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00자)
열쇠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2027년 9월 마지막 토요일, 1203호 거실 마루에는 이삿짐 상자가 세 개 남아 있었다. 왕가율은 맨발로 마루를 한 바퀴 걸었다. 바닥 난방을 끈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마루는 차갑지 않았다. 아침 햇빛이 거실 창으로 길게 들어와 마루를 데웠다. 난방이 없어도 따뜻한 집이었다. 가율은 이사 나가는 날에야 처음 알았다.
“테이프 더 있어요?” 건오가 마지막 상자를 접으며 물었다.
“없어요. 다 썼어요.”
“그럼 이건 그냥 들고 가요.” 건오가 「부부 문답 100」을 상자 맨 위에 올렸다. 종이 뭉치가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내밀던 날보다 두 배는 두꺼웠다. 고친 답과 새로 만든 물음이 접착 메모지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맨 뒤 장에 103번까지 있었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엘리베이터 홀에서 아이 웃음소리가 났다. 가율이 현관문을 열자 담희가 아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뒤에 택배 회사 조끼를 입은 남자가 상자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담희의 남편이었다. 가율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어깨에 멘 상자보다 얼굴이 더 긴장해 있었다.
“너무 일찍 왔죠. 열한 시라고 했는데.” 담희가 웃었다. “애가 아침부터 바닥 따뜻한 집 가자고 졸라서요.”
“딱 맞게 왔어요. 저희 다 쌌어요.”
관리사무소 직원이 서류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직원 뒤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서겸이 따라 나왔다. 회색 셔츠에 운동화였다. 6월 말에 1204호를 비우고 떠난 사람이었다.
“조사관님이 여긴 왜요?” 건오가 물었다.
“1203호 현장 마무리요.” 서겸이 말했다. “서류로는 시행사 직원이 오면 끝나요. 제가 와야 할 일은 없어요.”
“그럼 왜 오셨어요?”
“보러요.” 서겸이 대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해서 건오가 말을 멈췄다. 서겸은 덧붙이지 않았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서류판을 가율에게 내밀었다. 「세대 인수인계 확인서」 가율은 퇴거자 칸에 서명했다. 마지막 획이 길게 빠졌다. 건오가 옆에 서명했다. 반듯했다. 직원이 카드키 두 장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가율은 카드키를 직원에게 주지 않았다.
“이건 제가 드려도 돼요?”
직원이 서겸을 보았다. 서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율은 카드키 두 장을 담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담희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다음엔 열쇠로 연다고 했잖아요.” 가율이 말했다. “이번엔 담희 씨가 열어요.”
가율과 건오는 상자를 들고 엘리베이터 홀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혔다. 담희가 카드키를 도어록에 댔다. 삑,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아이가 엄마 손을 뿌리치고 먼저 뛰어 들어갔다. 문턱이 끼익 울었다. 아이가 꺅 웃었다. 하자 접수를 하지 않은 문턱이었다.
담희의 남편이 상자를 내려놓고 현관에 서서 거실을 한참 보았다.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담희가 남편의 운동화 뒤꿈치를 자기 발로 툭 밀었다. 남편이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 양말 바닥이 거뭇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율과 건오가 상자를 들고 탔다. 서겸은 타지 않았다. 홀에 서서 닫히는 문을 보았다.
“조사관님.” 가율이 문이 닫히기 전에 말했다. “후회하냐고 안 물어보세요?”
“안 물어볼게요.” 서겸이 말했다. “대답을 알아요. 문턱 밟고 나오셨잖아요.”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1층까지 사십 초 남짓이었다. 가율은 사십 초 동안 「여보」를 연습하지 않았다. 건오도 하지 않았다. 둘은 상자를 하나씩 안고 나란히 서서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
길건오는 2028년 2월, 서울남부지방법원 4층 복도 의자에 앉아 회색 면바지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복도 바닥이 갈색 대리석이었다. 의자 앞에 사람들의 신발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운동화, 고무 슬리퍼, 털 장화, 닳은 구두. 늘해랑빌 사람들이었다. 서른여덟 집 가운데 서른 집 남짓이 와 있었다.
선고는 짧았다. 설기담에게 징역형, 곽 실장에게 징역형. 늘해랑빌 마흔 세대를 비롯해 설기담이 굴린 빌라의 보증금을 가로챈 사기, 명의를 넘겨 무주택자로 꾸민 부정 청약, 위장 부부 다섯 쌍에게 계약금을 대고 분양권을 거둬 가려 한 공급 질서 교란. 판사가 죄명을 하나씩 읽는 동안 101호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돈은 압류한 재산과 1501호를 처분한 대금에서 나누기로 했다. 보증금 전부는 아니었다. 셋에 하나쯤이었다. 건오는 가율의 옆얼굴을 보았다. 가율은 숫자를 들으며 울지 않았다. 대신 구두 앞코로 대리석 이음매를 꾹 눌렀다. 시청 복도에서 하던 버릇이었다.
“셋에 하나면 됐어.” 복도로 나오며 옥탑 아저씨가 말했다. “국밥집도 열에 셋이면 장사 된다며. 건오네 어머니가.”
건오는 웃었다. 어머니는 오늘 국밥집 문을 닫고 왔다. 지금은 화장실에 가 있었다.
건오와 가율의 일은 지난 12월에 먼저 끝났다. 벌금형. 1203호 계약은 이미 취소됐고, 둘은 오랫동안 청약을 넣을 수 없게 됐다. 건오의 각서는 따로 무거웠다. 판사는 스스로 신고하고 다른 다섯 집과 설기담을 드러내는 데 협조한 것을 참작한다고 했다. 다엽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다엽은 법정을 나와 흰 운동화로 빗물 고인 계단을 일부러 밟고 내려갔다. 이제 아끼지 않아도 되는 신발이라고, 다엽은 말했다.
법정 문이 다시 열렸다. 교도관 둘 사이로 설기담이 나왔다. 하늘색 점퍼도 회색 카디건도 아닌 연갈색 수의였다. 머리가 더 하얘져 있었다. 신발은 굽 없는 고무신이었다. 피해자들이 복도 양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고무신이 대리석 위를 끌리는 소리만 났다.
설기담이 가율 앞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교도관이 팔을 당겼지만 설기담은 반 걸음 더 버텼다. 가율을 보았다. 가율의 발을 보았다. 가율은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시청에 가던 날 뒤꿈치를 벗겨 놓았던 구두였다. 이제는 발에 맞게 늘어나 있었다.
“새댁, 신발 신었네.”
“바닥 차다고 하셨잖아요.”
설기담이 웃었다. 보조개가 파였다. 수의를 입은 얼굴에서도 왼쪽 볼에만 파였다.
“새댁이 이겼다고 생각해?”
“아니요.” 가율이 말했다. “저도 졌어요. 집도 잃었고, 청약도 못 하고, 벌금도 냈어요. 사장님도 지셨고요. 이긴 사람은 따로 있어요. 지금 그 집 마루에서 자요.”
설기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도관이 다시 팔을 당겼다. 고무신이 끌리는 소리가 복도 끝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졌다. 건오는 고무신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가율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율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
염서겸은 같은 날 저녁, 수원의 새 단지 1102호 거실 바닥에 접이식 침대를 펴고 있었다. 슬리퍼는 여전히 한 켤레였다. 서류철 맨 위에 의심 가구 열넷이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서담희가 보낸 사진이었다. 1203호 거실 마루에 아이가 볼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아이 옆에 담희의 남편이 똑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둘 다 눈을 감고 있었다. 사진 밑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
「조사관님, 오늘 판결 뉴스 봤어요. 우리 집 바닥은 오늘도 따뜻해요. 문턱도 아직 울어요.」
서겸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다행입니다」 보내고 나서 휴대전화를 엎었다. 노트북 화면에 저녁 뉴스 자막이 지나갔다.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피해자 단체 “늦었지만 첫걸음”」 서겸은 자막을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수원 1102호 맞은편 집 문턱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들으러 현관으로 나갔다.
*
왕가율은 선고 날 저녁, 화곡동 시장 골목의 국밥집 문을 밀었다. 문에 「오늘 휴무」가 붙어 있었는데 안에서 불이 켜져 있었다. 주방 바닥 타일이 물청소로 젖어 반들거렸다. 건오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가마솥 뚜껑을 열고 있었다. 김이 천장까지 올라갔다.
“왔어? 앉아. 휴무는 손님들한테 휴무지.”
탁자 하나에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홍합이 들어간 그릇과 소고기가 들어간 그릇이었다. 어머니가 홍합 그릇을 건오 앞에, 소고기 그릇을 가율 앞에 밀었다.
“며느리는 소고기 먹어. 건오는 소고기 먹으면 두드러기 나.”
“알아요, 어머님.”
“알지. 미역국 끓였잖아.”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문이 열리고 휴무 종이를 못 본 단골 아저씨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머니가 손을 휘휘 저으려다 멈추고 가율의 어깨를 잡았다.
“김 사장, 인사해. 우리 며느리.”
“작년에도 며느리 자랑하셨잖아요. 사진까지 보여 주시고.” 단골 아저씨가 웃었다. “네 컷짜리.”
“작년 건 연습이었어.” 어머니가 말했다. 가율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건 진짜야. 국밥 한 그릇 공짜로 먹고 가.”
단골 아저씨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앉았다. 어머니가 일어나 가마솥으로 갔다. 건오가 홍합 국밥을 한 숟갈 떴다. 가율은 소고기 국밥을 떴다. 둘은 서로의 그릇을 보지 않고 각자 먹었다. 어머니가 가마솥 앞에서 등을 보인 채 코를 한 번 훌쩍였다. 김 때문이라고 했다.
*
길건오는 2028년 3월 마지막 토요일 밤, 화곡동 골목 2층 월셋방 바닥에 얇은 요를 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였다. 바닥은 낡은 장판이었고, 오래된 보일러가 돌 때마다 장판 한가운데만 미지근해졌다. 가장자리는 차가웠다. 창 너머로 늘해랑빌 지붕이 보였다. 경매가 끝나 새 주인이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꼭 한 해 전 오늘, 둘은 솔마루 엘리베이터에서 「여보」를 연습했다. 사십 초를 다 써도 한 번을 못 했다.
현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신발 벗는 자리에 신발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이백사십 간호화와 흙 묻은 운동화. 앞코가 둘 다 방 안을 향해 있었다. 서로 다른 데를 보던 신발들이었다.
가율이 부엌에서 손을 닦고 들어왔다. 요 위에 앉았다가, 장판 가장자리의 찬 기운에 발을 움츠렸다. 건오가 요를 끌어 미지근한 한가운데로 옮겼다. 요 한 장이 미지근한 자리를 다 덮지 못했다. 둘의 발이 요 밖으로 나와 장판 위에 놓였다. 건오의 발이 가율의 발보다 한 뼘 길었다. 문답 종이에는 없던 길이였다. 한 발은 따뜻한 자리에, 한 발은 찬 자리에.
건오가 상자에서 「부부 문답 100」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가율이 웃었다.
“안 해요?”
“답을 아는데 왜 해요.”
“그럼 하나만 해요. 종이 없이.” 가율이 요 위에 누웠다. 천장의 형광등이 가늘게 지지거렸다. “제 이름이 뭐예요?”
건오는 대답하기 전에 가율 옆에 누웠다. 요가 좁아서 어깨가 닿았다. 장판 가운데의 미지근한 온기가 둘의 등을 같은 높이로 데웠다. 건오가 가율을 불렀다. 연습한 높이도, 설명도 없이.
“가율아.”
가율이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시청 복도에서도, 22도 마루 위에서도 써 보지 않은 말이었다.
“응, 건오야.”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요 밖으로 나온 네 발 가운데 둘이 찬 자리에서 미지근한 자리로 천천히 옮겨 왔다. 장판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