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45자)

회장의 코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20일 새벽 다섯 시⁠, 솔래는 사다리를 메고 7번 줄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첫 나무 아래에 누군가 있었다⁠. 키가 작고 등이 조금 굽은 노인이었다⁠. 흰 면바지에 하늘색 반팔 셔츠를 입었고⁠, 머리는 하얗게 짧았다⁠. 노인은 사다리도 없이 가장 낮은 가지에 달린 망고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들고⁠, 꼭지에 코를 대고 있었다⁠. 오래 맡았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솔래에게까지 들렸다⁠.

“⁠저기요⁠, 농장 분이세요⁠?⁠”

노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한국말로 대답했다⁠.

“⁠이건 내일 따라⁠. 오늘은 송진이 너무 세⁠. 꿀이 아직 밑에 있어⁠.⁠”

솔래는 사다리를 내려놓았다⁠. 노인이 놓은 망고의 꼭지에 코를 댔다⁠. 노인의 말이 맞았다⁠. 송진 냄새가 먼저 왔고 단내는 뒤에 숨어 있었다⁠. 하루를 더 둬야 했다⁠.

“⁠어떻게 아세요⁠?⁠”

“⁠청과시장에서 육십 년 맡았다⁠.⁠” 노인은 옆 망고로 손을 옮겼다⁠. 냄새를 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오늘⁠. 지금⁠.⁠”

솔래가 사다리를 세우기도 전에 노인은 망고를 꺾었다⁠. 진이 솟았다⁠. 노인은 망고를 거꾸로 들어 진을 땅으로 흘렸다⁠. 손등에 진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손이 아니었다⁠.

줄 입구에서 누군가 뛰어왔다⁠. 채광필이었다⁠. 넥타이 없이 셔츠 바람이었고⁠,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회장님⁠! 호텔에 안 계셔서⁠, 차도 안 타고 가셔서⁠.⁠”

“⁠택시 탔다⁠. 기사가 망고 농장 가는 한국 늙은이는 처음이라더라⁠.⁠”

솔래는 손에 든 망고를 떨어뜨릴 뻔했다⁠. 노인이 솔래를 처음으로 똑바로 보았다⁠. 눈이 작고 날카로웠다⁠. 무건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는데⁠, 손을 보니 닮았다⁠. 손가락이 길었다⁠. 무건의 손과 달리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네가 그 코구나⁠. 라이브 봤다⁠. 망고보다 네 코가 더 비싸 보이더라⁠.⁠”

*

여섯 시⁠, 아치가 버터를 데리고 7번 줄로 왔다⁠. 손에는 둘둘 만 호스가 들려 있었다⁠. 솔래가 회장이라고 영어로 말하자 아치는 걸음을 멈추고 회장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회장도 아치를 그렇게 훑었다⁠. 일흔셋과 여든하나⁠, 둘 다 반팔 셔츠였고⁠, 둘 다 등이 조금 굽었다⁠.

“⁠이 사람이 내 땅 사러 온 사람이냐⁠?⁠”

“⁠네⁠. 그리고 비누 할아버지예요⁠.⁠”

아치는 호스를 고쳐 쥐었다⁠. 회장은 호스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첫 나무의 둥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몇 살이오⁠, 이 나무⁠?⁠”

솔래가 옮기자 아치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일흔⁠. 우리 아버지가 심었소⁠. 나는 물을 날랐고⁠.⁠”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래가 회장의 말을 옮겼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가 없었다고 하세요⁠. 리어카 하나가 다였대요⁠. 그 리어카를 회장님이 물려받으셨고요⁠. 아버지가 시장에서 쫓겨난 날 리어카를 끌고 집에 왔는데⁠, 리어카에 사과가 세 개 남아 있었대요⁠. 그걸 식구 일곱이 나눠 먹었대요⁠.⁠”

아치는 호스를 쥔 손을 조금 내렸다⁠.

“⁠그래서 남의 나무를 사겠다는 거요⁠?⁠”

“⁠그래서 사과를 일곱 개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세요⁠. 세 개 말고⁠.⁠”

두 노인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버터가 회장의 발목 냄새를 맡더니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아치가 혀를 찼다⁠.

“⁠이놈은 비누 때부터 배신자다⁠.⁠”

회장이 아치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솔래는 비누가 무건의 별명이라고 옮겼다⁠. 손이 비누로만 쥐어 본 손 같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회장은 처음으로 웃음 비슷한 것을 입가에 올렸다⁠.

“⁠맞는 이름이네⁠. 그놈 손은 내가 그렇게 키웠다⁠. 리어카 손잡이 대신 연필을 쥐여 줬지⁠.⁠” 회장은 아치를 보았다⁠. “⁠영감⁠, 그놈한테 리어카 손잡이를 쥐여 준 게 당신이오⁠?⁠”

솔래가 옮기자 아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사다리요⁠. 리어카는 없소⁠.⁠”

“⁠사다리면 더 높네⁠.⁠”

회장은 한마디를 남기고 혼자 7번 줄 끝까지 걸어갔다⁠. 나무마다 이름표를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연봉 협상 실패 앞에서 오래 멈췄다⁠.

*

오전 열 시⁠, 포장 창고 선별대 위에 망고 상자 두 개가 놓였다⁠. 하나는 채광필이 길 건너 개빈네 농장⁠, 이제 운해 농장이 된 곳에서 가져온 상자였고⁠, 하나는 펜로즈 농장 상자였다⁠. 회장이 시킨 일이었다⁠. 회장은 상자 위의 표시를 모두 테이프로 가리게 하고 피커들을 불러 모았다⁠.

“⁠냄새로 골라 봐라⁠. 어느 게 좋은지⁠.⁠”

대만 커플⁠, 프랑스 청년⁠, 마고⁠, 레 할머니⁠, 주홍까지 차례로 상자 앞에 와서 냄새를 맡았다⁠. 모두 같은 상자를 골랐다⁠. 회장은 테이프를 떼지 않고 자기도 두 상자에서 망고를 하나씩 집어 냄새를 맡았다⁠. 오래 맡고 나서⁠, 사람들이 고른 상자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이게 낫다⁠. 이게 펜로즈 거겠지⁠.⁠”

솔래가 테이프를 떼었다⁠. 펜로즈 농장 상자였다⁠. 피커들이 박수를 쳤다⁠. 회장은 박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솔래를 보았다⁠.

“⁠그래서⁠?⁠”

“⁠그래서요⁠?⁠”

“⁠냄새가 낫다⁠. 나도 안다⁠. 그래서 뭐⁠?⁠” 회장은 망고를 선별대에 내려놓았다⁠. “⁠냄새로 운해 직원 사백 명 월급 못 준다⁠. 나는 냄새 좋은 망고 이천 그루보다⁠, 냄새 덜한 망고 이만 그루가 필요하다⁠. 이만 그루면 마트 열 곳에 매일 망고를 깔 수 있고⁠, 한 개에 천 원이면 애들이 사 먹는다⁠. 냄새 좋은 망고 한 개에 오천 원이면 애들은 못 먹는다⁠. 나는 못 먹는 쪽이었다⁠.⁠”

“⁠한국에 이 망고를 미리 사겠다고 한 사람이 이천 명이에요⁠. 반값짜리 운해 나무 두고 이쪽을 골랐어요⁠.⁠”

“⁠이천 명⁠.⁠” 회장은 이천이라는 숫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우리 라면은 하루에 이백만 개 팔린다⁠. 아가씨⁠, 이천 명은 냄새 맡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도 좋다⁠. 그런데 그 사람들만으로 회사가 안 돌아간다⁠.⁠”

솔래는 대답할 말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 회장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채광필의 말에⁠, 본부장의 말에⁠, 무건의 계산에 틀린 데가 없었던 것처럼⁠. 모두 맞는 말 사이에서 솔래만 맞는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이 선별대에 손을 짚고 솔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네 코를 사겠다⁠.⁠”

“⁠네⁠?⁠”

“⁠서울에 와라⁠. 운해에 유기농 사업을 따로 만든다⁠. 네가 맡아라⁠. 한 그루 망고도 네가 다시 짜라⁠. 반값 말고 제값으로⁠. 이천 명을 이만 명으로 만들어 봐라⁠. 월급은 네가 부르는 대로 준다⁠.⁠” 회장은 펜로즈 망고를 다시 집어 솔래에게 건넸다⁠. “⁠네 코면 이 동네 냄새를 한국 전체에 판다⁠. 이 동네 하나에서 썩히지 말고⁠.⁠”

솔래는 망고를 받았다⁠. 손에 쥔 채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 안의 물소리가 커졌다⁠.

*

회장은 창고에서 나와 농장 사무실로 갔다⁠. 도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솔래가 통역하러 따라 들어갔다⁠. 도티는 묻지도 않고 찻잔 두 개를 꺼냈다⁠. 회장이 의자에 앉자 도티는 회장 앞에 잔을 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은행 편지가 든 서랍이 둘 사이에 있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이 나예요⁠.⁠” 도티가 먼저 말했다⁠. “⁠남편 몰래요⁠. 그러니까 회장님이 미워할 사람은 나예요⁠. 남편이 아니라⁠.⁠”

회장은 찻잔을 들고 한참 도티를 보았다⁠. 솔래가 옮겼다⁠.

“⁠미워할 사람을 찾으러 온 게 아니래요⁠. 그리고 하나 말씀드릴 게 있대요⁠.⁠”

회장은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오래 숙였다⁠. 솔래는 옮길 말을 기다리다가⁠, 회장이 고개를 들고 나서야 들었다⁠.

“⁠채 팀장이 북쪽 길로 비료 뿌린 거⁠, 채 팀장이 혼자 한 일이 아니래요⁠. 회장님이 흙 시험 결과를 1월 전에 보고 싶다고 하셨대요⁠. 어떻게 하라고는 안 하셨지만⁠, 하라고 한 거나 같대요⁠. 그러니까 그 세 줄은 회장님이 망가뜨린 거래요⁠.⁠”

도티는 찻잔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10번 줄이 보였다⁠.

“⁠그 세 줄⁠, 우리 결혼한 해에 심었어요⁠.⁠”

“⁠들었대요⁠. 손자가 보고서에 썼대요⁠. 서울에서 쓴 보고서에는 없던 말이래요⁠.⁠”

도티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주전자를 다시 불에 올렸다⁠. 솔래는 도티가 화가 나면 차를 끓인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화가 나서 끓이는 것인지 아닌지⁠, 솔래는 알 수 없었다⁠.

*

열한 시⁠, 주홍이 커피를 내왔다⁠. 쟁반을 든 손이 떨려 잔이 서로 부딪쳤다⁠. 회장 앞에 잔을 내려놓는 순간 회장이 주홍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사인 안 한 놈이냐⁠?⁠”

주홍은 쟁반을 든 채 굳었다⁠. 솔래가 대신 대답하려 하자 주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회장님⁠, 라면은 계속 먹습니다⁠. 맛있어서요⁠. 아빠도 드세요⁠.⁠”

회장은 잠깐 주홍을 보더니 크게 웃었다⁠. 창고 안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만큼 큰 웃음이었다⁠. 채광필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커피 잔만 들었다 놓았다⁠.

“⁠라면은 계속 먹어라⁠. 사인은 안 한 게 잘한 거다⁠. 시킨다고 다 하는 놈은 오래 못 쓴다⁠.⁠” 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커피는 못 탄다⁠.⁠”

“⁠네⁠. 커피는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저는 건조기 담당입니다⁠.⁠”

*

정오⁠, 무건이 창고에 왔다⁠. 레 할머니네 농장에서 오전 수확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회사 카드를 내놓은 뒤로 무건은 레 할머니네 피커로 시급을 받았다⁠. 레 할머니가 시켜 놓은 일이었다⁠. 땀에 젖은 셔츠⁠, 망고 물이 든 장갑⁠, 창고 못에서 얻은 밀짚모자⁠. 무건은 창고 문간에서 회장을 보고 멈췄다⁠.

“⁠할아버지⁠.⁠”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내밀었다⁠. 무건이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자⁠, 회장은 무건의 손을 잡아 손바닥이 위로 오게 뒤집었다⁠. 그리고 엄지로 손바닥을 한 번 쓸었다⁠. 서울에서 손주들이 인사하러 올 때마다 하던 손짓이었다⁠. 무건은 할아버지의 엄지가 무엇을 찾는지 이제 알았다⁠.

회장의 엄지가 무건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 가운뎃손가락 아래⁠, 사다리를 쥐는 자리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한 곳이었다⁠. 터졌다가 아문 물집 자리가 딱딱했다⁠. 손등에는 진에 덴 자국이 갈색으로 남았다⁠.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건의 손을 한참 쥐고 있다가 놓았다⁠. 솔래는 회장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으려 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회장이 창고 문으로 걸어가다가 무건 옆에서 멈췄다⁠.

“⁠내일 저녁에 케언스 호텔로 와라⁠. 혼자⁠.⁠”

“⁠네⁠.⁠”

“⁠마지막으로 묻는다⁠. 대답 정해서 와⁠.⁠”

회장이 창고를 나갔다⁠. 채광필이 뒤따라 나갔다⁠.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솔래는 손에 쥔 망고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회장이 건넨 망고였다⁠. 꼭지에서 송진과 꿀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솔래는 무건을 보았다⁠. 무건은 제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엄지가 지나간 자리를⁠.

“⁠할아버지가 저한테 서울 자리를 주신대요⁠. 유기농 사업이요⁠.⁠”

솔래가 말하자 무건이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좋은 걸 보면 사십니다⁠.⁠”

“⁠무건 씨는 내일 뭐라고 대답할 거예요⁠?⁠”

“⁠솔래 씨는요⁠?⁠”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선별대 위로 마지막 망고 몇 개가 굴러갔다⁠. 마고가 기계를 끄자 물소리가 멈추고⁠, 창고 지붕의 뚫린 자리로 들어온 햇빛만 바닥에 네모나게 남았다⁠. 솔래는 망고를 무건에게 내밀었다⁠. 무건이 받아 꼭지에 코를 댔다⁠.

“⁠오늘 따야 하는 애네요⁠.⁠”

“⁠알아요⁠. 할아버지가 땄어요⁠.⁠”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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