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0자)

아홉 번째 층

진짜 던전 방탈출 카페 · 류시안

팔 층에서 아홉 번째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열두 칸이었다⁠. 경탁이 세지 않아서 도연이 셌다⁠. 하담은 도연과 경탁 사이에서 양팔을 붙잡힌 채 한 칸씩 내려갔다⁠. 열흘 동안 앉아만 있던 다리가 계단마다 꺾였다⁠. 일곱 번째 칸에서 하담이 멈췄다⁠. 숨을 고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담은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다섯 칸을 더 내려갔다⁠.

아홉 번째 층은 작았다⁠. 열쇠공의 「⁠할머니의 다락⁠」만 한 방이었다⁠. 천장에는 푸른 돌이 없었다⁠. 대신 맞은편 벽에 가는 물길 하나가 비스듬히 뚫려 있었고⁠, 물길을 따라 물이 위로 흘러 올라가며 희미하게 빛났다⁠. 물길 옆에 계단 입구가 둘 있었다⁠. 하나는 도연 일행이 내려온 계단이었고⁠, 하나는 맞은편 벽에서 위로 꺾여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을지로에서 내려온 계단이었다⁠. 방 안쪽 바닥에는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이 열린 채였다⁠. 열린 문 아래로 계단이 이어졌다⁠.

방 한구석에 은박 담요가 덮여 있었다⁠.

담요는 반듯했다⁠. 네 귀퉁이가 돌멩이로 눌려 있었고⁠, 담요 아래의 모양은 사람 하나가 옆으로 누운 크기였다⁠. 담요 머리맡에 등산 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가방 어깨끈에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손잡이 창립 회원 · 채하운⁠」 가방 옆에 손전등 하나가 누워 있었다⁠. 몸통의 칠이 다 벗겨져 은색 쇠가 드러나 있었고⁠, 스위치 부분이 손가락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하담이 담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었다가 담요 귀퉁이의 돌멩이 앞에서 멈췄다⁠. 돌멩이를 치우지 않았다⁠. 담요를 들추지 않았다⁠. 손바닥을 담요 위에 얹었다⁠. 판을 열흘 동안 누르던 손이었다⁠. 손바닥의 붉은 무늬가 은박 위에서 흐렸다⁠.

도연은 계단 끝에 서 있었다⁠. 더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방을 보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혼자 튀는지⁠. 그렇게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담요는 하운이 혼자 덮은 것이 아니었다⁠. 담요를 누른 돌멩이 넷의 크기가 고르지 않았다⁠. 네 귀퉁이를 다 누르려면 누운 사람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하운은 누운 채 담요를 끌어 덮었고⁠, 네 귀퉁이의 돌멩이는 나중에 누가 놓았다⁠. 다른 누군가 여기 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돌멩이마다 이끼가 묻어 있었다⁠. 쥐였다⁠. 이끼쥐가 담요 귀퉁이로 돌멩이를 굴려 다 놓았다⁠.

물길 옆 벽에 하얀 자국이 있었다⁠. 분필이었다⁠. 화살표가 셋 있었다⁠. 하나는 을지로 계단을⁠, 하나는 열린 문 아래의 계단을⁠, 하나는 위로 흐르는 물길을 가리켰다⁠. 물길을 가리키는 화살표 밑에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 안에 문손잡이 그림⁠. 패치의 그림이었다⁠.

“⁠패치요⁠.⁠” 도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사 층 물에 떠 있던 거요⁠. 하운 씨가 여기서 물에 띄웠어요⁠. 물이 위로 흐르니까요⁠. 누가 보라고요⁠.⁠”

하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담요 위에 얹은 채 등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

경탁은 계단 맨 아래 칸에 서 있었다⁠. 내려오지 못했다⁠. 칸을 세지도 않았다⁠. 손전등을 쥔 손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손전등 빛이 바닥의 한 점만 비췄다⁠.

하담이 일어났다⁠. 은박 담요에서 손을 떼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비틀렸다⁠. 도연이 잡으려 했지만 하담이 손을 들어 막았다⁠. 하담은 경탁 앞에서 멈췄다⁠. 키가 경탁의 어깨에 닿았다⁠.

“⁠보세요⁠.⁠”

경탁이 담요를 보았다⁠.

“⁠더 가까이서요⁠.⁠”

경탁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담요 앞까지 걸어갔다⁠. 담요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손전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빛이 벽의 분필 화살표를 비췄다⁠.

“⁠왜 닫았어요⁠?⁠”

“⁠위에서 사람 둘이 다쳤습니다⁠. 한 분은 지금도 못 걸으십니다⁠.⁠” 경탁이 담요를 보며 말했다⁠. 하담을 보지 않았다⁠. 담요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일흔두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안 올라왔습니다⁠. 저는 소리가 안 올라오면 사람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위에서 배운 대로 했습니다⁠.⁠” 경탁이 바닥의 손전등을 보았다⁠. 칠이 다 벗겨진 하운의 손전등이었다⁠. “⁠소리가 여기서 위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홉 층입니다⁠. 저는 아홉 층을 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빠가 여기서 혼자 얼마나 있었는지 알아요⁠?⁠”

경탁은 하운의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스위치가 엄지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몇 번을 켜고 껐는지 셀 수 없는 스위치였다⁠.

“⁠모릅니다⁠.⁠”

하담의 주먹이 경탁의 가슴을 쳤다⁠. 힘이 없었다⁠. 한 번 더 쳤다⁠. 세 번째에 주먹이 펴졌다⁠. 하담의 손이 경탁의 회색 티셔츠를 움켜쥐었다⁠. 배지가 달려 있던 자리였다⁠. 늘어난 천이 하담의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

“⁠모른다고 하지 마세요⁠. 이제는요⁠.⁠”

“⁠네⁠.⁠”

“⁠보셨죠⁠.⁠”

“⁠봤습니다⁠.⁠”

“⁠기억하세요⁠. 칠월마다⁠. 저는 칠월마다 전화했어요⁠. 이제 조사관님이 칠월마다 기억하세요⁠.⁠”

“⁠네⁠.⁠”

하담이 손을 놓았다⁠. 티셔츠에 구김이 남았다⁠. 하담은 담요 옆에 다시 주저앉았다⁠. 경탁은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도연은 계단 끝에서 둘을 보았다⁠.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가면 둘 사이의 무언가가 흩어질 것 같아서였다⁠.

한참 뒤에 하담이 말했다⁠.

“⁠같이 올려 주세요⁠. 오빠요⁠. 여기 두고 싶지 않아요⁠.⁠”

경탁이 담요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업겠습니다⁠.⁠”

“⁠무거워요⁠.⁠”

“⁠압니다⁠.⁠” 경탁이 가방을 벗었다⁠. “⁠다섯 해 동안 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손으로 듭니다⁠.⁠”

*

위층 계단에서 유선 전화 상자가 울렸다⁠. 팔 층에 두고 온 상자였다⁠. 끊긴 줄의 상자가 울릴 리 없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상자가 다시 울렸다⁠. 길고 짧게⁠, 길고 짧게⁠.

경탁이 일어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도연이 따라갔다⁠. 팔 층 문 앞의 상자에서 수화기를 들자 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숨찬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러분⁠… 아니⁠, 사장님⁠? 조사관님⁠? 들려요⁠?⁠」

“⁠회장님⁠?⁠”

「⁠사장님⁠! 들려요⁠? 대박⁠. 재이 말대로 했어요⁠.⁠」 세찬의 목소리가 떨렸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몰랐다⁠. 「⁠연남동 계단 내려오니까 육 층 호수 옆으로 나와요⁠. 지도대로예요⁠. 호수 옆에 조사관님 줄이 있더라고요⁠. 열쇠공에서 내려오던 줄요⁠. 위가 끊겼잖아요⁠. 그래서 제 줄이랑 이었어요⁠. 편의점 전선 테이프로요⁠. 재이가 위에서 잡고 있고요⁠.⁠」

“⁠회장님⁠, 편의점 테이프로 관리국 전선을 이으셨습니까⁠?⁠” 경탁이 물었다⁠.

「⁠네⁠. 재이 어머님 가게 거요⁠. 사천 원이요⁠. 제가 냈어요⁠. 빚에서⁠.⁠」

도연은 수화기를 쥐고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줄 몰랐다⁠. 웃다가 목이 막혔다⁠.

“⁠회장님⁠, 하운 씨 찾았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잡음만 들렸다⁠. 한참 뒤에 세찬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나왔다⁠.

「⁠어떻게⁠, 있어요⁠?⁠」

“⁠담요 덮고 있어요⁠. 반듯하게요⁠.⁠”

세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부드럽고 짧았다⁠.

「⁠금 사장⁠, 차장이야⁠. 탁세찬 씨 줄로 듣고 있어⁠. 연남동은 내일 정오야⁠. 장비는 새벽에 들어와⁠. 여섯 층까지 올라오는 데 몇 시간이야⁠?⁠」

“⁠올라갈 때는 업고 가야 해요⁠. 한 사람을요⁠.⁠”

수화기 너머가 다시 조용했다⁠. 차장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업고 와⁠. 정오는 정오야⁠. 그 안에만 와⁠.⁠」

차장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다른 목소리가 들어왔다⁠. 단조롭고 짧았다⁠.

「⁠사장님⁠, 재이예요⁠. 줄 잡고 있어요⁠. 손에 감아서요⁠.⁠」 잡음 사이로 재이가 숨을 쉬었다⁠. 「⁠엄마가 김밥 싸 놨대요⁠. 참치마요요⁠. 이끼쥐 못 먹게 꼭 들고 있을게요⁠.⁠」

“⁠재이 씨⁠, 김밥 비닐째 들고 있어요⁠. 쥐가 비닐째 가져가요⁠.⁠”

「⁠알아요⁠. 생방송 봤어요⁠.⁠」

세찬의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코가 막힌 목소리였다⁠. 「⁠사장님⁠, 나 다시 올라갈게요⁠. 맨홀 지킬게요⁠. 차장님이 새벽에 장비 들고 오면⁠, 내가 맨홀 턱에 앉아 있을게요⁠. 이번에는 위에서 기다릴게요⁠. 형 올라올 때까지⁠.⁠」

“⁠회장님⁠, 카메라 켜 두세요⁠.⁠”

「⁠켜 둘게요⁠. 이번엔 돈 안 받고요⁠.⁠」

*

도연은 아홉 번째 층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내려오는 경탁이 오랜만에 칸을 소리 내어 셌다⁠. 열하나⁠, 열둘⁠. 숫자가 작은 방 안에서 울렸다⁠. 경탁은 하운의 가방을 열어 안의 것을 하나씩 꺼내 하담에게 건넸다⁠. 바닥이 갈라진 물병⁠, 다 쓴 건전지 열두 개⁠, 분필 몇 토막⁠, 지갑⁠. 하담은 하나씩 받아 제 가방에 넣었다⁠. 지갑은 열어 보지 않았다⁠.

가방 맨 밑에서 경탁이 빈 봉지 하나를 꺼냈다⁠. 빨간 곰젤리 봉지였다⁠. 안에 노란 곰 셋이 굳어 있었다⁠. 빨간 곰과 초록 곰은 하나도 없었다⁠.

하담이 봉지를 받아 들고 한참 보았다⁠.

“⁠오빠는 빨간 것만 먹었어요⁠. 저는 노란 것만 먹고요⁠. 한 봉지 사면 반씩 나눴어요⁠. 초록은 둘 다 안 먹어서 엄마 줬어요⁠.⁠” 하담이 봉지를 흔들었다⁠. 노란 곰 셋이 봉지 안에서 굳은 채 부딪쳤다⁠. “⁠제 거 남겨 뒀네요⁠. 다섯 해 동안⁠.⁠”

“⁠하담 씨가 처음 방탈출 한 것도⁠.⁠” 도연이 말했다⁠.

“⁠오빠가 데려갔어요⁠. 열여섯 살 때요⁠. 저는 첫 방에서 울었어요⁠. 무서워서요⁠. 오빠가 그랬어요⁠. 무서우면 문을 보지 말고 자물쇠를 보라고⁠. 자물쇠는 무섭지 않다고⁠.⁠” 하담이 봉지를 가방 맨 위에 넣었다⁠. “⁠그래서 랭킹 1위 됐어요⁠. 자물쇠만 봐서요⁠.⁠”

경탁은 담요 앞에서 밧줄을 풀었다⁠. 은박 담요를 들추지 않고⁠, 담요째 감쌀 수 있게 밧줄을 고르게 폈다⁠. 손이 느렸다⁠. 매듭 하나를 짓고 풀고 다시 지었다⁠. 관리국에서 배운 매듭이 아니었다⁠. 다섯 해 전 을지로 계단 앞에서 일흔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손이⁠, 처음으로 아래에서 무언가를 들려고 하고 있었다⁠.

도연은 벽 앞으로 갔다⁠. 분필 화살표 셋 말고도 무언가 더 있었다⁠. 물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벽 아래쪽이었다⁠. 도연은 쪼그려 앉아 손전등을 비췄다⁠.

소용돌이였다⁠. 분필로 그린 소용돌이가 손바닥만 하게 벽에 그려져 있었다⁠. 선이 여러 번 덧그어져 굵었다⁠. 같은 소용돌이를 몇 번이고 다시 그린 자국이었다⁠. 소용돌이 아래에 짧은 막대가 이어져 있었고⁠, 막대 끝에 들쭉날쭉한 이빨이 넷 그려져 있었다⁠. 열쇠였다⁠. 소용돌이는 열쇠 머리였다⁠.

열쇠 그림 옆에 화살표가 하나 더 있었다⁠. 열린 문 아래⁠, 바닥 층으로 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도연은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가게 열쇠 여덟 개를 손가락으로 밀어내고 놋쇠 열쇠 하나를 집었다⁠. 「⁠미로상회 3⁠」 열쇠 머리를 분필 그림 옆에 갖다 댔다⁠. 소용돌이가 감긴 방향⁠, 감긴 횟수⁠, 가운데 점의 자리⁠. 이빨 넷의 높낮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운은 바닥 층의 열쇠 구멍까지 갔다⁠. 열쇠 구멍을 보고 돌아와 벽에 열쇠를 그렸다⁠. 몇 번이고 다시 그렸다⁠. 열쇠는 위에 있었다⁠. 미로상회의 문에 철사로 묶인 채⁠, 관리국 창고에⁠, 을지로 공구 상가에⁠, 열쇠공 사장의 허리춤에⁠.

“⁠사장님⁠?⁠”

하담이 뒤에서 불렀다⁠. 도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놋쇠 열쇠가 손바닥 위에서 푸른 물빛을 받아 반짝였다⁠. 누런 꼬리표가 물길의 바람에 흔들렸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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