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25자)

각서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하남시청 3층 복도는 바닥이 연두색 비닐 타일이었다⁠. 왕가율은 타일 이음매 하나를 간호화 대신 신고 온 낮은 구두 앞코로 꾹꾹 눌렀다⁠. 이음매가 조금 들떠 있어서 누를 때마다 바닥이 푹 꺼졌다 올라왔다⁠. 복도 벽에 「⁠청약 질서 교란 행위⁠, 이웃의 집을 빼앗는 범죄입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 속 신혼부부 그림이 반지하 창문 너머로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보⁠.⁠” 옆자리에서 건오가 불렀다⁠.

가율은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먼저 나갔다⁠. “⁠응⁠.⁠”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십 번 해도 안 되던 것이 시청 복도 의자에서 그냥 됐다⁠. 「⁠여보⁠」와 「⁠응⁠」 사이에 웃음도⁠, 환자를 부르는 높이도 없었다⁠. 건오가 무릎 위의 서류 봉투를 두 손으로 쥐었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가율은 묻지 않았다⁠. 어머님 통장 사본을 가져왔다고 아침에 건오가 말했다⁠.

“⁠긴장돼요⁠?⁠” 가율이 물었다⁠.

“⁠제가 고3 수능 감독을 네 번 했어요⁠.⁠” 건오가 대답했다⁠. “⁠감독관이 더 떨려요⁠. 학생들은 모르죠⁠.⁠”

“⁠지금은 우리가 학생이에요⁠.⁠”

“⁠그러니까 덜 떨려야 정상인데요⁠.⁠”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서겸이 나왔다⁠. 넥타이를 맨 서겸은 1204호에서 추리닝을 입던 사람과 같은 얼굴이었는데⁠, 발소리가 달랐다⁠. 구두 굽이 비닐 타일을 똑같은 간격으로 두드렸다⁠.

“⁠남편분 먼저요⁠.⁠”

건오가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가율의 손등을 한 번 짚었다⁠. 연습한 적 없는 손이었다⁠. 가율은 손등에 남은 온기를 다른 손으로 덮었다⁠.

*

옥다엽은 같은 시각 마곡의 원룸 바닥에 앉아 콜센터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달 들어온 원룸이었다⁠. 고시원 쪽방에서 나온 뒤 처음 가져 본 제 방이라⁠, 다엽은 아직도 들어올 때마다 현관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았다⁠. 장판이 아니라 나뭇결 무늬 마루였다⁠. 맨발로 밟으면 매끈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곽 실장님⁠」

“⁠오늘 대표님 시청 가요⁠.⁠” 곽 실장이 인사도 없이 말했다⁠. “⁠대표님이 연락하면 모른다고 하세요⁠. 다엽 씨는 소개만 했지 돈 얘기는 몰랐다고⁠.⁠”

“⁠대표님이 알면 저는 모임에서 끝이에요⁠.⁠”

“⁠다엽 씨 보증금 누가 돌려줬는지 대표님이 알면 더 끝나죠⁠.⁠” 곽 실장이 웃었다⁠. “⁠다엽 씨는 잘한 거예요⁠. 다섯 집에 집이 생겼잖아요⁠. 다엽 씨 덕분에⁠.⁠”

전화가 끊겼다⁠. 다엽은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 대화방을 열었다⁠. 맨 위에 고정된 공지는 가율이 올린 것이었다⁠. 「⁠소송 서류 제출 마감 5월 14일⁠.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저한테 물어보세요⁠.⁠」 다엽은 입력 칸에 「⁠대표님 오늘 시청 잘 다녀오세요 화이팅⁠」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화이팅⁠」만 남겼다가 세 글자마저 지웠다⁠. 마루가 맨발 밑에서 매끈했다⁠. 매끈해서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

염서겸은 회의실 긴 탁자 끝에 건오를 앉히고 종이를 한 장도 꺼내지 않았다⁠. 물음은 머릿속에 있었다⁠. 지난 석 주 동안 두 사람의 현관과 칫솔과 신발과 문턱 소리를 보며 고른 물음들이었다⁠.

“⁠아내분 칫솔 색이요⁠.⁠”

“⁠연두색이요⁠. 제 건 파란색⁠.⁠”

“⁠아내분 잠버릇은요⁠?⁠”

“⁠모릅니다⁠. 안방에서 자니까요⁠.⁠” 건오가 대답하고 나서 덧붙였다⁠. “⁠제가 허리 때문에 거실에서 자거든요⁠. 대신 아내는 나이트 근무 다음 날 꼭 오후 네 시에 깨요⁠. 깨면 맨발로 부엌에 와서 물을 한 컵 마셔요⁠.⁠”

“⁠처음 만난 날 날씨요⁠.⁠”

“⁠추웠어요⁠. 제가 우산을 하나만 사 와서 둘이 쓰기엔 작았고요⁠.⁠”

서겸은 건오의 대답에서 펜을 멈췄다⁠. 지난번에 건오는 첫눈과 비닐우산과 쌓이는 눈 이야기를 길게 했다⁠. 오늘은 짧았다⁠. 가율이 부엌에서 했던 대답과 같은 길이⁠, 같은 낱말이었다⁠.

삼십 분 뒤 가율이 같은 의자에 앉았다⁠. 서겸은 같은 물음을 같은 순서로 했다⁠. 연두색⁠, 파란색⁠. 잠버릇은 모른다⁠, 남편은 거실에서 잔다⁠, 허리 때문에⁠. 대신 남편은 아침마다 에어매트를 개면서 마개를 입으로 빼고 바람을 빼는데⁠, 바람이 빠질 때 꼭 「⁠쉬이⁠」 소리를 내며 혼자 웃는다⁠. 추웠다⁠, 우산이 하나라 작았다⁠.

“⁠두 분 답이 토씨까지 같아요⁠.⁠” 서겸이 말했다⁠. “⁠외우셨어요⁠?⁠”

“⁠같이 살면 같아져요⁠.⁠”

“⁠외운 답은 토씨까지 같아요⁠. 같이 산 답은 토씨가 달라요⁠. 남편분은 「⁠작았고요⁠」라고 하셨고 대표님은 「⁠작았어요⁠」라고 하셨어요⁠. 그건 괜찮아요⁠.⁠” 서겸이 그제야 서류철을 열었다⁠. “⁠제가 오늘 보려던 건 이거예요⁠.⁠”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왔다⁠. 은행 거래 내역서였다⁠. 맨 위에 「⁠길건오⁠」 표 가운데 한 줄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입금⁠, 오천만 원⁠, 보낸 곳 「⁠온집 파이낸스⁠」 날짜는 1203호 계약금이 들어가기 이틀 전이었다⁠.

가율은 형광펜 줄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형광펜 노란색이 눈에 시렸다⁠.

“⁠이게 뭐예요⁠?⁠”

“⁠모르세요⁠?⁠”

“⁠건오 씨가 모은 돈이랑 어머님 적금이라고 했어요⁠.⁠”

서겸은 가율의 얼굴을 보았다⁠. 귀가 빨개지지 않았다⁠. 얼굴이 하얬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고⁠, 거짓말을 처음 들은 얼굴이었다⁠. 서겸은 석 주 동안 이 얼굴이 이렇게 하얘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천호동 대부업체예요⁠. 이 단지에서 이 업체 돈으로 계약금을 낸 집이 다섯이에요⁠. 다섯 집 다 늘해랑빌 모임 분들이고요⁠. 대표 이름은 곽이에요⁠. 곽 실장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율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쥐었다⁠.

“⁠조사관님⁠, 이 업체 대표 번호 끝자리가 칠칠공사예요⁠?⁠”

서겸은 대답하지 않고 서류철 두 번째 장을 넘겼다⁠. 대부업 등록 사항이었다⁠. 대표자 연락처 끝 네 자리에서 서겸의 손가락이 멈췄다⁠. 칠⁠, 칠⁠, 공⁠, 사⁠.

“⁠어떻게 아셨어요⁠?⁠”

가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비닐 타일을 긁는 소리가 회의실에 길게 울렸다⁠.

“⁠잠깐만요⁠. 오 분만요⁠.⁠”

“⁠대표님⁠, 조사 중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남편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가율이 문고리를 잡았다⁠. 「⁠남편⁠」이라는 낱말이 가율의 입에서 처음으로 연습 없이 나왔다⁠. 하필 지금이었다⁠. “⁠조사관님도 대답 듣고 싶으시잖아요⁠.⁠”

서겸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서겸은 서류철을 덮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 시 오십삼 분⁠. 오 분을 주기로 했다⁠. 규정에 없는 오 분이었다⁠.

*

길건오는 가율에게 팔을 잡혀 시청 비상계단으로 끌려 나갔다⁠. 방화문이 등 뒤에서 쿵 닫혔다⁠. 계단참은 콘크리트 바닥에 미끄럼 방지 고무가 덧대어 있었고⁠, 창 하나 없이 형광등 하나가 지지거렸다⁠.

가율이 거래 내역서 사진이 뜬 휴대전화를 건오의 얼굴 앞에 들었다⁠. 서겸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가율은 요즘 찍으면 안 되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었다⁠.

“⁠학원 실장님이요⁠?⁠”

건오는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봉투 안에 어머니 통장 사본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빈 봉투를 쥐고 한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엽 씨가 소개해 줬어요⁠.⁠” 건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계단 위아래로 울렸다⁠. “⁠혼인신고하고 나서⁠, 계약금을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아는 데가 있다고⁠. 이자 없이 빌려주는 데가 있다고⁠. 저는 그때 다엽 씨가 고마웠어요⁠. 가율 씨한테는 제가 모은 돈이 있다고 했어요⁠. 가율 씨가 자기 돈까지 빌려 올까 봐요⁠.⁠”

“⁠이자가 없었다고요⁠?⁠”

“⁠대신 각서를 썼어요⁠.⁠” 건오가 안경을 벗었다⁠. 형광등 불빛이 렌즈에 하얗게 번졌다⁠. “⁠분양권을 일정 기간 못 파는 전매 제한이 풀리면⁠, 그때 곽 실장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집을 넘긴다는 거예요⁠. 사람 이름만 바꿔서⁠. 계약금 오천에 집 한 채를요⁠. 저는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알고 도장 찍었어요⁠. 어머니 돈을 어떻게든 돌려 드리고 싶어서요⁠. 집이 넘어가면 웃돈을 조금 준다고 했거든요⁠.⁠”

가율의 등이 계단 난간에 닿았다⁠. 쇠 난간이 블라우스 너머로 차가웠다⁠.

“⁠곽 실장이 설기담 사람이라는 건요⁠? 언제 알았어요⁠?⁠”

“⁠입주한 다음 날이요⁠.⁠” 건오가 숨을 들이켰다⁠. “⁠설기담이 떡을 돌린 날⁠, 곽 실장한테 문자가 왔어요⁠. 「⁠설 사장님이 떡은 잘 받으셨냐고⁠.⁠」 셀프 사진관에서 찍을 때요⁠. 세 번째 컷이요⁠. 제가 입 벌리고 있던 거⁠.⁠”

가율이 눈을 감았다⁠. 냉장고에 붙은 네 컷 사진이 눈꺼풀 안에 떴다⁠. 세 번째 칸에서 건오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네 번째 칸에서 가율이 건오의 얼굴을 보고 웃고 있었다⁠. 가율이 처음 웃은 날이라고 건오가 대답한 날이었다⁠.

“⁠다섯 쌍도 다 그래요⁠?⁠”

“⁠다엽 씨가 짝을 지었고⁠, 곽 실장이 계약금을 댔어요⁠. 다섯 집 다요⁠. 다엽 씨는 그 대가로 자기 보증금을 돌려받았어요⁠. 설기담 돈으로요⁠.⁠” 건오가 안경을 다시 썼다⁠. 쓰자마자 가율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또렷해지지 않았으면 좋을 얼굴이었다⁠. “⁠설기담은 늘해랑빌 보증금으로 빚을 막고⁠, 남은 돈으로 우리한테 계약금을 빌려줬어요⁠. 몇 년 뒤에 집 다섯 채를 거둬 가려고요⁠. 우리 모임 사람들 이름으로요⁠.⁠”

가율은 웃었다⁠. 소리가 없는 웃음이었다⁠. 계단 형광등이 지지거리다 한 번 꺼졌다 켜졌다⁠.

“⁠제 보증금 일억 육천을 가져간 사람이⁠, 그 돈으로 제 집 계약금을 냈네요⁠.⁠”

“⁠가율 씨⁠.⁠”

“⁠제가 대표예요⁠. 모임 사람들이 저를 보고 결혼했대요⁠. 대표님도 했으니까⁠.⁠” 가율이 휴대전화를 내렸다⁠. 화면이 꺼졌다⁠. “⁠서른여덟 명이 저를 대표라고 불렀어요⁠. 저는 그 사람들을 설기담한테 데려다줬어요⁠. 제 발로 앞장서서요⁠.⁠”

“⁠가율 씨는 몰랐잖아요⁠.⁠”

“⁠예비 1번 선생님도 몰라요⁠. 자기 집에 누가 사는지⁠.⁠”

건오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부부 문답 100⁠」에 이런 물음은 없었다⁠. 건오가 만든 백 개의 물음은 전부 들키지 않으려는 물음이었다⁠.

가율이 구두를 벗었다⁠. 시청에 오려고 산 낮은 구두였다⁠. 새 가죽이 뒤꿈치를 벗겨 놓았는지 스타킹에 피가 조금 배어 있었다⁠. 가율은 구두 두 짝을 건오의 가슴에 안겼다⁠. 건오는 빈 서류 봉투와 구두를 한꺼번에 안았다⁠.

“⁠조사관님한테 오 분 달라고 했어요⁠. 지났네요⁠.⁠”

가율은 맨발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은 위층에 있었고⁠, 가율의 발은 아래로 내려갔다⁠. 콘크리트가 발바닥을 차갑게 밀어 올렸다⁠. 미끄럼 방지 고무의 홈이 한 칸 내려갈 때마다 발바닥에 박혔다⁠. 건오가 구두를 안은 채 한 칸 뒤에서 따라 내려갔다⁠.

“⁠어디 가요⁠? 회의실은 위예요⁠.⁠”

가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1층 계단참에서 방화문을 밀고 나가자 시청 로비의 햇빛이 쏟아졌다⁠. 맨발 밑의 대리석이 햇볕에 데워져 있었다⁠. 가율은 따뜻한 대리석 위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따뜻한 바닥은 이제 가율에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3층 회의실에서 서겸이 손목시계를 다시 보았다⁠. 세 시 십일 분⁠. 비상계단 방화문이 한 번 쿵 닫히는 소리가 복도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서겸은 서류철을 가방에 넣었다⁠. 창밖 주차장으로 맨발의 여자가 걸어 나가는 것이 보였고⁠, 구두 두 짝을 안은 남자가 반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둘 사이의 틈은 첫날 엘리베이터 홀에서 본 것보다 좁았다⁠. 서겸은 의자 두 개를 탁자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하나는 따뜻했고⁠, 하나는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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