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10자)

여보 연습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엘리베이터 바닥에는 보호 비닐이 아직 덜 벗겨져 있었다⁠. 왕가율이 운동화 앞코로 비닐 귀퉁이를 눌러 펴자 끈적한 소리가 났고⁠, 이삿짐 상자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1층에서 12층까지는 사십 초 남짓이었고⁠, 오늘의 목표는 사십 초 안에 「⁠여보⁠」를 한 번이라도 안 웃고 해 보는 것이었다⁠.

“⁠자⁠, 다시요⁠.⁠” 옆에서 길건오가 동그란 은테 안경을 밀어 올렸다⁠. 청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차림이었다⁠. “⁠제가 먼저 할게요⁠. 여보⁠, 상자 무거우면 제가 들까⁠?⁠”

“⁠괜찮아요⁠.⁠”

“⁠아니죠⁠. 존댓말을 하면 안 되죠⁠. 결혼한 지 석 달 된 부부가 상자를 두고 존댓말을 하면⁠, 보는 사람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싸웠거나⁠, 남이거나⁠.⁠”

“⁠괜찮아⁠, 여보⁠.⁠”

가율의 입에서 나온 「⁠여보⁠」는 병동에서 「⁠환자분⁠」을 부를 때와 같은 높이였다⁠. 건오가 입을 틀어막았다⁠. 6층에서 문이 열리고 강아지를 안은 아주머니가 탔다가⁠, 두 사람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겠다며 도로 내렸다⁠.

“⁠방금 그분 왜 내리셨어요⁠?⁠”

“⁠우리가 싸우는 줄 아셨나 봐요⁠.⁠” 건오가 가방에서 집게로 묶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표지에 「⁠부부 문답 100⁠」이라고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어젯밤에 만들었습니다⁠. 칫솔 색⁠, 신발 크기⁠, 처음 만난 날 날씨⁠, 잠버릇⁠. 실거주 점검이 나오면 보통 이런 걸 따로따로 묻는대요⁠.⁠”

“⁠백 개를 언제 외워요⁠?⁠”

“⁠하루에 열 개씩이면 열흘입니다⁠.⁠”

가율은 상자 너머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1번 물음은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이었고 건오가 연필로 「⁠오이(⁠확인 필요⁠)⁠」라고 달아 놓았다⁠. 오이는 맞았다⁠. 언제 봤는지 몰라서 귀가 뜨거워졌다⁠.

석 달 전 둘은 구청 민원실에서 혼인신고서를 냈다⁠. 화곡동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처음 본 지 한 달 만이었다⁠. 가율은 302호 보증금 일억 육천을⁠, 건오는 어머니가 국밥집을 하며 모은 돈으로 얻은 201호 보증금을 날렸다⁠. 혼인신고서를 내던 날 건오는 볼펜을 세 번 떨어뜨렸고⁠, 가율은 접수 창구 직원이 「⁠축하드려요⁠」라고 할 때 「⁠감사합니다⁠, 다음 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하남 감일지구 솔마루 아파트 신혼부부 특별공급⁠, 신혼부부에게 따로 떼어 둔 분양 물량에 당첨됐다⁠. 둘 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했다⁠. 남의 집을 가로채는 일이었다⁠.

12층에서 문이 열렸다⁠.

*

염서겸은 접이식 침대 바퀴가 엘리베이터 홀 타일 줄눈을 넘으며 덜컹거리는 것을 발바닥으로 먼저 느꼈다⁠. 새 건물 바닥은 줄눈이 덜 굳어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1204호 현관 앞에 침대를 세우고 열쇠를 찾는데⁠,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여자가 앞에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었고⁠, 베이지 가디건 안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운동화 밑창 안쪽이 바깥보다 더 닳아 있었다⁠. 오래 서서 일하는 사람의 신발이었다⁠. 남자는 반 걸음 뒤에서 상자 대신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회색 면바지에 구두⁠. 구두 뒤축은 거의 새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이 있었다⁠. 서겸은 틈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오래 보면 상대도 안다⁠.

“⁠1203호시죠⁠? 맞은편에 오늘 들어온 사람입니다⁠.⁠” 서겸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국토교통부 청약 점검반 염서겸입니다⁠. 석 달 동안 이 집에 삽니다⁠. 단지 신혼부부 특별공급 당첨 가구 가운데 몇 집을 실제로 사는지 보러 왔어요⁠.⁠”

여자의 귀가 이 초 만에 빨개졌다⁠.

“⁠아⁠, 네⁠.⁠” 남자가 먼저 웃었다⁠.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저희는 길건오⁠, 왕가율입니다⁠. 부부고요⁠. 당연히요⁠.⁠”

“⁠당연히요⁠.⁠” 서겸이 따라 말했다⁠. “⁠입주 축하드립니다⁠. 결혼식은 어디서 하셨어요⁠?⁠”

“⁠아직 안 했어요⁠.⁠”

“⁠스몰 웨딩이었어요⁠.⁠”

두 대답이 같은 순간에 나왔다⁠. 엘리베이터 홀 센서등이 꺼졌다⁠. 셋 다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서겸이 한 발 내딛자 불이 다시 들어왔다⁠.

“⁠아직 안 하신 스몰 웨딩이요⁠?⁠”

“⁠그러니까⁠.⁠” 건오가 종이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식은 아직 안 했고⁠, 양가 어른들만 모시고 밥을 먹었습니다⁠. 저희끼리는 그걸 스몰 웨딩이라고 불러요⁠. 아내는 그걸 결혼식으로 안 치고요⁠. 아내가 원래 기준이 높습니다⁠. 간호사라서요⁠. 간호사는 처치가 다 끝나야 끝났다고 합니다⁠.⁠”

“⁠아⁠, 간호사세요⁠?⁠” 서겸이 여자를 보았다⁠.

“⁠외과 병동이요⁠.⁠” 가율이 상자를 고쳐 안았다⁠. “⁠밥은 한정식이었어요⁠. 시어머님이 갈비찜을 두 번 시키셨고요⁠.⁠”

건오가 가율을 쳐다보았다⁠. 갈비찜 이야기는 종이 뭉치에 없었다⁠.

서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신분증을 넣었다⁠. “⁠좋은 데서 드셨네요⁠. 앞으로 점검 때 몇 가지 여쭙고⁠, 생활하시는 것도 조금 보겠습니다⁠. 동의서는 다음 주에 드릴게요⁠. 시끄럽게 굴진 않을게요⁠. 저도 밤에는 자야 해서요⁠.⁠”

1203호 문이 닫혔다⁠. 서겸은 자기 집 현관에 침대를 밀어 넣으며 머릿속으로 1203호를 열두 집 가운데 일곱 번째 자리에 놓았다⁠. 혼인신고 직후 청약⁠, 소득은 기준선 바로 아래⁠, 신고 전 주소가 서로 달랐다⁠. 서류로 추린 이유는 이 세 가지였다⁠. 오늘 하나가 더 붙었다⁠. 신발 두 켤레가 현관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 다른 데로 향해 있었다⁠.

빈집 거실에 침대를 펴고 나니 짐이 끝났다⁠. 슬리퍼 한 켤레⁠, 노트북 하나⁠, 열두 가구의 서류철⁠. 휴대전화에 팀장의 문자가 와 있었다⁠. 「⁠현장 첫날 어때⁠. 무리하지 말고⁠. 작년 수원 단지는 의심 가구 열넷 중에 진짜 위장이 둘이었다⁠.⁠」 서겸은 「⁠둘이면 두 집이 돌아갑니다⁠」라고 답하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예비 입주자 1번 부부가 지금 어디서 자는지⁠, 서겸은 서류로 알고 있었다⁠. 성남의 반지하였다⁠.

*

길건오는 밤 열한 시에 거실 바닥에 에어매트를 폈다⁠. 새 마루에 바닥 난방이 들어와 발바닥이 뜨끈했다⁠. 안방은 가율이⁠, 거실은 건오가 쓰기로 했다⁠. 계약서를 쓰던 날 둘이 정한 순서대로였다⁠. 생활비는 반반⁠, 화장실 청소는 번갈아⁠, 서로의 방문은 노크 두 번⁠. 사랑 같은 것은 순서에 없었다⁠.

발로 밟는 펌프를 꾹꾹 누를 때마다 쉭⁠, 쉭⁠, 하는 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열 번쯤 밟았을 때 안방 문이 열렸다⁠.

“⁠그거 소리 너무 커요⁠.⁠”

“⁠전동 펌프는 더 큽니다⁠. 이건 그나마 조용한 겁니다⁠. 드라이기의 절반 정도 데시벨이에요⁠.⁠”

“⁠옆집에 조사관 산다고요⁠.⁠”

건오는 발을 멈췄다⁠. 에어매트가 반쯤 부푼 채 거실 바닥에서 숨을 쉬었다⁠. 둘은 동시에 현관을 보았다⁠. 현관 너머 엘리베이터 홀⁠, 홀 너머가 1204호였다⁠.

“⁠설마 들리겠어요⁠? 새 아파트인데⁠.⁠”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가율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건오의 팔을 잡아끌었다⁠. 둘은 현관까지 가는 동안 세 번 부딪쳤다⁠. 건오가 문을 열자 회색 추리닝 차림의 서겸이 슬리퍼를 신고 서 있었다⁠. 손에는 휴대전화 손전등 대신 생수 두 병이 들려 있었다⁠.

“⁠이사 첫날이라 물 없으실까 봐요⁠.⁠” 서겸이 생수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건오 어깨 너머 거실을 보았다⁠. 반쯤 부푼 에어매트가 현관 센서등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손님 오세요⁠?⁠”

“⁠네⁠?⁠”

“⁠에어매트요⁠. 보통 손님 오실 때 펴잖아요⁠.⁠”

“⁠아⁠, 제가 허리가 안 좋아서요⁠.⁠” 건오가 허리를 짚었다⁠. “⁠디스크가 살짝⁠. 침대가 푹신하면 아침에 못 일어나요⁠. 그래서 딱딱한 데서 자는데⁠, 그냥 바닥은 너무 딱딱하고⁠, 에어매트가 딱 중간입니다⁠. 의학적으로요⁠.⁠”

“⁠여보 허리 안 좋아요⁠.⁠” 가율이 덧붙였다⁠. 이번 「⁠여보⁠」는 엘리베이터 때보다 반음 낮았다⁠. “⁠제가 간호사라 알아요⁠.⁠”

서겸은 생수를 건오 손에 쥐여 주었다⁠. “⁠빨리 나으세요⁠. 저도 허리 디스크 있어서 압니다⁠. 바닥에서 자면 처음 사흘은 좋아요⁠. 나흘째부터는 엉덩이가 아파요⁠.⁠”

문이 닫혔다⁠. 건오와 가율은 현관 문턱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문턱 한 곳이 건오의 발밑에서 삐걱했다⁠. 새집인데 벌써 삐걱이는 자리가 있었다⁠.

“⁠들렸네요⁠.⁠” 가율이 말했다⁠.

“⁠들렸습니다⁠.⁠” 건오가 생수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 사람⁠, 허리 안 아파요⁠. 서 있는 자세 봤어요⁠? 허리 아픈 사람은 저렇게 짝다리 안 짚어요⁠.⁠”

“⁠그럼 건오 씨도 허리 안 아픈 거 들켰겠네요⁠.⁠”

건오는 대답 대신 에어매트 펌프를 발로 한 번 더 밟았다⁠. 쉭⁠. 가율이 건오의 발목을 잡았다⁠.

“⁠손으로 불어요⁠.⁠”

*

왕가율은 안방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켰다⁠. 새 매트리스에서 비닐 냄새가 났다⁠. 화곡동 고시원 반지하 방에서 두 달⁠, 병원 기숙사 이층 침대에서 넉 달을 지낸 몸이 넓은 침대 가운데를 못 찾고 자꾸 가장자리로 굴렀다⁠.

알림이 두 개 와 있었다⁠. 하나는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이었다⁠. 총무 옥다엽이 올린 글이었다⁠.

「⁠대표님 입주 축하드려요🎉 우리 302호 언니 드디어 집 생겼다⁠!⁠! 다들 박수 짝짝⁠」

박수 이모티콘이 스물몇 개 달렸다⁠. 「⁠205호⁠」가 「⁠대표님 집들이 언제요⁠」⁠, 「⁠옥탑⁠」이 「⁠신랑님 얼굴 공개 바랍니다⁠」라고 썼다⁠. 모임 사람들은 서로를 이름 대신 늘해랑빌 옛 호수로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 울 것 같다고 처음 모임 때 누가 말했고⁠, 이후로 다들 옛 호수로 불렀다⁠. 가율은 「⁠다들 고마워요⁠. 소송 서류는 월요일에 정리해서 올릴게요⁠」라고 쓰고⁠, 글자를 지웠다가 다시 썼다⁠. 집이 생겼다고 축하받는 일이 소송 서류 이야기보다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솔마루 입주민 소통방⁠」이었다⁠. 입주 첫날인데 벌써 삼백 명이 넘게 들어와 있었다⁠. 「⁠103동 엘베 보호 비닐 언제 떼나요⁠」⁠, 「⁠주차장 B2 물 고였어요 사진 첨부⁠」⁠, 「⁠106동 6층 강아지 이름이 콩떡이래요 너무 귀여움⁠」 콩떡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아주머니의 강아지였다⁠. 가율은 소리 없이 웃다가 다음 글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101동 1501호 설기담입니다⁠. 이번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후보로 나왔습니다⁠. 우리 단지 집값⁠, 제가 지키겠습니다⁠. 내일 집집마다 떡 돌리러 갑니다⁠. 우리 새댁 새신랑님들 환영합니다⁠!⁠」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커뮤니티 센터 앞에서 떡 상자를 들고 엄지를 세운 남자⁠. 짧게 깎은 반백 머리⁠, 금테 안경⁠, 웃을 때 왼쪽 볼에만 파이는 보조개⁠.

가율은 휴대전화를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벌렸다⁠. 보조개가 화면 가득 커졌다⁠.

2025년 겨울⁠, 늘해랑빌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맞은편에 앉아 귤을 까 주던 얼굴이었다⁠. 「⁠아가씨⁠, 여긴 내가 직접 지은 건물이야⁠. 보증금 걱정은 하지 마⁠.⁠」 귤껍질을 반으로 접어 재떨이에 넣던 손가락이었다⁠. 보증금 만기 날 전화가 꺼져 있던 번호의 주인이었다⁠. 등기부에 낯선 노인의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집주인 설기담이었다⁠.

가율은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바닥 난방이 발바닥을 데웠다⁠. 따뜻한 바닥 위에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거실에서 건오가 에어매트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는 소리가 들렸다⁠. 후⁠, 후⁠, 하고 길게 불다가 숨이 차서 쉬는 소리⁠. 가율은 안방 문을 열었다⁠.

“⁠건오 씨⁠.⁠”

에어매트 마개를 입에 문 건오가 고개를 들었다⁠. 반쯤 부푼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설기담이 여기 살아요⁠. 101동에⁠.⁠”

건오가 마개를 놓쳤다⁠. 에어매트가 쉬이이 하고 바람을 뱉으며 건오의 무릎 밑에서 납작하게 꺼졌다⁠. 건오의 얼굴은 바람 빠진 매트보다 빠르게 하얘졌는데⁠, 가율은 휴대전화 화면만 보고 있어서 건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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