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36자)

붉은 동그라미

가짜 무당과 신당 고양이 · 문들레

아침 아홉 시⁠, 사다리를 멘 남자 둘이 신당 담장 앞에 섰다⁠. 한 사람이 깡통을 흔들었다⁠. 달각달각⁠, 깡통 속에서 쇠구슬이 굴렀다⁠. 깜이는 담장 위에서 쇠구슬 소리를 들었다⁠. 언덕 꼭대기 담벼락마다 나던 시큼한 냄새가 깡통 주둥이에서 피어올랐다⁠.

남자가 깡통을 담벼락에 대고 눌렀다⁠. 쉬익 소리와 함께 붉은 동그라미가 신당 담벼락에 생겼다⁠. 대문 바로 옆이었다⁠.

깜이의 털이 한꺼번에 부풀었다⁠. 큰 수컷의 표시가 마침내 깜이의 담까지 내려왔다⁠. 깜이는 담장에서 뛰어내려 동그라미 앞에 등을 대고 섰다⁠. 꼬리를 곧추세워 바르르 떨었다⁠. 붉은 칠 위로 깜이의 오줌이 뿌려졌다⁠. 남자가 펄쩍 뛰어 물러섰다⁠.

“⁠아⁠, 이 고양이 새끼가⁠! 칠 다 번지잖아⁠!⁠”

“⁠칠이 번지면 다시 칠하시든가⁠.⁠”

춘심이 마루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들이 사다리를 접고 내려가자⁠, 춘심은 대문 밖으로 나가 동그라미를 오래 보았다⁠. 오줌에 번진 붉은 칠이 담벼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춘심은 동그라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손바닥이 붉어졌다⁠. 칠은 지워지지 않았다⁠.

*

대학원생은 사흘째 춘심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요양원에서 돌아온 뒤로 밥을 하고⁠, 마당을 쓸고⁠, 장구를 연습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깜이는 대학원생이 몇 번이나 춘심의 등 뒤에서 입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보았다⁠. 사냥감 앞에서 망설이는 어린 고양이 같았다⁠. 덤벼야 할 순간을 놓치고 엉덩이만 씰룩거리다가 결국 돌아서는⁠.

점심상을 물리며 대학원생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중에 해⁠. 손님 줄 섰어⁠.⁠”

대문 밖에 손님 줄이 다시 늘어서 있었다⁠. 깜이 점 소문은 아직 식지 않았다⁠. 대학원생은 입을 다물고 장구채를 쥐었다⁠.

*

오후 두 시⁠, 조합장이 줄 맨 끝에서부터 걸어 올라왔다⁠. 손에 흰 봉투 하나와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등에는 젖은 남자가 업혀 있었다⁠. 조합장은 신당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 밑에 멈췄다⁠. 줄 선 손님들에게 다 보이는 자리였다⁠.

“⁠마 선생님⁠. 이건 내용증명입니다⁠. 밀린 월세 석 달 치하고⁠, 이달 말까지 비워 달라는 내용이에요⁠.⁠”

춘심이 무복 차림으로 마루 끝에 나왔다⁠.

“⁠굿 끝나면 월세는 없던 일로 하신다면서요⁠.⁠”

“⁠굿을 하시면요⁠. 근데 선생님이 망설이시는 것 같아서요⁠. 이것도 하나 들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조합장이 전화기 화면을 눌렀다⁠. 마이크 앞에서 발표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학회장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이어서 춘심의 목소리가 나왔다⁠. 부엌에서 소주를 마실 때의 목소리였다⁠.

“⁠신발 굽을 봐⁠. 굽이 바깥쪽으로 닳았으면 서서 일하는 사람이야⁠. 손톱 밑을 봐⁠. 그리고 문서 얘기를 해⁠. 문서 얘기 하면 다 울어⁠. 장군님이 그러신다고 하면 돼⁠. 장군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거든⁠.⁠”

마당이 조용해졌다⁠. 대문 밖 손님 줄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이는 문지방에서 사람들의 냄새가 바뀌는 것을 맡았다⁠. 기대하는 땀 냄새가 식어서 시큼해졌다⁠. 화난 사람의 냄새였다⁠.

“⁠지난주 학회 발표에 나온 녹음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요⁠. 이름은 안 나왔는데⁠, 들으면 다 압니다⁠. 고양이 영상이 워낙 유명해서요⁠.⁠”

줄 맨 앞의 남자가 먼저 돌아섰다⁠. 사흘 전에 북어 가루가 묻은 외투를 입고 굿을 받았던 남자였다⁠. 남자는 대문 앞에 침을 뱉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 사람이 따라 내려갔다⁠. 줄이 아래에서부터 흩어졌다⁠. 전화기를 든 손들이 이번에는 춘심을 찍었다⁠.

춘심은 조합장을 보지 않았다⁠. 대학원생을 보았다⁠. 대학원생이 장구채를 떨어뜨렸다⁠.

“⁠네가 팔았냐⁠?⁠”

“⁠…처음 주에 제가 교수님한테 보낸 음성 메모예요⁠. 몰래 녹음했어요⁠. 선생님이 부엌에서 혼자 하시는 말씀이요⁠. 지워 달라고 했어요⁠. 교수님이 학회에⁠…⁠.⁠”

“⁠팔았냐고⁠.⁠”

“⁠돈은 안 받았어요⁠.⁠”

“⁠돈도 안 받고 팔았구나⁠.⁠”

춘심이 웃었다⁠. 깜이는 춘심이 그렇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입만 웃고 목은 굳어 있었다⁠.

조합장이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보름날 굿만 해 주시면 이 녹음은 제가 막아 드리죠⁠. 학회에 아는 교수가 있습니다⁠. 내리라면 내립니다⁠. 신당 사람들이 다시 믿게 해 드릴게요⁠. 영물 고양이가 꼭대기에서 얌전하기만 하면요⁠.⁠”

*

줄이 다 흩어진 계단을 거꾸로 올라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앞코가 하얗게 닳은 운동화였다⁠. 깜이는 냄새로 먼저 알았다⁠. 고무 밑창과 지하철 계단 먼지⁠. 첫날 문서 이야기를 듣고 울고 간 여자였다⁠. 운동화는 그대로인데 손톱 밑에 볼펜 잉크가 없었다⁠.

여자는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귤 한 봉지를 마루에 올려놓았다⁠.

“⁠녹음 들었어요⁠. 내려오는 사람들이 틀어 주더라고요⁠.⁠”

춘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가 귤 봉지를 춘심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신발 보고 아신 거⁠, 그것도 아는 거잖아요⁠. 그날 울고 나서 원서 냈어요⁠. 다음 주부터 출근해요⁠. 그 말씀 드리러 왔어요⁠.⁠”

여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춘심은 귤 봉지를 오래 보다가 하나를 까서 반을 입에 넣었다⁠. 나머지 반을 깜이 앞에 놓았다⁠. 깜이는 귤 냄새에 코를 찡그리고 물러났다⁠. 고양이는 귤을 먹지 않는다⁠. 춘심도 알면서 놓았다⁠. 깜이는 귤 대신 춘심의 발목에 볼을 비볐다⁠.

*

손님이 다 내려간 마당은 넓었다⁠. 대학원생은 부엌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조합장은 돌아가지 않고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춘심은 반대편 끝에 앉았다⁠. 둘 사이에 깜이가 엎드렸다⁠. 깜이에게 마루는 원래 셋이 앉으면 꽉 차는 자리였다⁠.

조합장이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마루에 놓았다⁠. 지붕이 내려앉은 방이었다⁠. 이불이 흙더미에 반쯤 묻혀 있었다⁠.

“⁠꼭대기 아랫집입니다⁠. 지난겨울 할아버지 혼자 사시던 방이요⁠. 지붕이 눈 무게에 내려앉았는데⁠, 돌아가신 건 그 전이었어요⁠. 보일러가 얼어서요⁠. 사흘 뒤에 찾았습니다⁠.⁠”

춘심이 사진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언덕에 그런 방이 서른 개는 됩니다⁠. 저는 그 방들을 비우고 싶은 거예요⁠. 노인들 미워서가 아니고요⁠.⁠”

젖은 남자의 손이 조합장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깜이는 젖은 손을 오래 보았다⁠. 목을 조르는 손이 아니었다⁠. 할머니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처럼⁠, 그냥 얹혀 있었다⁠. 어딘가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손님의 손이었다⁠. 젖은 남자는 조합장을 미워하지 않았다⁠. 깜이는 오늘 처음 알았다⁠.

“⁠우리 엄마가 당신 아버지 돈을 받았대요⁠. 공수 바꿔 달라고⁠.⁠”

춘심이 사진을 밀어 돌려주며 말했다⁠. 조합장의 손이 사진 위에서 멈췄다⁠.

“⁠…압니다⁠.⁠”

“⁠알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 말했어요⁠. 병원에서요⁠. 태풍 예보 듣고도 배 내보낸 거⁠, 굿날 밤에 옥선녀 신당에 봉투 두 개 들고 간 거⁠.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물소리를 들었어요⁠. 이제 제가 들어요⁠.⁠”

조합장이 목덜미를 쓸었다⁠. 젖은 남자의 손 위를 쓸었다⁠.

“⁠그러니까 끝내자는 겁니다⁠. 언덕을 비우고⁠, 굿을 크게 하고⁠, 넋들도 갈 데로 가고⁠. 아버지 일을 제 대에서 덮고 끝내려는 거예요⁠. 마 선생님 어머님도 덮으셨잖습니까⁠?⁠”

“⁠덮었더니 마흔 해 동안 젖어 있대요⁠. 우리 엄마 말로는⁠.⁠”

“⁠그러니까 이번엔 크게 덮자는 겁니다⁠. 언덕째로요⁠.⁠”

춘심이 웃지도 않고 조합장을 보았다⁠. 조합장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엎드린 깜이는 두 사람의 숨소리를 번갈아 들었다⁠. 춘심의 숨은 짧았고 조합장의 숨은 길었다⁠. 길게 쉬는 숨 끝마다 조합장의 목에서 물 넘어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깜이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깜이는 일어나 조합장의 구두 냄새를 맡았다⁠. 구두약 아래에서 바닷물 냄새가 올라왔다⁠. 깜이는 구두코에 볼을 한 번 문질렀다⁠. 왜 그랬는지는 깜이도 몰랐다⁠. 조합장이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깜이 머리에 얹으려다 말았다⁠. 깜이는 손이 내려오기 전에 춘심 쪽으로 돌아갔다⁠.

*

해 질 녘 깜이는 담장 끝으로 갔다⁠. 삼색이가 먼저 와 있었다⁠. 삼색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언덕 꼭대기를 보며 귀를 눕혔다⁠. 삼색이의 털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쇠파이프 녹 냄새와 새 비닐 냄새⁠, 사람 여럿이 흘린 땀 냄새였다⁠. 꼭대기 공터에서 망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사람들이 당집 앞에 무언가를 세우고 있었다⁠.

삼색이가 깜이 볼에 제 볼을 세게 문질렀다⁠. 평소보다 오래 문질렀다⁠. 고양이가 냄새를 오래 묻히는 것은 무리를 단단히 붙들 때다⁠. 삼색이의 영역이 흔들리고 있었다⁠. 깜이도 볼을 마주 문질렀다⁠. 담장 아래 붉은 동그라미에서 아직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둘은 해가 다 질 때까지 담장 위에 붙어 앉아 있었다⁠.

*

조합장이 대문을 나설 때 대학원생이 부엌에서 나와 뒤따랐다⁠. 깜이는 담장 위로 올라가 둘을 내려다보았다⁠. 계단 첫 칸에서 조합장이 돌아섰다⁠.

“⁠학생도 곤란하겠군요⁠. 지도교수가 저렇게 나오면⁠.⁠”

“⁠녹음 내려 주세요⁠. 굿이랑 상관없이요⁠.⁠”

“⁠학생 논문은 조합에서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언덕 정비하고 무속 문화 보존⁠, 좋은 주제잖아요⁠. 원본 파일만 저한테 주시면⁠, 학회 쪽은 깔끔하게 정리하죠⁠.⁠”

대학원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합장이 명함을 대학원생의 배낭 끈에 끼워 넣고 내려갔다⁠. 대학원생은 명함을 빼지 않고 한참 서 있었다⁠.

밤에 대학원생이 노트북을 들고 신당 방으로 왔다⁠. 춘심은 제단 앞에서 촛불을 보고 있었다⁠. 대학원생이 노트북을 춘심의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노트북 옆 화면 한 귀퉁이에는 깜이 영상 아래 달린 외국어 댓글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fake shaman⁠」이라는 글자가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대학원생이 댓글 창을 닫았다⁠. 화면에 오래된 신문이 떠 있었다⁠. 누렇게 바랜 지면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깜이는 춘심의 무릎 옆에서 화면의 불빛을 보았다⁠. 글자는 읽지 못했다⁠.

“⁠도서관 신문 보관실에서 찾았어요⁠. 「⁠태풍 특보 속 출항한 새우잡이 배⁠, 선원 다섯 실종⁠」 선주가 보험금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어요⁠. 보름날 이걸 말씀하세요⁠. 선생님 입으로요⁠.⁠”

“⁠진실이 엄마 요양원비 내 줘⁠?⁠”

“⁠선생님⁠…⁠.⁠”

“⁠우리 엄마가 거짓말한 걸 딸인 내 입으로 언덕 사람들 앞에서 까라고⁠? 그럼 우리 엄마는 사십 년 동안 사기꾼이 되는 거야⁠. 나도 사기꾼이고⁠. 너 논문에 딱 좋겠다⁠.⁠”

대학원생의 입술이 떨렸다⁠. 대학원생은 노트북을 닫지 않고 방을 나갔다⁠.

*

자정 무렵 춘심의 전화기가 울렸다⁠. 요양원이었다⁠. 깜이는 장구 위에서 귀를 세웠다⁠.

“⁠보호자님⁠, 원장님이 대기자분을 금요일에 받기로 하셨어요⁠. 이번 주 금요일까지예요⁠. 죄송합니다⁠.⁠”

춘심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 동안 촛불을 보다가 다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가기 전에 상대가 받았다⁠.

“⁠하겠습니다⁠. 대신 고양이는 빼 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조합장이 낮게 웃었다⁠.

“⁠고양이도 옵니다⁠.⁠”

깜이는 제단 밑을 보았다⁠. 젖은 방석이 비어 있었다⁠. 젖은 남자는 조합장을 따라가서 오늘 밤은 돌아오지 않았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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