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55자)

떡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일요일 아침 열 시⁠, 엘리베이터 홀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왕가율은 거실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삿짐 상자의 테이프를 뜯다가 손을 멈췄다⁠. 슬리퍼가 아니었다⁠. 구두 굽이 타일을 또각또각 두드리며 1201호 앞에서 멈췄다가⁠, 1202호 앞에서 멈췄다가⁠, 점점 가까워졌다⁠.

“⁠새로 오신 분들 반가워요⁠. 101동 설기담입니다⁠. 떡 하나 드세요⁠.⁠”

벽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계약서를 쓰던 날 귤을 까 주던 목소리와 높이가 같았다⁠. 가율은 테이프를 쥔 채 일어섰다⁠. 거실 바닥에서 에어매트를 개던 건오가 가율의 얼굴을 보고 매트를 떨어뜨렸다⁠.

초인종이 울렸다⁠.

“⁠제가 열게요⁠.⁠” 건오가 말했다⁠.

“⁠아니요⁠. 제가요⁠.⁠”

가율은 현관 문턱의 삐걱이는 자리를 밟고 문을 열었다⁠. 설기담은 사진보다 작았다⁠. 하늘색 점퍼 가슴에 「⁠기호 2번 설기담⁠」 배지를 달았고⁠, 한 손에 떡 상자를⁠, 다른 손에 전단 뭉치를 들었다⁠. 전단에는 「⁠우리 단지 집값⁠, 우리가 지킨다⁠」라는 글자가 빨갛게 박혀 있었다⁠.

“⁠아이고⁠, 우리 새댁⁠.⁠” 설기담이 웃었다⁠. 왼쪽 볼에만 보조개가 파였다⁠. “⁠신혼이죠⁠? 얼굴에 써 있네⁠. 떡 드세요⁠. 쑥떡이에요⁠. 쑥이 집안에 나쁜 기운을 막아 준대⁠.⁠”

“⁠늘해랑빌 302호 왕가율이에요⁠.⁠”

설기담은 떡 상자를 내민 자세 그대로 있었다⁠. 웃음도 그대로였다⁠. 눈만 가율의 얼굴에서 가율의 어깨 너머로⁠, 거실에서 굳어 있는 건오에게로 옮겨 갔다가 돌아왔다⁠.

“⁠늘해랑빌⁠? 거기가 어디지⁠.⁠” 설기담이 고개를 갸웃했다⁠. 복도 끝 1201호 문이 아직 열려 있었고⁠, 1201호 아기 엄마가 떡을 들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새댁⁠, 사람 잘못 봤네⁠. 내가 얼굴이 흔해⁠. 동네마다 나 닮은 사람이 하나씩 있다니까⁠.⁠”

“⁠화곡동이요⁠. 마흔 세대⁠. 계약하던 날 귤 까 주셨잖아요⁠.⁠”

“⁠귤은 내가 까긴 잘 까지⁠.⁠” 설기담이 소리 내어 웃었다⁠. 1201호 아기 엄마도 따라 웃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설기담이 반 걸음 다가왔다⁠. 떡 상자가 가율의 가슴께에 닿았다⁠. 쑥 냄새가 훅 끼쳤다⁠.

“⁠고소 취하해⁠.⁠” 목소리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옆집 공무원이랑 벌써 친해 보이던데⁠. 결혼한 지 석 달 됐다며⁠. 새신랑은 허리가 안 좋고⁠.⁠”

가율의 손이 문고리를 쥐었다⁠.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허리 이야기는 어젯밤 현관에서만 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홀에서⁠.

“⁠새 아파트는 소리가 잘 울려⁠, 새댁⁠.⁠” 설기담이 떡 상자를 가율의 손에 쥐여 주고 물러났다⁠.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집들이할 때 불러 줘요⁠! 우리 단지는 이웃끼리 정이 있어야 집값이 올라⁠!⁠”

구두 굽 소리가 엘리베이터로 멀어졌다⁠. 가율은 떡 상자를 든 채 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붙이자 문짝의 찬 기운이 블라우스를 뚫고 들어왔다⁠.

“⁠모임방에 올릴게요⁠.⁠” 가율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설기담이 솔마루 101동에 산다고⁠. 입주자대표 후보로 나왔다고⁠. 다들 알아야 해요⁠.⁠”

건오가 가율의 손목을 잡았다⁠. 처음이었다⁠. 잡고 나서 건오가 먼저 놀라 손을 놓았다⁠.

“⁠지금 올리면 다들 여기 몰려와요⁠. 기자도 오고요⁠. 기자가 오면 옆집 사람이 제일 먼저 봐요⁠. 피해자 모임 대표가 왜 하필 지금 신혼부부 특공에 당첨됐는지⁠.⁠”

가율은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 대화방 입력 칸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서른여덟 명이 기다리는 방이었다⁠. 가율은 화면을 껐다⁠. 떡 상자의 비닐 랩 위로 김이 서려 있었다⁠.

*

길건오는 단지 상가 2층 셀프 사진관 앞에서 지갑을 열었다⁠. 네 컷에 사천 원⁠. 커튼 안에 들어가자 바닥에 붙은 발 모양 스티커 두 쌍이 보였다⁠. 여기 서라는 표시였다⁠. 발 모양 스티커 사이가 한 뼘도 안 됐다⁠.

“⁠가까이 서야 해요⁠.⁠” 건오가 말했다⁠. “⁠내일 점검 때 집에 사진이 한 장도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결혼한 지 석 달인데⁠.⁠”

“⁠알아요⁠.⁠” 가율이 스티커 위에 발을 올렸다⁠. 어깨와 어깨 사이에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틈이 남았다⁠.

화면에 「⁠포즈를 취해 주세요 10⁠」이 떴다⁠. 숫자가 줄어드는 동안 건오는 머릿속으로 어젯밤 찾아본 「⁠신혼부부 커플 포즈 추천⁠」을 넘겼다⁠. 볼 뽀뽀⁠, 백허그⁠, 이마 맞대기⁠. 셋 다 할 수 없었다⁠. 결국 둘은 양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증명사진처럼 나왔다⁠.

두 번째 컷에서 건오가 가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율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고⁠, 화면 속 가율의 얼굴이 반쯤 흐려졌다⁠.

“⁠다시 할까요⁠?⁠”

“⁠네 컷을 다 찍어야 사진이 나와요⁠.⁠”

세 번째 컷 직전에 건오의 휴대전화가 바지 주머니에서 짧게 떨었다⁠. 건오는 꺼내 보지 않고 손바닥으로 주머니를 눌렀다⁠. 누가 보냈는지 건오는 알았다⁠. 손바닥 밑에서 진동이 한 번 더 왔다⁠.

“⁠건오 씨⁠, 표정⁠.⁠”

“⁠네⁠?⁠”

찰칵⁠. 세 번째 컷은 건오가 입을 반쯤 벌린 얼굴이었다⁠. 가율이 건오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웃는 순간 네 번째 컷이 찍혔다⁠. 사진기에서 나온 종이를 받아 든 건오는 네 번째 칸을 한참 보았다⁠. 가율이 고개를 젖히고 웃고⁠, 건오가 놀란 얼굴로 가율의 웃음을 보고 있었다⁠. 연습한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이거 쓰면 되겠네요⁠.⁠” 가율이 사진을 가져갔다⁠. “⁠냉장고에 붙이게요⁠.⁠”

건오는 상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냈다⁠. 「⁠실장님⁠」에게서 온 문자 두 통이 잠금 화면에 떠 있었다⁠.

「⁠입주 축하합니다⁠. 설 사장님이 떡은 잘 받으셨냐고⁠.⁠」

「⁠고소 건은 새신랑이 잘 정리하실 거라 믿습니다⁠.⁠」

건오는 문자를 지웠다⁠. 앞서 걷던 가율이 돌아보았다⁠.

“⁠누구예요⁠?⁠”

“⁠학원이요⁠. 내일 보강 잡자고⁠.⁠”

*

염서겸은 월요일 저녁 일곱 시에 1203호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동의서를 내밀었다⁠. 서명란에 두 사람 이름이 차례로 들어갔다⁠. 남자의 글씨는 반듯했고⁠, 여자의 글씨는 마지막 획이 길게 빠졌다⁠.

“⁠편하게 계세요⁠. 저는 그냥 둘러보고⁠, 몇 가지 따로 여쭤볼게요⁠.⁠”

서겸은 현관부터 보았다⁠. 신발장 안에 여자 운동화 세 켤레와 굽 낮은 구두 하나⁠, 남자 구두 두 켤레와 운동화 하나⁠. 남자 운동화는 밑창에 흙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산 것이었다⁠. 욕실 컵에 칫솔 두 개가 꽂혀 있었다⁠. 둘 다 젖어 있었고⁠, 둘 다 새것이었다⁠. 냉장고에 네 컷 사진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마지막 칸에서 여자가 웃고 있었다⁠. 서겸은 마지막 칸을 오래 보았다⁠. 웃음은 가짜로 찍기 어렵다⁠.

“⁠남편분은 거실에서⁠, 아내분은 부엌에서요⁠. 같은 걸 여쭤볼게요⁠.⁠”

거실 마루에 마주 앉자 건오가 무릎을 꿇었다⁠. 서겸은 편하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아내분 내일 출근 몇 시예요⁠?⁠”

“⁠일곱 시요⁠. 아니⁠, 데이 근무면 일곱 시고⁠, 이브닝이면 오후 세 시고⁠, 나이트면 밤 열 시 반⁠. 내일은⁠.⁠” 건오가 냉장고를 힐끗 보았다⁠. 사진 옆에 근무표가 붙어 있었다⁠. 서겸이 몸을 틀어 근무표를 가렸다⁠. “⁠내일은 이브닝입니다⁠.⁠”

부엌에서 같은 물음에 가율이 대답했다⁠. “⁠나이트요⁠.⁠”

서겸은 아무것도 고치지 않은 얼굴로 다음 물음을 꺼냈다⁠. “⁠두 분 처음 만난 날⁠, 날씨 기억하세요⁠?⁠”

“⁠눈이 왔습니다⁠.⁠” 건오가 곧바로 대답했다⁠. 「⁠부부 문답 100⁠」의 7번이었다⁠. “⁠첫눈이었어요⁠. 아내가 우산이 없어서 제가 편의점에서 사 왔고⁠, 비닐우산이라 눈이 위에 쌓이는 게 보였습니다⁠. 아내가 그걸 올려다보면서⁠.⁠”

“⁠거기까지만요⁠.⁠” 서겸이 손을 들었다⁠. “⁠묻지 않은 걸 길게 대답하시면 대개 외운 겁니다⁠.⁠”

부엌의 가율은 같은 물음에 한참 냉장고 문을 보다가 말했다⁠. “⁠추웠어요⁠. 건오 씨가 우산을 사 왔는데 하나만 사 와서⁠, 둘이 쓰기엔 작았어요⁠.⁠” 서겸은 가율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짧았고⁠, 작은 우산 하나는 문답 종이에 없을 만한 이야기였다⁠.

서겸이 세 번째 물음을 꺼내려는 참에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 화면에 보자기를 든 육십 대 여자가 떴다⁠.

“⁠건오야⁠! 엄마 왔다⁠! 문 열어⁠, 팔 떨어진다⁠!⁠”

건오가 일어나다가 마루에 무릎을 찧었다⁠. 가율이 먼저 현관으로 갔다⁠. 문이 열리자 보자기 둘과 아이스박스 하나가 들어왔고⁠, 뒤따라 건오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가율을 보자마자 보자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가율의 얼굴을 감쌌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 얼굴이 반쪽이 됐네⁠. 이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내가 갈비찜 했다⁠. 상견례 때 우리 며느리가 갈비찜 잘 먹길래⁠.⁠”

거실에서 건오가 눈을 감았다⁠. 가율이 지어낸 상견례 갈비찜이 어머니 입에서 진짜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서겸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어머⁠, 손님 계셨네⁠.⁠” 어머니가 서겸을 보았다⁠. “⁠누구셔⁠?⁠”

“⁠옆집 사는 사람입니다⁠.⁠” 서겸이 고개를 숙였다⁠. “⁠국토교통부에서 나왔어요⁠. 신혼부부 특공 당첨 가구 실제로 사시나 보러요⁠.⁠”

“⁠아유⁠, 잘 오셨네⁠. 실컷 보세요⁠. 우리 애들 진짜로 살아요⁠.⁠” 어머니가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김치통이 다섯 개 나왔다⁠. “⁠우리 건오가 서른둘 먹도록 여자를 안 데려와서 내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몰라요⁠. 그러다 석 달 전에 갑자기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화가 왔어⁠. 식도 안 하고⁠. 내가 전화통 붙들고 한 시간을 울었다니까⁠.⁠”

“⁠기쁘셔서요⁠?⁠”

“⁠기뻐서도 울고 서운해서도 울고⁠. 근데 총각⁠.⁠” 어머니가 김치통 하나를 서겸의 가슴에 안겼다⁠. “⁠총각도 얼른 장가가요⁠. 남의 집 칫솔 세지 말고⁠. 이거 총각김치야⁠.⁠”

서겸은 총각김치를 안은 채 서 있었다⁠. 냉장고 앞에서 어머니가 네 컷 사진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 이거 언제 찍었어⁠? 엄마는 왜 안 보내 줬어⁠!⁠”

“⁠어제요⁠.⁠” 건오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가율과 같은 순간에 같은 말이 나왔다⁠. 서겸은 들었다⁠. 처음으로 두 대답이 겹쳤다⁠.

“⁠다음 주에 다시 올게요⁠.⁠” 서겸이 총각김치를 들고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으며 건오의 새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남편분 운동화⁠, 한 번 신고 나가세요⁠. 새 신발만 있는 신혼집은 없어요⁠.⁠”

*

왕가율은 밤 아홉 시에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섰다⁠. 건오 어머니는 갈비찜과 김치 다섯 통과 「⁠손주는 언제⁠」라는 말을 남기고 막 돌아간 참이었다⁠. 갈비찜 냄비는 가율이 혼자 다 먹은 것으로 해 두었다⁠. 어머니가 서운해할까 봐 건오와 둘이 나눠 퍼먹다가⁠, 마지막 남은 갈비 한 대를 두고 젓가락이 부딪쳤다⁠. 건오가 양보했다⁠. 가율이 받았다⁠. 연습한 적 없는 순서였다⁠.

엘리베이터 홀 센서등이 켜졌다⁠. 1204호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율은 걸음을 멈췄다⁠. 발밑에서 슬리퍼가 미끄러졌다⁠.

“⁠공무원 양반⁠, 혼자 사는 총각한테는 떡 두 상자야⁠. 내가 이래 봬도 정이 많아⁠.⁠”

열린 문틈으로 하늘색 점퍼의 등이 보였다⁠. 설기담이 1204호 현관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있었다⁠. 서겸의 거실 바닥에 떡 상자 두 개가 놓였다⁠. 서겸이 설기담에게 슬리퍼를 내밀고⁠, 설기담이 슬리퍼를 신었다⁠. 한 켤레뿐이던 서겸의 슬리퍼였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닫히기 직전⁠, 설기담이 고개를 돌려 문틈 사이로 가율과 눈을 맞췄다⁠.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가율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채 엘리베이터 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센서등이 꺼졌다⁠. 가율은 움직이지 않았다⁠. 닫힌 1204호 문 너머로 설기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율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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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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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달래2026.10.31· 2화

    구두 굽 소리가 1201호, 1202호 앞에서 멈추며 다가오는 장면, 이웃이 제일 무서워요.

    • 소하린작가2026.11.01

      위장 결혼 부부한테 이웃 인사는 시험이에요. 떡 접시를 받는 순간부터 연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