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88자)

10월 17일, 파리 — 깎는 나라와 늘리는 나라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

오후 2시⁠, 광장 한가운데 마리안 동상 받침대에 고등학생 셋이 올라가 있었다⁠. 아래에서는 프랑스 최대 노조 연맹인 노동총동맹(⁠CGT⁠)의 붉은 깃발과⁠, 2018년 유류세 인상에 맞서 시작된 시민 운동의 노란 조끼가 뒤섞였다⁠. 크레테이에서 온 학생들은 「⁠40°C EN CLASSE⁠」 판지를 다시 들고 나왔다⁠. 지우의 판지에는 프랑스어로 「⁠나는 178유로를 못 내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비유럽연합 학생은 2⁠,895유로를 낸다는 농담인데⁠,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에서 박성훈 차장의 메시지가 왔다⁠. 「⁠여기는 820조 9천억이다⁠. 거기는 얼마 깎는다고⁠?⁠」 이재명 정부가 9월 국회에 낸 2027년 예산은 820조 9천억 원으로 1년 전보다 93조 원⁠, 12⁠.8% 늘었다⁠. 증가율이 역대 가장 높다⁠.

저녁 6시 숫자가 나왔다⁠. 내무부는 전국 110곳 행진에 55만 명⁠, 파리에서만 11만 명이 나왔다고 셌다⁠. 노동총동맹과 노란 조끼 등 주최 측은 80만 명이라고 했다⁠. 25만 명이 어긋났고⁠, 어느 숫자가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한국도 같은 다툼을 겪었다⁠. 2016년 12월 24일 서울 촛불 집회를 주최 측은 60만 명⁠, 경찰은 3만 6천 명으로 셌다⁠. 경찰은 한 시점에 가장 많이 모인 인원을⁠, 주최 측은 하루 동안 다녀간 연인원을 센다⁠. 나는 수첩에 두 숫자를 다 적고 누가 셌는지 괄호를 달았다⁠. 박 차장의 답장은 짧았다⁠. 「⁠괄호 좋다⁠. 괄호가 기사다⁠.⁠」

이 사람들이 맞선 것은 예산이다⁠. 르코르뉘 총리는 9월 17일 르피가로 인터뷰에서 2027년 예산에서 540억 유로(⁠약 80조 원⁠)를 줄이겠다고 했다⁠. 올해 국내총생산의 5⁠.4%인 재정 적자를 내년 5%로 낮추고⁠, 연금을 물가만큼 올려 주던 규칙에도 손을 댄다⁠. 같은 달 서울은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주는 기초연금 예산은 2027년에 11% 늘었다⁠. 프랑스는 이미 받는 연금의 오름폭을 누르고⁠, 한국은 연금이 얇은 노인에게 얹는다⁠. 한 나라가 80조 원 가까이 깎을 때 다른 나라는 93조 원을 늘렸다⁠. 광장 가장자리 카페 주인은 내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계산대 밑에서 메뉴판을 꺼내 보였다⁠. “⁠커피값은 안 깎아요⁠. 정부가 깎으니까 저라도 버텨야죠⁠.⁠”

나란히 놓기 전에 잣대를 맞춰야 한다⁠. 프랑스의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의 119% 안팎이고⁠,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2027년 48⁠.3%로 잡혔다⁠. 한국 숫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빚만 센 것이라⁠, 사회보장기금까지 더해 재는 프랑스 숫자보다 좁다⁠. 적자도 같다⁠. 한국 정부가 2027년 0⁠.1%로 내다본 관리재정수지는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기금 흑자를 빼고 잰 숫자라 프랑스의 일반정부 적자보다 엄격하다⁠. 잣대를 맞춰도 간격은 남는다⁠. 프랑스는 빚이 경제 규모보다 크고⁠, 한국은 절반이 안 된다⁠.

빚에는 이자가 붙는다⁠.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4⁠.94%까지 올라 2002년 뒤 가장 높았다⁠. 시장이 프랑스에 돈을 빌려줄 때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한다는 신호다⁠. 한국 야당은 다른 숫자를 들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국가채무가 처음 1⁠,500조 원을 넘었고 이자만 한 해 35조 원이라며⁠, 정부가 빚을 더 늘린다고 비판했다⁠. 2027년 국가채무는 1⁠,519조 8천억 원이다⁠. 두 나라 야당은 반대 방향에서 정부를 친다⁠. 프랑스 사회당 의원 아르튀르 들라포르트는 이 예산을 「⁠쓴 긴축 물약⁠」이라 불렀다⁠. 파리의 야당은 너무 깎는다고⁠, 서울의 야당은 너무 쓴다고 한다⁠.

해가 지자 광장 동쪽 골목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밤사이 파리와 마르세유⁠, 니스⁠, 리옹을 비롯한 아홉 도시에서 상점이 털렸다⁠. 리옹에서는 관광 안내소가 불탔고⁠, 리모주에서는 140년 넘은 시청이 불길에 대부분 무너졌다⁠. 르코르뉘 총리는 1⁠,200명을 체포했고 경찰 150명이 다쳤다며 “⁠피해가 더 크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이틀 뒤 내무부 집계를 인용한 영국 BBC는 다친 경찰을 1⁠,000명 안팎으로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책임자를 “⁠기소하고 처벌하겠다⁠”고 했다⁠. 상점을 털고 시청에 불을 지른 것은 시위가 아니다⁠. 범죄다⁠. 한국 형법도 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하거나 남의 물건을 부수면 제115조 소요죄로 처벌한다⁠. 두 나라 법이 같은 자리에 선을 긋는다⁠.

전쟁의 약탈을 범죄로 정한 것도 유럽과 미국이었다⁠. 1863년 링컨이 서명한 북군 전시 규칙 리버 법전은 점령지의 약탈을 사형까지 둘 수 있는 죄로 정했고⁠,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협약은 약탈을 국제법으로 금지했다⁠. 선이 그어지기 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해군은 외규장각의 의궤를 배에 실어 갔다⁠. 145년 뒤인 2011년 4월과 5월⁠, 296권이 네 번에 나뉘어 서울로 돌아왔다⁠.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이 먼저 들고 온 1권을 더하면 297권이다⁠. 형식은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이고⁠, 소유권은 아직 프랑스에 있다⁠. 의궤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처음 찾아낸 사람은 19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였다⁠. 나는 2011년 5월 27일 마지막 상자가 도착했다는 기사를 수첩에 옮겨 적다가 펜을 멈췄다⁠. 145년 만의 귀환이 대여였다⁠.

프랑스가 남의 땅에서 가져간 것은 한국 책만이 아니다⁠. 1892년 프랑스 식민군은 지금의 베냉⁠, 다호메 왕국의 수도 아보메 궁에서 왕실 보물을 가져갔다⁠. 프랑스 의회는 2020년 12월 26점의 소유권을 베냉에 넘기는 법을 통과시켰고⁠, 보물은 2021년 11월 9일 돌아갔다⁠. 법은 26점에만 적용되도록 좁게 만들어졌다⁠. 베냉은 돌려받은 나라이고⁠, 한국은 아직 빌려 읽는 나라다⁠. 미경이 저녁에 가게 셔터를 내리며 말했다⁠. “⁠우리 가게는 털어 가 봐야 고추장뿐이에요⁠. 고추장도 제 거라고 우기면 곤란하지만⁠.⁠”

프랑스의 넉넉함은 오랫동안 남의 땅 위에 있었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1954년부터 8년 동안 독립 전쟁을 치렀다⁠. 아프리카 열네 나라는 아직 CFA 프랑이라는 돈을 쓴다⁠. 2019년 12월 21일 서아프리카 여덟 나라가 개편에 합의해 프랑스 국고에 외환 보유액 절반을 맡기던 규칙을 2020년 프랑스 법으로 없앴지만⁠, 유로에 묶인 고정 환율은 남았고 중앙아프리카 여섯 나라 제도는 그대로다⁠. 한국은 같은 20세기 전반 35년을 남의 식민지로 보냈다⁠. 한국의 곳간에는 남의 땅에서 거둔 몫이 없다⁠.

그러면 한국의 93조 원은 어디서 왔나⁠? 9월 30일 재정경제부는 올해 국세가 478조 6천억 원 걷혀 3월 추경 때 전망보다 63조 2천억 원 많다고 다시 계산해 냈다⁠. 법인세만 35조 원 늘었다⁠.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들이 낸 세금이다⁠. 같은 달 파리의 계산은 반대 방향이었다⁠. 적자 5⁠.4%를 메울 세금이 모자라니 지출에서 540억 유로를 덜어 내야 한다는 계산이다⁠. 한 나라는 더 걷힌 세금으로 예산을 짰고⁠, 다른 나라는 모자란 세금으로 예산을 깎았다⁠.

한국 세금의 뿌리는 1986년 8월로 내려간다⁠. 정부는 삼성반도체통신·금성반도체·현대전자 세 회사와 전자통신연구소를 한 사업으로 묶어 4메가 디램 공동개발에 나섰고⁠, 연구원 670명이 매달렸다⁠. 같은 사업은 1991년 16메가⁠, 1993년 64메가 디램으로 이어졌다⁠. 이후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어도 메모리 반도체를 키운다는 방향은 이어졌다⁠. 프랑스에도 기획은 있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1년 10월 12일 540억 유로짜리 산업 투자 계획 「⁠프랑스 2030⁠」을 발표했다⁠. 원자력⁠, 수소⁠, 반도체⁠, 바이오에 돈을 붓는 계획이다⁠. 프랑스 상원 보고서에 따르면 첫 다섯 해 동안 지원이 약 400억 유로 정해졌지만⁠, 실제 기업과 연구소 손에 들어간 돈은 약 140억 유로였다⁠. 5년 뒤 같은 540억 유로라는 숫자가 이번에는 삭감액으로 돌아왔다⁠.

기획은 지금도 이어 쓰는 중이다⁠. 한국은 8월 3일 세제개편안에 반도체와 이차전지⁠, 인공지능 로봇 부품을 국내에서 만들어 판 만큼 세금을 깎아 주는 국내생산세액공제를 새로 넣었다⁠. 수도권 과밀억제권역은 빼고⁠, 인구감소지역 공장은 1⁠.5배를 깎아 준다⁠. 언론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빗대 「⁠한국판 IRA⁠」라고 불렀다⁠. 유럽연합은 2024년 5월 탄소중립산업법을 만들어⁠,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 같은 청정 기술 수요의 40%를 2030년까지 유럽 안에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유럽은 목표를 법에 적었고⁠, 한국은 공장이 낸 매출에 세금 공제를 붙였다⁠. 광장의 날로부터 10일 뒤인 10월 27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해법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들고⁠, 늘어난 재정 여력으로 첨단 산업 투자를 늘리고 내수를 키우라고 주문했다⁠. 더 걷힌 세금이 다시 공장과 연구실로 간다⁠.

연구비도 거꾸로 움직인다⁠. 2027년 한국 정부 연구개발 예산은 39조 5천억 원으로 11⁠.2% 늘었다⁠. 2024년 26조 5천억 원으로 깎였던 연구개발 예산이 3년 만에 13조 원 늘어난 것이다⁠. 프랑스는 2020년 12월 24일 연구 계획법을 만들어 2021년부터 2030년까지 공공 연구 예산을 해마다 늘려 가기로 했다⁠. 법안을 낼 때 정부가 내건 숫자는 10년 동안 250억 유로였다⁠. 한국 쪽 비판도 적는다⁠. 올해 세수 추계는 추경 때보다 15⁠.2% 빗나가 역대 다섯 번째로 큰 오차를 냈고⁠, 국민의힘은 초과세수를 담는 미래대응기금이 국회 통제 밖에 있다고 지적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지키려는 것도 적어 둔다⁠. 프랑스는 2000년 법정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줄였고⁠, 1982년부터 유급휴가가 다섯 주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두 주로 시작한 휴가가 반세기에 걸쳐 늘었다⁠. 한국은 2025년 연평균 1⁠,833시간을 일해 OECD 평균 1⁠,736시간보다 길고⁠, 근로기준법의 연차는 1년 일하면 15일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1⁠,700시간대로 줄이겠다고 했다⁠. 한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고⁠, 연장 근로까지 더한 주 52시간 상한은 2018년 7월 300명 넘는 사업장에 먼저 들어왔다⁠. 광장의 노란 조끼 하나가 내 수첩을 보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다섯 주요⁠. 이걸 깎으면 저는 바리케이드 말고 해변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시위할 거예요⁠.⁠”

성적표도 같은 자리에 둔다⁠. 한국은 3분기에 1⁠.0% 자랐고⁠, 한국은행이 8월에 내다본 0⁠.3%의 세 배다⁠. 1년 전보다는 3⁠.4% 컸다⁠. 끌어올린 것은 설비투자 4⁠.1%와 정부소비 1⁠.9%였고⁠, 민간소비는 0⁠.2% 줄었다⁠. 공장과 정부는 돈을 썼고⁠, 가계는 지갑을 닫았다⁠. 유로존은 같은 분기 0⁠.4% 자랐다⁠. 성장률 1⁠.0% 안에서 가계의 지갑은 열리지 않았다⁠.

자정 넘어 레퓌블리크 광장에는 깨진 유리와 노란 조끼 몇 벌이 남았다⁠. 지우는 판지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하품을 했다⁠. 미경은 셔터를 내린 가게 앞에서 내일 장사를 걱정했다⁠. 박 차장의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다음은 등록금이다⁠. 10월 6일 리에주 수첩 펴⁠. 거기 1⁠,194유로 있지⁠?⁠」 지우가 옆에서 거들었다⁠. “⁠리에주는 1⁠,194유로래요⁠. 저는 2⁠,895유로 내니까 거기 가면 부자예요⁠.⁠” 나는 지갑에서 리에주행 기차표를 꺼냈다⁠. 왕복 영수증이 반으로 접혀 있었다⁠. 한국 대학 등록금의 법정 인상 한도는 올해 3⁠.1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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