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45자)

폭풍 뒤에 남는 것 — 11월 1일, 서울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1월 1일 일요일⁠, 서울 마포⁠.

저녁 7시⁠, 마포 큰길 주유소 가격판의 경유 숫자는 1⁠,840원대에 머물러 있었다⁠. 10월 넷째 주 전국 평균 1⁠,842⁠.1원과 몇 원 차이다⁠. 한국 기름값은 24주 연속 내렸다⁠. 3일 전 에손 주유소의 경유는 리터당 2⁠.37유로⁠, 약 3⁠,540원이었다⁠. 민수는 1톤 트럭에 주유기를 꽂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나 살 빠졌다⁠. 유럽 물가 보고 와서 여기 싸 보이지⁠? 그 눈으로 내 월급도 한번 봐 줘⁠.⁠” 나는 가격판 사진을 찍고⁠, 주유기 옆에 수첩을 폈다⁠. 마감까지 2시간이 남았다⁠.

성적표부터 적었다⁠. IMF는 10월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세계 성장률을 3⁠.1%⁠, 선진국을 2⁠.1%⁠, 한국을 3⁠.3%로 내다봤다⁠. 같은 3분기에 유로존은 1년 전보다 1⁠.3%⁠, 한국은 3⁠.4% 자랐다⁠. IMF가 잡은 한국의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은 4만 3⁠,512달러로⁠, 2014년 3만 달러를 넘긴 뒤 12년 만에 처음 4만 달러를 넘는다⁠. 4월 전망만 해도 3만 7⁠,412달러였다⁠. IMF는 반도체를 찾는 바깥 수요가 전쟁의 충격을 상쇄한다고 설명했다⁠. 유럽 대부분이 1%대 성장에 머무는 해에⁠, 한국은 세계 평균보다 빨리 자란다⁠.

수출 숫자는 오늘 아침에 나왔다⁠. 산업통상부 발표로 10월 수출은 1⁠,152억 8천만 달러로 1년 전보다 93⁠.7% 늘었고⁠, 반도체가 564억 4천만 달러로 259⁠.4% 늘었다⁠. 무역수지는 425억 달러 흑자다⁠. 1⁠~10월 수출은 9⁠,300억 달러로 처음 9⁠,000억 달러를 넘었고⁠, 김정관 장관은 한 해 1조 달러를 11월 안에 넘길 것으로 내다봤다⁠. 유럽의 공장은 같은 분기에 숨을 골랐다⁠. 유럽에서 가장 큰 제조 강국 독일의 3분기 성장률은 0⁠.2%였다⁠. 독일은 싼 가스를 잃은 뒤 아직 공장의 숨을 고르지 못했고⁠, 한국은 메모리 칩을 찾는 세계의 줄 맨 앞에 섰던 공장으로 버텼다⁠.

5일 전 27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대통령은 성적표 하나를 직접 읽었다⁠. “⁠올해 2분기 경상수지 흑자가 세계 2위로 글로벌 제조 강국인 독일⁠, 일본의 흑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 IMF 국가별 통계로 따지면 한국의 2분기 흑자는 1⁠,166억 3천만 달러로 36개 나라 가운데 중국 다음이었고⁠, 독일과 일본을 합한 1⁠,028억 9천만 달러보다 컸다⁠. 대통령은 곧바로 덧붙였다⁠. “⁠역사적인 일이긴 하지만 자만해서도 만족해서도 안 된다⁠.⁠” 독일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흑자를 낸 나라였고⁠, 2분기에는 한국 한 나라에 일본과 함께 밀렸다⁠.

물가와 나라 살림도 적었다⁠. 9월 소비자물가는 유로존이 3⁠.8%로 3년 만에 가장 높았고⁠, 한국은 2⁠.9%였다⁠. 한국의 10월 물가는 내일 발표된다⁠. 한국은 2027년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의 0⁠.1%⁠,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잡았다⁠. 프랑스는 적자 5⁠.4%⁠, 빚 119⁠.3%다⁠. 한국의 적자 숫자는 사회보장기금 흑자를 뺀 것이고 빚 숫자는 중앙과 지방 정부 빚만 센 것이라 잣대가 다르지만⁠, 잣대를 맞춰도 간격은 남는다⁠. 민수가 수첩을 넘겨다보더니 말했다⁠. “⁠누나⁠, 나라 빚 얘기는 나 없을 때 해⁠. 내 할부가 생각나⁠.⁠”

성적표 옆에 그늘을 적었다⁠. 한국은행 속보치로 3분기 민간소비는 전 분기보다 0⁠.2% 줄었다⁠. 1년 전보다는 1⁠.1% 늘었고⁠, 한국은행은 주식 거래가 줄어 금융 서비스가 줄어든 것과 10년 만의 완성차 업체 전면 파업으로 차 인도가 늦어진 것을 꼽으며 두 가지를 빼면 0⁠.4% 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지갑을 연 사람이 줄었다는 숫자다⁠. 유럽의 생활비 분노는 거리로 나왔다⁠. 10월 17일 프랑스와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에서 생활비 시위가 한꺼번에 열렸다⁠. 유럽은 지갑이 비어 거리로 나왔고⁠, 한국은 수출이 기록을 쓰는 동안 골목의 지갑이 덜 열렸다⁠.

둘째 그늘은 환율이다⁠. 1인당 4만 달러는 달러로 잰 숫자라 원화 값에 달려 있다⁠. 원·달러 환율은 10월 27일 1⁠,323⁠.7원에 마감했다⁠. 유로도 원화에 대해 5월 7일 1⁠,707⁠.4원에서 10월 30일 1⁠,491⁠.76원으로 13% 가까이 싸졌다⁠. 환율이 다시 오르면 달러로 잰 한국은 그만큼 작아진다⁠. 유로가 싸지면 유럽 물건이 싸지고⁠, 원화가 비싸지면 한국 물건이 비싸진다⁠. 올해 한국의 수출 기록은 유로에 견줘 비싸진 원화를 견디며 세운 것이다⁠.

셋째 그늘은 청년이다⁠. 9월 한국 청년 고용률은 44⁠.0%로 29개월째 내려갔다⁠. 대통령도 27일 국무회의에서 기회의 총량이 모자라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이 크다고 스스로 숙제를 짚었다⁠. 유럽연합 스물다섯 살 아래 실업률은 7월 15⁠.1%였고⁠, 한국 15⁠~29세 실업률은 9월 5⁠.4%였다⁠. 나이 구간이 달라 바로 견줄 수는 없다⁠. 유럽 청년은 일자리 밖에서 기다리고⁠, 한국 청년은 일자리 문턱에서 기다린다⁠. 민수가 주유기 손잡이를 뽑으며 말했다⁠. “⁠나는 문턱 넘었어⁠. 대신 바닥이 트럭 짐칸이야⁠.⁠” 아테네에서 지운 민수 이야기는 이번에도 기사에 넣지 않았다⁠.

한국이 버틴 첫째 까닭은 곳간이다⁠. 올해 국세가 추경 때 전망보다 63조 2천억 원 더 걷혔고⁠, 법인세가 35조 원 늘었다⁠.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들이 낸 세금이다⁠. 이 돈은 1986년 8월 정부가 세 회사와 연구소를 묶어 4메가 디램을 함께 만들게 한 기획에서 시작해⁠, 정권이 여러 번 바뀌는 40년 동안 이어 온 산업 정책의 열매다⁠. 정부는 2026년 세제개편에 국내생산세액공제를 넣었고⁠, 2027년 10대 전략기술 연구개발 예산을 11조 원에서 13조 8천억 원으로 늘렸다⁠. 반도체와 피지컬 인공지능⁠,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5조 8천억 원을 묶어 넣는다⁠. 유럽연합은 2023년 반도체법을 만들고 2030년 세계 생산 20%를 목표로 잡았지만⁠, 유럽 감사원은 11⁠.7%에 그칠 것으로 봤다⁠.

나머지 까닭 셋도 적었다⁠. 둘째는 값 상한이다⁠. 3월 13일 석유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 국민 70%에게 준 고유가 피해지원금이 6주 안에 한 묶음으로 나왔다⁠. 셋째는 선거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에서 2025년 6월 3일 대선까지⁠, 한국은 광장과 헌법재판소와 투표함으로 정권을 바꿨다⁠. 세르비아 학생들은 노비사드 역 지붕 붕괴에서 총선 승리까지 2년 가까이를 거리에서 보냈다⁠. 넷째는 세 나라 사이의 거래다⁠. 한국은 미국과 관세를 15%로 낮추고⁠, 1월 베이징에서 중국과 관계를 되살렸다⁠. 유럽은 같은 해 미국의 관세와 중국의 희토류와 러시아의 혼합 공격을 한꺼번에 맞았다⁠.

한국이 나은 곳은 성적표 밖에도 있다⁠. 고용노동부 집계로 올해 상반기 산재 사고 사망자는 253명으로 2022년 통계 작성 뒤 상반기 가장 적었다⁠. 2025년 11월에는 국유재산 매각을 멈추고⁠, 300억 원 넘는 매각은 국회에 먼저 보고하게 했다⁠. 베오그라드의 학생들은 역 지붕에 깔려 숨진 16명의 책임을 물었고⁠, 티라나 사람들은 보호구역 바닷가를 지키느라 다섯 달째 거리에 있다⁠. 다만 한국 산재 사망 숫자 안에는 3월 대전 공장 화재로 숨진 14명이 들어 있다⁠. 나은 숫자도 사람을 지운 숫자는 아니다⁠.

대통령이 내놓은 처방은 성장이다⁠. 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지금은 더 많은 씨앗을 더 효과적으로 뿌려 미래에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했고⁠, “⁠강한 성장 토대가 구축되면 경제규모 증가로 부채비율은 안정되고 재정도 탄탄해지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의 디딤돌이 마련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정반대 처방을 골랐다⁠. 빚 비율을 낮추려고 2027년 예산에서 540억 유로(⁠약 80조 원⁠)를 덜어 낸다⁠. 한국은 씨앗을 더 뿌려 빚 비율을 낮추겠다고 하고⁠, 프랑스는 씨앗값부터 깎아 빚 비율을 낮추겠다고 한다⁠.

남은 숙제는 셋이다⁠. 첫째는 집이다⁠. 서울 아파트는 2025년 2월부터 90주 연속 올랐고⁠, 빈의 시민 넷 중 하나가 사는 시영 주택 같은 받침은 한국에 아직 얇다⁠. 둘째는 청년 일자리다⁠. 곳간을 채운 반도체는 사람을 적게 뽑는 산업이고⁠, 인공지능은 신입 자리부터 지운다⁠. 셋째는 노인 빈곤이다⁠. 한국 노인 소득 빈곤율은 37⁠.7%로 스페인의 노인 빈곤·사회적 배제 위험 비율 19⁠.2%보다 높다⁠. 잣대가 다른 두 숫자지만⁠, 스페인은 1990년에 무기여 연금을 만들었고 한국은 2014년에야 기초연금을 들였다⁠. 유럽이 백 년 걸려 쌓은 것을 한국은 이제 제 곳간으로 쌓아야 한다⁠.

결론을 적었다⁠. 유럽은 이 위기로 좌초할 것이다⁠. 내 전망이다⁠. 까닭은 유럽의 넉넉함이 기대 온 받침이 한꺼번에 빠졌기 때문이다⁠. 콩고의 고무와 알제리의 땅에서 거둔 제국의 부는 1960년대에 끝났다⁠. 제국이 떠난 자리를 메운 미국의 안보 우산과 러시아의 싼 가스와 중국의 시장은 2026년 관세와 혼합 공격과 희토류 통제로 돌아왔다⁠. 유럽의 해법은 하나같이 안에서 돈을 다시 나누는 처방이고⁠, 빠진 받침을 다시 세우는 처방은 없다⁠. 한국은 거꾸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였던 나라가⁠, 남의 땅에서 거두지 않고 제 손으로 일군 산업으로 같은 폭풍을 버텼다⁠. 그래서 한국의 선방은 빌린 것이 아니다⁠.

거리의 분노도 같은 저울에 올렸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6년 미국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폭동은 들어 주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라고 말했다⁠. 이듬해 스탠퍼드 대학 강연에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폭동은 사회를 부수고 스스로를 무너뜨린다고 못 박았다⁠. 10월 17일 프랑스 아홉 도시에서 상점이 털리고 리모주 시청이 불탔고⁠, 10월 중순 티라나에서는 총리실과 은행에 불이 붙었다⁠. 상점을 털고 불을 지르는 일은 범죄다⁠. 한국의 광장은 2016년 겨울부터 촛불을⁠, 2024년 겨울에는 응원봉을 들었다⁠. 유럽의 거리가 거칠어지는 것은 들어 줄 곳간이 비어 가기 때문이고⁠, 한국의 광장이 촛불로 남은 것은 투표함이 대답했기 때문이다⁠.

반론도 한 문단 받는다⁠. 유로존 경제는 3분기에 1년 전보다 1⁠.3%⁠, 유럽연합 전체는 1⁠.5% 자랐고⁠, 스페인은 2⁠.7%나 자랐다⁠. 1993년에 문을 연 단일시장에는 4억 5천만 명이 산다⁠. 대륙 하나가 이 정도 성장과 이만한 시장을 가지고 좌초한다는 말은 지나치다는 반론이다⁠. 대통령은 27일 해외 사례에서 시사점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어느 한 측면만 과도하게 확대해 견강부회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나를 다잡았다⁠. 좌초는 사실로 쓰지 않고 전망으로 쓴다⁠. 그래도 답은 남는다⁠. 1⁠.3% 성장으로는 국내총생산의 5% 국방비와 늙어 가는 연금과 학교와 집을 한꺼번에 받칠 수 없다⁠. 단일시장은 크지만⁠, 회원국 스물일곱이 같은 바깥 기둥 셋에 기대 왔다⁠. 스페인의 2⁠.7%도 사회주택 1⁠.5%를 채우지 못했다⁠.

박 차장의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제목⁠.⁠」 나는 보냈다⁠. 「⁠폭풍 뒤에 남는 것⁠.⁠」 「⁠숫자가 없잖아⁠.⁠」 「⁠본문에 숫자가 두 개씩 있어요⁠. 열다섯 회 내내요⁠.⁠」 답장은 「⁠통과⁠」 두 글자였다⁠. 다음 날짜들은 예정으로만 적었다⁠. 11월 2일 한국 10월 물가⁠, 3일 미국 중간선거⁠, 15일 프라하 레트나 광장 집회⁠, 20일 이탈리아 총파업⁠, 29일 스페인 조기 총선⁠, 30일 한국 유류세 인하 끝⁠, 12월 2일 한국 2027년 예산 국회 처리 기한⁠, 그리고 2027년 봄 프랑스 대선⁠.

민수가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내밀었다⁠. 경유 1⁠,840원대⁠, 2만 원어치⁠. 나는 영수증 여백에 펜으로 「⁠11월 1일⁠, 마포⁠」라고 쓰고⁠, 에손의 2⁠.37유로 영수증 뒤에 스테이플러로 박았다⁠. 철컥 소리가 났다⁠. 가격판의 숫자는 그대로였고⁠, 민수의 트럭 짐칸에는 내일 아침 실어 나를 상자들이 비닐을 덮고 쌓여 있었다⁠. 지갑 지퍼는 이번에도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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