“⁠할아버지 제안대로 하면 농장은 삽니다⁠. 그런데 펜로즈 영감님 농장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살려 준 농장이 돼요⁠. 솔래 씨 나무 맡기도 할아버지가 한 해 봐준 장사가 되고요⁠. 솔래 씨는 그런 걸 제일 싫어해요⁠. 딱지랑 냄새가 다른 거요⁠.⁠” 무건은 숨을 한 번 골랐다⁠. “⁠저는 안 돌아가겠습니다⁠. 지분도 안 받겠습니다⁠. 상속도 내놓겠습니다⁠. 서류로 쓰라고 하시면 쓰겠습니다⁠.⁠”

“⁠그럼 너는 뭐가 남냐⁠?⁠”

“⁠이 손이요⁠.⁠” 무건은 손바닥을 할아버지에게 보였다⁠. “⁠할아버지가 처음 장사를 시작하신 손이랑 같은 손이요⁠. 아직은 반쯤이지만요⁠.⁠”

회장은 오래 무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회장은 망고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럼 영감네 농장은 어떻게 살리게⁠?⁠”

“⁠숫자로요⁠.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숫자로 이기면 들어 주신다고⁠.⁠”

“⁠모자라잖아⁠. 네 숫자는 열한 번째도 모자랐다고 채 팀장이 그러더라⁠.⁠”

“⁠열두 번째는 아직 안 해 봤습니다⁠.⁠”

회장이 웃었다⁠. 소리 내지 않고 어깨로만 웃었다⁠.

“⁠1월 30일⁠. 정오⁠. 그 영감네 포장 창고⁠. 숫자 가져와라⁠. 그 아가씨도 데려와라⁠. 냄새 말고 숫자로 말해⁠.⁠” 회장은 무건에게 등을 돌려 다시 창을 보았다⁠. “⁠그날 내가 지면 빚 문서는 영감 거다⁠. 내가 이기면 농장은 운해 거고⁠, 너는 서울에도 못 온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무건이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뒤에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고 가져가라⁠. 펜로즈 거⁠. 내가 딴 거다⁠.⁠”

무건은 돌아와 망고를 집었다⁠. 회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무건은 농장 문 앞에 짐차를 세웠다⁠. 레 할머니에게 빌린 짐차였다⁠. 문 앞에 솔래가 앉아 있었다⁠. 버터가 솔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무건이 내리자 버터가 꼬리로 땅을 두 번 쳤다⁠.

“⁠기다렸어요⁠?⁠”

“⁠버터가 기다렸어요⁠. 저는 버터 따라 나왔고요⁠.⁠”

무건은 문지방 앞에 멈췄다⁠. 넘지 않았다⁠. 솔래가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요⁠. 할아버지가 오늘은 된대요⁠. 아까 그러셨어요⁠. 비누가 오늘 무슨 대답을 하고 오는지 보고 정한대요⁠.⁠”

“⁠영감님은 주무십니까⁠?⁠”

“⁠창문에서 보고 계실 거예요⁠.⁠”

무건이 문지방을 넘었다⁠. 둘은 7번 줄까지 걸었다⁠. 무건은 걸으며 호텔 방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할아버지의 제안과⁠, 한 해와⁠, 서울과⁠, 자기가 한 대답까지⁠. 솔래는 첫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보예요⁠? 한 해면 갚는다면서요⁠. 무건 씨가 서울 가면 농장이 사는데⁠.⁠”

“⁠네⁠. 바보입니다⁠.⁠”

“⁠왜요⁠?⁠”

“⁠솔래 씨가 딱지랑 냄새가 다른 걸 제일 싫어하니까요⁠.⁠”

솔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장 낮은 가지의 갈라진 틈으로 손을 뻗었다⁠. 무건이 끼워 둔 쪼그라든 망고가 한 달 넘게 거기 있었다⁠. 폭풍도 가져가지 않은 망고였다⁠. 솔래는 망고를 빼내 꼭지에 코를 댔다⁠. 송진 냄새는 거의 날아갔다⁠. 아주 희미하게 꿀 냄새만 남아 있었다⁠.

“⁠이거⁠, 이제 받을게요⁠.⁠”

무건이 솔래를 보았다⁠. 솔래는 망고를 멜빵바지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무건의 손을 잡아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할아버지가 하던 대로⁠, 엄지로 한 번 쓸었다⁠. 굳은살이 엄지 끝에 단단하게 닿았다⁠. 솔래는 무건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망고 진과 흙과 땀 냄새가 났다⁠. 비누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무건이 다른 손으로 솔래의 땋은 머리를 쓸었다⁠. 솔래가 고개를 들었다⁠. 반딧불이 몇 마리가 둘 사이로 지나갔다⁠. 무건이 몸을 숙였고⁠, 솔래가 발끝을 들었다⁠. 입술이 닿았을 때 솔래는 무건의 숨에서 망고 냄새를 맡았다⁠. 할아버지가 딴⁠, 펜로즈 망고였다⁠.

본채 창문에서 커튼이 한 번 흔들렸다⁠. 아치였다⁠. 커튼은 곧 닫혔다⁠. 닫히기 직전⁠, 창 안에서 도티의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새어 나왔다⁠.

*

1월 26일은 호주의 국경일이었다⁠. 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또 소시지가 구워졌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구웠다⁠. 개빈이 집게를 들었다⁠. 운해 앞치마 대신 아무 무늬 없는 앞치마를 둘렀다⁠. 아이들이 얼굴에 호주 국기 스티커를 붙이고 뛰어다녔다⁠.

회관 안 부엌 탁자에는 다른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솔래⁠, 무건⁠, 주홍⁠, 아치⁠, 도티⁠, 레 할머니⁠. 탁자 위에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무건과 주홍이 사흘 동안 만든 숫자였다⁠. 주홍의 아빠가 아침에 보낸 메시지가 주홍의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었다⁠. 「⁠아들 라면 바꿨다 비싼 거 맛은 운해가 낫다⁠」

“⁠사십이만 달러에서 시작합니다⁠.⁠” 무건이 첫 줄을 짚었다⁠. “⁠나무 맡기로 들어온 돈이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 아침바구니가 아홉 줄 물량을 미리 사 주는 돈이 사분의 일쯤이고요⁠. 남은 게 오분의 일쯤입니다⁠.⁠”

“⁠팔만 달러쯤이요⁠.⁠” 주홍이 덧붙였다⁠. “⁠라면으로 하면⁠.⁠”

“⁠주홍 씨⁠.⁠”

“⁠네⁠, 안 할게요⁠.⁠”

아치가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팔만⁠. 어디서 나오냐⁠?⁠”

도티가 아치를 보지 않고 말했다⁠.

“⁠10번부터 12번 줄을 팔면 나와요⁠. 이제 유기농도 아니잖아요⁠. 운해가 그 세 줄을 따로 사겠다고 하면⁠.⁠”

아치의 얼굴이 굳었다⁠.

“⁠그 세 줄을⁠?⁠”

“⁠그 세 줄이요⁠. 내가 처음에 내준다고 한 세 줄이요⁠. 이제 진짜로 내주면 돼요⁠.⁠”

“⁠당신이 묘목을 넣은 줄이야⁠. 내가 구덩이를 파고⁠.⁠”

“⁠알아요⁠. 그래서 내가 팔자는 거예요⁠. 내가 넣었으니까 내가 판다고요⁠.⁠”

부엌이 조용해졌다⁠. 레 할머니가 일어나 차를 끓이러 갔다⁠. 도티가 할 일이었는데 도티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치는 탁자 위의 종이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솔래를 보았다⁠.

“⁠너는 뭐라고 생각하냐⁠?⁠”

솔래는 대답하기 전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맡은 사람들의 단톡방에 이틀 전 누군가 올린 글이 있었다⁠. 「⁠이번 철 끝나도 내년에 같은 나무 또 맡을 수 있어요⁠? 미리 내도 돼요⁠?⁠」 아래로 답이 백 개 넘게 달려 있었다⁠. 「⁠저도요⁠」「⁠저도 내년 거 지금 낼래요⁠」「⁠퇴사 기념수 내년에도 제가 맡아요⁠」

“⁠다음 철 돈을 미리 받으면 팔만이 나올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먼저 내겠다고 했어요⁠.⁠”

무건이 종이를 다시 보았다⁠.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주홍이 휴대전화 계산기를 두드렸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와요⁠.⁠” 주홍이 말했다⁠. “⁠이천 명이 다 다음 철 걸 미리 내면⁠, 나와요⁠.⁠”

“⁠이천 명이 다 내면요⁠.⁠” 무건이 덧붙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미리 받은 돈을 빚 갚을 돈으로 쳐 주시면요⁠.⁠”

아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티도 대답하지 않았다⁠. 레 할머니가 찻잔을 여섯 개 들고 돌아왔다⁠. 솔래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짧은 메시지였다⁠.

「⁠1월 30일 정오⁠. 숫자 가져와라⁠. 냄새 말고⁠. — 배석곤⁠」

솔래는 화면을 탁자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회관 밖에서 아이들이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개빈의 철판에서 소시지 터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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