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68자)

무주택 십오 년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아침 여덟 시 반⁠, 왕가율은 엘리베이터 바닥의 보호 비닐이 다 벗겨진 것을 보았다⁠. 밤사이 누가 떼어 냈다⁠. 맨 대리석 위에서 간호화 밑창이 끽 소리를 냈다⁠.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두 시간 동안 수술 환자 열한 명의 소변량을 재고 진통제를 놓고⁠, 새벽 네 시에 열이 오른 할머니 곁에서 얼음주머니를 갈았다⁠. 몸은 젖은 수건 같았고 머리는 이상하게 맑았다⁠.

가방 안에 비닐 파일이 들어 있었다⁠. 늘해랑빌 등기부 등본 마흔 장⁠, 피해자 모임 사람들이 낸 고소장 사본⁠, 보증금 반환 소송 서류⁠. 일 년 넘게 들고 다닌 파일이라 모서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12층에서 내린 가율은 1203호 대신 1204호 앞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문 앞 바닥에 떡 부스러기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쑥떡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한 켤레뿐인 슬리퍼였다⁠.

*

염서겸은 현관 화면에 뜬 1203호 아내의 얼굴을 보고 노트북을 덮었다⁠. 덮기 전에 화면 맨 위 기사 제목이 한 번 더 눈에 들어왔다⁠. 「⁠신혼부부 특공 경쟁률 역대 최고⁠… 반지하 신혼부부 “⁠청약이 유일한 사다리⁠”⁠」 아침마다 보는 종류의 기사였다⁠.

“⁠나이트 끝나셨어요⁠?⁠” 문을 열며 서겸이 물었다⁠. “⁠어제 남편분은 이브닝이라고 하셨어요⁠.⁠”

“⁠제 근무를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수간호사밖에 없어요⁠.⁠” 가율이 신발을 벗었다⁠. 슬리퍼를 내미는 서겸에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뿐이잖아요⁠. 맨발이 편해요⁠.⁠”

1204호 거실에는 접이식 침대와 접이식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탁자 옆에 떡 상자 두 개가 뜯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가율은 탁자 앞 바닥에 앉아 비닐 파일을 꺼냈다⁠. 바닥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다⁠. 발바닥이 차가웠다⁠.

“⁠화곡동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 대표 왕가율입니다⁠. 마흔 세대 가운데 서른여덟 세대가 보증금을 못 받았어요⁠. 다 합치면 오십억이 넘어요⁠. 집주인은 설기담이에요⁠. 101동 1501호에 사는 사람이요⁠.⁠”

서겸은 파일을 넘겼다⁠. 등기부 등본 맨 앞 장의 소유자 칸에 처음 보는 노인의 이름이 있었다⁠. 날짜를 보니 보증금 만기 석 달 전에 명의가 넘어가 있었다⁠.

“⁠여기 설기담 씨 이름이 없네요⁠.⁠”

“⁠마흔 장 다 없어요⁠. 계약할 때는 있었어요⁠. 만기 직전에 다 이 할아버지한테 넘겼어요⁠. 할아버지는 집이 마흔 채인 것도 몰라요⁠. 경찰 말로는 그래요⁠. 찾아갔더니 고시원에 사셨어요⁠.⁠”

서겸이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몇 번 두드리자 설기담의 당첨 서류가 떴다⁠. 가율이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려 하자 서겸이 화면을 살짝 틀었다⁠.

“⁠설기담 씨는 일반공급 당첨자예요⁠. 제 열두 가구에 없습니다⁠.⁠” 서겸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서류로는 무주택 십오 년이에요⁠. 부양가족도 있고요⁠. 가점이 높아요⁠. 깨끗한 당첨이에요⁠.⁠”

“⁠마흔 채 집주인이 무주택 십오 년이요⁠?⁠”

“⁠서류로는요⁠.⁠” 서겸이 노트북을 덮었다⁠. “⁠서류로는 1203호도 결혼한 지 석 달 된 신혼부부예요⁠.⁠”

가율의 귀가 붉어졌다⁠. 서겸은 붉어진 귀를 보았고⁠, 가율도 서겸이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대표님⁠. 하나만 여쭐게요⁠.⁠” 서겸이 탁자 위에 손을 깍지 꼈다⁠. “⁠보증금 일억 육천 날리고 고시원에 계셨죠⁠. 그러다 석 달 전에 결혼하셨어요⁠. 혼인신고 열흘 뒤에 이 단지 특공을 넣으셨고요⁠. 왜 하필 지금이에요⁠?⁠”

“⁠사람이 바닥까지 가면 옆에 누가 있는지 보여요⁠.⁠” 가율이 대답했다⁠. 연습한 문장이었다⁠. 연습할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건오 씨도 같은 빌라 201호였어요⁠. 어머님 돈을 날렸고요⁠. 둘 다 바닥이었어요⁠.⁠”

“⁠바닥이 둘이면 집이 되나요⁠?⁠”

“⁠조사관님은 바닥에 누워 보셨어요⁠?⁠”

“⁠네⁠.⁠” 서겸이 대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해서 가율이 말을 멈췄다⁠. 서겸은 덧붙이지 않았다⁠. 창밖에서 어린이집 차가 후진하는 소리가 삐삐 울렸다⁠.

“⁠어제 설기담 씨가 여기 왔었어요⁠.⁠” 서겸이 떡 상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떡 두 상자를 주면서 그러더군요⁠. 1203호 새댁이 좀 예민하다고⁠. 보증금 사기를 당해서 아무나 사기꾼으로 본다고⁠. 혹시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불쌍하게 봐 달라고요⁠.⁠”

가율은 비닐 파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파일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먼저 왔네요⁠.⁠”

“⁠먼저 왔어요⁠. 먼저 오는 사람은 대개 뭘 압니다⁠.⁠” 서겸이 등기부 등본을 반으로 접어 탁자 위에 두었다⁠. “⁠이거 복사해도 되죠⁠? 설기담 씨를 열세 번째로 봅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하지 마세요⁠.⁠” 서겸이 일어섰다⁠. “⁠열두 번째까지 그대로예요⁠. 1203호도 계속 봅니다⁠. 대표님이 제보하신 일과 대표님 댁을 보는 일은 다른 일이에요⁠. 제가 보는 집이 하나 늘었을 뿐이에요⁠.⁠”

가율은 맨발로 현관까지 걸었다⁠. 차가운 마루가 발꿈치를 따라왔다⁠. 신발을 신다가 가율이 돌아보았다⁠.

“⁠떡은 안 드세요⁠?⁠”

“⁠증거일 수도 있어서요⁠.⁠” 서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농담입니다⁠. 쑥을 못 먹어요⁠.⁠”

*

길건오는 오후 네 시⁠, 천호동 학원 3강의실 교탁에 종로 귀금속 상가의 비닐봉지를 올려놓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맨 앞줄 학생이 먼저 봤다⁠. 고3반 열네 명의 눈이 동시에 교탁으로 모였다⁠. 강의실 바닥의 낡은 장판이 의자 끄는 소리를 길게 뱉었다⁠.

“⁠쌤⁠, 그거 반지예요⁠?⁠”

“⁠확률 단원이다⁠. 교과서 펴⁠.⁠”

“⁠쌤 결혼해요⁠? 헐⁠, 쌤 여자친구 있었어요⁠?⁠”

“⁠있었다가 아니라⁠, 결혼을 했어⁠.⁠” 건오는 비닐봉지를 서랍에 넣었다⁠. 말해 놓고 보니 처음으로 남 앞에서 한 말이었다⁠.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던 날보다 입이 더 말랐다⁠. “⁠석 달 전에⁠.⁠”

강의실이 뒤집혔다⁠. 뒷줄에서 누가 휴대전화로 「⁠길쌤 유부남 됨⁠」을 단톡방에 올렸고⁠, 일 분도 안 돼 다른 반 학생들의 답장이 줄줄이 울렸다⁠. 「⁠구라⁠」⁠, 「⁠상대 누구⁠」⁠, 「⁠길쌤 안경 벗으면 잘생겼다던데 그거 진짜임⁠?⁠」 건오는 칠판에 크게 썼다⁠. 「⁠두 사건 A⁠, B가 서로 독립일 때⁠」

“⁠자⁠, 예를 들자⁠. 내가 결혼한 사건과 너희 모의고사 점수가 오르는 사건은 서로 독립이다⁠. 내가 결혼해도 너희 점수는 안 오른다⁠.⁠”

“⁠쌤⁠, 그럼 사모님이랑 쌤이 만난 사건은요⁠? 독립이에요⁠?⁠”

건오는 분필을 쥔 채 잠깐 멈췄다⁠. 가율과 건오가 만난 사건은 늘해랑빌 보증금이 사라진 사건에 묶여 있었다⁠. 둘 다 늘해랑빌에 살지 않았다면 만날 일이 없었다⁠. 두 사건 사이에는 곽 실장도⁠, 옥다엽도⁠, 설기담도 끼어 있었다⁠.

“⁠종속이다⁠.⁠” 건오가 말했다⁠. “⁠서로 영향을 주는 사건⁠. 다음 문제⁠.⁠”

학생들은 건오의 대답을 로맨틱하다고 받아들였다⁠. 맨 앞줄 학생이 박수를 쳤다⁠. 건오는 칠판을 향해 돌아서서 분필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 회색 면바지에 하얀 손자국이 두 줄 남았다⁠.

*

왕가율은 저녁 일곱 시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건오가 무언가를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나와 보니 건오가 마루에 앉아 작은 상자 두 개를 열고 있었다⁠. 종로에서 사 왔다는 커플링이었다⁠. 은반지 두 개가 벨벳 홈에 나란히 박혀 있었다⁠.

“⁠점검 때 반지가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제일 싼 걸로 샀어요⁠. 은이에요⁠. 은은 검게 변하는데⁠, 검게 변하면 오래 낀 것처럼 보입니다⁠. 장점이죠⁠.⁠”

“⁠저 병동에선 반지 못 껴요⁠. 손 씻을 때 반지 밑에 균이 남아요⁠.⁠”

건오는 반지를 들고 잠시 굳었다⁠. 「⁠부부 문답 100⁠」에 없는 정보였다⁠. 건오가 가방에서 가는 은 목걸이를 꺼냈다⁠. 반지와 같은 가게 비닐에 들어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산 건 아니고요⁠.⁠” 건오가 목걸이에 반지를 꿰었다⁠. “⁠사장님이 끼워 주셨어요⁠. 신혼이면 하나 더 가져가라고⁠. 이렇게 걸면 됩니다⁠.⁠”

가율은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반지가 블라우스 안에서 차갑게 쇄골을 눌렀다가 금세 체온을 닮아 갔다⁠. 건오는 제 반지를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우려다 손가락 마디에서 멈췄다⁠. 한 호수 작았다⁠.

“⁠새끼손가락에 끼면 되겠네요⁠.⁠” 가율이 말했다⁠.

“⁠새끼손가락에 반지 끼는 남편은 없습니다⁠.⁠”

“⁠있어요⁠. 지금 생겼어요⁠.⁠”

건오가 웃었다⁠. 새끼손가락에 은반지가 헐겁게 들어갔다⁠. 가율은 건오의 손을 보다가 오늘 아침 일을 말했다⁠. 1204호에 간 것⁠, 비닐 파일을 꺼낸 것⁠, 설기담이 열세 번째가 된 것⁠. 건오의 웃음이 말 한 마디마다 조금씩 줄었다⁠.

“⁠조사관한테 직접 갔다고요⁠? 우리 집을 보는 사람한테요⁠?⁠”

“⁠설기담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어요⁠.⁠”

“⁠우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도 그 사람밖에 없어요⁠.⁠” 건오가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돌렸다⁠. “⁠대표님이 제보하면 조사관은 대표님 사정을 더 들여다봐요⁠. 보증금 날린 대표가 왜 석 달 만에 결혼했는지⁠. 저라면 그걸 제일 먼저 봅니다⁠. 수학 문제도 그래요⁠. 답이 너무 깔끔하면 풀이를 다시 봐요⁠.⁠”

“⁠벌써 물어봤어요⁠. 왜 하필 지금이냐고⁠.⁠”

“⁠뭐라고 하셨어요⁠?⁠”

“⁠바닥이 둘이면 집이 된다고⁠.⁠”

건오가 가율을 보았다⁠. 가율은 말을 하고 나서야 방금 한 말이 연습한 문장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서겸에게 한 말과 조금 달랐다⁠. 거실 바닥 난방이 두 사람의 무릎을 똑같이 데우고 있었다⁠.

“⁠설기담이 고소 취하하라고 했어요⁠.⁠” 가율이 말했다⁠. “⁠떡 줄 때요⁠. 저 거기서 물러나면 서른여덟 집이 끝나요⁠. 건오 씨 어머님 돈도요⁠.⁠”

건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부 문답 100⁠」을 펼쳐 연필을 들었다⁠. 23번⁠, 「⁠아내가 화났을 때 하는 행동은⁠?⁠」 건오가 빈 줄에 천천히 썼다⁠. 「⁠맨발로 다닌다⁠.⁠」

*

길건오는 밤 열한 시 반에 베란다로 나갔다⁠.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세 번째로 떨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베란다 바닥 타일은 난방이 안 들어와서 양말 바닥으로 찬 기운이 올라왔다⁠. 건오는 유리문을 닫고 전화를 받았다⁠.

“⁠새신랑⁠, 늦게까지 안 자네⁠.⁠” 설기담의 목소리였다⁠. 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뉴스였다⁠.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이번 주 국회 소위원회에⁠…⁠」 설기담이 리모컨으로 소리를 줄였다⁠. “⁠떡은 맛있게 먹었어⁠?⁠”

“⁠사장님⁠.⁠”

“⁠우리 새댁이 오늘 아침에 옆집 공무원 집에 들어가더라⁠. 맨발로⁠. 한 시간 있다가 나오던데⁠.⁠” 설기담이 웃었다⁠. “⁠101동 15층에서 106동 12층 복도가 잘 보여⁠. 내가 이 집을 왜 골랐겠어⁠.⁠”

건오는 베란다 난간을 잡았다⁠. 맞은편 101동 꼭대기 층에 불 켜진 창 하나가 보였다⁠.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다⁠.

“⁠새신랑이 곽 실장한테 써 준 거 있지⁠. 그거 잊지 마⁠. 신혼집 계약금 누가 냈는지도⁠.⁠” 설기담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화를 낼 때보다 부드러울 때가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마누라 단속 좀 해⁠. 새댁이 저러다 다치면 새신랑도 다쳐⁠. 우리끼리는 같이 사는 거야⁠. 한 단지에서⁠.⁠”

맞은편 창의 커튼이 닫혔다⁠. 건오는 거실 유리문 너머를 돌아보았다⁠. 마루 위에 펴 둔 에어매트 옆에 「⁠부부 문답 100⁠」이 펼쳐져 있었고⁠, 안방 문틈으로 불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가율이 아직 깨어 있었다⁠.

“⁠대답해야지⁠, 새신랑⁠.⁠”

건오는 새끼손가락의 은반지를 엄지로 돌렸다⁠. 한 번⁠, 두 번⁠.

“⁠네⁠.⁠” 건오가 말했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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