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63자)

다섯 집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옥다엽의 원룸 바닥에 노란 접착 메모지가 수십 장 붙어 있었다⁠. 왕가율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메모지를 밟을 뻔했다⁠. 메모지마다 다엽의 동그란 글씨로 한두 줄이 쓰여 있었다⁠. 「⁠대표님이 다 시켰습니다⁠」⁠, 「⁠저는 전했을 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쓰다 만 것⁠, 줄을 그은 것⁠, 구겨 펴서 다시 붙인 것⁠. 나뭇결 마루가 노랗게 덮여 있었다⁠.

“⁠밟아도 돼⁠.⁠” 다엽이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다 버릴 거야⁠.⁠”

가율은 밟지 않았다⁠. 메모지 사이 맨바닥을 골라 디디며 방 가운데까지 가서⁠, 다엽의 침대 아래 바닥에 앉았다⁠. 앉으니 메모지들이 눈높이에 가까웠다⁠.

“⁠진술서 봤어⁠.⁠”

“⁠알아⁠. 그래서 문 열었어⁠.⁠” 다엽이 웃었다⁠. 웃음이 금방 꺼졌다⁠. “⁠언니가 문 두드릴 줄 알았어⁠. 언니는 늘 두드리잖아⁠. 고시원 할아버지 방도⁠, 조사관 방도⁠.⁠”

“⁠왜 썼어⁠?⁠”

다엽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새 휴대전화였다⁠. 곽 실장과의 대화가 떠 있었다⁠. 지난주 날짜였다⁠.

「⁠다엽 씨 보증금⁠, 그거 대여금이에요⁠. 우리가 빌려준 거죠⁠. 갚으라면 갚아야 해요⁠.⁠」

「⁠그리고 다엽 씨가 다섯 쌍한테 서류 요령 알려 준 거⁠, 그거 사기 방조예요⁠. 다엽 씨가 제일 먼저 잡혀요⁠. 대표님은 몰랐다고 하면 끝나는데 다엽 씨는 아니잖아요⁠.⁠」

「⁠진술서 한 장이면 다 정리됩니다⁠. 원룸 보증금도 그대로 두고요⁠.⁠」

“⁠이 방 보증금도 그 돈이야⁠.⁠” 다엽이 메모지가 덮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술서 안 쓰면 이 방에서 나가야 해⁠. 다시 고시원으로⁠. 고소당하고⁠. 언니는 진짜 몰랐으니까 빠질 수 있다고 실장님이 그랬어⁠. 언니한테는 손해가 아니라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어⁠. 진짜로⁠.⁠”

가율은 메모지 한 장을 집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엽의 글씨가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나 진술할 때 다른 사람 얘기 안 했어⁠. 다엽이 너 얘기도⁠.⁠” 가율이 메모지를 바닥에 다시 붙였다⁠. 붙인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네 얘기는 네가 하라고 했어⁠. 나는 그게 너 위하는 건 줄 알았어⁠. 근데 그게 너 혼자 남겨 두는 거였네⁠.⁠”

다엽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미안해⁠, 이런 말 하려고 온 거 아냐⁠?⁠”

“⁠아니⁠. 같이 가자고 하려고 왔어⁠.⁠” 가율이 무릎을 세웠다⁠. “⁠경찰서⁠. 월요일 아침⁠. 나 또 가야 해⁠. 추가 진술⁠. 같은 시간에 너도 가⁠. 내가 옆에 앉아 있을게⁠. 말은 네가 해⁠.⁠”

“⁠나 잡혀⁠.⁠”

“⁠나도 잡혀⁠.⁠” 가율이 웃었다⁠. “⁠잡히는 사람끼리 앉아 있자⁠. 내가 대표 할 때 너 총무 했잖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다엽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의 메모지를 밟았다⁠. 사각 소리가 났다⁠. 한 장⁠, 두 장⁠. 다엽은 메모지를 밟으며 가율 옆까지 와서 털썩 앉았다⁠. 둘의 무릎이 닿았다⁠. 다엽이 가율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이 방 바닥 진짜 좋아⁠. 언니⁠.⁠”

“⁠알아⁠.⁠”

“⁠나가기 싫어⁠.⁠”

“⁠알아⁠.⁠” 가율이 다엽의 등을 두드렸다⁠. 병동에서 수술 전날 밤 잠 못 드는 환자 등을 두드리던 박자였다⁠. “⁠그래도 나가야 해⁠.⁠”

*

길건오는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솔마루 정문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트렁크를 열었다⁠. 보자기에 싼 스테인리스 통 다섯 개가 나왔다⁠. 국밥이었다⁠.

“⁠엄마⁠, 이걸 왜⁠.⁠”

“⁠사람한테 말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냐⁠.⁠” 어머니가 보자기 하나를 건오에게 안겼다⁠. 묵직했다⁠. 아직 따뜻했다⁠. “⁠그 애들 엄마들 생각하면 내가 잠이 안 와⁠. 다 나 같은 엄마들이야⁠. 자식 보증금 대 주고 날린 엄마들⁠. 엄마들 말은 엄마가 해⁠.⁠”

104동 803호 초인종을 누르자 205호 청년이 문을 열었다가⁠, 건오 뒤의 어머니와 보자기를 보고 굳었다⁠. 어머니는 청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현관 바닥에 보자기를 풀었다⁠. 국밥 냄새가 803호를 채웠다⁠.

“⁠아이고⁠, 너 얼굴이 반쪽이다⁠. 컵라면만 먹었다며⁠.⁠” 어머니가 숟가락을 꺼내 청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부엌에서 307호 누나가 나오자 어머니는 누나의 손에도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둘 다 앉아⁠. 먹으면서 들어⁠.⁠”

둘은 앉았다⁠. 앉아서 국밥 뚜껑을 열었다⁠. 어머니는 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국밥집에서 단골 앞에 앉던 자세였다⁠.

“⁠너네 엄마도 나랑 똑같은 소리 할 거야⁠. 내가 장담해⁠.⁠” 어머니가 청년을 보았다⁠. “⁠너 엄마한테 돈 갚고 싶다며⁠. 갚아⁠. 근데 그 사장 돈으로 갚지 마⁠. 그 돈은 받으면 또 빚이야⁠. 우리 아들 봐라⁠. 안경 휘었지⁠. 그 돈 무르러 갔다가 휘었어⁠. 너네 엄마는 네가 돈 갚는 것보다 네가 경찰서에서 거짓말 안 하는 게 백 배 좋아⁠. 엄마들은 원래 그래⁠.⁠”

청년이 국밥을 한 숟갈 떴다가 내려놓았다⁠. 숟가락이 그릇 가에서 덜그럭거렸다⁠.

“⁠아주머니는 왜 이러세요⁠? 아주머니 돈도 날리셨잖아요⁠.⁠”

“⁠날렸지⁠. 그래서 이러지⁠.⁠” 어머니가 307호 누나의 국밥에 김치를 얹어 주었다⁠. “⁠날린 사람이 날린 사람 편 안 들면 누가 들어⁠. 그 사장은 날린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들었어⁠. 그게 제일 나빠⁠. 돈 가져간 거보다⁠.⁠”

307호 누나가 먼저 울었다⁠. 국밥 그릇 위로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청년이 누나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연습한 손놀림이 아니었다⁠. 손이 떨렸다⁠.

“⁠진술서 거둘게요⁠.⁠” 청년이 말했다⁠. “⁠다음 주에 경찰서 가서 다시 쓸게요⁠. 저희 얘기로요⁠.⁠”

108동 1102호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인터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냥 이대로 할게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국밥 통 하나를 문 앞 바닥에 내려놓고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식기 전에 먹어⁠. 통은 안 돌려줘도 돼⁠.⁠” 102동 604호는 문을 열고 국밥을 받았고⁠, 다음 날 아침 건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희도 다시 쓸게요⁠」 105동 207호는 국밥을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 질 녘 정문 앞에서 어머니가 빈 보자기를 접었다⁠. 통 다섯 개가 다 나갔다⁠. 셋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셋이면 됐다⁠.⁠” 어머니가 보자기를 핸드백에 넣었다⁠. “⁠국밥집도 손님 열에 셋 오면 장사 된다⁠.⁠”

“⁠엄마⁠, 통값 드릴게요⁠.⁠”

“⁠통값 말고⁠.⁠” 어머니가 건오의 안경을 고쳐 씌웠다⁠. 비뚤어진 다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나중에 며느리 데리고 와⁠. 진짜로⁠. 국밥 먹으러⁠.⁠”

*

옥다엽은 월요일 아침 아홉 시⁠, 하남경찰서 2층 조사실 의자에 앉아 운동화 끝만 보았다⁠. 흰 가죽 운동화였다⁠. 오늘 아침 신을까 말까 현관에서 십 분을 서 있다가 신고 나왔다⁠. 이 운동화도 곽 실장의 돈으로 샀다⁠. 벗고 맨발로 올 수는 없었다⁠.

옆 의자에 가율이 앉아 있었다⁠. 가율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엽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의자 다리가 장판 위에서 다엽의 의자 다리와 한 뼘 떨어져 있었다⁠.

“⁠지난주에 내신 진술서⁠, 본인이 쓰신 거 맞죠⁠?⁠” 수사관이 손글씨 진술서를 탁자에 놓았다⁠.

“⁠제가 썼어요⁠.⁠” 다엽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콜센터에서 첫 통화를 받을 때의 목소리였다⁠. “⁠거짓말이에요⁠. 곽 실장님이 불러 줬어요⁠. 대표님은 아무것도 안 시켰어요⁠. 제가 짝을 지었어요⁠. 다섯 쌍 다요⁠. 제 보증금 받으려고요⁠.⁠”

수사관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곡의 카페⁠, 명함⁠, 곽 실장의 문자⁠, 「⁠대여금⁠」이라는 낱말⁠, 메모지가 덮인 방바닥⁠. 다엽이 한 번 숨을 고를 때 가율의 운동화 끝이 다엽의 운동화 끝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엽은 닿았다 떨어진 운동화 끝을 「⁠계속해⁠」로 들었다⁠.

진술이 끝나고 수사관이 물었다⁠. “⁠옥다엽 씨도 입건될 수 있어요⁠. 아시죠⁠?⁠”

“⁠네⁠.⁠” 다엽이 가율을 보았다⁠. “⁠잡히는 사람끼리 앉아 있기로 했어요⁠.⁠”

*

염서겸은 월요일 오후 세 시⁠, 한누리대학병원 외과 병동 6인실 창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맞은편에 가율이 서 있었다⁠. 근무복 차림이었다⁠. 노인은 보행 보조기를 침대 옆에 세워 두고⁠, 베개에 등을 기대 서겸을 보았다⁠.

“⁠이 양반은 누구요⁠?⁠”

“⁠믿어 줄 사람이요⁠, 할아버지⁠.⁠” 가율이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 사람⁠.⁠” 노인이 서겸을 위아래로 훑었다⁠. “⁠젊네⁠. 공무원이오⁠?⁠”

“⁠네⁠. 국토교통부에서 왔습니다⁠.⁠”

“⁠국토⁠. 땅⁠.⁠” 노인이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나는 땅이 한 평도 없소⁠. 집도 한 채도 없고⁠. 근데 서류에는 마흔 채가 내 거래⁠. 세금이 와⁠. 고지서가 고시원으로 와⁠. 그 고지서를 키 큰 놈이 와서 가져가⁠. 내가 내 이름으로 온 편지를 내가 못 뜯어⁠.⁠”

노인이 협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하얀 봉투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두툼했다⁠. 노인이 고무줄을 풀어 봉투를 침대 시트 위에 펼쳤다⁠. 봉투 앞면마다 같은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온집 파이낸스 — 서민 금융의 따뜻한 동반자⁠」

“⁠도장 찍을 때마다 이걸 줬어⁠. 용돈이라고⁠. 소주 사 먹으라고⁠.⁠” 노인이 봉투 하나를 집어 흔들었다⁠. 비어 있었다⁠. “⁠돈은 다 썼어⁠. 봉투는 안 버렸어⁠. 봉투가 좋더라고⁠. 따뜻한 동반자래⁠. 나는 동반자가 없어서⁠.⁠”

서겸은 봉투를 하나씩 세지 않았다⁠. 노인이 세는 동안 기다렸다⁠. 노인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봉투를 한 장씩 넘겼다⁠. 넘길 때마다 입술이 움직였다⁠. 스물셋이었다⁠.

“⁠스물세 번⁠.⁠” 노인이 말했다⁠. “⁠스물세 번 도장 찍었소⁠. 무슨 도장인지는 모르고⁠.⁠”

“⁠할아버지⁠, 이 봉투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나중에 꼭 돌려드릴게요⁠.⁠”

“⁠가져가⁠. 돌려주지 마⁠.⁠” 노인이 봉투 뭉치를 서겸의 무릎에 밀었다⁠. “⁠근데 공무원 양반⁠. 하나만 물읍시다⁠. 그 마흔 채⁠, 진짜 주인한테 돌아가오⁠? 거기 살던 아가씨들한테⁠?⁠”

서겸은 대답하기 전에 가율을 보았다⁠. 가율은 노인의 수액 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얼굴은 들지 않았다⁠.

“⁠전부는 못 돌아가요⁠.⁠” 서겸이 말했다⁠. “⁠조금은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조금이면 됐소⁠.⁠” 노인이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나는 조금도 못 받아 봤소⁠.⁠”

병실을 나오는 길에 서겸은 복도 바닥을 보았다⁠. 간호화 발자국과 슬리퍼 발자국과 바퀴 자국이 섞여 있었다⁠. 서겸은 봉투 뭉치를 서류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스물세 장이 가방 속에서 따뜻했다⁠. 병실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

왕가율은 밤 열한 시⁠, 1203호 거실 마루에 누워 있었다⁠. 건오가 옆에서 「⁠부부 문답 100⁠」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이제 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틀린 답을 고치고 있었다⁠. 12번⁠, 신발 이백사십⁠. 88번⁠, 22도⁠. 23번⁠, 「⁠맨발로 다닌다⁠」 옆에 「⁠화가 풀리면 신발장 문을 노크한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가율은 받았다⁠. 받기 전에 누구인지 알았다⁠.

“⁠우리 새댁⁠.⁠” 설기담의 목소리 뒤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뉴스도⁠. “⁠국밥 맛있었다며⁠. 우리 애들이 다 먹었대⁠. 셋이 진술서 거둔다고⁠.⁠”

가율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건오가 문답 종이를 내려놓았다⁠.

“⁠새댁⁠, 우리 집에서 보자⁠. 1501호⁠. 내일 저녁 여덟 시⁠.⁠” 설기담이 말했다⁠. “⁠둘이서만⁠. 새신랑도 조사관도 없이⁠. 새댁한테 줄 게 있어⁠. 새댁이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거⁠.⁠”

전화가 끊겼다⁠. 가율은 휴대전화를 마루 위에 엎었다⁠. 거실 창 너머로 101동 15층에 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커튼이 다 열려 있었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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