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299자)

계약금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길건오는 신발장 위에서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거절 단추를 눌렀다⁠. 엄지가 화면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현관 대리석 위에 맨발로 선 가율이 건오를 올려다보았다⁠. 나이트 근무를 마친 눈이 빨갰다⁠.

“⁠학원 실장님이요⁠.⁠” 건오가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순간 문장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만들어 둔 문장이었다⁠. “⁠원장님 밑에서 상담이랑 보강 잡는 분이요⁠. 학원마다 실장님이 한 분씩 있어요⁠. 저희 학원은 실장님이 학부모 전화를 다 받으세요⁠.⁠”

“⁠학원 실장님이 왜 고시원 할아버지 보호자예요⁠?⁠”

“⁠네⁠?⁠”

가율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수술 동의서 연락처 칸을 찍은 사진이었다⁠. 병동에서 찍으면 안 되는 사진이었다⁠. 끝의 네 자리만 보이게⁠, 나머지는 손가락으로 가린 채 찍혀 있었다⁠. 가율도 다 찍을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칠칠공사⁠.⁠” 건오가 숫자를 읽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했다⁠. “⁠가율 씨⁠, 칠칠공사는 흔해요⁠. 저희 학원 대표 번호도 칠칠로 끝나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예요⁠. 칠이 행운이라서⁠.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 네 개가 같을 확률이요⁠, 대충 만 분의 일이에요⁠. 서울에 천만 명이 살면 칠칠공사가 천 명이에요⁠.⁠”

가율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화면을 껐다⁠. 건오는 가율의 어깨가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믿고 싶어서 내려가는 어깨였다⁠. 건오는 가율의 어깨가 수학보다 무서웠다⁠.

“⁠천 명 중에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 보호자네요⁠.⁠”

“⁠그런 우연은 있어요⁠.⁠”

“⁠북엇국 먹을게요⁠.⁠” 가율이 맨발로 부엌에 갔다⁠. 마루에 난 가율의 발자국이 바닥 난방에 금방 지워졌다⁠.

가율이 북엇국을 먹는 동안 건오는 현관에 쪼그려 앉아 연락처를 열었다⁠. 「⁠실장님⁠」을 길게 눌러 「⁠학원 실장님⁠」으로 바꿨다⁠. 진짜 학원 실장님은 「⁠상담실 김 선생님⁠」으로 저장돼 있었다⁠. 거짓말 하나를 맞추려고 진짜 사람 하나의 이름을 바꾸는 데 십 초도 들지 않았다⁠.

“⁠고춧가루 안 넣었네요⁠.⁠” 부엌에서 가율이 말했다⁠. 가율은 매운 국물을 먹으면 나이트 다음 날 꼭 속이 불편해했다⁠. 건오는 지난주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 문답 종이에 옮겨 둔 적은 없었다⁠.

“⁠네⁠.⁠” 건오는 현관 바닥에 앉은 채 대답했다⁠. 바닥 대리석의 냉기가 바지를 뚫고 올라왔다⁠.

*

염서겸은 월요일 오후 1204호 접이식 탁자 위에 노트북 두 대를 나란히 펴 놓았다⁠. 하나에는 열두 가구의 계약금 입금 내역이⁠, 하나에는 금융 정보 회신 공문이 떠 있었다⁠. 계약금 내역은 시행사에서⁠, 회신은 지난주 팀장을 거쳐 받은 것이었다⁠. 바닥 난방을 안 켠 거실에서 서겸은 양말을 두 켤레 겹쳐 신고 있었다⁠.

열두 줄 가운데 다섯 줄에 같은 글자가 있었다⁠. 계약금을 보낸 계좌가 다섯 집 모두 본인 계좌였지만⁠, 보내기 하루나 이틀 전에 같은 곳에서 큰돈이 들어와 있었다⁠. 「⁠온집 파이낸스⁠」 천호동의 대부업체였다⁠. 대부업체에서 오천만 원을 빌려 계약금을 내는 신혼부부가 한 집이면 사정이다⁠. 같은 단지에 다섯 집이면 사정이 아니었다⁠.

서겸은 다섯 줄의 동·호수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었다⁠. 104동 803호⁠. 108동 1102호⁠. 102동 604호⁠. 105동 207호⁠. 마지막이 106동 1203호였다⁠.

맞은편 집에서 마루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1203호 현관 문턱이었다⁠. 서겸은 문턱 소리를 이제 구별할 줄 알았다⁠. 남편은 문턱을 밟고 한 번 멈췄다가 넘었고⁠, 아내는 밟지 않고 건너뛰었다⁠. 지금은 한 번 멈췄다⁠. 서겸은 노트북 하나를 덮고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분⁠,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건오가 손을 멈췄다⁠. 학원에 가는 길인 듯 가방을 메고 있었다⁠.

“⁠지금요⁠? 학원이 네 시인데⁠.⁠”

“⁠오 분이면 됩니다⁠. 앉으실 데가 바닥밖에 없어요⁠.⁠”

건오는 1204호 거실 맨바닥에 앉았다⁠. 엉덩이가 차가워 몸을 움찔했다⁠. 서겸이 탁자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 덮지 않은 노트북 화면이 건오를 향해 있었다⁠.

“⁠계약금 어디서 나셨어요⁠?⁠”

“⁠모아 둔 거랑⁠, 어머니 적금이요⁠.⁠”

“⁠어머님은 늘해랑빌 201호 보증금으로 적금을 다 쓰셨다고 들었어요⁠.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아드님 보증금이 어머님 돈이었다고⁠.⁠”

건오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손가락이 콧등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어머니가 국밥집을 하시면서 따로 모은 게 또 있었어요⁠. 어머니들은 원래 통장이 여러 개예요⁠. 한 통장이 털려도 다른 통장이 남게⁠. 분산 투자죠⁠. 어머니가 이 원칙에 엄격하세요⁠.⁠”

“⁠국밥 한 그릇에 얼마예요⁠?⁠”

“⁠구천 원이요⁠.⁠”

“⁠오천만 원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죠⁠?⁠”

건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은 오천오백 그릇 남짓이었다⁠. 건오의 머릿속에서 계산은 벌써 끝나 있었고⁠, 끝난 답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서겸이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 하나로 톡 쳤다⁠. 건오는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온집⁠」이라는 두 글자가 눈 가장자리로 들어왔다⁠.

“⁠이 단지에 계약금을 같은 곳에서 빌린 집이 다섯 집이에요⁠. 다섯 집 다 늘해랑빌 사람들이고요⁠. 남편분⁠, 이 대부업체 아세요⁠?⁠”

“⁠모릅니다⁠.⁠”

“⁠아내분은 아세요⁠?⁠”

건오는 이번에도 모른다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겸은 건오의 침묵을 기다렸다⁠. 창밖에서 어린이집 아이들이 줄을 지어 놀이터로 가며 「⁠올챙이 송⁠」을 불렀다⁠.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쏙⁠. 노래가 멀어질 때까지 건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면 조사는 다음 주 월요일 오후 두 시⁠, 하남시청 3층 회의실입니다⁠. 두 분 따로요⁠.⁠” 서겸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출석 요청서⁠」 “⁠그때 계약금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오세요⁠. 어머님 통장이면 어머님 통장을요⁠.⁠”

건오는 종이를 받아 들고 일어섰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건오의 등에 대고 서겸이 말했다⁠.

“⁠남편분 운동화⁠, 이제 흙이 묻었더라고요⁠.⁠”

건오가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한 번 신고 나가시라고 했잖아요⁠. 신으셨더라고요⁠. 아내분이랑 같이 나갈 때만요⁠.⁠” 서겸이 탁자 위 노트북을 덮었다⁠. “⁠그 운동화가 1203호에서 제일 진짜 같았어요⁠. 계약금보다요⁠.⁠”

*

왕가율은 화요일 오후 다섯 시⁠, 고관절 수술을 마친 노인의 침대 곁에서 소변 주머니를 비웠다⁠. 노인은 마취에서 깨어나 기운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계속 돌리다가 트로트가 나오는 데서 멈췄다⁠.

“⁠아가씨⁠, 나 아가씨 알아⁠.⁠” 노인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작년 여름에 고시원 왔던 아가씨지⁠. 수박 사 들고⁠.⁠”

가율이 손을 멈췄다⁠. 지난여름 가율이 들고 간 것은 복숭아 한 봉지였다⁠. 노인의 기억은 비슷한 데까지 와서 멈춰 있었다⁠.

“⁠기억하시네요⁠, 할아버지⁠.⁠”

“⁠아가씨가 내 집이 어떻고 하길래 내가 무서웠어⁠. 나는 집이 없거든⁠. 근데 서류에 내 이름이 있대⁠. 마흔 채⁠.⁠” 노인이 웃다가 엉덩이를 붙잡았다⁠. “⁠조카가 와서 도장 몇 번 찍으라고 했어⁠. 찍으면 용돈 줬어⁠. 소주 사 먹으라고⁠. 몇 년 동안 몇 번⁠. 나는 그게 무슨 도장인지 몰랐어⁠.⁠”

“⁠조카분이 자주 오세요⁠?⁠”

“⁠어제 왔지⁠. 키 큰 놈⁠. 젖은 구두 신고⁠.⁠” 노인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조카가 아니야⁠, 그놈⁠. 나는 조카가 없어⁠. 근데 그놈이 조카라고 하면 다들 그렇다고 해⁠. 나는 말을 해도 다들 내가 정신이 없다고 해⁠.⁠”

가율은 비운 소변 주머니를 걸이에 다시 걸었다⁠. 손이 차가웠다⁠. 노인의 침대 밑 바닥에 실내화 한 짝이 뒤집혀 있었다⁠. 가율이 무릎을 꿇고 실내화를 바로 놓아 주었다⁠. 실내화 밑창이 다 닳아 얇았다⁠.

“⁠할아버지⁠, 이 얘기 다른 사람한테도 해 주실 수 있어요⁠?⁠”

“⁠누구한테⁠?⁠”

“⁠믿어 줄 사람한테요⁠.⁠”

노인이 가율을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트로트 가수가 꺾는 소리를 냈다⁠. 노인이 가락을 따라 고개를 한 번 꺾었다⁠.

“⁠아가씨가 믿으면 나는 하지⁠.⁠”

*

왕가율은 화요일 밤 열한 시⁠, 거실 벽의 난방 조절기 앞에서 건오와 마주 섰다⁠. 조절기 화면에 「⁠24도⁠」가 떠 있었다⁠.

“⁠이거 누가 올렸어요⁠?⁠”

“⁠제가요⁠.⁠” 건오가 손을 들었다⁠. “⁠바닥에서 자니까 밤에 등이 시려요⁠.⁠”

“⁠저 안방에서 땀띠 나요⁠. 이 집 난방은 거실이랑 안방이 같이 돌아요⁠. 21도로 내려요⁠.⁠”

“⁠21도면 제 등이 얼어요⁠. 23도⁠.⁠”

“⁠22도⁠.⁠”

“⁠22⁠.5도⁠.⁠”

“⁠점 오는 없어요⁠.⁠” 가율이 조절기 화면을 눌렀다⁠. 「⁠22⁠」 건오가 손가락을 뻗어 「⁠23⁠」으로 올렸다⁠. 가율이 다시 「⁠22⁠」로 내렸다⁠. 둘의 손가락이 조절기 앞에서 부딪쳤다⁠. 건오가 손을 빼려다 말았다⁠. 가율도 빼지 않았다⁠.

“⁠신혼부부들 원래 이걸로 싸운대요⁠.⁠” 건오가 말했다⁠. “⁠「⁠부부 문답 100⁠」 88번이 「⁠난방 온도를 두고 싸운 적이 있는가⁠」예요⁠. 답을 「⁠없다⁠」로 해 뒀는데⁠, 고쳐야겠네요⁠.⁠”

“⁠뭐라고요⁠?⁠”

“⁠「⁠있다⁠. 22도로 정했다⁠.⁠」⁠”

가율이 웃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건오의 손가락 위에 있었다⁠. 건오의 새끼손가락 은반지가 가율의 손등에 닿았다⁠. 은반지는 그새 조금 검어져 있었다⁠. 오래 낀 것처럼⁠.

둘은 거실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건오의 에어매트는 개켜진 채 벽에 기대 있었다⁠. 마루가 엉덩이 밑에서 천천히 데워졌다⁠. 가율이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오늘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조카가 아니라고⁠. 젖은 구두 신은 키 큰 놈이라고⁠.⁠”

건오가 가율을 보지 못하고 마루의 나뭇결만 보았다⁠. 나뭇결이 강물처럼 굽이쳐 거실 끝으로 흘러갔다⁠.

“⁠건오 씨⁠, 문답 하나 해요⁠. 종이 없이⁠.⁠”

“⁠네⁠.⁠”

“⁠제가 처음 웃은 날 기억해요⁠? 건오 씨 앞에서요⁠.⁠”

건오는 대답을 알았다⁠. 「⁠부부 문답 100⁠」에 없는 물음이었고⁠, 외운 적도 없었다⁠. 그런데 알았다⁠.

“⁠셀프 사진관이요⁠. 세 번째 컷에서 제가 입 벌리고 있던 거 보고요⁠. 네 번째 컷에 찍혔어요⁠. 냉장고에 붙어 있어요⁠.⁠”

가율이 턱을 괸 손을 내렸다⁠. 건오를 보았다⁠. 이번에는 귀가 빨개지지 않았다⁠. 대신 가율이 건오에게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건오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손가락 두 개만 한 틈이 마루 위에서 없어졌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루가 따뜻했다⁠. 22도였다⁠.

“⁠이건 연습이에요⁠?⁠” 가율이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아니요⁠.⁠” 건오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가율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노크 두 번 규칙을 정한 문이었다⁠. 건오는 거실 바닥에 혼자 누웠다⁠. 에어매트를 펴지 않았다⁠. 마루의 온기가 등으로 그대로 올라왔다⁠.

바닥 위에 엎어 둔 휴대전화가 떨었다⁠. 건오는 손을 뻗어 뒤집었다⁠. 「⁠실장님⁠」이 보낸 사진이었다⁠. 건오의 반듯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 맨 아래 건오의 도장⁠. 사진 밑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시청 가신다고요⁠. 이거 새댁한테 먼저 보여 드릴까요⁠?⁠」

건오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엎었다⁠. 등 밑의 마루는 여전히 따뜻했고⁠, 가슴 위의 휴대전화는 차가웠다⁠.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이 꺼졌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계약금 ·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