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69자)

위약금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천호동 상가 3층 복도는 노래방과 당구장 사이에 있었다⁠. 길건오는 아침 아홉 시⁠, 밤새 담배 냄새가 밴 복도 바닥 타일을 밟고 「⁠온집 파이낸스⁠」라고 붙은 유리문 앞에 섰다⁠. 타일이 끈적했다⁠. 노래방에서 흘린 음료가 마르지 않은 자리였다⁠.

셔츠 가슴 주머니에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녹음 앱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켰다⁠. 주머니 천이 얇아 화면 빛이 비칠까 봐⁠, 건오는 화면 밝기를 가장 낮게 내려 두었다⁠.

곽 실장은 사무실 안쪽 책상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책상 위에 서류철이 몇 권 쌓여 있었고⁠, 벽에는 「⁠서민 금융의 따뜻한 동반자⁠」라는 액자가 비뚤게 매달려 있었다⁠. 곽 실장이 젓가락을 들어 건오에게 앉으라고 했다⁠.

“⁠새신랑⁠, 시청은 잘 다녀왔어요⁠?⁠”

“⁠각서 무르러 왔습니다⁠.⁠” 건오는 앉지 않았다⁠. “⁠계약금 오천은 갚겠습니다⁠. 다달이요⁠. 학원 월급에서 백오십씩⁠. 이자도 드리겠습니다⁠. 법정 이자로요⁠.⁠”

곽 실장이 국물을 마셨다⁠. 후루룩 소리가 길었다⁠.

“⁠무르는 건 됩니다⁠.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계약금 오천에 위약금 오천⁠.⁠” 곽 실장이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았다⁠. “⁠일억이요⁠. 한 번에⁠.⁠”

“⁠위약금 이야기는 각서에 없었습니다⁠.⁠”

“⁠각서 맨 밑에 있어요⁠. 「⁠기타 사항은 갑의 내부 규정을 따른다⁠.⁠」 새신랑이 도장 찍은 줄이요⁠.⁠” 곽 실장이 웃었다⁠. “⁠수학 선생님이 문제 맨 밑 조건을 안 읽으셨네⁠.⁠”

건오는 맨 밑 줄을 기억했다⁠. 작은 글씨였다⁠. 읽었지만 읽지 않았다⁠. 도장을 찍던 날에는 어머니 돈을 돌려줄 수 있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기담 사장이 시킨 거죠⁠. 이거 다⁠.⁠”

“⁠설 사장님이 누군데요⁠?⁠” 곽 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러 하는 갸웃이었다⁠. “⁠저는 대부업 하는 사람이에요⁠. 돈 필요한 신혼부부한테 빌려줬고⁠, 신혼부부가 자기 손으로 각서를 썼어요⁠. 어디가 잘못이에요⁠?⁠”

곽 실장이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왔다⁠. 건오 앞에 서서 건오의 셔츠 가슴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천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녹음 중을 알리는 빨간 점이었다⁠. 밝기를 낮춰도 빨간 점은 낮아지지 않았다⁠.

곽 실장이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건오가 손목을 잡았다⁠. 곽 실장이 건오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세게 민 것도 아닌데 건오의 구두가 끈적한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건오는 뒤로 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어깨를 찧었고⁠,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 타일 위로 튕겼다⁠. 곽 실장의 구두가 안경을 밟았다⁠. 은테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아이고⁠, 죄송해요⁠. 못 봤네⁠.⁠” 곽 실장이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렸다⁠. 녹음 파일이 지워졌다⁠. 곽 실장은 휴대전화와 휜 안경을 건오의 손에 차례로 쥐여 주었다⁠. “⁠새신랑⁠, 오천 갚을 생각 하지 말고 새댁 조용히 시키는 생각을 하세요⁠. 그게 싸요⁠.⁠”

건오는 휜 안경을 썼다⁠. 한쪽 렌즈가 비뚤어져 세상이 반쯤 기울어 보였다⁠. 기울어진 사무실 책상 위에 서류철 다섯 권이 쌓여 있었다⁠. 맨 위 서류철 등에 매직으로 「⁠솔마루⁠」라고 쓰여 있었다⁠.

*

왕가율은 월요일 밤 열 시⁠, 현관 센서등이 켜지는 소리에 안방 문을 열었다⁠. 건오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안경 한쪽 다리가 위로 들려 있었다⁠.

가율은 아무 말 없이 공구함을 가져왔다⁠. 이사 올 때 가율이 챙긴 것이었다⁠. 롱노즈 펜치를 꺼내 건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오가 안경을 벗어 건넸다⁠. 가율은 식탁 등 밑에서 안경다리를 펜치로 조금씩 폈다⁠. 수술 봉합 바늘을 잡던 손이었다⁠. 다리가 펴지는 동안 건오는 맨눈으로 가율의 손을 보았다⁠. 흐릿했다⁠. 흐릿한데도 손가락 끝이 떨리지 않는 것은 보였다⁠.

“⁠어깨는요⁠?⁠” 가율이 안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시청 이후 처음으로 간호사 말투가 아니었다⁠.

“⁠책상 모서리에요⁠. 괜찮아요⁠.⁠”

“⁠옷 벗어요⁠. 봐야 알아요⁠.⁠”

건오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왼쪽 어깨에 손바닥만 한 멍이 퍼지고 있었다⁠. 가율이 냉동실에서 얼린 홍합 봉지를 꺼내 수건에 싸서 건오의 어깨에 댔다⁠. 차가워서 건오가 숨을 들이켰다⁠.

“⁠홍합이요⁠?⁠”

“⁠내일 미역국 끓일 거예요⁠.⁠” 가율이 말했다⁠. “⁠얼음팩이 없어서요⁠. 다 녹으면 그대로 넣으면 돼요⁠.⁠”

건오가 웃으려다 어깨가 결려 얼굴을 찡그렸다⁠. 가율은 홍합 봉지를 누르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곽 실장 책상에 서류철이 다섯 권 있었어요⁠.⁠” 건오가 말했다⁠. “⁠맨 위에 매직으로 「⁠솔마루⁠」라고⁠. 다섯 권이면 다섯 집이에요⁠. 각서가 다 거기 있을 거예요⁠.⁠”

“⁠녹음은요⁠?⁠”

“⁠지웠어요⁠. 곽 실장이 제 휴대전화로요⁠.⁠” 건오가 잠깐 멈췄다⁠. “⁠근데 제 휴대전화는 녹음이 저절로 백업돼요⁠. 학원 수업을 녹음해 두느라 켜 놨거든요⁠. 지운 건 휴대전화 안에서만이에요⁠.⁠”

가율이 처음으로 건오를 똑바로 보았다⁠. 맨눈의 건오는 가율이 흐릿할 텐데도 가율의 눈을 정확히 찾아왔다⁠.

*

길건오는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식탁 위의 홍합 미역국을 내려다보았다⁠. 국 위에 뜬 기름이 식탁 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서른두 해 동안 생일 미역국은 어머니가 끓였다⁠. 소고기를 넣으면 두드러기가 나서 어머니는 늘 홍합을 넣었다⁠. 가율에게 홍합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님이 알려 주셨어요⁠.⁠” 가율이 숟가락을 놓았다⁠. “⁠생일인 것도요⁠. 문답에 없었어요⁠.⁠”

“⁠생일은 안 물어볼 것 같아서요⁠.⁠”

“⁠제가 물어봐요⁠.⁠”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 화면에 생크림 케이크 상자를 든 어머니가 떴다⁠. 「⁠우리 아들 생일 축하해⁠!⁠」라는 노래를 문 앞에서부터 부르고 있었다⁠. 1204호 문이 반쯤 열렸다가 닫혔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자마자 건오의 얼굴부터 보았다⁠. 안경다리가 펜치 자국으로 반짝였다⁠. 어머니의 눈이 안경에서 건오의 어깨로⁠, 어깨에서 현관 신발장 옆에 접혀 세워진 에어매트로 옮겨 갔다⁠. 국밥집을 삼십 년 하며 손님 얼굴만 보고 술을 몇 병 먹었는지 맞히던 눈이었다⁠.

“⁠건오야⁠. 너 왜 현관에 매트가 있어⁠?⁠”

“⁠허리가⁠.⁠”

“⁠허리는 무슨 허리⁠. 너 허리 아픈 적 없잖아⁠.⁠” 어머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며늘아⁠, 얘가 뭘 잘못했어⁠?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혼내 줄게⁠.⁠”

가율이 건오를 보았다⁠. 건오는 미역국을 보았다⁠. 국에서 홍합 껍데기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엄마⁠.⁠” 건오가 말했다⁠. “⁠우리 가짜예요⁠.⁠”

어머니가 웃었다⁠. “⁠뭐가⁠?⁠”

“⁠결혼이요⁠. 집 받으려고 서류만 했어요⁠. 가율 씨랑 저⁠, 같은 빌라 피해자예요⁠. 엄마 돈 날린 그 빌라요⁠. 계약금도 제가 대부업체에서 빌렸어요⁠. 그 대부업체가 엄마 돈 가져간 집주인 거예요⁠.⁠”

어머니의 웃음이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식탁 밑에서 어머니의 슬리퍼가 마루를 한 번 긁었다⁠. 어머니는 손을 들어 건오의 팔뚝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힘이 빠져서 손바닥이 팔에 그냥 얹혔다⁠.

“⁠이 미친놈아⁠. 엄마는 석 달 동안 며느리 생겼다고 국밥집 단골들한테 다 자랑했어⁠.⁠”

“⁠죄송해요⁠.⁠”

“⁠죄송하면 다야⁠?⁠”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가 국밥집 주방에서 뚝배기 끓는 소리처럼 낮게 부글거렸다⁠. 어머니가 가방을 뒤져 통장 하나를 꺼냈다⁠. 표지가 닳아 하얬다⁠. “⁠이거 마지막 적금이다⁠. 이천⁠. 이걸로 그놈들 돈 갚아⁠. 갚고 빠져⁠.⁠”

“⁠엄마⁠, 그거 엄마 노후 자금이잖아요⁠.⁠”

“⁠노후는 무슨 노후⁠. 아들이 범죄자 되게 생겼는데⁠.⁠”

“⁠어머님⁠.⁠” 가율이 통장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거 받으시면 안 돼요⁠. 오천은 갚아도⁠, 위약금이 오천 더 있대요⁠. 이천으로 갚으면 남은 빚은 또 생겨요⁠. 갚을수록 늘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어머니가 가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통장 위에 얹힌 손이었다⁠. 어머니는 가율의 손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을 가율의 손등에 포갰다⁠.

“⁠며늘아⁠.⁠” 어머니가 코를 훌쩍였다⁠. “⁠너는 가짜여도⁠, 미역국은 진짜다⁠. 홍합 넣었네⁠.⁠”

“⁠어머님이 알려 주셨잖아요⁠.⁠”

“⁠알려 줘도 안 하는 애들 많아⁠.⁠” 어머니가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먹자⁠. 생일이잖아⁠. 다 먹고 얘기해⁠.⁠”

셋은 미역국을 먹었다⁠. 아무도 맛을 말하지 않았다⁠. 건오는 국물을 끝까지 마셨다⁠. 국그릇 바닥에 녹은 홍합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젯밤 건오의 어깨에 대었던 홍합이었다⁠.

*

염서겸은 같은 날 오후 1204호 바닥에 노트북을 펴 놓고 엎드려 있었다⁠. 탁자에 두 대를 다 올리기에는 종이가 너무 많았다⁠. 늘해랑빌 마흔 세대의 옛 등기 기록⁠, 설기담의 청약 신청 서류⁠, 국토부 전산 회신 공문⁠. 서겸은 설기담의 청약 서류에 적힌 무주택 기간과 옛 등기 기록의 날짜를 손가락으로 한 줄씩 짚어 내려갔다⁠.

맞지 않았다⁠. 설기담이 청약 서류에 적은 무주택 기간은 열다섯 해였다⁠. 옛 등기 기록에서 늘해랑빌 마흔 세대의 소유자는 2025년 가을까지 설기담이었다⁠. 명의가 고시원 노인에게 넘어간 날부터 청약을 넣은 날까지는 두 해가 되지 않았다⁠. 전산은 청약을 넣은 날의 등기만 보았다⁠. 청약을 넣던 날 설기담의 이름으로 된 집은 한 채도 없었다⁠.

서겸은 서류를 챙겨 101동으로 갔다⁠. 로비 바닥이 대리석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늘색 점퍼가 돌아섰다⁠. 설기담이 떡 대신 선거 전단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아이고⁠, 조사관님⁠. 우리 동엔 웬일이세요⁠.⁠”

“⁠설기담 씨⁠, 청약 서류에 무주택 열다섯 해라고 적으셨어요⁠. 2025년 가을까지 화곡동에 마흔 채가 설기담 씨 이름이었는데요⁠.⁠”

설기담이 전단 뭉치를 고쳐 안았다⁠. 웃음은 그대로였다⁠. 보조개도 그대로였다⁠.

“⁠그거 사무장이 넣은 거예요⁠. 내가 서류를 잘 몰라서⁠. 실수면 고치면 되지⁠. 과태료 내라면 내고요⁠.⁠” 설기담이 한 발 다가왔다⁠. 로비 대리석 위에서 구두 굽이 또각 울렸다⁠. “⁠근데 조사관님⁠. 나 같은 실수 하나 잡는 동안⁠, 106동 12층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집 계약금 누가 냈는지 이제 아시잖아⁠.⁠”

“⁠압니다⁠.⁠”

“⁠그럼 그 집부터 하셔⁠. 그 집 들어내면 예비 1번 선생님이 들어오잖아⁠. 조사관님이 제일 원하는 거⁠.⁠” 설기담이 전단 한 장을 서겸의 가슴에 붙였다⁠. 「⁠기호 2번 설기담 — 이웃의 집은 이웃이 지킨다⁠」 “⁠나는 선거 준비하느라 바빠서⁠. 6월 5일이에요⁠. 꼭 투표하세요⁠. 조사관님도 이 단지 주민이시잖아요⁠, 석 달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서겸은 가슴에 붙은 전단을 떼어 반으로 접었다⁠. 접힌 전단 속에서 설기담의 사진이 웃었다⁠.

*

길건오는 밤 열한 시⁠, 현관에 다시 에어매트를 깔다가 휴대전화를 보았다⁠. 「⁠곽 실장님⁠」이었다⁠.

「⁠녹음 백업 되는 거 압니다⁠. 상관없어요⁠. 대부업체가 돈 빌려준 게 죄예요⁠? 각서는 새신랑이 썼고요⁠.⁠」

곧바로 한 통이 더 왔다⁠.

「⁠그리고 하나 알려 드릴게요⁠. 모임 다섯 쌍⁠, 다 우리 편이에요⁠. 새신랑네 빼고⁠.⁠」

건오는 매트 위에 앉았다⁠. 문턱이 끼익 울었다⁠. 안방 문이 열리더니 가율이 나왔다⁠. 가율은 건오 옆에 쪼그려 앉아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 같은 문장을 읽었다⁠. 「⁠새신랑네 빼고⁠.⁠」

“⁠우리 편이 하나 남았네요⁠.⁠” 가율이 말했다⁠.

“⁠누구요⁠?⁠”

가율이 건오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연습한 적 없는 손가락이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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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1.01· 9화

    녹음 앱 켜고 대부업체 유리문 앞에 선 건오 씨 너무 멋있어요. 증거 잡는 거죠?

    • 소하린작가2026.11.01

      네, 건오 씨는 겁이 나도 녹음은 끝까지 해요. 끈적한 타일 위에서 버팁니다.

위약금 ·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