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7자)

선거

청약 당첨 위장 결혼 · 소하린

5월 18일 아침⁠, 염서겸은 1203호 결과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다⁠. 대신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204호 바닥에 앉은 채였다⁠. 양말을 한 켤레만 신어도 발이 시리지 않았다⁠. 오월 중순이었다⁠.

“⁠1203호는 설기담 건이랑 묶어서 보겠습니다⁠. 3주만 더 주세요⁠.⁠”

“⁠서겸아⁠, 장관 발표가 6월 말이야⁠.⁠” 팀장의 목소리 뒤에서 복사기가 돌았다⁠. 「⁠상반기 부정 청약 점검 결과⁠」라는 보도자료 초안이 어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을 것이었다⁠. “⁠적발 건수가 숫자로 나가⁠. 1203호는 이미 다 나왔잖아⁠. 계약금⁠, 각서⁠, 대부업체⁠. 그거면 한 건이야⁠.⁠”

“⁠한 건 올리면 설기담은 실수로 과태료 내고 끝납니다⁠. 다섯 집 각서가 설기담 돈이라는 걸 보이려면 1203호가 필요해요⁠. 1203호 사람들이 말을 해야 하고요⁠.⁠”

“⁠그 사람들이 왜 말을 해⁠. 말하면 자기들 집이 날아가는데⁠.⁠”

서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맞은편 집에서 문턱 소리가 났다⁠. 한 번 멈췄다가 넘는 소리였다⁠. 요즘은 문턱 소리 뒤에 바로 한 번 더 났다⁠. 밟지 않고 건너뛰는 사람이 같이 나갔다⁠.

“⁠3주다⁠.⁠” 팀장이 말했다⁠. “⁠6월 7일 월요일까지⁠.⁠”

3주의 끝을 사흘 앞둔 6월 4일⁠, 1204호 우편함에 등기 봉투 하나가 들어왔다⁠. 보낸 곳은 강남의 법무법인이었다⁠. 의뢰인 이름은 없었다⁠. 봉투 안에 진술서 네 장이 들어 있었다⁠. 104동 803호⁠, 108동 1102호⁠, 102동 604호⁠, 105동 207호⁠. 네 장의 문장이 토씨까지 같았다⁠.

「⁠늘해랑빌 피해자 모임 대표 왕가율이 신혼부부 특별공급을 받으려면 서류상 결혼을 하라고 권했으며⁠, 계약금을 빌릴 대부업체를 소개했습니다⁠. 저희는 대표를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서겸은 네 장을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외운 답은 토씨까지 같았다⁠. 같이 산 답은 토씨가 달랐다⁠. 이 네 장을 쓴 사람들은 같이 살지 않았다⁠. 한 사람이 불러 준 말을 받아 적었다⁠.

*

길건오는 선거 날 아침 여덟 시에 104동 803호 초인종을 눌렀다⁠. 205호 청년이 추리닝 바람으로 문을 열었다⁠. 현관 바닥에 남자 운동화 한 켤레와 여자 샌들 한 켤레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행거의 남색 티셔츠는 없어져 있었다⁠.

“⁠형⁠.⁠” 청년이 문을 반만 열었다⁠. 엄지가 검지 손톱으로 갔다⁠. “⁠대표님이 보내셨어요⁠?⁠”

“⁠아니⁠. 나 혼자 왔어⁠.⁠” 건오는 현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문턱 밖에서 말했다⁠. “⁠진술서 쓰지 마⁠. 대표님은 아무것도 안 시켰어⁠. 너도 알잖아⁠. 다엽 씨가 이어 줬고 곽 실장이 돈을 댔어⁠. 그 돈이 설기담 돈이야⁠.⁠”

“⁠알아요⁠.⁠” 청년이 손톱을 뜯었다⁠. 피가 살짝 배었다⁠. “⁠벌써 썼어요⁠. 어제 변호사 사무실 가서요⁠.⁠”

건오는 문틀을 잡았다⁠.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형⁠, 저 이 년 동안 컵라면만 먹었어요⁠. 학비 대출이랑 보증금 대출을 같이 갚느라고요⁠. 보증금은 엄마가 시골 땅 판 돈이었어요⁠. 설 사장님이 다음 주에 돌려준대요⁠. 그거 받으면 엄마한테 갚을 수 있어요⁠.⁠”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형도 어머니 돈이었잖아요⁠. 형이면 안 썼을 거예요⁠?⁠”

건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역국 앞에서 어머니가 내민 닳은 통장이 떠올랐다⁠. 이천이었다⁠. 마지막이었다⁠. 통장을 받았다면 건오는 지금 여기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받지 않은 것은 건오가 아니었다⁠. 가율이 통장 위에 손을 얹었다⁠.

“⁠갚으면 또 생겨⁠.⁠” 건오가 말했다⁠. “⁠설기담한테 받은 돈은 갚으면 또 빚이 생겨⁠. 진술서가 그 빚이야⁠.⁠”

“⁠형은 수학 선생님이라 그렇게 말하죠⁠.⁠” 청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저는 그냥 엄마한테 돈 갚고 싶어요⁠. 죄송해요⁠.⁠”

문이 닫혔다⁠. 건오는 803호 문 앞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 앞 매트에 「⁠어서 와요⁠, 우리 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건오는 매트를 밟지 않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803호 안에서 여자가 우는 소리가 났다⁠. 307호 누나의 목소리였다⁠. 건오는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귀를 막지 않았다⁠.

*

왕가율은 6월 5일 토요일 밤 아홉 시⁠, 커뮤니티 센터 강당 뒷줄에 서 있었다⁠. 개표가 끝나 가고 있었다⁠. 체육관 마루 위에 접이식 의자가 줄을 맞춰 놓였고⁠, 앞쪽 탁자에서 관리사무소 직원 둘이 투표용지를 두 무더기로 갈랐다⁠. 기호 1번 무더기는 손바닥 높이였고⁠, 기호 2번 무더기는 팔꿈치 높이였다⁠.

“⁠기호 2번 설기담 후보⁠, 육백십이 표⁠. 당선입니다⁠.⁠”

강당이 박수로 찼다⁠. 아기 띠를 한 아빠가 또 휘파람을 불었다⁠. 기호 1번 교장 선생님이 일어나 설기담과 악수를 하고⁠, 다시 앉아 꾸벅 졸았다⁠. 설기담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입주민 여러분⁠. 우리 단지 집값⁠, 우리 단지 사생활⁠, 제가 지키겠습니다⁠. 첫 번째 일로⁠, 국토부에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우리 단지 입주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조사⁠, 이제 그만해 달라고요⁠.⁠”

박수가 한 번 더 터졌다⁠. 가율 옆에 담희가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투표권은 없었지만 아이 손을 잡고 개표를 보러 왔다고 했다⁠. 담희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이가 엄마를 따라 손뼉을 치려다 멈췄다⁠.

설기담이 단상에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돌며 악수를 했다⁠. 가율 앞에 와서 멈췄다⁠.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가율의 귀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쑥떡 냄새는 나지 않았다⁠. 대신 박하사탕 냄새가 났다⁠.

“⁠새댁⁠, 진술서 소식 들었지⁠? 새댁이 주범이래⁠. 대표님이 다 시켰대⁠.⁠”

“⁠다섯 집이 사장님 음성 메시지를 들으면요⁠?⁠” 가율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늘해랑빌 애들 보증금이 집이 돼서 돌아오네⁠.⁠」 사장님 목소리요⁠.⁠”

설기담의 웃음이 반 박자 멈췄다⁠. 다시 이어졌다⁠.

“⁠그 애들이 보증금 받고 나서 들으면 뭐가 달라져⁠?⁠” 설기담이 가율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정한 손이었다⁠. “⁠새댁⁠, 사람은 돈을 받으면 귀가 먹어⁠. 새댁이 이 년 동안 그 애들한테 준 건 희망이고⁠, 나는 이번 주에 현금을 줘⁠. 누구 말을 듣겠어⁠. 나는 새댁보다 그 애들을 더 잘 알아⁠. 내 세입자였잖아⁠.⁠”

“⁠제 세입자이기도 했어요⁠. 사장님이 아니라 제 옆집이요⁠.⁠”

“⁠그러니까 새댁이 진 거야⁠.⁠” 설기담이 몸을 펴고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아이고⁠, 우리 106동 새댁⁠! 투표하러 와 줬어⁠? 고마워⁠!⁠”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가율은 박수 가운데에 서 있었다⁠. 담희가 가율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

왕가율은 밤 열한 시⁠, 1203호 거실 마루에 앉아 「⁠늘해랑빌 보증금 모임⁠」 대화방 입력 칸을 오래 보았다⁠. 건오가 옆에서 종이 상자 하나에 서류를 넣고 있었다⁠. 혼인관계증명서⁠, 1203호 공급 계약서⁠, 건오의 거래 내역서⁠, 곽 실장이 보낸 각서 사진을 뽑은 것⁠, 클라우드에서 내려받은 녹음 파일을 담은 메모리 카드⁠. 그리고 다엽이 지난달 마루 위에 두고 간 휴대전화⁠.

가율은 글을 썼다⁠. 고치지 않았다⁠. 고치는 순간 연습이 된다고⁠, 가율은 생각했다⁠.

「⁠302호 왕가율입니다⁠. 오늘부로 모임 대표를 내려놓습니다⁠. 저는 작년 겨울 같은 빌라 분과 서류로만 결혼했고⁠, 신혼부부 특별공급에 당첨됐습니다⁠. 남의 차례를 가로챈 일입니다⁠. 계약금은 제가 모르는 사이 설기담의 돈이었습니다⁠. 내일 조사관에게 모두 말하겠습니다⁠. 다른 분들 이야기는 제가 하지 않습니다⁠. 각자 하실 이야기는 각자의 입으로 하셨으면 합니다⁠. 이 년 동안 대표라고 불러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저는 대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보내기 단추를 누르자 숫자 「⁠38⁠」이 「⁠37⁠」로 바뀌었다⁠. 읽은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숫자가 줄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일 분 뒤 「⁠옥탑⁠」이 썼다⁠. 「⁠대표님 아니어도 302호는 302호예요⁠」 옥탑의 글 밑에 「⁠101호 할머니⁠」가 식혜 사진을 한 장 올렸다⁠. 아무 글도 없이⁠.

건오가 상자 뚜껑을 닫았다⁠. “⁠가요⁠?⁠”

“⁠가요⁠.⁠” 가율이 일어섰다⁠. 다리가 저렸다⁠. 발바닥에 피가 돌아오는 동안 마루의 온기가 다시 느껴졌다⁠. 가율은 온기를 오래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빨리 걸었다⁠.

*

염서겸은 밤 열한 시 이십 분⁠,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1203호 두 사람이 종이 상자 하나를 같이 들고 서 있었다⁠. 상자 모서리를 하나씩 쥔 손이었다⁠. 둘의 신발은 엘리베이터 홀 타일 위에서 처음으로 같은 데를 향해 있었다⁠.

서겸은 먼저 묻기로 했다⁠. 진술서 네 장이 바닥에 깔린 거실을 등 뒤에 두고⁠, 문턱을 막아선 채였다⁠.

“⁠대표님⁠. 대표님이 이분들한테 서류상 결혼을 권하셨습니까⁠?⁠”

“⁠아니요⁠.⁠”

“⁠진술서가 넷이에요⁠. 대표님 말은 하나고요⁠.⁠”

“⁠알아요⁠. 그래서 하나 더 가져왔어요⁠.⁠” 가율이 상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희 거요⁠.⁠”

서겸은 비켜서지 않았다⁠. “⁠이걸 받으면 저는 1203호를 올립니다⁠. 경찰로 넘어가요⁠. 계약은 취소되고⁠, 두 분은 오랫동안 청약을 못 하시고⁠, 형사 처벌을 받으실 수 있어요⁠. 남편분 각서는 따로 문제가 커요⁠. 제가 받기 전에 다시 생각하실 시간이 있어요⁠. 지금이요⁠.⁠”

“⁠생각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수십 번이요⁠.⁠” 건오가 말했다⁠. “⁠조사관님⁠, 이거 없으면 설기담은 과태료 내고 회장 하잖아요⁠. 다섯 집은 몇 년 뒤에 집을 뺏기고요⁠. 그 다섯 집 다 저희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담희 씨는 계속 반지하에 있고요⁠.⁠” 가율이 말했다⁠.

서겸은 오래 두 사람을 보았다⁠. 첫날 엘리베이터 홀에서 둘 사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하던 틈이 있었다⁠. 지금은 상자 하나만 한 틈이었고⁠, 상자는 둘이 같이 들고 있었다⁠.

“⁠무겁죠⁠, 그거⁠.⁠” 서겸이 말했다⁠.

“⁠네⁠.⁠”

서겸이 문턱에서 비켜섰다⁠. 두 사람이 상자를 들고 1204호 거실로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진술서 네 장 옆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가율이 뚜껑을 열고⁠, 맨 위의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술서 옆에 나란히 놓았다⁠.

“⁠저희부터 잡으세요⁠.⁠” 가율이 말했다⁠. “⁠그다음에 설기담을 잡으세요⁠.⁠”

서겸은 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씩 꺼내 바닥에 펼쳤다⁠. 계약서⁠, 거래 내역서⁠, 각서 사진⁠, 메모리 카드⁠,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 차가운 바닥 위에서 1203호의 석 달이 한 장씩 펼쳐졌다⁠. 펼칠수록 건오의 반듯한 글씨가 많았다⁠.

“⁠이 휴대전화는 누구 거예요⁠?⁠”

“⁠모임 총무 거예요⁠. 본인이 말하겠다고 했어요⁠.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서겸은 휴대전화를 따로 비닐에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나 두 사람 앞에 섰다⁠. 무표정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하남경찰서 수사관이 같이 옵니다⁠. 두 분 따로 진술하시게 될 거예요⁠.⁠” 서겸이 두 사람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가율은 간호화를⁠, 건오는 흙 묻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은 편한 거 신으세요⁠. 오래 앉아 계실 거예요⁠.⁠”

두 사람이 1204호를 나갔다⁠. 문턱 소리가 났다⁠. 한 번 멈췄다가 넘는 소리와 건너뛰는 소리가⁠, 이번에는 동시에 났다⁠. 서겸은 거실 바닥에 혼자 앉아 진술서 네 장과 혼인관계증명서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장 가운데 진짜를 말하는 종이는 하나뿐이었다⁠. 거짓으로 맺은 결혼이 적힌 종이였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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