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6자)

보호자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늘해랑빌 현관 앞 계단은 세 번째 칸이 깨져 있었다⁠. 왕가율은 이 년을 사는 동안 날마다 깨진 칸을 건너뛰었고⁠, 이사 나온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발이 저절로 건너뛰었다⁠. 현관 유리문에 법원 경매 공고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강서구 화곡동 ○○번지 다세대주택 40세대 일괄 매각⁠」 공고 위에 누가 매직으로 「⁠우리 돈 돌려줘⁠」라고 써 놓았고⁠, 매직 글씨 위에 또 누가 「⁠경매 들어가면 돈 못 받음 ㅠ⁠」라고 덧붙였다⁠.

토요일 오후 두 시⁠, 모임 사람 여남은 명이 빌라 앞 골목에 모였다⁠. 법률 상담을 해 주는 변호사가 온다고 해서였다⁠. 옥탑 아저씨가 돗자리를 깔았고⁠, 101호 할머니가 식혜를 돌렸다⁠. 가율은 서류 파일을 무릎에 올려놓고 계단에 앉아 있다가⁠, 골목 끝에서 커피 캐리어를 든 다엽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언니⁠! 아니⁠, 대표님⁠! 신혼 냄새 난다⁠!⁠” 다엽이 커피를 내밀었다⁠. 밝은 목소리에 손짓이 컸다⁠. “⁠아이스 바닐라 라테⁠. 언니 이거 좋아하잖아⁠.⁠”

다엽은 새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흰 가죽에 밑창이 두툼한⁠, 비싼 운동화였다⁠. 지난겨울 집회 때 다엽은 밑창이 갈라진 운동화에 비닐봉지를 덧대 신고 왔었다⁠.

“⁠다엽아⁠, 잠깐만⁠.⁠” 가율이 일어나 골목 모퉁이로 다엽을 데려갔다⁠. 담벼락에 붙은 전봇대 그늘이었다⁠. “⁠어제 104동에서 205호랑 307호를 만났어⁠.⁠”

다엽의 얼굴에서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빠졌다⁠.

“⁠아⁠, 둘이 같은 단지 됐대⁠? 신기하다⁠.⁠”

“⁠다섯 쌍이래⁠. 우리 모임 사람이 솔마루에만⁠.⁠”

“⁠언니⁠.⁠” 다엽이 커피 캐리어를 담벼락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가 처음에 고민할 때 내가 뭐라 그랬어⁠. 언니만 그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다들 급해⁠. 205호는 대학원 학비 대출에 보증금 대출까지 이중으로 갚고 있었고⁠, 307호 언니는 반지하에서 곰팡이 때문에 천식이 왔어⁠. 그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울었어⁠. 대표님은 결혼해서 집 생겼다던데 나는 어떡하냐고⁠.⁠”

“⁠그래서 짝을 지어 줬어⁠?⁠”

“⁠이어 줬지⁠. 서로 사정 아는 사람끼리⁠.⁠” 다엽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내가 돈 받았어⁠? 아니잖아⁠. 서류 넣는 거 대신 해 줬어⁠? 각자 알아서 했어⁠. 나는 아 이 사람이랑 이 사람이 비슷하게 바닥이네⁠, 이 말만 했어⁠.⁠”

“⁠우리가 한 게 뭔지 알잖아⁠. 남의 집을 가로챈 거야⁠. 예비 1번 부부가 반지하에 있어⁠. 어제 만났어⁠. 어린이집 선생님이야⁠.⁠”

다엽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언니가 그 말을 해⁠? 언니가 제일 먼저 했잖아⁠. 언니가 하니까 다들 대표님도 했는데 뭐⁠, 했어⁠.⁠” 다엽이 커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언니⁠, 우리 이 년 동안 고소장 몇 장 썼어⁠. 집회 몇 번 나갔어⁠. 그거로 돌아온 돈 있어⁠? 국회는 특별법 고친다고 일 년째 소위원회만 열어⁠. 경매 들어가면 우리 순서는 은행 다음이야⁠. 다들 바닥에서 숨이라도 쉬고 싶었던 거야⁠.⁠”

“⁠다엽이 너는⁠?⁠”

“⁠나⁠?⁠” 다엽이 운동화 끝으로 전봇대 밑을 툭 찼다⁠. “⁠나는 아직 고시원이지⁠. 나는 짝이 없잖아⁠.⁠”

변호사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다⁠. 다엽이 먼저 돌아서서 걸어갔다⁠. 가율은 다엽의 새 운동화 밑창이 골목 바닥의 빗물 자국을 피해 가는 것을 보았다⁠. 운동화를 아끼는 걸음이었다⁠. 고시원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

길건오는 일요일 아침 솔마루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입주민 단톡방에서 첫날부터 사진이 올라오던⁠, 물이 고이는 자리 근처였다⁠. 바닥에 고인 물에 형광등이 길게 비쳤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세워져 있었다⁠. 건오가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새신랑⁠, 일찍 나왔네⁠.⁠” 곽 실장은 마흔 안팎에 검은 패딩 조끼를 입은 남자였다⁠. 목소리가 설기담보다 낮고 짧았다⁠. “⁠타요⁠.⁠”

“⁠여기서 말씀하세요⁠.⁠”

곽 실장이 웃고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닫자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소리가 울렸다⁠. 곽 실장은 고인 물을 피하지 않고 밟으며 건오 앞으로 왔다⁠. 구두가 젖었다⁠. 젖어도 신경 쓰지 않는 신발이었다⁠.

“⁠토론회 봤어요⁠. 우리 새댁 대단하던데⁠. 사장님이 웃으시더라고⁠. 저런 사람이 회장을 해야 한다고⁠.⁠”

“⁠대표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알면 큰일 나지⁠.⁠” 곽 실장이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건오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건오의 반듯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였다⁠. 맨 아래에 건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계약금 빌려 간 거⁠, 이자 없이 해 드렸잖아요⁠. 조건은 하나였고⁠. 분양권을 일정 기간 못 파는 전매 제한이 풀리면⁠, 그때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한다⁠. 잊으셨나 해서⁠.⁠”

“⁠그거 무르고 싶습니다⁠. 계약금은 갚을게요⁠.⁠”

“⁠뭘로요⁠?⁠” 곽 실장이 화면을 껐다⁠. “⁠새신랑 월급으로 오천을 갚으려면 몇 년이에요⁠? 수학 선생님이니까 바로 나오겠네⁠.⁠”

건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답은 머릿속에서 바로 나왔다⁠. 아홉 해였다⁠. 어머니 국밥집 월세를 보태 주지 않는다고 쳐도 일곱 해였다⁠.

“⁠무르는 건 됩니다⁠. 계약금 돌려주고 위약금 내고⁠.⁠” 곽 실장이 건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거 못 하면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우리 새댁 고소 취하만 시키면 돼요⁠. 새댁이 조용하면 다섯 집이 다 조용해요⁠. 새댁이 시끄러우면 다섯 집이 다 시끄럽고요⁠.⁠”

곽 실장이 차에 올라탔다⁠. 비상등이 꺼지고 차가 미끄러져 나갔다⁠. 바퀴가 고인 물을 갈라 건오의 회색 면바지 밑단에 흙탕물이 튀었다⁠. 건오는 밑단을 내려다보았다⁠. 엊그제 학원에서 묻힌 분필 자국 옆에 갈색 점이 둘 생겼다⁠.

*

염서겸은 일요일 저녁 관리사무소 소장에게서 종이 뭉치를 받았다⁠. 맨 위 장에 「⁠국토부 조사관 단지 내 거주 반대 및 사생활 침해 중단 요구서⁠」라고 인쇄돼 있었고⁠, 밑으로 동·호수와 서명이 빽빽했다⁠. 소장은 서겸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사무실 바닥 타일의 줄눈만 보았다⁠.

“⁠이백팔십 세대가 넘었어요⁠. 제가 받은 건 아니고요⁠, 기호 2번 사람들이 돌렸어요⁠. 조사관님께 전해 달라고⁠.⁠”

“⁠기호 2번 사람들이요⁠.⁠” 서겸이 종이를 넘겼다⁠. 106동 1203호는 없었다⁠. 104동 803호는 있었다⁠. 서명 글씨가 아침에 본 남자 신발만큼 반듯했다⁠. “⁠이거 제가 받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아무것도 안 달라지죠⁠. 그냥 다들 무서운 거예요⁠. 집값이요⁠.⁠” 소장이 한숨을 쉬었다⁠. “⁠조사관님⁠, 칫솔 진짜 세세요⁠?⁠”

“⁠칫솔은 안 셉니다⁠. 젖었는지만 봐요⁠.⁠”

서겸은 서명지를 옆구리에 끼고 단지를 한 바퀴 걸었다⁠. 불 켜진 창이 많았다⁠. 정문 버스 정류장 의자에 어린이집 교사가 잠든 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막차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교사의 운동화 앞코가 가로등 밑에서 거뭇했다⁠. 서겸은 담희 부부의 서류를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예비 입주자 1번⁠, 서담희⁠. 성남의 반지하⁠. 서겸은 정류장을 지나치지 못하고 맞은편 편의점에 들어가 따뜻한 보리차 하나를 샀다가⁠, 건네지 못하고 들고 나왔다⁠. 조사관이 예비 입주자에게 음료를 건네는 일은 규정에 없었다⁠. 버스가 와서 교사를 태워 갔다⁠. 서겸은 식은 보리차를 마셨다⁠.

*

왕가율은 새벽 한 시 사십 분⁠, 병동 처치실에서 수액 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이트 근무 사흘째였다⁠. 간호사실 텔레비전은 소리를 끈 채 뉴스 자막만 흘려보냈다⁠.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 소위 통과 또 불발⁠… 피해자 단체 “⁠1년째 제자리⁠”⁠」 동기 간호사가 자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율아⁠, 너네 얘기다⁠.⁠”

“⁠우리 얘기는 늘 저거야⁠. 또 불발⁠.⁠”

“⁠그래도 넌 이제 신혼이잖아⁠.⁠” 동기가 가율의 목을 가리켰다⁠. 가운 깃 사이로 은 목걸이가 반짝였다⁠. “⁠근무 때도 반지 걸고 오는 사람이 어딨냐⁠. 꿀 떨어진다⁠, 왕 간호사⁠.⁠”

“⁠수술 부위에 꿀 떨어지면 감염돼⁠.⁠”

“⁠아⁠, 진짜 재미없어⁠. 신랑은 너 이러는 거 알아⁠?⁠”

“⁠알아⁠. 그래서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껴⁠.⁠”

동기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고관절 골절 노인 한 명이 올라온다는 연락이었다⁠. 고시원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이동 침대가 복도 바닥 이음매를 덜컹덜컹 넘어 들어왔다⁠. 가율은 침대를 받다가 노인의 얼굴을 보고 손을 멈췄다⁠. 머리가 하얗게 센 마른 노인이었다⁠. 볼이 패고⁠, 오른쪽 눈썹 위에 콩알만 한 점이 있었다⁠. 지난여름 가율이 고시원 쪽방 문을 두드렸을 때⁠,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아가씨는 누구요⁠」라고 묻던 노인이었다⁠. 늘해랑빌 등기부 마흔 장에 이름이 박힌 서류상 집주인이었다⁠.

“⁠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누구요⁠?⁠”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통제 때문에 혀가 꼬였다⁠. “⁠간호사 아가씨⁠. 나 집에 가야 돼⁠. 집에 우편물 와⁠. 세금 고지서가 자꾸 와⁠. 나는 집이 없는데 세금이 와⁠. 우습지⁠.⁠”

노인이 웃다가 다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가율은 노인의 손을 잡고 진통제 주입 속도를 확인했다⁠. 노인의 손바닥은 장판처럼 얇고 차가웠다⁠. 맥박이 손가락 끝에서 빠르게 뛰었다⁠.

새벽 두 시 십 분⁠, 보호자가 왔다⁠. 검은 패딩 조끼를 입은 남자가 간호사실 앞에 멈췄다⁠. 젖은 구두가 병동 바닥에 발자국을 남겼다⁠.

“⁠어르신 보호자입니다⁠. 수술 동의서 쓰러 왔어요⁠.⁠”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먼 조카요⁠.⁠” 남자가 웃었다⁠. “⁠어르신이 의지할 데가 저밖에 없어서요⁠.⁠”

가율이 동의서와 펜을 내밀었다⁠. 남자는 보호자 칸에 「⁠곽⁠」 한 글자와 서명을 하고⁠, 연락처 칸에 숫자 열한 개를 빠르게 썼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가율의 가운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보았다⁠. 「⁠간호사 왕가율⁠」

“⁠아⁠.⁠” 곽 실장이 이름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간호사님이 왕가율 씨구나⁠. 신혼이시라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가율의 손이 동의서를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동네 소문이요⁠. 솔마루 사시잖아요⁠. 저도 그 단지 일을 좀 봐서요⁠.⁠” 곽 실장이 펜을 가율의 손에 돌려주었다⁠. 펜 뚜껑을 닫아서⁠. “⁠우리 어르신 잘 부탁드려요⁠. 어르신이 아프시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져요⁠.⁠”

곽 실장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구두가 남긴 젖은 발자국이 간호사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한 줄로 이어졌다⁠. 가율은 동의서 연락처 칸의 숫자 열한 개를 내려다보았다⁠. 끝의 네 자리가 눈에 밟혔다⁠. 칠⁠, 칠⁠, 공⁠, 사⁠. 어디서 본 숫자였다⁠.

*

왕가율은 아침 여덟 시 반에 1203호 현관 문턱을 밟았다⁠. 삐걱⁠. 거실에서 건오가 에어매트를 개다가 고개를 들었다⁠.

“⁠수고하셨어요⁠. 북엇국 끓여 놨어요⁠. 나이트 끝나고 오면 속이 쓰리다고 하셨잖아요⁠.⁠”

가율은 신발을 벗다가 신발장 위를 보았다⁠. 건오의 휴대전화가 충전기에 꽂혀 화면을 위로 한 채 놓여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 진동이 신발장 나무판을 웅웅 울렸다⁠. 화면 가운데 글자가 떴다⁠.

「⁠실장님⁠」

이름 밑에 번호가 작게 떴다⁠. 끝의 네 자리가 칠⁠, 칠⁠, 공⁠, 사였다⁠.

건오가 개던 에어매트를 내려놓고 현관으로 걸어왔다⁠. 휴대전화를 집으려는 건오의 손보다 가율의 말이 먼저 나왔다⁠.

“⁠건오 씨⁠.⁠” 가율은 맨발로 현관 바닥에 서 있었다⁠. 대리석이 발바닥을 차갑게 밀어 올렸다⁠. “⁠실장님이 누구예요⁠?⁠”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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