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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서 온 영수증
비교체험 유럽/한국 · 윤서각
제목: 호르무즈에서 온 영수증 훅: 파리 남쪽 주유소의 경유 2.37유로와 서울 주유소의 1,842원, 같은 폭풍이 찍어 낸 영수증 두 장이 나란히 놓였다. 요약: 2026년 10월 29일, 파리 주재 프리랜서 기자 한정현은 파리 남쪽 에손의 주유소에서 경유 2.37유로 영수증을 받고, 서울의 동생이 보낸 경유 1,842원 영수증을 나란히 든다. 서울 데스크는 연재 이름을 「비교체험 유럽/한국」으로 정하고 유럽 한 문단마다 같은 주 한국 숫자를 붙이라고 한다. 같은 날 프랑스는 유럽 비축유 4,200만 배럴 방출을 알렸고, 한국은 봄부터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로 기름값을 붙잡아 왔다. --- 2026년 10월 29일 목요일, 파리 남쪽 에손.
주유기 손잡이가 덜컥 튀어 오르고 계기판이 20리터에서 멈췄다. 기둥에 세운 가격판에는 「GAZOLE 2,37 €」, 영수증 끝줄에는 47.40유로가 찍혀 나왔다. 나는 수첩 맨 앞장에 봄부터 적어 둔 환율, 5월 7일 유럽중앙은행 고시 1유로 1,707.4원을 보고 영수증 여백에 펜으로 「약 4,050원」이라고 썼다. 같은 주 서울 주유소의 경유는 리터당 1,840원 언저리였다. 리터 하나에 두 배 넘게 차이가 났다.
영수증을 지갑에 넣으려다 지갑이 닫히지 않는 것을 알았다. 9월 중순부터 모은 빵집 영수증과 기차표, 리스본 전차표가 지퍼를 밀어내고 있었다.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다. 서울의 동생 민수가 같은 시각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택배 일에 쓰는 1톤 트럭에 기름을 넣고 받은 영수증이었고, 서울 큰길가 주유소의 「경유 1,842원/L」 글자가 또렷했다. “누나, 서울은 이래. 거기는 기름에 금 탔어?” 민수는 서른한 살, 서울 마포에서 택배를 나른다. 서울에서 만 원어치를 넣으면 5.4리터가 들어가고, 이 주유소에서 같은 돈으로는 3리터를 채우지 못한다.
주유소 옆 대형 마트 입구에 사진 인화기가 있었다. 0.50유로를 넣고 민수의 사진을 영수증 크기로 뽑았더니, 인화기도 영수증을 한 장 내놓았다.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턱선까지 오는 검은 단발, 짙은 눈썹,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베이지 트렌치코트 안의 흰 셔츠, 남색 통 넓은 바지에 흰 운동화. 목에는 파란 줄 프레스 카드가 늘어져 있고, 어깨에는 낡은 갈색 캔버스 가방을 메고 있었다. 왼손에 수첩과 파리 영수증을, 오른손에 서울 영수증을 들고 얼굴 높이에 나란히 놓았다. 한쪽 눈썹이 저절로 올라갔다. 2,37 €와 1,842원, 한 폭풍이 두 대륙에 찍어 낸 숫자였다.
옆 주유기에서 작은 흰색 승합차가 기름을 넣고 있었다. 운전석 문에 방문 돌봄 업체 이름이 붙어 있었고, 예순쯤 된 여자가 15유로에서 손잡이를 놓았다. 마르틴이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하루에 노인 여섯 집을 돈다고 했다. “가득 넣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15유로씩 이틀마다요.” 15유로면 6리터를 조금 넘는다. 민수는 하루 일을 마치면 2만 원어치를 넣는다. 2만 원이면 서울에서는 11리터 가까이 들어간다. 두 사람 다 남의 집 문 앞까지 가는 일을 하고, 파리의 15유로는 원으로 2만 2천 원이 넘는다. 마르틴은 내 손의 서울 영수증을 보더니 한참 웃었다. “한국으로 출장 돌봄 가면 기름값이 빠지겠네요.”
서울 일간지 국제부 박성훈 차장의 전화는 인화기 앞에 서 있을 때 왔다. “연재 이름 정했다. 비교체험 유럽/한국. 빗금까지 제목이야.” 옛날 텔레비전 예능 이름 같다고 했더니 박 차장은 노린 거라고 했다. “조건은 하나, 유럽 한 문단마다 같은 주 한국 숫자 붙여. 숫자 두 개 붙여서 보내.” 나는 펜 글씨 「약 4,050원」을 불러 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자판 소리가 났다. “너 환율 몇 월 거 쓰냐? 금요일 유럽중앙은행 고시로 통일해. 1,490원대야.” 이 연재의 유로는 모두 10월 30일 유럽중앙은행 기준 환율 1유로 1,491.76원으로 바꾼다. 다시 계산하니 2.37유로는 약 3,540원, 20리터는 약 7만 700원이었다. 봄에서 가을 사이에 유로가 원화에 대해 13% 가까이 싸졌다. 같은 기간 한국 수출은 기록을 갈아 치웠고, 원·달러 환율은 10월 27일 1,323.7원에 마감했다고 머니투데이가 전했다. 펜 글씨는 지우지 않았다. 틀린 숫자도 기록이다.
비싼 기름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전쟁 전인 2월 20일 프랑스 경유 평균은 1.65유로(약 2,460원)였다고 가격 비교 업체 셀렉트라는 집계했다. 세금이 무거워 원래 비쌌던 몫이 그만큼이고, 2.37유로까지 40% 넘게 올라서 비싸진 몫이 얹혔다. 한국에서는 3월 13일 정부가 처음 정한 경유 최고가격이 1,713원이었고, 9월 소비자물가에서 경유는 1년 전보다 20.0% 올랐다. 두 숫자는 재는 기간이 달라 바로 견줄 수 없다. 그래도 프랑스는 원래 비쌌고, 전쟁 뒤에도 많이 올랐다.
폭풍은 2월 말에 시작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치자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막았고, 3월에 북해산 브렌트유가 배럴당 118달러를 찍었다. 카타르 라스라판의 액화 천연가스 설비가 공격을 받았고 유럽의 가스 저장고는 30%대까지 비었다. 한국이 들여오는 중동산 두바이유는 한때 배럴당 169.75달러까지 갔다. 한국은 원유 대부분이 이 해협을 지나 들어오고, 카타르는 한국 측에 최장 5년까지 가스를 대지 못할 수 있다고 알렸다. 해협 하나가 두 대륙의 주유기를 같은 날 같은 방향으로 돌렸다.
마트 계산대 위 라디오가 아침 뉴스를 되풀이했다. 유럽연합 에너지 장관 회의가 열리기 직전, 프랑스 경제장관 롤랑 레스퀴르가 유럽이 석 달 동안 비축유 4,200만 배럴을 풀고 절반을 경유로 채운다고 발표했다. 레스퀴르는 이를 단기 처방이라고 불렀고, 프랑스 몫이 풀리면 리터당 12~18센트(약 180~270원)가 내려갈 수 있으니 11월 1일부터 내린 값을 내걸라고 주유소들에 권했다. 한국 정부는 3월 국제에너지기구가 나눈 방출 할당 2,246만 배럴을 곧장 시장에 쏟는 대신 민간 재고와 맞교환부터 썼다. 두 정부의 발표문을 나란히 놓으면 말투부터 다르다. 파리는 “위기가 천천히, 그래도 확실하게 저절로 풀리기를 바란다”고 했고, 한국 정부는 상한 가격을 차수마다 원 단위까지 고시했다.
같은 위기 앞에서 두 정부는 반대로 움직였다. 프랑스 르코르뉘 정부는 기름값을 대체로 시장에 맡기고, 피해 업종 보조금을 유럽연합 규칙이 허락하는 끝까지 올렸다. 한국은 3월 13일, 1997년 석유 가격 자유화 뒤 처음으로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을 거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꺼냈다. 3월 27일에는 유류세 인하 폭을 휘발유 15%, 경유 25%로 넓혔고, 4월 27일부터 국민 70%에게 고유가 피해지원금 10만~60만 원을 나눠 주었다. 유류세 인하는 11월 30일까지 늘어났고, 세금이 1조 2천억 원 덜 걷힌다는 전망이 따라붙었다. 프랑스의 업종 보조금과 같은 자리에서, 한국 정부는 경유를 가장 많이 쓰는 화물차 몫도 손봤다. 5월 12일 경유 유가연동보조금 한도를 리터당 183원에서 280원으로 올려, 25톤 화물차는 한 달에 최대 23만 원을 더 받게 됐다.
값을 시장에 맡길지 사람이 정할지는 유럽이 먼저 다툰 물음이다. 영국 역사가 E. P. 톰슨은 1971년 논문 「18세기 잉글랜드 군중의 도덕 경제」에서 흉년의 곡물 폭동을 다시 읽었다. 군중은 값을 올린 상인의 곡물을 그냥 가져가는 대신, 공동체가 옳다고 여기는 가격에 팔게 하고 돈을 주인에게 남기곤 했다. 톰슨은 생존이 이윤보다 앞선다는 이 믿음을 도덕 경제라 불렀다. 2026년 서울에서는 군중 대신 정부가 법에 따라 고시로 값을 정한다. 석유 최고가격제 11차 상한은 휘발유 1,784원, 경유 1,773원이다. 창고 앞 군중과 정부 고시는 손이 다르다. 겹치는 것은 위기 때 값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다.
상한에는 대가가 있다. 세수가 줄고, 정유사는 지난해 물량의 90%를 국내에 내놓아야 한다. 독일도 가을에 유류세를 한시로 내렸으니 유럽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손이 닿은 깊이가 달랐다. 주유소 계산대의 알제리 출신 직원 하킴은 내 영수증 두 장을 번갈아 보더니 웃었다. “서울 가격판 사진 저한테도 보내 주세요. 사장님 책상에 붙여 놓게요. 여기는 9월 중순부터 2.30 밑으로 내려간 날이 없어요.” 라디오의 12~18센트 이야기를 꺼내자 하킴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잘 풀리면 2.20이네요. 그래도 서울보다 비싸죠?”
하킴은 계산대 옆 게시판을 가리켰다. 「토요일 31일, 3차」라고 손으로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프랑스의 기름값 시위는 9월 15일 시작해 10월 24일에 2차를 치렀고, 이번 토요일이 3차다. “시위 날은 손님이 반으로 줄어요. 기름값에 화난 사람들이 기름 넣으러는 안 오고, 시위하러 가는 차에만 넣고 가요.” 에손 주유소 가격판이 9월 중순부터 2.30유로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 동안, 한국의 기름값은 10월 넷째 주까지 24주 연속 내렸다.
두 정부의 반대 걸음은 기름값에서 끝나지 않는다. 르코르뉘 총리는 9월에 2027년 예산에서 540억 유로(약 80조 원)를 깎겠다고 했다. 이재명 정부는 같은 달 2027년 예산을 93조 원 늘린 820조 9천억 원으로 짰다. 한 나라는 허리띠를 조이고 한 나라는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 든 돈이 어디서 왔는지는 다음 회들에서 하나씩 따라간다. 나는 수첩에 「깎는 나라, 늘리는 나라」라고 적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지갑을 연 돈의 첫 줄에는 반도체가 있다. 한국 수출은 9월 한 달에만 1,100억 달러를 넘겼고, 반도체 수출만 500억 달러를 넘었다. 하루 전인 10월 28일 국가기록원은 1986년 정부가 삼성반도체통신·금성반도체·현대전자를 한 연구 사업에 묶어 개발한 4메가 디램의 설계도 15건 67매를 복원했다고 알렸다. 연구비 879억 원 가운데 200억 원은 석유안정기금에서 나왔다. 기름값을 다스리려 모은 돈이 메모리 칩 연구에 들어간 해다. 유럽연합은 2023년 반도체법을 만들고 2030년까지 세계 생산의 20%를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유럽 감사원은 2025년 4월 보고서에서 집행위원회 전망대로라면 2030년에 11.7%에 그친다고 적었다.
인화한 사진을 다시 찍어 보냈더니 민수의 답이 바로 왔다. “누나 지금 내 영수증 액자 했어? 근데 우리나라 이제 부자래. 뉴스에 4만 달러.” 국제통화기금 10월 전망에서 한국의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은 4만 3,512달러로 처음 4만 달러를 넘었다. 4월 전망은 3만 7,412달러였고, 이번 숫자로 일본(3만 5,400달러)을 넘어 대만(4만 3,950달러)에 바짝 붙었다. 반년 사이에 6천 달러가 늘었다. 달러로 잰 숫자라 환율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인다. 봄에 1,707원이던 1유로가 가을에 1,491원이 된 것처럼, 원화는 유로에 견주어 단단해졌다. 나는 민수에게 답했다. “부자 나라 사람이 기름 넣는 사진 잘 받았다.”
국제통화기금은 10월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세계 성장률을 3.1%, 선진국을 2.1%로 내다보았다. 해협이 2027년 3월에야 다시 열린다는 가정 위에 세운 숫자다. 같은 보고서가 한국을 3.3%로 올려 잡았다. 7월에는 2.6%였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을 인공지능 하드웨어의 핵심 교역국이라고 불렀고, 한국 전망치가 세계 평균을 넘은 것은 2020년을 빼면 2010년 뒤 처음이다. 유로존의 9월 물가는 3.8%로 2023년 9월 뒤 가장 높았고, 한국은 2.9%였다.
유럽이 먼저 깔아 둔 것도 있다. 기후 연구소 엠버의 집계로 유럽연합은 2025년 전기의 48%를 재생에너지로 만들었다.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2024년에 10.69%였다. 해와 바람으로 돌리는 전기는 호르무즈를 지나지 않는다. 유럽은 전기에서 앞서 있었고, 주유기 앞에서는 한국이 앞서 나갔다. 한 대륙이 모든 줄에서 앞서는 일은 없다.
차에 돌아와 앉자 박 차장이 다시 전화했다. “순서는 날짜 순서 말고 저울에 올릴 순서로 간다. 학교부터 예산, 등록금, 국방, 집, 청년. 첫 회는 오늘 주유소, 두 번째 회는 9월 17일 크레테이 정문부터.” 나는 수첩 첫 장을 폈다. 9월 17일 자 크레테이 빵집 영수증이 거기 있었다. 프랑스 교사들이 파업한 날이고, 한국에서는 다음 날 정부가 유류세 인하 연장을 발표했다. “영수증 얘기는 몇 줄까지 돼요?” “독자가 지갑 열어 볼 만큼만.”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석유공사 가격 정보망 오피넷이 10월 넷째 주 전국 평균을 냈다. 휘발유 1,855.7원, 경유 1,842.1원. 민수가 들른 주유소는 전국 평균과 0.1원 차이였다. 같은 아침 유럽연합 통계청은 프랑스의 3분기 성장률을 -0.1%로 내놓았다. 한국은행이 같은 주에 먼저 낸 한국의 3분기 성장률은 1.0%였다. 나는 파리 주유소와 서울 주유소와 마트 인화기의 영수증을 수첩 한 장에 스테이플러로 박았다. 지갑이 조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