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70자)
뿌리 — 다섯 겹, 두 대륙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2026년 10월 31일 토요일, 서울행 기내.
밤 10시, 베를린을 떠난 지 2시간이 지나자 기내 불이 꺼졌다. 나는 접이식 탁자에 수첩을 펴고 맨 위에 「다섯 겹」이라고 적었다. 박 차장은 마지막 기사 앞에 뿌리를 한 회로 묶어 달라고 했다. 숫자 둘부터 적었다. 10월 30일 유럽연합 통계청이 낸 유로존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보다 0.4%, 1년 전보다 1.3%였다. 한국은행 속보치로 한국은 같은 분기에 전 분기보다 1.0%, 1년 전보다 3.4% 자랐다. 옆자리 남자가 내 수첩을 흘끗 보더니 물었다. “기내에서 숙제하세요?” “유럽 숙제요. 한국 숙제는 내일 내려서 해요.”
뿌리의 맨 아래에는 성장이 있다. 10월 27일 이재명 대통령은 유럽 시위의 근본 원인을 저성장으로 짚으며, 성장이 오래 멈추면 청년 실업과 양극화가 깊어지고 재정 기반이 약해져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고 했다. 유로존 3분기를 나라별로 들여다보면 프랑스가 -0.1%, 이탈리아가 0.0%, 독일이 0.2%였다. 한국도 저성장을 지나왔다. 한국은행 집계로 한국 경제는 2025년 1.0% 자라 잠재성장률로 추정되는 1.8% 안팎에 못 미쳤다. 올해 IMF가 내다본 한국 성장률 3.3%는 반도체를 찾는 바깥 수요가 전쟁의 충격을 상쇄한다는 계산에서 나왔다. 유럽은 저성장이 길어지는 중이고, 한국은 1년 만에 저성장을 빠져나오는 중이다.
첫째 겹은 에너지다. 유럽연합은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2022년 45%에서 2025년 13%로 낮췄고, 2026년 1월 26일 러시아 가스 수입을 단계적으로 막는 규정을 채택했다. 장기 계약 액화가스는 2027년 1월 1일부터, 장기 계약 가스관 가스는 2027년 9월 30일까지 끊는다. 한국은 끊을 상대보다 지나갈 바닷길이 문제였다. 2025년 한국이 들여온 원유 가운데 중동산은 한국석유공사 집계로 69.1%, 정부와 산업연구원 집계로 70.7%였고, 산업연구원은 중동산 물량의 약 99%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고 분석했다. 해협이 막힌 뒤 5~7월 중동산 비중은 48.5%로 내려갔다. 유럽은 법으로 공급자를 바꾸고, 한국은 배를 다른 바다로 돌렸다.
같은 편지가 로마와 브뤼셀과 서울로 갔다. 3월 19일 사드 알카비 카타르에너지 최고경영자는 라스라판 공단 피해 때문에 한국과 중국, 이탈리아, 벨기에로 가는 액화가스 장기 계약에 최장 5년의 불가항력을 선언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생산 라인 14개 가운데 2개가 직접 맞아 수출 능력의 17%가 상했고, 복구에 3~5년이 걸린다는 전망이었다. 한국가스공사는 한국의 카타르 의존도가 20% 아래이고 미국과 호주로 공급처를 나눠 두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난해 카타르산 액화가스 690만 톤을 들여왔다. 유럽은 러시아 가스를 줄인 자리를 다른 공급자로 메워 왔고, 카타르는 새 공급자 가운데 하나였다. 메운 자리 하나가 3월에 다시 비었다.
옆자리 남자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사업 사무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베를린 학회에 들렀다가 서울 본사로 가는 길이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25년 6월 4일, 체코 대법원 격인 최고행정법원이 계약 금지 가처분을 뒤집은 날 두코바니에 APR-1000 원전 2기를 짓는 계약을 맺었다. 2025년 가격으로 4,070억 코루나, 약 186억 달러짜리 사업이다. 독일은 2023년 4월 마지막 원전 세 기를 껐고, 이웃 체코는 한국에 원전을 맡겼다. “독일 친구들이 원전 끈 얘기를 하면 저는 말을 아껴요. 고객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남자는 내 지갑을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 “그 영수증 묶음, 원자로 압력 용기보다 단단해 보이네요.”
둘째 겹은 빚과 규칙이다. 유럽연합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때부터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의 3% 안, 나랏빚을 60% 안에 두라는 규칙을 지켜 왔다. 프랑스는 적자 5.4%, 빚 119.3%에서 2027년 예산 540억 유로(약 80조 원)를 깎는다. 성장이 낮으니 세금이 덜 걷히고, 규칙에 맞추려 지출을 깎고, 깎으니 다시 성장이 낮아진다. 한국은 2027년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의 0.1%,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잡았다. 올해 국세는 추경 때 전망보다 63조 2천억 원 더 걷혔다. 유럽은 규칙이 지출을 묶고, 한국은 더 걷힌 세금이 지출을 받친다.
셋째 겹은 국방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2025년 6월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국방과 관련 지출을 국내총생산의 5%로 올리기로 했다. 핵심 국방비 3.5%에 기반 시설과 사이버 방어 같은 관련 지출 1.5%를 더한 숫자이고, 스페인만 예외를 받았다. 독일은 헌법의 부채 제동 장치를 고쳐 국방비를 빚 한도 밖으로 뺐다. 한국은 2027년 국방예산을 73조 3천억 원으로 8.2% 늘렸고, 정부 안에서는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의 3.5%를 목표로 잡는다. 같은 3.5%라도 유럽은 5%로 가는 중간 숫자이고, 한국은 휴전선을 둔 나라의 목표 숫자다. 유럽은 총을 사려고 학교 예산과 다투고, 한국은 곳간이 버텨 주는 동안 둘을 함께 늘린다.
넷째 겹은 집이다. 유럽연합 전체로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집값이 47% 올랐다. 마드리드에서는 여든일곱 살 세입자가 들것에 실려 나왔고, 리스본 광장의 텐트는 새벽에 걷혔다. 서울 아파트는 2025년 2월 첫째 주부터 90주 연속 올랐다. 뿌리는 정책보다 3년 앞에 있었다. 2022~2023년 착공이 바닥난 대가로 올해 서울 입주는 1만 7,698가구, 1년 전보다 45.3% 줄었다. 두 대륙 모두 집값 오름이 지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시작됐다. 다른 것은 받침의 두께다. 빈은 백 년 동안 지은 시영 주택에 시민 넷 중 하나를 살게 했고, 한국의 장기 공공임대는 집 열둘 가운데 하나쯤이다.
다섯째 겹은 세대다. 프랑스의 르코르뉘 총리는 2025년 10월 14일 연금 받는 나이를 올리는 개혁을 멈추겠다고 했고, 국민의회는 11월 255 대 146으로 정지를 통과시켰다. 연금 받는 나이는 2028년 1월까지 62세 9개월에 묶였다. 정지에 드는 돈은 2026년 4억 유로(약 6천억 원), 2027년 18억 유로(약 2조 7천억 원)다. 대신 2027년 예산은 연금을 물가만큼 올려 주던 규칙에 손을 대고, 크레테이 고등학교에는 교사 자리가 비어 있다. 한국은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2026년 1월 9%에서 9.5%로, 1998년 뒤 처음 올렸다. 해마다 0.5%포인트씩 올라 2033년 13%가 되고, 받는 몫인 소득대체율은 41.5%에서 43%로 올랐다. 젊은 사람이 더 내는 대신 받는 몫도 함께 올린 개혁이다. 다만 한국 청년 고용률은 29개월째 내려가고 있다.
다섯 겹을 바깥에서 조이는 여섯째 겹이 있다. 유럽은 러시아를 막으면서 희토류는 중국에, 안보는 미국에 기대 왔다. 중국은 7월 라인메탈을 비롯한 유럽 업체 14곳을 수출 통제 명단에 올렸고, 미국은 1월 그린란드를 두고 동맹에 관세를 들이밀었다. 한국도 같은 세 나라 사이에 있다. 미국과는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며 3,500억 달러를 약속했고, 2026년 1월 5일 베이징에서 중국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쪽에는 2024년 6월 러시아와 상호 군사 지원 조항을 담은 조약을 맺은 북한이 있다. 유럽은 세 나라 가운데 둘과 부딪치며 하나에 기대고, 한국은 셋 모두와 거래하며 넷째 나라를 지켜본다. 남은 위험은 301조 관세와 11월 3일로 잡힌 미국 중간선거다.
가장 깊은 겹은 제국이다. 박 차장이 기내 와이파이로 메시지를 보냈다. 「제국 얘기는 짧게. 독자는 콜로세움보다 전세를 본다.」 「전세까지 가려면 개선문부터 지나야 해요.」 로마 포로 로마노의 티투스 개선문에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에서 실어 온 일곱 갈래 촛대를 병사들이 메고 가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털었고, 경기장의 청동 말 네 마리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정면에 올라갔다. 1797년 나폴레옹이 말들을 다시 파리로 가져갔고, 말들은 1815년에야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한국은 빼앗긴 나라였다. 1913년 오대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실려 갔고, 1923년 관동대지진에 대부분 불탔다. 남은 47책은 2006년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오늘 상점을 터는 일이 범죄이듯 나라가 한 약탈도 범죄였다. 다른 점은 나라의 약탈은 개선문과 박물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라의 약탈은 식민지 경영으로 이어졌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콩고를 사유지처럼 다스리며 고무를 거뒀고,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에야 독립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에 들어가 1962년에야 손을 뗐고, 아프리카 열네 나라는 지금도 프랑스가 만든 CFA 프랑을 쓴다.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식민 전쟁을 치렀다.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고,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 가운데 일부가 포항제철을 짓는 밑천이 됐다. 벨기에의 궁전과 박물관은 남의 땅에서 거둔 것 위에 서 있고, 한국의 공장은 빼앗긴 35년 뒤에 들여온 돈과 제 손으로 지었다.
식민지가 떠난 자리는 바깥 기둥 셋이 메웠다. 1949년 북대서양조약으로 미국의 안보 우산이 펴졌고, 1970년 서독은 강관을 내주고 소련 가스를 받는 첫 거래를 맺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들어간 뒤 독일 자동차와 기계는 중국 시장에서 자랐다. 2026년 세 기둥이 한꺼번에 압박이 되었다. 미국은 관세를, 러시아는 반년 새 54건의 혼합 공격을, 중국은 희토류를 들었다. 한국도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안보를 미국에 기댔고, 기름과 가스는 바다 건너에서 사 왔다. 다른 것은 한국의 넉넉함이 빼앗은 땅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빌린 받침 위에 제 공장을 세웠고, 유럽은 빼앗은 받침이 빠진 자리를 빌린 받침으로 메웠다.
일곱 겹이 무너뜨리는 것은 유럽이 백 년 가까이 쌓은 것이다. 한 해 178유로인 프랑스 국립대 등록금, 노동자 98%를 덮는 프랑스 단체협약, 한국보다 한 해 501시간 덜 일하는 독일, 시민 넷 중 하나가 사는 빈의 시영 주택. 한국은 아직 그만큼 쌓지 못했다. 4년제 평균 등록금 727만 300원, 노조 조직률 13.0%, 한 해 1,833시간, 장기 공공임대 8.4%. 그래도 한국이 쌓는 돈은 제 곳간에서 나온다. 올해 더 걷힌 63조 2천억 원은 1986년 4메가 디램 공동개발부터 40년을 이어 온 반도체 기획이 낸 세금이다. 유럽의 장점은 여전히 장점이고, 받침이 빠졌을 뿐이다.
서울 시각 11월 1일 아침 7시, 착륙까지 7시간이 남았다. 옆자리 남자가 잠에서 깨어 내 수첩의 일곱 줄을 세어 보았다. “어느 겹이 제일 무거워요?” “맨 밑이요. 유럽은 내려놓지 못하고, 한국은 처음부터 지지 않은 겹이에요.” 박 차장의 메시지가 왔다. 「다음 회 해법. 마지막 회 결론. 마감은 서울 시각 오늘 밤 9시.」 해법 목록 맨 위에 벨기에를 적었다. 벨기에 임금은 물가가 오르면 자동으로 따라 오르고, 한국 최저임금은 해마다 표결로 정해 2027년 10,700원이 됐다. 벨기에 밑에 빈의 집과 마드리드의 퇴거 금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