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07자)
해법을 저울에 단다 — 빌릴 연장, 빌려줄 연장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1월 1일 일요일, 인천.
서울 시각 아침 9시, 기내식 쟁반이 치워지자 해법 목록을 다시 폈다. 맨 위는 빈의 집이다. 빈 시영 주택의 돈줄 가운데 하나는 월급이다. 오스트리아 노동자와 회사는 월급의 1%를 반씩 나눠 주택 건설 지원 분담금으로 내고, 빈은 2026년 1월부터 이 몫을 1.5%로 올린 유일한 주가 됐다. 한국 공공 임대의 돈줄은 주택도시기금이다. 청약통장에 넣는 저축과, 집을 사서 등기할 때 사야 하는 국민주택채권이 기금으로 모인다. 정부는 9·7 대책으로 2026~2030년 수도권 135만 가구 착공을 내걸고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직접 짓게 했다. 빈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서 조금씩 걷고, 한국은 집을 바라는 사람과 집을 사는 사람에게서 걷는다.
둘째는 마드리드의 퇴거 금지다. 9월 29일 스페인 정부는 2030년까지 퇴거를 막는 법령을 냈지만, 하원은 10월 첫 주 178 대 172, 184 대 166으로 두 법령을 부결했다.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은 10월 7일 숨졌다. 한국은 2020년 7월 세입자가 2년을 한 번 더 살 수 있는 계약갱신청구권과, 갱신 때 임대료를 5% 넘게 못 올리는 상한을 들였다. 스페인은 퇴거를 아예 막으려다 의회 문턱에서 멈췄고, 한국은 쫓겨나지 않을 시간을 4년으로 늘렸다. 다만 한국 세입자를 가장 크게 다치게 한 것은 퇴거보다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이었다. 9월 말까지 전세사기 피해로 인정된 것이 4만 1,559건이다. 한국이 마드리드에서 빌릴 것은 퇴거 금지보다, 늙은 세입자를 따로 지키는 생각이다.
셋째는 벨기에의 임금이다. 물가 지수가 문턱을 넘으면 업종 협약에 따라 월급이 저절로 오르고, 노조에 들지 않은 사람도 업종 협약 임금을 받는다. 노동자 100%가 협약을 적용받는 나라다. 한국 최저임금은 해마다 표결로 정해 2027년 시간당 10,700원, 3.7% 올랐다. 한국의 협약은 오랫동안 회사 담장에서 멈췄는데, 2026년 3월 10일 하청 노조가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게 한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됐다. 고용노동부 집계로 첫날 하청 노조 407곳이 원청 221개 사업장에 교섭을 요구했고, 9월 10일 현대제철과 자회사 네 곳 노조가 산업안전 의제로 첫 원·하청 합의를 맺었다. 벨기에는 협약이 업종 전체로 퍼지고, 한국은 담장에 문 하나를 막 냈다.
넷째는 파리의 부유세 논쟁이다. 2025년 10월 31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1억 유로(약 1,492억 원) 넘는 재산에 최소 2%를 매기자는 경제학자 가브리엘 쥐크만의 안을 228 대 172로 부결했다. 쥐크만은 이 세금으로 1,800가구에서 한 해 200억 유로(약 29조 8천억 원)를 걷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올해 10월 14일 2027년 예산 토론에서 이 세금은 다시 불붙었다. 한국은 8월 세제개편안에서 종합부동산세를 주택 수 대신 주택 가격으로 매기게 바꾸고, 실거주 1주택자 공제는 12억 원에서 14억 원으로 넓히는 대신 비거주 1주택자 공제는 9억 원으로 낮췄다. 비거주 1주택자의 종부세는 2028년 4배쯤 늘어날 전망이다. 프랑스는 아주 큰 부자 1,800가구를 두고 2년째 다투고, 한국은 사는 집과 갖고만 있는 집을 나눠 세금을 매긴다.
다섯째는 유럽연합이 함께 빌리는 돈이다. 유럽연합은 2025년 5월 회원국에 국방비를 싸게 빌려주는 1,500억 유로(약 223조 8천억 원)짜리 대출 제도 SAFE를 만들었다. 유럽연합이 시장에서 빌려 회원국에 다시 빌려주고, 회원국은 2070년까지 갚는다. 가장 큰 몫은 폴란드의 437억 유로이고, 루마니아가 167억 유로, 프랑스와 헝가리가 162억 유로씩이다. 유럽연합이 처음 크게 함께 빌린 것은 2020년 코로나 회복 기금 7,500억 유로였다. 한국은 빌리지 않고 남는 세금을 쌓는다. 정부는 초과세수 일부를 미래대응기금에 담겠다고 했고, 국민의힘은 기금이 국회 통제 밖에 있다고 지적했다. 파리의 지우가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그럼 유럽은 곗돈으로 탱크 사는 거야? 곗날이 2070년이고?」
여섯째는 에너지 전환이다. 영국 에너지 연구소 엠버 집계로 2025년 유럽연합 전기의 48%를 재생에너지가 만들었고, 바람과 햇빛이 30%로 처음 화석연료의 29%를 앞질렀다. 한국 정부는 8월 재생에너지 설비를 2025년 37GW에서 2040년 220GW로 늘리고, 2035년 발전 비중을 30% 넘게 올리겠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한국이 9년 뒤 목표로 잡은 30%를 유럽은 바람과 햇빛만으로 이미 채웠다. 한국도 기름을 덜 쓰는 길로 들어갔다. 4월 15일 전기차 누적 등록이 100만 대를 넘었고, 새 차 다섯 대 가운데 한 대 넘게가 전기차였다. 그래도 한국의 기름값 처방에는 끝나는 날이 있다. 유류세 인하는 11월 30일에 끝날 예정이다. 유럽은 기름을 덜 쓰는 길을 오래 닦았고, 한국은 비싼 기름을 덜 비싸게 사는 법을 먼저 찾았다.
일곱째는 바깥을 대하는 법이다. 유럽은 「전략적 자율」을 내건다.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캐고, 스스로 만들자는 말이다. 유럽연합 핵심원자재법은 2030년까지 유럽연합이 쓰는 핵심 광물의 10%를 안에서 캐고 40%를 안에서 가공하고 25%를 재활용으로 얻으며, 어느 한 나라에 65% 넘게 기대지 않겠다고 적었다. 한국은 고르지 않고 거래한다. 미국과 관세를 15%로 낮추며 3,500억 달러를 약속했고, 2026년 1월 베이징에서 중국과 관계를 되살렸다. 유럽의 자율은 회원국이 2070년까지 갚을 빚으로 사고, 한국의 거래는 미국 땅에 보낼 투자 약속으로 산다. 둘 다 공짜가 아니다.
한국이 빌려줄 연장도 있다. 첫째는 위기 때 값을 붙잡은 상한과 곧바로 나눈 지원금이다. 한국은 3월 13일 석유 최고가격제를 꺼냈고, 4월 27일부터 국민 70%에게 고유가 피해지원금 10만~60만 원을 주었다. 유럽은 연료 보조를 업종에 주었고, 이탈리아 화물 기사들은 3월부터 8월까지 몫 4억 3,480만 유로를 신청서 3만 1천 건 앞에서 기다렸다. 둘째는 세 나라 사이에서 양쪽과 거래하는 외교다. 셋째는 오래 가진 건강보험이다. 1977년 큰 사업장에서 시작해 1989년 전 국민으로 넓힌 한국 건강보험은, 1978년 세금으로 문을 연 이탈리아 국민보건서비스 옆에 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상한은 유럽에 없는 연장이 아니다. 벨기에 연방 경제부는 정부와 석유 업계가 맺은 협약에 따라 날마다 주유소 최고 가격을 계산해 내건다. 3월 말 벨기에 경유 최고가는 하루 새 17센트 올라 리터당 2.33유로(약 3,476원)가 됐다. 독일도 벨기에처럼 판매가 상한을 둘지 따지는 중이다. 한국의 상한은 정유사 공급가에 걸어 차수마다 원 단위로 고시하고, 11차 경유 최고가격은 1,773원이다. 벨기에의 상한은 오래 써 온 평소의 규칙이고, 한국의 상한은 3월에 처음 꺼낸 위기용 연장이다. 한국이 빌려줄 것은 상한이라는 연장보다, 상한과 유류세 인하와 현금 지원을 6주 안에 한 묶음으로 내놓은 속도다.
넷째 연장은 원전이다. 체코 정부는 2024년 7월 프랑스 전력공사 대신 한국수력원자력을 골랐고, 프랑스 전력공사가 낸 소송으로 막혔던 계약은 2025년 6월 4일에야 맺어졌다. 계약에는 테멜린 발전소에 2기를 더 지을 수 있는 선택권도 들어 있다. 옆자리 엔지니어는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오자 안전띠를 매며 말했다. “체코는 해법을 사 왔고, 저희는 해법을 팔았죠. 애프터서비스는 60년이고요.” 독일이 마지막 원전을 끈 2023년에도 한국은 원전을 돌렸고, 2024년 발전량의 3분의 1 가까이를 원전에서 얻었다. 유럽 안에서도 길은 둘로 나뉘었다. 독일은 원전을 내려놓았고, 체코는 바다 건너 한국의 원전을 들였다.
한국이 빌릴 연장은 집과 임금과 시간이다. 빈처럼 월급에서 조금씩 걷어 백 년 동안 짓는 집, 벨기에처럼 업종 전체로 퍼지는 협약, 프랑스처럼 법으로 묶은 짧은 노동시간이다. 프랑스는 2000년 주 35시간제를 들였고, 한국은 2018년 7월 큰 사업장에서 먼저 주 52시간 상한을 들였다. 한국 정부는 2030년까지 연 노동시간을 1,700시간대로 줄이겠다고 했다. 빌리는 데에도 대가가 있다. 빈의 1.5%는 월급에서 나가고, 벨기에의 연동은 경제가 흔들릴 때 회사가 먼저 버텨야 하며, 짧은 노동시간은 같은 생산을 더 적은 시간에 해내야 지켜진다.
대학은 해법 목록에서 가장 오래 망설인 줄이다. 프랑스 국립대 한 해 178유로와 독일 국공립대의 무상 등록금은 세금이 대학 예산 대부분을 대는 나라 위에 서 있다. 벨기에 프랑스어권은 대학에 줄 세금이 모자라자 학생 형편에 따라 0유로에서 1,194유로(약 178만 원)까지 네 구간으로 나눴다. 한국은 고등교육에 쓰는 정부 돈이 국내총생산의 0.7%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0.9%에 못 미친다. 2027년에는 등록금을 묶는 대가로 대학에 주던 국가장학금 Ⅱ유형을 없애고, 18년 동안 이어 온 사립대 등록금 억제를 푼다. 유럽은 세금으로 대학 문을 넓혀 두었다가 세금이 모자라 다시 좁히고, 한국은 장학금으로 문을 받쳐 왔다가 등록금을 대학에 맡긴다. 이 줄에는 빌릴 연장보다 숙제가 먼저 적혔다.
한국이 가장 늦게 쌓기 시작한 연장은 노인의 소득이다. 스페인은 1990년 보험료를 내지 못한 노인에게도 주는 무기여 연금을 만들었고, 한국은 2014년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주는 기초연금을 들였다. 한국의 기초연금 예산은 2027년에 11% 늘었다. 프랑스는 2027년 예산에서 연금을 물가만큼 올려 주던 규칙에 손을 대고, 한국은 연금이 얇은 노인에게 얹는다. 유럽의 노인은 오래 쌓은 연금을 지키려 싸우고, 한국의 노인은 아직 다 쌓지 못한 연금을 기다린다. 한국이 유럽에서 빌릴 것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이 이 시간이다.
저울에 다 올리고 나니 하나가 보였다. 유럽의 해법은 하나같이 안에서 돈을 다시 나누는 처방이다. 부자에게 더 걷고, 월급으로 집을 짓고, 물가만큼 임금을 올리고, 회원국끼리 함께 빌린다. 빠진 받침을 다시 세우는 처방은 없다. 식민지는 돌아오지 않고, 러시아 가스는 유럽 스스로 법으로 끊었고, 미국의 우산은 관세를 달고 돌아왔다. 한국의 처방도 안에서 나누는 것이지만, 나눌 돈을 제 공장이 벌어 왔다. 올해 10월까지 한국 수출은 9,300억 달러를 넘었다. 유럽에는 근본 해결책이 없다. 비행기 안에서 내린 내 판단이다.
오후 2시, 바퀴가 인천 활주로에 닿았다. 입국 심사대 줄에서 박 차장이 전화했다. “해법 회 받았다. 결론은 뭐로 가냐?” “유럽은 좌초한다, 전망으로요. 반론도 한 문단 넣어요. 유로존 3분기 1.3% 성장, 단일시장.” “반론은 왜 넣어?” “안 넣으면 제가 한쪽만 부풀리는 거니까요.” 박 차장은 한참 웃더니 숫자 두 개를 붙이라고 했다. 공항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자 영수증이 나왔다. 에손의 2.37유로(약 3,540원) 영수증 옆에 서울의 첫 영수증이 들어갔고, 지갑 지퍼는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민수의 카톡이 왔다. 「누나 도착? 저녁 7시 마포 큰길 주유소. 경유는 내가 넣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