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43자)

1501호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1204호 거실 바닥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길건오는 무릎을 꿇었고⁠, 가율은 다리를 모으고 앉았고⁠, 서겸은 양반다리를 했다⁠. 바닥 난방을 켜지 않은 마루가 저녁 일곱 시의 냉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건오의 무릎 밑이 시렸다⁠.

“⁠혼자는 안 돼요⁠.⁠” 건오가 말했다⁠. 같은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었다⁠.

“⁠혼자 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혼자 오라는 사람은 혼자 오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수학으로 말하면⁠.⁠”

“⁠수학으로 말하지 마요⁠.⁠”

서겸이 휴대전화 화면을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문자 한 통이 떠 있었다⁠. 수사관이 보낸 것이었다⁠. 「⁠1501호⁠, 온집 사무실 압수수색 영장 발부⁠. 내일 오전 집행 예정⁠.⁠」

“⁠내일 아침에 들어갑니다⁠.⁠” 서겸이 말했다⁠. “⁠대표님이 오늘 안 가셔도 돼요⁠.⁠”

“⁠오늘 안 가면 설기담은 내일 아침 전에 뭘 치울지 알아요⁠.⁠” 가율이 화면을 밀어냈다⁠. “⁠저를 부른 건 제가 뭘 가졌는지 보려는 거예요⁠. 제가 안 가면 다 가졌다고 생각할 거예요⁠. 가면 빈손인 걸 보여 줄 수 있고요⁠.⁠”

“⁠빈손이 아니잖아요⁠.⁠” 건오가 가율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제 휴대전화는 제 거예요⁠. 제가 하는 대화를 제가 녹음하는 거예요⁠.⁠” 가율이 서겸을 보았다⁠. “⁠그건 되죠⁠?⁠”

“⁠됩니다⁠.⁠” 서겸이 오래 가율을 보았다⁠. “⁠아홉 시로 당기겠습니다⁠. 수사관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여덟 시에 올라가시면 한 시간이에요⁠. 한 시간 안에 내려오세요⁠. 못 내려오시면 아홉 시에 저희가 올라갑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해요⁠.⁠”

건오가 일어났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건오는 현관으로 가서 가율의 간호화를 들고 돌아왔다⁠. 신발 끈을 다시 묶어서 가율의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매듭이 반듯했다⁠.

“⁠101동 로비에 있을게요⁠. 엘리베이터 앞에요⁠.⁠”

“⁠알아요⁠.⁠”

“⁠그리고⁠.⁠” 건오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부부 문답 100⁠」 101번이요⁠. 제가 어젯밤에 하나 더 만들었어요⁠. 「⁠남편은 아내를 기다릴 때 무엇을 하는가⁠.⁠」⁠”

“⁠답은요⁠?⁠”

“⁠엘리베이터 숫자를 셉니다⁠. 십오 층까지⁠.⁠”

가율이 웃었다⁠. 신발을 신었다⁠.

*

왕가율은 여덟 시 정각에 1501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먼저 나왔다⁠. 설기담은 하늘색 점퍼도 감색 양복도 아닌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맨발이었다⁠.

“⁠들어와⁠, 새댁⁠. 신발 벗고⁠.⁠”

1501호 거실은 1203호의 두 배였다⁠. 바닥이 마루 대신 흰 대리석이었다⁠. 가율이 맨발을 올려놓자 발바닥이 움찔했다⁠. 차가웠다⁠. 6월인데도 차가웠다⁠.

“⁠바닥 난방 안 켜⁠. 나는 더운 게 싫어⁠.⁠” 설기담이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가율이 앉을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소파보다 낮은 의자였다⁠. “⁠새댁 집은 22도라며⁠. 1103호가 단톡방에 그러더라⁠. 12층은 밤마다 따뜻해서 좋겠다고⁠.⁠”

가율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리석 위에 서 있었다⁠.

“⁠주실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성격 급하네⁠. 간호사라서 그런가⁠.⁠” 설기담이 소파 옆 협탁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집어 대리석 바닥 위로 밀었다⁠. 봉투가 미끄러져 가율의 맨발 앞에서 멈췄다⁠. “⁠열어 봐⁠.⁠”

가율은 허리를 굽혀 봉투를 열었다⁠.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일억 육천만 원⁠. 수표 뒤에 종이 한 장이 더 있었다⁠. 1203호 공급 계약서 사본이었다⁠. 계약자 칸의 길건오 옆에 누가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두었다⁠.

“⁠새댁 보증금 일억 육천⁠. 늘해랑빌 302호⁠. 이 년 이자는 못 쳐 줘⁠. 미안해⁠.⁠” 설기담이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1203호⁠. 진술서 넷은 내가 다 거두게 할게⁠. 새댁네 계약금은 내가 그냥 준 걸로 하고⁠, 각서는 찢어⁠. 새신랑 이름으로 된 그 집⁠, 새댁이 계속 살아⁠. 전매 풀리면 새댁 이름으로 바꿔 줄게⁠. 둘 다 줄게⁠, 새댁⁠.⁠”

“⁠대신요⁠?⁠”

“⁠대신 새댁이 경찰서 가서 말해⁠. 녹음은 새신랑이 이어 붙인 거고⁠, 다엽이 걔 휴대전화는 걔가 꾸민 거라고⁠. 새댁은 피해자 모임 대표로서 억울한 사람을 모함한 걸 반성한다고⁠.⁠” 설기담이 웃었다⁠. 보조개가 파였다⁠. “⁠쉽잖아⁠. 새댁은 원래 피해자야⁠. 피해자가 피해를 돌려받는 거야⁠. 누가 뭐래⁠.⁠”

가율은 수표를 내려다보았다⁠. 이 년 동안 고시원 반지하 방에서⁠, 기숙사 이층 침대에서 머릿속으로 수천 번 그려 본 숫자였다⁠. 숫자는 그림보다 작았다⁠. 종이 한 장이었다⁠.

“⁠사장님은 이 돈이 어디서 났어요⁠?⁠”

“⁠새댁들 보증금에서 났지⁠. 그걸 은행 이자 막고 남은 걸로 굴렸고⁠. 굴린 게 불어서 이만큼 됐어⁠.⁠” 설기담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새댁⁠, 나 화곡동에서 태어났어⁠. 판잣집⁠. 열한 살 때 철거반이 와서 우리 집을 부쉈어⁠. 아침에 학교 갔다 오니까 집이 없더라⁠. 우리 엄마가 그 자리에서 맨발로 서 있었어⁠. 신발도 못 챙겨 나왔대⁠. 나는 그날부터 집을 모았어⁠. 마흔 채⁠. 남의 돈으로⁠. 남들도 다 그렇게 했어⁠. 은행 돈으로⁠, 세입자 돈으로⁠. 나는 늦게 해서 걸린 거야⁠. 집값이 떨어지는 해에⁠.⁠”

“⁠그래서 남의 엄마들을 맨발로 세웠어요⁠?⁠”

설기담의 웃음이 멈췄다⁠. 처음으로 보조개가 사라졌다⁠.

“⁠새댁⁠. 국가는 너희한테 뭘 줬어⁠?⁠” 설기담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부드러울수록 깊어지는 목소리였다⁠. “⁠특별법⁠? 일 년째 소위원회야⁠. 경매⁠? 은행 다음이야⁠. 청약⁠? 백 대 일이야⁠. 나는 다섯 집에 새 아파트를 줬어⁠. 새댁한테는 남편도 줬잖아⁠. 내가 안 이어 줬으면 새댁은 새신랑을 몰랐어⁠. 지금 새댁이 사랑하는 그 남자⁠, 내 돈이 이어 준 거야⁠.⁠”

가율은 대리석 위에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차가운 바닥이 발바닥을 밀어 올렸다⁠. 가율은 1203호 거실 마루에 볼을 대고 엎드렸던 아이를 떠올렸다⁠. 「⁠엄마⁠, 바닥이 따뜻해⁠.⁠」 깨끗한 발바닥⁠. 마루에 남았다가 금방 지워진 둥근 볼 자국⁠.

“⁠사장님 말 맞아요⁠. 건오 씨는 사장님 돈이 이어 줬어요⁠.⁠” 가율이 말했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병동에서 보호자에게 수술 결과를 말하던 목소리였다⁠. “⁠근데 건오 씨가 제 신발 끈을 묶어 준 건 사장님 돈이 한 거 아니에요⁠. 홍합 미역국도요⁠.⁠”

“⁠새댁⁠.⁠”

“⁠제가 제일 갖고 싶은 거⁠, 사장님은 몰라요⁠.⁠” 가율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수표와 계약서를 도로 넣고⁠, 봉투를 소파 앞 대리석 위에 내려놓았다⁠. 설기담의 맨발 앞이었다⁠. “⁠제 보증금이요⁠. 사장님한테 받는 거 말고⁠, 법원에서 돌려받는 거요⁠. 서른여덟 집이 같이요⁠. 그건 사장님이 못 줘요⁠. 사장님이 줄 수 있는 건 다 빚이에요⁠.⁠”

설기담이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집지 않았다⁠. 시계가 여덟 시 오십 분을 가리켰다⁠. 거실 창 너머로 106동 12층 복도 창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홀에 센서등이 켜져 있었다⁠. 누가 서 있었다⁠.

“⁠새신랑이 기다리나 보네⁠.⁠” 설기담이 창을 보며 말했다⁠. “⁠아니다⁠. 저건 공무원 양반이네⁠. 짝다리 짚은 거 보니까⁠.⁠”

가율은 창을 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설기담에게 보여 주었다⁠. 녹음 앱의 빨간 점이 오십 분째 깜빡이고 있었다⁠.

“⁠사장님 판잣집 얘기도 들어갔어요⁠.⁠” 가율이 말했다⁠. “⁠그건 좋은 얘기였어요⁠. 지우지 않을게요⁠.⁠”

*

염서겸은 아홉 시 정각⁠, 101동 1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수사관 넷이 뒤따랐다⁠. 같은 시각 천호동 상가 3층에도 수사관 셋이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온집 파이낸스⁠」 액자가 비뚤게 매달린 사무실이었다⁠. 서겸의 휴대전화가 짧게 떨었다⁠. 「⁠곽 실장 사무실에서 확보⁠. 서류철 다섯 권⁠, 등에 솔마루⁠.⁠」

1501호 문이 열렸다⁠. 가율이 맨발로 현관에 서 있었다⁠. 손에 간호화를 들고 있었다⁠. 건오가 묶어 준 매듭 그대로였다⁠. 가율이 서겸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 홀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건오가 서 있었다⁠. 1층 로비에서 숫자를 세다가 결국 계단으로 뛰어 올라온 듯 숨이 가빴다⁠. 가율은 건오 앞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 건오의 셔츠 앞섶을 쥐었다⁠.

서겸은 현관에 들어서서 영장을 펼쳤다⁠. 설기담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리석 위의 누런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기담 씨⁠, 주택법 위반과 사기 혐의로 압수수색을 하겠습니다⁠.⁠”

수사관들이 신발 덮개를 신고 거실로 들어갔다⁠. 서랍이 열리고⁠, 서류 상자가 대리석 위에 내려졌다⁠. 설기담은 소파에 앉은 채 수사관들이 자기 집 바닥을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맨발이 대리석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수사관 하나가 체포 영장을 읽었다⁠. 설기담이 그제야 일어섰다⁠. 현관까지 걸어와 서겸 앞에 멈췄다⁠.

“⁠공무원 양반⁠. 신발 신어도 되지⁠?⁠”

“⁠신으세요⁠.⁠”

설기담이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냈다⁠. 굽이 높은 구두였다⁠. 구둣주걱을 쓰지 않고 발을 밀어 넣었다⁠. 뒤꿈치가 접혔다⁠. 설기담은 접힌 뒤꿈치를 펴지 않았다⁠.

“⁠공무원 양반이 쫓아낸 다섯 집⁠, 다 피해자야⁠.⁠” 설기담이 서겸을 올려다보았다⁠. 보조개는 없었다⁠. “⁠나 잡으면 그 애들 집도 다 날아가⁠. 진술서 거둔 애들도⁠, 안 거둔 애들도⁠. 새댁네도⁠. 공무원 양반이 이긴 거 아니야⁠. 집이 다섯 채 줄었어⁠. 그게 다야⁠.⁠”

“⁠압니다⁠.⁠” 서겸이 말했다⁠.

“⁠알고 해⁠?⁠”

“⁠알고 합니다⁠.⁠” 서겸이 수갑을 채우는 수사관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집 다섯 채는 다섯 부부한테 돌아가요⁠. 반지하에서 기다리는 부부들이요⁠. 설기담 씨 계산에는 그 사람들이 없어요⁠.⁠”

설기담이 웃었다⁠. 소리가 없었다⁠. 수갑 찬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엘리베이터 홀로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가율과 건오가 서 있었다⁠. 설기담이 둘 앞에서 멈췄다⁠.

“⁠새댁⁠, 맨발이네⁠.⁠”

“⁠네⁠.⁠”

“⁠우리 엄마도 그랬어⁠.⁠” 설기담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전에 말했다⁠. “⁠새댁은 신발 신어⁠. 바닥 차⁠.⁠”

문이 닫혔다⁠. 숫자가 15에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건오는 숫자를 세지 않았다⁠. 가율의 발 앞에 쪼그려 앉아 간호화를 신겨 주었다⁠. 매듭은 풀지 않았다⁠.

*

염서겸은 자정이 다 되어 1203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것은 가율이었다⁠. 거실에 에어매트가 펴져 있지 않았다⁠. 마루 가운데에 「⁠부부 문답 100⁠」이 펼쳐져 있었고⁠, 연필 두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늦게 죄송합니다⁠.⁠” 서겸이 말했다⁠. 넥타이를 풀어 손에 감고 있었다⁠. “⁠1203호 계약 취소⁠, 오늘 밤 시행사에 통보했습니다⁠. 수사 결과와 따로 진행되는 거예요⁠. 두 분은 석 달 안에 집을 비우셔야 하고요⁠.⁠”

“⁠알아요⁠.⁠”

“⁠예비 1번에게는 다음 주에 연락이 갑니다⁠.⁠” 서겸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 “⁠서담희 씨요⁠.⁠”

건오가 가율 뒤에서 나왔다⁠. 둘은 현관 문턱 앞에 나란히 섰다⁠. 건오가 문턱을 밟았다⁠. 끼익⁠. 가율이 문턱을 밟았다⁠. 처음이었다⁠. 석 달 동안 건너뛰던 자리를 가율이 맨발로 밟았다⁠. 문턱이 같은 소리를 두 번 냈다⁠.

“⁠담희 씨 아들이 이 문턱 소리 좋아했어요⁠.⁠” 가율이 말했다⁠. “⁠하자 접수하지 말라고 관리실에 말해 주세요⁠.⁠”

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1204호로 돌아가려다 돌아섰다⁠.

“⁠대표님⁠, 칫솔 색 확인하셨어요⁠?⁠”

“⁠하늘색이요⁠.⁠” 가율이 대답했다⁠. “⁠건오 씨 거는 연두색으로 바꿨어요⁠. 제가 사 왔어요⁠.⁠”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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