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52자)

문답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하남경찰서 2층 조사실 바닥은 회색 비닐 장판이었다⁠. 의자 다리 네 개가 닿는 자리마다 동그랗게 눌린 자국이 나 있었다⁠. 길건오는 눌린 자국 네 개에 의자 다리를 정확히 맞춰 앉았다⁠. 맞춰 앉고 나서야⁠, 이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이 다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맞은편에 수사관 한 명과 서겸이 앉았다⁠. 수사관은 마흔 중반의 남자였고⁠, 탁자 끝에 은박지로 싼 김밥 한 줄을 놓아 두었다⁠. 아침을 못 먹었다고 했다⁠. 서겸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1204호의 회색 추리닝과 시청의 넥타이 사이 어디쯤의 셔츠 차림이었다⁠.

“⁠먼저 조사관님이 확인하실 게 있대요⁠.⁠” 수사관이 김밥 은박지를 반쯤 벗기며 말했다⁠. “⁠저는 듣기만 할게요⁠.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서겸이 건오를 보았다⁠. 종이는 꺼내지 않았다⁠.

“⁠아내분 칫솔 색이요⁠.⁠”

“⁠하늘색이요⁠.⁠” 건오가 대답했다⁠. “⁠지난주에 바꿨어요⁠. 연두색이 다 벌어져서요⁠. 제가 사 왔어요⁠. 아내가 칫솔을 세게 닦아요⁠. 석 달이면 칫솔이 꽃처럼 벌어져요⁠.⁠”

“⁠처음 만난 날 날씨요⁠.⁠”

“⁠눈이 왔어요⁠. 첫눈이었고⁠, 제가 비닐우산을 하나만 사 왔는데⁠, 아내가 우산 위에 눈이 쌓이는 걸 올려다보면서⁠.⁠” 건오가 잠깐 말을 끊었다⁠. “⁠거기까지만 하라고 하셨죠⁠.⁠”

“⁠이번엔 끝까지 하세요⁠.⁠”

“⁠눈이 쌓이는 걸 올려다보면서 이랬어요⁠. 「⁠이거 다 녹으면 우산 무거워지겠다⁠.⁠」 저는 그때 이 사람이 무서웠어요⁠. 눈 보면서 무게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건오가 웃었다⁠. “⁠지금은 그게 좋아요⁠.⁠”

수사관이 김밥을 씹다 멈추고 서겸을 보았다⁠. 서겸은 표정이 없었다⁠.

“⁠답이 달라졌네요⁠. 지난번엔 추웠다⁠, 우산이 작았다였어요⁠.⁠”

“⁠지난번엔 외웠어요⁠. 아내 답을요⁠.⁠” 건오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펜치로 편 다리가 아직 조금 비뚤었다⁠. “⁠이번엔 안 외웠어요⁠. 아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요⁠.⁠”

“⁠그럼 이제 그 얘기 하시죠⁠.⁠” 서겸이 의자를 당겼다⁠. 의자 다리가 장판 위의 눌린 자국에서 벗어났다⁠. “⁠처음부터요⁠. 옥다엽 씨가 곽 실장을 소개한 날부터⁠.⁠”

건오는 처음부터 말했다⁠. 혼인신고 이튿날⁠, 마곡의 카페에서 다엽이 곽 실장의 명함을 내밀던 손⁠. 천호동 상가 3층의 끈적한 바닥⁠. 각서의 반듯한 글씨와 맨 밑 작은 줄⁠. 셀프 사진관 세 번째 컷 직전에 온 문자⁠. 입주 사흘째 밤⁠, 베란다에서 받은 설기담의 전화⁠. 101동 15층에서 106동 12층 복도가 잘 보인다던 목소리⁠. 지하 2층 주차장의 고인 물⁠. 휜 안경⁠.

수사관은 김밥을 다 먹지 못했다⁠. 은박지를 다시 덮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건오가 말을 멈출 때마다 타자 소리도 멈췄다⁠. 사십 분쯤 지나 건오가 입을 다물었을 때⁠, 탁자 위의 김밥은 식어 있었다⁠.

“⁠길건오 씨는 지금 피의자 신분이에요⁠. 아시죠⁠?⁠” 수사관이 말했다⁠.

“⁠압니다⁠.⁠”

“⁠각서 쓰신 거⁠, 이건 위장 결혼보다 무거울 수 있어요⁠. 분양권을 넘기기로 약속한 거니까⁠.⁠”

“⁠압니다⁠. 그래서 왔어요⁠.⁠” 건오가 무릎 위의 손을 폈다⁠. 새끼손가락의 은반지가 이제 거의 검었다⁠. “⁠제가 가볍게 오면⁠, 설기담도 가볍게 빠지잖아요⁠.⁠”

*

왕가율은 조사실 앞 복도 의자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가 계단에서 올라오는 구두 소리를 들었다⁠. 굽이 높은 구두 하나와 굽이 낮은 구두 하나⁠. 또각 소리와 저벅 소리가 나란히 왔다⁠. 가율은 소리만 듣고 일어났다⁠. 일어나고 나서야 하늘색 점퍼가 보였다⁠.

설기담은 오늘 점퍼를 입지 않았다⁠. 감색 양복이었다⁠. 옆에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설기담이 가율을 보고 웃었다⁠. 보조개가 파였다⁠.

“⁠우리 새댁⁠, 여기서 다 보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고소장 내러 왔지⁠.⁠” 설기담 대신 변호사가 대답했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어 보였다⁠. “⁠왕가율 씨가 저희 의뢰인을 근거 없이 전세 사기 주범으로 지목하고⁠, 입주민 단톡방과 피해자 모임에서 의뢰인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본인이 위장 결혼을 주선하고 들키자 의뢰인에게 책임을 돌린 것으로 보고⁠,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합니다⁠.⁠”

가율은 변호사의 봉투를 보지 않고 설기담을 보았다⁠.

“⁠제가 주선했다고요⁠?⁠”

“⁠진술서가 넷이야⁠, 새댁⁠.⁠” 설기담이 목소리를 낮췄다⁠. 경찰서 복도에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새댁 모임 사람들이 새댁을 가리켰어⁠. 나는 그 애들한테 보증금을 돌려줬고⁠. 오늘 아침에 다 입금했어⁠. 은행 이자 갚느라 늦었지만⁠, 결국 갚았잖아⁠. 누가 사기꾼이야⁠?⁠”

“⁠그 보증금은 늘해랑빌 사람들 거였어요⁠. 처음부터요⁠.⁠”

“⁠그럼 원래 주인한테 돌아갔네⁠. 잘된 거 아냐⁠?⁠” 설기담이 가율 옆 의자에 앉았다⁠. 가율은 앉지 않았다⁠. “⁠새댁⁠, 내 말 잘 들어⁠. 나는 화곡동에 빌라 마흔 채를 지을 때 은행에서 다 빌렸어⁠. 집값이 오를 때는 은행도 웃고 세입자도 웃고 나도 웃었어⁠. 집값이 떨어지니까 은행은 경매로 제 돈 다 챙겨 가고⁠, 세입자는 울고⁠, 나만 사기꾼이 됐어⁠. 은행은 한 푼도 안 잃었어⁠. 국가는 뭘 했어⁠? 특별법 고친다고 일 년째 소위원회만 열었지⁠.⁠”

“⁠그래서 사장님이 국가 대신 집을 줬어요⁠?⁠”

“⁠줬잖아⁠. 다섯 집⁠.⁠” 설기담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새댁도 받았잖아⁠. 바닥 따뜻한 집⁠. 내가 안 줬으면 새댁은 지금도 기숙사 이층 침대에서 자⁠. 나는 사기꾼이고⁠, 새댁은 내 집에서 연애를 했어⁠. 그런데 누가 누구를 고소해⁠?⁠”

복도 끝 정수기가 꾸르륵 소리를 냈다⁠. 가율은 설기담 앞에 서 있었다⁠. 설기담은 앉아서 가율을 올려다보았다⁠. 가율의 간호화 끝이 설기담의 구두 끝에서 한 뼘 떨어져 있었다⁠.

“⁠사장님 말 다 맞아요⁠.⁠” 가율이 말했다⁠. 설기담의 눈썹이 올라갔다⁠. “⁠은행은 안 잃었고⁠, 국가는 늦었고⁠, 저는 사장님 돈으로 산 집에서 연애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집을 내놓으러 왔어요⁠. 사장님은 뭘 내놓으러 오셨어요⁠?⁠”

설기담이 웃었다⁠. 소리가 없는 웃음이었다⁠. 웃음이 끝나자 일어나 양복 앞섶을 여몄다⁠.

“⁠새댁은 아직 몰라⁠. 내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야⁠.⁠” 설기담이 변호사에게 턱짓을 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겨⁠.⁠”

변호사가 고소장 봉투를 민원실 창구로 들고 갔다⁠. 설기담은 복도를 걸어가다 조사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문 너머에서 건오의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설기담은 건오의 목소리를 몇 초 들었다⁠. 그러고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또각 소리가 한 층씩 멀어졌다⁠.

*

길건오는 점심시간에 경찰서 1층 자판기 앞에서 가율을 만났다⁠. 수사관이 둘이 말을 맞추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건오는 자판기 버튼만 보았다⁠. 가율도 자판기 버튼만 보았다⁠. 둘의 신발 앞코가 자판기 앞 고무 매트 위에 나란히 놓였다⁠. 간호화와 흙 묻은 운동화였다⁠.

“⁠말하면 안 돼요⁠.⁠” 건오가 버튼을 보며 말했다⁠. “⁠말 맞추는 거 된대요⁠.⁠”

“⁠칫솔 색도요⁠?⁠”

“⁠칫솔 색이 제일 위험해요⁠.⁠”

가율이 율무차 버튼을 눌렀다⁠. 종이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건오는 우유 버튼을 눌렀다⁠. 종이컵 두 개가 나란히 김을 올렸다⁠.

“⁠그럼 다른 얘기 해요⁠. 조사랑 상관없는 거⁠.⁠” 가율이 컵을 들었다⁠. “⁠건오 씨 오늘 아침에 에어매트 안 갰죠⁠.⁠”

“⁠네⁠. 거실에 그냥 두고 나왔어요⁠.⁠”

“⁠처음이에요⁠. 석 달 동안⁠.⁠”

“⁠이제 갤 이유가 없어서요⁠.⁠” 건오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입술에 하얀 수염이 생겼다⁠. 가율이 손가락으로 제 입술 위를 가리켰다⁠. 건오가 손등으로 닦았다⁠. 반대쪽을 닦았다⁠. 가율이 웃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순경이 둘을 힐끗 보았다⁠. 피의자 둘이 자판기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거 조사랑 상관있어요⁠?⁠” 건오가 물었다⁠.

“⁠없어요⁠.⁠” 가율이 컵을 비웠다⁠. “⁠이건 기록에 안 들어가요⁠.⁠”

*

염서겸은 오후 두 시⁠, 같은 조사실 같은 의자에 가율을 앉혔다⁠. 가율은 의자 다리를 장판의 눌린 자국에 맞추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앉았다⁠. 서겸은 아무렇게나 앉은 자세를 좋은 신호로 보기로 했다⁠.

“⁠아내분 칫솔 색이요⁠.⁠”

“⁠모르겠어요⁠.⁠” 가율이 대답했다⁠. “⁠연두색이었는데⁠, 건오 씨가 새로 사 온 걸 아직 안 봤어요⁠. 아침에 불 안 켜고 닦아서요⁠. 오늘 저녁에 볼게요⁠.⁠”

수사관이 새 김밥을 뜯다가 웃음을 참았다⁠.

“⁠처음 만난 날 날씨요⁠.⁠”

“⁠눈이요⁠. 우산 위에 쌓였어요⁠.⁠” 가율이 잠깐 생각했다⁠. “⁠건오 씨는 그날 제가 무게 얘기를 해서 무서웠대요⁠. 저는 그 우산을 버리지 않고 기숙사에 가져갔어요⁠. 녹은 눈 때문에 진짜로 무거웠어요⁠.⁠”

“⁠지난번엔 추웠다⁠, 작았다였어요⁠.⁠”

“⁠지난번엔 건오 씨 답을 외웠어요⁠. 건오 씨가 만든 종이에 건오 씨 답이 있었거든요⁠.⁠” 가율이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 꼈다⁠. “⁠이번엔 둘 다 안 외웠어요⁠. 그래서 다 틀리게 나올 거예요⁠.⁠”

“⁠틀린 게 아니고요⁠.⁠” 서겸이 말했다⁠. “⁠달라진 거예요⁠.⁠”

조사는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가율은 늘해랑빌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부터⁠, 구청 민원실 접수 창구에서 「⁠감사합니다⁠, 다음 분⁠」이라고 말한 날⁠, 솔마루 엘리베이터 사십 초⁠, 병동의 고시원 노인과 젖은 구두의 보호자⁠, 시청 비상계단⁠, 맨발로 내려간 계단까지 말했다⁠. 다른 다섯 집 이야기를 묻자 가율은 고개를 저었다⁠.

“⁠제 이야기만 할게요⁠. 다른 분들 이야기는 그분들이 하셔야 해요⁠.⁠”

수사관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그분들이 다 왕가율 씨를 가리켰는데도요⁠?⁠”

“⁠네⁠.⁠”

서겸은 진술 기록이 출력되는 동안 가율을 보았다⁠. 가율은 출력되는 종이를 보지 않고 조사실 바닥을 보았다⁠. 의자 다리 네 개가 장판의 눌린 자국 옆에 새 자국을 내고 있었다⁠.

“⁠하나만 더 여쭐게요⁠.⁠” 서겸이 말했다⁠. “⁠이건 기록에 안 들어가요⁠. 지금은 진짜 부부입니까⁠?⁠”

가율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조사에 필요해요⁠?⁠”

“⁠아니요⁠. 제가 궁금해서요⁠.⁠”

수사관이 김밥을 내려놓고 일부러 모니터를 보았다⁠. 가율은 한참 서겸을 보았다⁠. 첫날 엘리베이터 홀에서 「⁠결혼식은 어디서 하셨어요⁠?⁠」라고 묻던 얼굴과 같은 얼굴이었다⁠. 물음만 달랐다⁠.

“⁠칫솔 색 모르는 부부요⁠.⁠” 가율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 확인할 거예요⁠.⁠”

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조사실 문이 열렸다⁠. 다른 수사관이 서류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방금 법무법인에서 추가 진술서가 하나 더 들어왔습니다⁠. 늘해랑빌 모임 총무요⁠. 옥다엽⁠.⁠”

서류가 탁자 위에 놓였다⁠. 컴퓨터로 친 네 장과 달랐다⁠. 손으로 쓴 진술서였다⁠. 동그랗고 큰 글씨⁠, 이모티콘을 그리듯 둥글린 받침⁠. 가율이 이 년 동안 모임 공지 밑에서 보아 온 글씨였다⁠.

「⁠저는 총무로서 대표 왕가율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대표님이 다 시켰습니다⁠. 짝을 정한 것도⁠, 대부업체를 알려 준 것도 대표님입니다⁠. 저는 그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 옥다엽⁠」

맨 밑 서명 옆에 작은 얼룩이 하나 있었다⁠. 마른 물방울 자국이었다⁠. 가율은 얼룩에 손가락을 대지 않았다⁠. 대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았다⁠. 다엽이 진술서 앞에 밤새 앉아 있다가 이름까지 썼다가 찢었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찢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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