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49자)
은설이라는 이름
폐위된 황후의 두 번째 간택 · 백해원
영희 6년 정월, 황후의 산실에는 침향과 피 냄새가 함께 떠 있었다. 산파가 아이를 받아 들어 올렸을 때 서련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는데, 그래도 아이 울음소리만은 또렷하게 들었다. 가늘고 길게 우는 소리였다. 문밖에 서 있던 상궁이 공주마마라고 외쳤다. 그 외침이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가, 한참 뒤에 황제의 발소리가 그 복도를 거슬러 왔다.
연휘는 산실 문지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안아 보았다. 아이는 그의 품에서 울음을 그쳤다. 그는 아이 얼굴을 오래 내려다보았는데, 서련은 그 얼굴에서 기쁨보다 셈을 먼저 읽었다. 황자가 아니었다. 윤가의 피를 받은 황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셈인지, 아쉽다는 셈인지 그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이름은 황후가 지으시오.”
연휘가 아이를 산파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서련은 그날 밤 눈이 내리는 것을 들창 너머로 보며 이름을 지었다. 은설. 은빛 눈.
영희 13년 가을, 은설이 여덟 살이던 해에 사간원 정언 문하온이 편전에서 상소를 읽었다. 황후 윤씨가 서북 번왕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상소였고, 증거로 황후의 친필 서신 세 통이 올라왔다. 서련은 그 서신을 보았다. 자기 글씨였다. 획 하나, 먹 번진 자리 하나까지 자기 글씨였다. 그녀는 그런 서신을 쓴 적이 없었다.
냉궁으로 옮겨지고 열흘째 밤, 문밖에서 누가 무릎을 꿇는 소리가 났다. 문풍지 너머로 등불 하나가 떨렸다. 사간원 정언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편전에서 맑게 울리던 목소리가 그 밤에는 쉬어 있었다.
“그 서신은 신이 썼습니다, 마마. 마마의 글씨로.”
서련은 문 안쪽에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밖의 목소리가 한참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어머니 무덤에 비석을 세울 값이었습니다. 신은 그 값을 받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비석에 새긴 글씨도 신이 썼습니다. 그 글씨를 볼 때마다 마마의 글씨가 보입니다.”
“은설이는.”
“공주마마는 진 귀비 처소로 옮겨지셨습니다.”
문밖에서 이마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났다. 세 번. 그리고 등불이 멀어졌다. 서련은 그 뒤로 그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했다. 이듬해 겨울에 사약이 왔다.
*
정서왕 경저의 매는 게을렀다.
세자 소경이 가죽 장갑을 낀 팔에 매를 올리고 마당 한가운데 섰다. 매는 회색 깃에 눈매가 사나웠는데, 세자가 팔을 들어 올리자 날아오르는 대신 장갑 위에서 몸을 낮추고 세자의 소매에 꽂힌 고깃점만 노려보았다.
“날아라. 서북이다. 아버님께 가라.”
매는 고깃점을 쪼았다.
“날고 나서 먹어라.”
매는 고깃점을 또 쪼았다. 마당 끝에서 지켜보던 문하온이 나직이 말했다.
“저하, 저 매는 저하를 닮았습니다. 먹을 때는 부지런하고 일할 때는 게으릅니다.”
“서생, 그대 입은 원래 그렇게 생겼나?”
“날 때부터 이렇게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낳고 처음 하신 말씀이 저놈 입 좀 보라는 거였답니다.”
세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바람에 팔이 흔들렸다. 매가 놀라서 날개를 펼쳤다가 도로 접었다. 서련은 마루에 앉아 그 꼴을 지켜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웃음이 가라앉자 세자가 매를 횃대에 올려놓고 마루로 왔다. 술병 대신 찻잔을 들었다. 한량의 얼굴이 아니었다.
“탄핵은 뒤집었더군. 등문고 이야기는 도성 개들도 알더라. 약속대로 부왕께 매를 띄우겠소. 다만 혼서를 보내기 전에 정해 둘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혼서를 받는 순간 아가씨는 서북의 사람이 되오. 혼례를 올리면 나와 함께 서북으로 가야 하오. 나는 볼모라 아직 못 가지만, 혼인이 서면 부왕께서 나를 돌려 달라고 청할 명분이 생기오. 그러면 아가씨 아버님은 도성에 남소. 황제 눈앞에.”
서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생각해 둔 일이었다. 생각해 둔 일이어도 남의 입으로 들으니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윤가의 쌀길. 서북이 아가씨를 받는 것은 그 길 때문이오. 혼서와 함께 쌀길도 서북으로 오는 거요.”
“쌀길은 혼수가 아닙니다, 저하.”
세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쌀길을 서북에 통째로 드리면 폐하께서는 그날로 서북을 칠 명분을 얻으십니다. 호조의 길을 번왕이 가로챘다고요. 쌀길은 지금처럼 호조의 길로 둡니다. 다만 마포에서 서북으로 가는 배는 늦지 않게 하지요. 한 석도 빠지지 않게. 그게 서북이 받을 혼수입니다.”
“그럼 아가씨는 무엇을 받소?”
“저하께서 살아서 서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요.”
세자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횃대 위의 매를 보았다. 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는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오?”
“도성에 오래 계시면요.”
세자가 웃었다. 이번에는 헤프지 않은 웃음이었다.
“좋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소. 부왕께서는 내 글씨를 못 읽으시오. 너무 형편없어서. 지난번 서신은 아예 답이 안 왔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답도 없었지.”
하온이 한 걸음 나섰다.
“제가 쓰겠습니다. 저하의 글씨로. 다만 조금 낫게.”
“조금만 낫게 하시오. 너무 나으면 부왕께서 누가 대신 썼는지 아시오.”
하온은 마루 끝에 종이를 펴고 세자가 전에 쓴 서신 한 장을 옆에 놓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획이 비틀리고 삐침이 엉뚱한 데로 뻗은 글씨였다. 하온의 붓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련은 그 손을 지켜보았다. 붓끝이 세자의 비틀린 획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몇 군데에서만 아주 조금 바로 섰다. 다 쓴 서신을 받아 든 세자가 입을 벌렸다.
“이건 내 글씨요. 내가 기분 좋은 날 쓴 내 글씨.”
“저하께서 기분 좋은 날이 드물었나 봅니다.”
서신은 대롱에 말려 매의 다리에 묶였다. 세자가 고깃점을 하나 더 매 부리에 물려 주자, 매는 그제야 날개를 펼치고 경저 담을 넘어 서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담 밖에서 금군 하나가 고개를 들어 그 매를 오래 쳐다보았다.
*
그날 밤 하온은 별당 마루 끝에 앉아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 홍매가 차를 두 번 내왔다가 두 번 도로 가져갔다. 서련은 들창 안쪽에서 그를 보다가 결국 마루로 나왔다. 봄밤인데도 바람이 찼다. 마당의 매화는 다 지고 잎이 돋아 있었다.
“가지 않으십니까?”
“아가씨, 오늘 제 손을 보셨지요. 세자 저하 글씨를 쓸 때.”
“보았습니다.”
“아가씨는 처음부터 제 손을 보셨습니다. 남문 밖에서도, 매화정에서도. 제 얼굴보다 손을 먼저 보셨어요. 그리고 아가씨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일처럼 말씀하십니다. 폐하의 침전 향이며 열 해 뒤의 일이며.”
하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등잔 불빛이 그의 얼굴에 흔들렸다. 독설을 고를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번에는 대답해 주십시오. 제가 아가씨를 죽였습니까?”
서련은 마루 기둥에 손을 짚었다. 나무가 차고 거칠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고를 수 있었다. 궁에서 열한 해를 살면서 거짓말을 고르는 법은 얼마든지 익혔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고르지 않기로 했다. 남문 밖에서 비녀를 맡길 때부터 정해 둔 일이었다.
“예.”
하온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열 해 뒤에 서생은 사간원 정언이 됩니다. 그리고 제 글씨로 서북 번왕에게 보내는 서신 세 통을 씁니다. 저는 그런 서신을 쓴 적이 없는데, 그 서신은 제가 봐도 제 것이었습니다. 서생이 그 서신을 들고 편전에서 저를 탄핵하는 상소를 읽습니다. 이듬해 겨울 저는 사약을 받습니다.”
하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가 가라앉았다.
“어머니 비석 값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냉궁 문밖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 찧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서련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냉궁 문틈으로 들어오던 목소리였다.
“그 손이 이번에 제 편이면, 아무도 제 글씨로 거짓 서신을 만들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제 글씨를 가장 잘 흉내 낼 사람이 제 곁에 있으니까요.”
“그것뿐입니까?”
“그리고 문밖에서 이마를 찧던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는 이마를 찧을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온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오래 그러고 있었다. 마당에서 개가 두 번 짖고 그쳤다. 그가 손을 내렸을 때 눈가가 붉었지만 젖어 있지는 않았다.
“그때 아가씨가 제게 물으신 게 있었습니까? 문밖에서.”
“한 가지 물었습니다.”
“무엇을요?”
서련은 마루에 앉았다. 하온과 한 자쯤 떨어진 자리였다. 마루 널빤지가 차가웠다.
“딸이 있었습니다. 은설이라고. 은빛 눈이라는 뜻으로 제가 지었습니다. 눈 오는 밤에 태어났어요. 울음소리가 가늘고 길었습니다. 문밖에서 저는 그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서생은 진 귀비 처소로 옮겨졌다고 답했습니다. 그 뒤로 그 아이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 생에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고 나자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졌다. 사약을 마시던 밤과 같은 자리였다. 서련은 마루 널빤지를 손바닥으로 짚고 숨을 세 번 쉬었다.
“제가 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아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걸 알고 단자를 찢었습니다.”
하온이 그녀를 보았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위로하는 말은 그의 입에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루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썼다. 먹도 붓도 없어서 아무 자국도 남지 않았다. 서련은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었다. 은, 설. 그녀의 글씨였다.
“그 아이 이름은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아가씨 혼자 기억하지 않게.”
서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
매는 닷새 뒤 새벽에 돌아왔다. 세자의 하인이 경저에서 윤가 뒷문까지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전갈을 전했다. 매 다리에 매인 대롱 안에 정서왕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부왕의 글씨는 아들 글씨보다 더 형편없었지만, 하온이 읽으니 뜻은 분명했다.
“혼서가 서북을 떠났답니다. 정서왕께서 직접 쓰셨고, 사자가 말을 바꿔 타며 밤낮으로 달린다 합니다. 아흐레면 도성에 닿는다고요.”
서련은 손가락으로 날을 셈했다. 재간택까지 남은 날은 열흘이었다. 교지에 옥새가 찍히는 아침은 열하루째였다.
“하루 남는군요.”
하온이 말했다. 서련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가 남는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매를 보셨습니다. 금군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흐레 동안 폐하께서는 그 혼서가 도성 문을 넘지 못하게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