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58자)

남은 계율

기루 문지기가 된 소림 땡중 · 류청산

반여혁은 이번에는 대문으로 들어왔다⁠. 계단 위의 혜각에게 합장까지 했다⁠. 손바닥 사이에 은 꾸러미를 끼운 채였다⁠.

“⁠스님⁠, 오늘은 술 마시러 왔소⁠. 들여보내 주시겠지⁠?⁠”

혜각은 합장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지도 않았다⁠. 첫날 밤 제 입으로 술 마시러 오는 분만 받는다고 했으니⁠, 술 마시러 왔다는 사람을 막을 말이 없었다⁠. 반여혁이 이 곁을 지나 대청으로 들어왔다⁠. 대문 아래의 혜명이 눈을 뜨고 반여혁의 뒷모습을 봤다⁠.

반여혁은 대청에 앉지 않았다⁠. 나를 불러 은 꾸러미를 술상에 올려놓았다⁠. 끈을 풀자 은덩이가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기녀 열둘이 이층 난간에서 일제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연홍이를 오늘 밤 별실에⁠. 날이 샐 때까지⁠.⁠”

“⁠연홍이는 오늘 손님을 안 받아요⁠.⁠”

“⁠행수가 정하는 거요⁠, 연홍이가 정하는 거요⁠?⁠”

나는 대답하기 전에 계단 위를 봤다⁠. 연홍이 거기 서 있었다⁠. 비파를 안고⁠, 난간에 기대서⁠. 반여혁을 내려다보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나는 이 끄덕임의 뜻을 알았다⁠. 저 사람이 무엇을 물으러 왔는지 들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연홍이가 정했네요⁠.⁠”

*

홍월루 별실은 이층 맨 끝에 있다⁠. 병풍 하나를 사이에 두고 쪽방이 붙어 있는데⁠, 행수가 거기 앉아 있다는 것은 기루 손님들이 다 아는 일이다⁠. 손님이 술에 취해 사고를 칠 때 병풍 뒤에서 기침을 한 번 하면 대개 멈춘다⁠. 반여혁도 이걸 알았다⁠. 별실에 들어서며 병풍 쪽을 한 번 보고 웃었다⁠.

연홍은 비파를 무릎에 얹고 앉아 술을 따랐다⁠. 반여혁은 잔을 받고 마시지 않았다⁠.

“⁠노래부터 하겠어요⁠, 술부터 드시겠어요⁠?⁠”

“⁠말부터 하지⁠.⁠” 반여혁이 잔을 내려놓았다⁠. “⁠항주 서호 가에 집이 하나 있소⁠. 마당에 매화가 있고⁠, 대문에서 물이 보이는 집⁠. 그 집 문서와⁠, 연홍이가 평생 남의 잔에 술을 따르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 그걸 주겠소⁠.⁠”

“⁠뭘 드리면요⁠?⁠”

“⁠문지기 땡중이 짐꾼들과 무엇을 꾸미는지⁠. 조운 나루에서⁠.⁠”

연홍은 비파 줄을 하나씩 조였다⁠. 줄감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병풍 뒤에서 나는 숨을 죽였다⁠. 서호 가의 집⁠. 기녀가 그런 집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나는 열여덟 해 동안 봤다⁠. 열에 아홉은 이 집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이 먼저 흔들린다⁠. 연홍의 눈은 줄감개만 보고 있었다⁠.

“⁠방주님⁠, 저 버들목에서 물길로 하루 더 올라가는 마을에서 왔어요⁠.⁠”

“⁠들었소⁠.⁠”

“⁠우리 마을도 제가 여덟 살 때 애들을 팔았어요⁠. 그때 저는 못생겨서 안 팔렸고요⁠.⁠”

“⁠지금은 그 거간이 눈이 삐었다고 하겠군⁠.⁠”

“⁠그 거간이 방주님 밑에 있던 사람이에요⁠.⁠” 연홍이 줄을 퉁겼다⁠. 소리가 맑았다⁠. “⁠얼굴은 기억에 없어요⁠. 배에 그려진 물결 세 줄은 똑똑히 기억해요⁠.⁠”

반여혁은 웃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갚는 거요⁠. 그때 못 산 것을 지금 비싸게 사겠다는데⁠.⁠”

연홍이 노래를 불렀다⁠. 다락에서 아이들을 재우던 이 노래였다⁠. 별실에서 손님에게 부를 노래가 아니었다⁠. 손님에게는 서호의 달이나 이별하는 낭군이나 술잔 위의 꽃잎을 부른다⁠. 연홍은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 반여혁은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잔을 들지 않았다⁠. 듣고 있었는지 셈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노래가 끝나자 연홍이 비파를 내려놓았다⁠.

“⁠이 노래 값이면 돼요⁠. 술값은 행수님한테 따로 내시고요⁠.⁠”

“⁠집은⁠?⁠”

“⁠저는 제 발로 들어왔어요⁠. 나갈 때도 제 발로 나갈 거예요⁠. 남이 사 준 집으로 걸어 나가면 그건 제 발이 아니죠⁠.⁠” 연홍이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 집 문지기가 그랬어요⁠. 이 집은 술 마시러 오는 분만 받는다고⁠. 방주님은 오늘 술을 한 잔도 안 드셨어요⁠.⁠”

연홍은 은 꾸러미에 손도 대지 않고 별실을 나갔다⁠. 날이 새려면 아직 세 시진이 남아 있었다⁠.

*

반여혁은 혼자 남았다⁠. 잔을 들어 비로소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그리고 병풍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 행수⁠, 거기 있는 거 아오⁠. 나오시오⁠. 남은 술을 혼자 마시긴 아깝소⁠.⁠”

나는 나가지 않았다⁠. 병풍 너머에서 반여혁이 부채를 펴는 소리가 났다⁠. 쇠살이 한 칸씩 맞물리는 소리⁠. 부채 살 사이에 끼워 둔 것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매화 한 송이를 새긴 비녀⁠.

“⁠행수 비녀를 하루 종일 들여다봤소⁠. 금이 참 좋더군⁠. 스무 해 가깝게 한 번도 안 꽂은 금이오⁠. 한 번이라도 꽂았으면 머리 기름이 배서 빛이 죽었을 텐데⁠.⁠”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스무 해 전 북쪽 기근 때 나는 스무 살이었소⁠. 짐꾼 반장 밑에서 배 밑창을 치우던 놈이었지⁠. 그해 그 배들이 북쪽에서 아이를 많이 실어 왔소⁠. 키 작은 아이들은 한 말 반이었소⁠.⁠” 반여혁이 잔을 내려놓았다⁠. “⁠행수 동생도 한 말 반이었지⁠?⁠”

병풍 너머에서 반여혁이 일어서는 소리가 났다⁠. 은 꾸러미를 챙기지 않고 일어섰다⁠.

“⁠그 은은 오늘 술값이오⁠. 거스름은 필요 없소⁠. 동생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지⁠. 행수가 나와서 앉으면⁠.⁠”

반여혁은 별실을 나갔다⁠. 나는 병풍 뒤에서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손바닥에 땀이 차서 치마에 닦았는데 닦아도 다시 찼다⁠. 술상 위의 은이 등잔불에 반짝였다⁠. 나는 이것을 셈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

별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연홍이 계단참에 앉아 있었다⁠. 비파를 무릎에 세우고⁠, 줄 하나를 손톱으로 천천히 긁고 있었다⁠. 내가 옆에 앉자 고개를 기울여 내 어깨에 댔다⁠.

“⁠언니⁠, 아까운 집이었죠⁠? 매화 있는 집⁠.⁠”

“⁠매화 있는 집은 겨울에 추워⁠. 꽃 보려고 창을 크게 내거든⁠.⁠”

“⁠언니가 어떻게 알아요⁠?⁠”

“⁠손님들이 다 그 집 이야기를 해⁠. 열여덟 해 동안 매화 있는 서호 집을 준다는 손님이 마흔 명은 됐어⁠. 서호에 매화나무가 그렇게 많으면 서호가 아니라 매화 밭이지⁠.⁠”

연홍이 웃었다⁠. 웃다가 비파 줄이 손톱에 걸려 퉁 소리가 났다⁠. 웃음이 다 가라앉은 뒤에 물었다⁠. 별실에서 반여혁이 무슨 말을 더 했느냐고⁠. 나는 술값 이야기만 했다고 대답했다⁠. 연홍은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더 묻지 않았다⁠. 기루 여자는 다른 기루 여자가 거짓말하는 얼굴을 안다⁠. 알아도 안 묻는 것까지가 같이 사는 법이다⁠.

연홍이 비파를 안고 일어섰다⁠. 이층 제 방으로 가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쪽으로 갔다⁠. 나는 이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내 방 창으로 지붕이 보인다⁠. 연홍이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혜각이 이 옆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술병이 없었다⁠.

창을 닫으려 했다⁠. 손이 창살에 걸려 있는 동안 연홍의 목소리가 먼저 건너왔다⁠.

“⁠스님⁠, 계율이 몇 개 남았어요⁠?⁠”

혜각이 손가락을 꼽았다⁠.

“⁠술 깼고⁠, 고기 깼고⁠, 거짓말 깼고⁠. 방장 스님 약술 마셨으니 도둑질도 깼고⁠.⁠” 혜각은 손가락 넷을 접고 남은 엄지를 내려다봤다⁠. “⁠살생 하나 남았습니다⁠.⁠”

“⁠그럼 이건 그 하나가 아니네요⁠.⁠”

연홍이 혜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부은 자리가 아직 덜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아픈 쪽을 피해서⁠, 반대쪽 볼에 입을 댔다⁠. 혜각은 몸을 굳힌 채 가만히 있었다⁠. 손을 어디 둘지 몰라서 무릎 위에서 쥐었다 폈다 했다⁠. 연홍이 이 손을 잡아 제 허리에 얹어 주었다⁠.

나는 창을 닫았다⁠. 행수는 남의 창을 보는 사람이지만⁠, 닫을 때를 아는 것도 행수다⁠.

다음은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귀로 들었고⁠, 짐작으로 알았다⁠. 지붕에서 내려오는 기왓장 밟는 소리가 둘이었다⁠. 대문 옆 문간방 문이 열렸다 닫혔다⁠. 문간방 등잔은 이날 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이경을 지나 삼경이 가까울 무렵⁠, 문간방 쪽에서 무언가 마룻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고 단단한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사방으로 굴러가는 소리⁠. 이 소리가 다 멎고 나서도 등잔은 한참 더 켜져 있었다⁠.

이튿날 연홍이 내 방에 와서 머리를 빗으며 말해 준 것은 셋뿐이었다⁠. 이 사람 손바닥이 생각보다 뜨거웠다는 것⁠. 등잔을 끄려다 손이 떨려서 두 번이나 못 껐다는 것⁠. 그리고 경 대신 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 이 셋을 말하는 동안 연홍은 거울만 보고 있었고⁠, 빗질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

아침에 문간방 앞을 지나는데 혜각이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쓸며 뭔가를 줍고 있었다⁠. 나무 염주알이었다⁠. 염주 끈이 끊어져 백여덟 알이 다 흩어진 것을⁠, 하나씩 주워 바리때에 담고 있었다⁠. 마룻장 틈에 들어간 것은 손톱으로 파냈다⁠.

삼봉이 부엌에서 국자를 들고 나와 이 꼴을 봤다⁠.

“⁠스님⁠, 몇 개 찾았소⁠? 내기하겠소⁠? 백여덟 개 다 찾는다에 동전 열⁠.⁠”

“⁠영감님은 노름 금지입니다⁠.⁠”

“⁠이건 내기요⁠.⁠”

혜각은 대답 대신 염주알을 셌다⁠. 아흔아홉⁠. 다시 마루 밑을 들여다봤다⁠. 맨발이가 부엌에서 미음 그릇을 들고 나오다 숟가락으로 뭔가를 건져 올렸다⁠. 동그란 나무알이었다⁠. 아이가 이것을 혜각에게 내밀었다⁠.

“⁠스님⁠, 미음에 이거 들었어요⁠.⁠”

혜각이 이 알을 받아 들고 한참 보더니 소매로 닦아 바리때에 넣었다⁠. 문간방에서 부엌까지 염주알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혜각은 결국 백다섯 알을 찾았다⁠. 새 끈에 꿰어 손목에 감고 대문으로 나갔다⁠. 계단 아래 혜명이 눈을 뜨고 혜각의 손목을 봤다⁠. 한 바퀴 돌아가는 알의 수를 눈으로 세는 것 같았다⁠.

“⁠백다섯이로구나⁠.⁠”

“⁠사형은 그걸 어떻게 세십니까⁠?⁠”

“⁠열여섯 해를 같이 셌다⁠. 번뇌 셋은 어디 두고 왔느냐⁠?⁠”

혜각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혜명은 이 말을 받지 않고 눈을 감았다⁠. 혜명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는데⁠, 웃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혜명이 웃는 것을 나는 이때까지 한 번도 못 봤다⁠.

아침상에서 금란이 연홍 그릇에 두부를 한 점 더 얹어 주었다⁠.

“⁠많이 먹어⁠. 어젯밤 고생했잖아⁠.⁠”

“⁠별실에서 노래 한 곡 부르고 나왔는데 무슨 고생⁠?⁠”

“⁠별실 말고⁠.⁠” 금란이 젓가락으로 문간방 쪽을 가리켰다⁠. “⁠그 방 마룻바닥에서 밤새 콩 볶는 소리가 나던데⁠.⁠”

연홍이 두부를 금란 입에 밀어 넣었다⁠. 기녀들이 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대문 쪽에서 혜각이 나무아미타불을 두 번 연달아 했다⁠.

*

점심나절 은향이 나를 찾았다⁠. 어젯밤 뒷나루의 작은 배가 다시 왔다고 했다⁠. 나는 은향에게 일러 둔 말이 있었다⁠. 땡중은 얼굴을 다쳐서 며칠 누워 있을 거라는 말⁠. 은향은 이 말을 그대로 전했고⁠, 배의 사내는 대신 다른 말을 흘리고 갔다⁠.

“⁠모레 새벽이래요⁠. 북쪽 배가 조운 나루에 닿는 거요⁠. 그리고 이번엔 삼협방 부방주가 직접 나온대요⁠.⁠” 은향이 치맛자락을 쥐었다⁠. “⁠쇠뇌 든 사람들을 데리고⁠.⁠”

“⁠쇠뇌⁠?⁠”

쇠로 만든 활틀에 살을 메겨 쏘는 쇠뇌는 관병이나 드는 물건이었다⁠. 뱃사람 방회가 이걸 들고 나온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짐꾼들이 짐을 안 내린다는 말이 벌써 들어갔대요⁠.⁠”

나는 대청으로 나갔다⁠. 어젯밤 반여혁이 두고 간 은 꾸러미가 아직 술상 위에 있었다⁠. 나는 이것을 처음으로 셈했다⁠. 쌀 열 가마 값이었다⁠. 이 은을 들고 대문으로 나가 혜각에게 보였다⁠.

“⁠스님⁠, 이걸로 짐꾼들 몽둥이 살 수 있어⁠?⁠”

혜각이 은덩이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몽둥이는 짐꾼들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걸로는 쌀 사십시오⁠. 모레 아침에 아이들이 몇이 될지 모르니까요⁠.⁠”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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