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98자)

세 줄

워홀 호주 농장에서 만난 재벌 3세 · 연채온

1월 11일 오후 네 시⁠, 하늘이 초록빛으로 변했다⁠. 솔래는 그런 하늘을 처음 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렸고⁠, 구름 밑으로 빛이 이상하게 새어 들어와 망고 잎이 모두 형광색으로 보였다⁠. 레 할머니는 사이클론 오기 전 하늘이라고 했다⁠. 새들이 울지 않았다⁠. 버터가 아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다섯 시에 바람이 왔다⁠. 피커들의 숙소는 기둥 위에 올린 집이라 바람이 바닥 밑으로도 지나갔다⁠. 집 전체가 배처럼 삐걱거렸다⁠. 도티와 아치도 숙소로 건너왔다⁠. 본채보다 숙소가 튼튼하다고 아치가 우겼다⁠. 아치의 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전기가 나갔다⁠. 마고가 가져온 촛불 몇 개를 거실 바닥에 세우고⁠, 열두 사람과 개 한 마리가 둘러앉았다⁠.

창밖에서 무엇인가 날아가는 소리가 계속 났다⁠. 함석판이 긁히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빈 상자가 굴러가는 소리⁠. 솔래는 소리마다 어느 줄의 어느 나무인지 맞히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았다⁠. 전파가 겨우 잡혔다⁠.

「⁠딸 태풍 거기 간다는데 망고보다 너부터 챙겨라 영숙이가 교회에서 기도한다 할렐루야 나무 이름 붙인 목사님도 기도한다⁠」

솔래는 할렐루야 나무의 가지가 이미 부러졌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다 괜찮아요⁠. 집 안이에요⁠.⁠」라고만 보냈다⁠.

주홍이 촛불 앞에서 손전등으로 천장을 비추며 말했다⁠.

“⁠이 집 기둥이 몇 개인지 아세요⁠? 서른여섯 개예요⁠. 아까 세어 봤어요⁠. 기둥 하나가 버티는 무게를 계산하면요⁠.⁠”

“⁠주홍 씨⁠, 지금 계산하면 무서워져요⁠.⁠”

“⁠아니요⁠, 계산하니까 덜 무서워요⁠. 이 집 안 무너져요⁠. 영감님 아버님이 기둥을 두 배로 박으셨어요⁠.⁠”

아치가 촛불 너머에서 주홍을 보았다⁠. 처음으로 아치가 주홍을 개미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겁이 많았다⁠. 그래서 두 배로 박았다⁠.⁠”

창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집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도티가 아치의 손을 잡았다⁠. 아치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솔래는 휴대전화를 무릎 위에서 뒤집었다가 다시 바로 놓았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마지막 대화는 회관 전단 사진과 「⁠갈게요⁠.⁠」였다⁠. 솔래는 한 줄을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모텔 괜찮아요⁠?⁠」

답은 한참 뒤에⁠, 전파가 잡혔다 끊겼다 하는 사이에 왔다⁠.

「⁠기둥이 서른여섯 개는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레 할머니 망고 상자를 문 앞에 쌓았습니다⁠.⁠」

솔래는 웃음이 나서 입을 막았다⁠. 주홍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솔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촛불이 흔들렸다⁠.

*

1월 12일 아침⁠, 농장은 다른 곳 같았다⁠. 줄 사이에 꺾인 가지와 잎이 무릎 높이로 쌓였다⁠. 포장 창고 지붕의 함석판 넉 장이 사라졌고⁠, 하나는 7번 줄 첫 나무 가지에 감겨 있었다⁠. 수확 보조차는 옆으로 누웠다⁠. 할렐루야 나무는 굵은 가지 하나를 잃었다⁠. 부러진 자리에서 송진 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나무가 피를 흘리는 냄새였다⁠.

망고는 거의 다 건졌다⁠. 남은 망고를 폭풍 전날 밤에 다 땄기 때문이었다⁠. 회관 부엌에 쌓아 둔 말린 망고도 젖지 않았다⁠. 솔래는 7번 줄을 끝까지 걸으며 이름표를 하나씩 세었다⁠. 마흔 개 가운데 서른일곱 개가 가지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세 개는 풀 속에서 찾았다⁠. 솔래는 퇴사 기념수의 이름표를 주워 진흙을 닦았다⁠. 이름표 뒷면에 누군가 볼펜으로 작게 써 놓은 글씨가 있었다⁠. 「⁠버텨라⁠」 처음 맡은 동기의 글씨였다⁠.

첫 나무 아래에는 아직 무건의 쪼그라든 망고가 가지 틈에 끼워져 있었다⁠. 바람은 쪼그라든 망고 한 알을 가져가지 않았다⁠.

*

1월 15일 오전 열 시⁠, 인증 기관의 심사원이 왔다⁠. 회색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였고⁠, 흙을 파는 삽과 비닐 봉투와 작은 냉장 상자를 들고 있었다⁠. 심사원은 농장 사무실의 식탁에 서류를 펼쳤다⁠. 도티와 아치가 맞은편에 앉았고⁠, 솔래가 통역을 맡았다⁠. 창고 지붕은 아직 반쯤 비어 있었다⁠.

삼십 분 뒤 흰 사륜구동차가 왔다⁠. 채광필이었다⁠. 계약서상 매수 예정자였으므로 심사에 함께 앉을 수 있었다⁠. 채광필은 자기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심사 전에 미리 드릴 게 있습니다⁠. 저희가 계약서 칠 조에 따라 지난주에 농장 흙 시험을 했습니다⁠. 10번부터 12번 줄입니다⁠.⁠”

채광필이 꺼낸 종이에는 표가 있었다⁠. 12번 줄 끝 세 그루 밑에서 요소가 많이 나왔고⁠, 10번과 11번 줄 아래쪽에서도 조금씩 나왔다⁠. 비가 흙을 따라 흘려 보낸 자리였다⁠. 심사원이 표를 오래 들여다보고 도티를 보았다⁠.

“⁠펜로즈 부인⁠, 이 줄에 화학 비료를 쓰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누가 썼습니까⁠?⁠”

채광필이 대신 대답했다⁠.

“⁠저희는 아닙니다⁠. 저희 시험 트럭은 12월 6일 새벽에 농장에 들어왔다가⁠, 아무것도 뿌리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여기 계신 연솔래 씨가 막으셨어요⁠. 피커분들 여럿이 보셨습니다⁠.⁠” 채광필은 솔래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솔래 씨⁠, 그날 트럭이 12번 줄에 들어갔습니까⁠?⁠”

솔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들어가지 못했다⁠. 솔래가 막았다⁠. 솔래가 막은 것이 지금 채광필의 증거가 되어 있었다⁠. 트럭이 들어가지 못했다면⁠, 흙에 비료를 넣은 사람은 땅 주인밖에 없었다⁠.

“⁠못 들어갔어요⁠.⁠”

“⁠감사합니다⁠.⁠” 채광필은 심사원에게 다시 몸을 돌렸다⁠. “⁠저희가 안 뿌렸으니⁠, 농장 안에서 뿌린 겁니다⁠. 계약 기간 중에 매도인이 유기농 기준을 어긴 것이죠⁠. 그렇다면 농장 전체의 인증을 다시 보셔야 할 겁니다⁠.⁠”

아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도티가 아치의 팔을 잡았다⁠. 심사원은 표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펜로즈 씨⁠, 다른 사람이 뿌렸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보여 주지 못하면 저는 농장 전체의 인증을 멈추고 다시 심사해야 합니다⁠. 몇 달이 걸립니다⁠.⁠”

솔래는 브리즈번의 본부장을 떠올렸다⁠. 한 점이라도 나오면 없던 일이야⁠. 몇 달이면 아침바구니 계약도⁠, 이천 명의 나무 맡기도 다 없던 일이었다⁠. 솔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냄새는 증거가 아니었다⁠.

*

사무실 문이 열렸다⁠. 무건이 들어왔다⁠. 밀짚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종이 몇 장이 쥐어져 있었다⁠. 아치는 무건을 보고 일어선 채 그대로 굳었다⁠. 무건은 아무도 보지 않고 곧장 식탁으로 걸어와 종이를 심사원 앞에 내려놓았다⁠.

“⁠운해식품의 현지 작업 지시서와 차량 운행 기록입니다⁠. 회사 시스템에서 제 계정으로 꺼냈습니다⁠.⁠”

채광필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솔래가 무건의 종이를 영어로 옮겼다⁠. 첫 장은 작업 지시서였다⁠. 「⁠2027년 12월 6일 · 시험 살포 · 펜로즈 농장 12번 줄 끝 세 그루 · 진입 경로 — 농장 북쪽 경계 도로 · 승인 — 해외조달팀장 채광필⁠」 둘째 장은 개빈네 농장에서 빌린 트럭의 위치 기록이었다⁠. 새벽 세 시 오십 분⁠, 트럭은 펜로즈 농장 북쪽 경계 도로에 십이 분 동안 멈춰 있었다⁠. 그러고 나서 큰길로 돌아 나가 네 시 반에 농장 정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솔래가 막은 것은 두 번째 진입이었다⁠.

“⁠북쪽 길로 먼저 들어가서 세 그루에만 뿌렸습니다⁠. 정문 진입은 보여 주기용이었고요⁠.⁠” 무건의 목소리는 숫자를 말할 때처럼 고르게 이어졌다⁠. “⁠제가 그날 아침 팀장님께 시험을 미루자고 했을 때⁠, 시험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지시서는 어제 처음 봤습니다⁠.⁠”

“⁠본부장님⁠.⁠” 채광필이 낮게 말했다⁠. “⁠그 종이 내시면 끝나십니다⁠. 회사 기록을 매도인에게 넘기신 겁니다⁠.⁠”

“⁠압니다⁠.⁠”

“⁠회장님이 아시면요⁠.⁠”

“⁠압니다⁠.⁠”

심사원이 지시서와 운행 기록을 나란히 놓고 오래 보았다⁠. 창밖에서 아치가 기른 녹색 개미들이 꺾인 가지 위를 줄지어 기어갔다⁠. 심사원이 펜을 내려놓았다⁠.

“⁠운행 기록을 낸 트럭 주인에게도 확인해야 합니다⁠.⁠”

“⁠개빈 씨요⁠.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솔래가 일어나려 하자 문밖에서 목소리가 났다⁠.

“⁠여기 있어⁠.⁠”

개빈이었다⁠. 운해 작업복을 입은 채 사무실 문간에 서 있었다⁠. 무건이 오는 길에 개빈네 농장을 들렀던 것이다⁠. 개빈은 채광필을 보지 않고 심사원에게 말했다⁠.

“⁠제 트럭 맞습니다⁠. 그날 새벽에 운해 사람이 빌려 갔어요⁠. 북쪽 길 열쇠도 제가 줬고요⁠. 저는 흙 시험이라고 들었습니다⁠.⁠”

*

심사원의 판정은 짧았다⁠. 비료는 계약상 매수 예정자가 뿌렸다⁠. 농장 주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농장 전체의 인증은 그대로 둔다⁠. 다만 10번부터 12번 줄은 흙에서 요소가 나왔으므로 유기농 자격을 잃는다⁠. 10번부터 12번 줄이 다시 유기농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세 해가 걸린다⁠.

도티가 고개를 숙였다⁠. 아치는 창밖을 보았다⁠. 사무실 창으로 10번 줄이 보였다⁠. 결혼하던 해에 아치가 구덩이를 파고 도티가 묘목을 넣은 줄이었다⁠. 사십육 년 된 나무들이 꺾인 가지를 매단 채 서 있었다⁠.

“⁠세 줄이요⁠.⁠” 도티가 작게 말했다⁠. “⁠내가 내준다고 한 세 줄이네요⁠.⁠”

아치가 도티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솔래는 사무실 문밖으로 나가 브리즈번의 본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심사 결과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아홉 줄은 깨끗하고⁠, 세 줄은 운해가 뿌린 비료 때문에 자격을 잃었다고⁠. 답장은 오 분 만에 왔다⁠.

「⁠아홉 줄 물량만 산다⁠. 세 줄은 빼⁠. 값은 그대로 팔 할⁠. 그리고 연 대리⁠, 이번엔 숨기지 않았네⁠」

솔래는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이번엔⁠. 본부장은 솔래가 숨긴 적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모르면서 그렇게 썼다⁠. 솔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세 줄 몫의 물량이 빠지면 빚을 갚을 돈도 그만큼 모자랐다⁠. 무건이 열한 번째에 맞췄다던 계산이 다시 틀어졌다⁠.

채광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누르고 식탁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스피커였다⁠. 신호음이 두 번 가고 서울의 목소리가 받았다⁠. 짧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말해라⁠.⁠”

“⁠회장님⁠, 채광필입니다⁠. 본부장님이 계십니다⁠. 심사 자리에 회사 작업 지시서를 내셨습니다⁠.⁠”

스피커 너머가 조용했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보았다⁠. 솔래는 무건의 손을 보았다⁠. 식탁 끝을 짚은 손가락 마디에 칼에 베인 자국이 넷⁠, 덴 자국이 셋 있었다⁠.

“⁠무건아⁠. 네가 냈냐⁠?⁠”

“⁠네⁠, 제가 냈습니다⁠.⁠”

“⁠왜⁠?⁠”

“⁠사실이라서요⁠. 할아버지가 손으로 안 만져 본 사람은 과일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흙을 만져 봤습니다⁠.⁠”

스피커에서 한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회장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커지지 않았다⁠.

“⁠오늘부터 너는 운해 사람 아니다⁠. 법인 카드 내놓고⁠, 서울 집 열쇠 내놓고⁠, 지분은 내가 도로 가져간다⁠. 채 팀장⁠, 카드 받아라⁠.⁠”

“⁠네⁠, 회장님⁠.⁠”

“⁠그리고 내가 간다⁠. 그 영감 얼굴 보고⁠, 그 아가씨 코 보고⁠, 내 눈으로 그 나무 본다⁠. 1월 31일 전에⁠.⁠”

전화가 끊겼다⁠.

무건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회사 카드 두 장을 빼서 식탁 위⁠, 채광필 앞에 내려놓았다⁠. 검은 카드 한 장⁠, 은색 카드 한 장⁠. 카드 옆에 무건의 손이 잠깐 머물렀다⁠. 손톱 밑이 망고 물로 노랬다⁠. 무건은 손을 거두어 밀짚모자를 다시 썼다⁠.

채광필은 카드를 집지 않았다⁠. 카드를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에 손수건으로 감싸서 집었다⁠. 지문을 묻히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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