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03자)
규수들의 봄
폐위된 황후의 두 번째 간택 · 백해원
단자는 기한 마지막 날 아침에 예부로 갔다. 윤정겸은 외조부 항렬을 짐작으로 써 넣고, 청지기를 시켜 붉은 테 종이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보냈다. 서련은 그 보자기가 대문을 나가는 것을 별당 들창으로 지켜보았다.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있는 날은 이미 지났다.
점심 무렵 청지기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예부에서는 단자를 받기는 받았는데, 받은 자리에서 옆으로 밀어 두었다고 했다. 죄를 기다리는 집의 단자는 죄가 정해질 때까지 보류한다는 것이 예부의 법이었다. 윤정겸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헛웃음을 웃었다.
“폐하께서 단자를 원하시면서 단자를 못 받게 하셨구나.”
“무릎을 꿇으시라는 겁니다, 아버지. 무릎을 꿇으시면 탄핵을 거두시고, 그다음에 단자를 받으십니다.”
“그럼 꿇으면 되지 않느냐?”
“꿇으시면 다시는 못 일어나십니다.”
윤정겸은 대답하지 않고 궁 쪽을 향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서련은 아버지의 굽은 등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
좌상 진관오 댁의 봄 연회는 해마다 삼월 보름에 열렸다. 올해는 간택령이 내린 해라 연회의 주인이 좌상이 아니라 그 딸 진채이였다. 채이는 간택 단자를 낸 도성 규수들에게 빠짐없이 청첩을 돌렸다. 꽃을 지져 먹는 화전놀이에 함께하자는 청이었지만, 받은 집들은 다 그 속뜻을 알았다. 채이는 함께 궁에 들어갈 사람들의 얼굴을 미리 보고 싶어 했다.
윤가에도 청첩이 왔다. 아버지가 탄핵을 받기 이틀 전에 대문을 넘은 청첩이었다.
“아가씨, 정말 가세요? 대감마님을 탄핵한 집이에요.”
홍매가 서련의 머리를 빗으며 물었다. 빗이 지날 때마다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그러니까 간다. 그 집이 나를 못 오게 하려면 청첩을 거두어야 하는데, 거두면 탄핵이 저 집 짓인 줄 다 알게 된다.”
“그럼 저 집에서 아가씨를 반기겠네요?”
“아주 반길 거다. 이를 갈면서.”
진가의 후원은 넓었다. 연못 둘레에 진달래가 붉게 번져 있었고, 연못가 넓은 바위 위에 돌 화로가 여러 개 놓여 찹쌀 반죽에 진달래 꽃잎을 붙여 지지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규수 스무 명쯤이 바위 둘레에 앉아 있었는데, 서련이 들어서자 그 스무 개의 입이 한꺼번에 닫혔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다시 열렸다.
“윤 판서 댁이래.”
“탄핵받았다던데.”
“그런데도 왔대.”
서련은 그 소리를 들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오른쪽에 오 판서 댁 큰딸이 있었고, 왼쪽에 박 참판 댁 셋째 딸이 있었다. 둘 다 서련이 아는 얼굴이었다. 지난 생에서 이 둘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았다.
오 판서 댁 큰딸은 곱게 웃으며 서련에게 화전 하나를 집어 주었다.
“윤 아가씨는 이번 간택에 기대가 크시겠어요. 저는 그런 거 하나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늙고 싶어요.”
서련은 화전을 받아 들었다. 이 규수는 내년 가을, 집에 그림을 그리러 왔던 나라의 그림을 맡은 도화서의 화공과 함께 담을 넘는다. 아침에 오 판서 댁 하인들이 빈 별당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도성 절반에 울린다.
“조용히 늙으시긴 어려우실 겁니다.”
“예?”
“아니, 얼굴이 고우셔서요.”
박 참판 댁 셋째 딸은 정혼자 자랑이 한창이었다. 간택령이 내리기 바로 전에 혼서가 오가서 단자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정혼자가 얼마나 풍채가 좋고 머리숱이 많은지를 그녀는 세 번이나 말했다.
“머리숱이 어찌나 많은지 상투를 틀면 주먹 두 개만 해요.”
서련은 지난 생에 그 정혼자를 보았다. 서른 살 무렵 그 사람의 상투는 메추리알만 했다. 서련은 웃음을 참느라 화전을 한입에 너무 크게 베어 물었고, 뜨거운 찹쌀에 입천장을 데었다.
“어머, 윤 아가씨, 왜 우세요?”
“화전이 뜨거워서요.”
“울 만큼 맛있으세요?”
“예. 아주.”
“윤 아가씨네 매화정에 귀한 손님이 다녀가셨다던데, 정말이에요?”
건너편에 앉은 김 참의 댁 둘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무 개의 귀가 한꺼번에 서련 쪽으로 기울었다.
“예. 약과를 아주 좋아하시는 분이 오셨지요. 한 접시를 혼자 다 드셨습니다.”
“어머, 그분이요?”
“아니요. 그분을 모시고 온 분이요.”
규수들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서로 얼굴만 보았다. 김 참의 댁 둘째는 약과 접시를 슬그머니 자기 앞으로 당겼다.
서른한 살의 기억으로 스무 살의 수다를 듣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서련은 이 자리의 규수 대부분이 어떻게 시집가서 어떻게 늙는지를 알았다. 누가 아이를 몇 낳는지, 누구의 남편이 첩을 들이는지, 누가 마흔도 못 넘기는지.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앉아 있는 데는 궁에서 익힌 재주가 다 필요했다.
*
연못 저편 정자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진채이였다. 붉은 비단 저고리에 노란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 꽂은 떨잠, 가는 용수철 끝에 옥 나비를 단 장식이 걸음마다 떨렸다. 그녀는 규수들 사이를 한 바퀴 돌며 화전을 권했고, 서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윤 아가씨, 와 주셨네요. 아버님 일로 경황이 없으실 텐데.”
“경황이 없어서 꽃이라도 보러 왔습니다.”
“우리 집 꽃이 그렇게 위로가 될까요?”
“진달래는 어느 집에 피어도 같은 색입니다.”
채이가 웃었다. 웃는 입과 달리 눈은 서련의 얼굴을 낱낱이 재고 있었다. 서련은 그 눈을 알았다. 지난 생에 귀비 진씨가 황후 윤씨에게 문안을 올 때마다 짓던 눈이었다.
채이가 지나가자 연못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물 냄새에 섞여 희미한 향 냄새가 실려 왔다. 정자 안 향로에서 누가 향을 피운 모양이었다. 침향이었다.
서련의 눈앞에서 진달래 빛이 흐려졌다.
지난 생, 영희 9년 여름이었다. 궁의 후원 연못가에서 귀비 진씨가 황후에게 곡물 가루를 꿀에 개어 틀로 찍어 낸 다식 한 접시를 올렸다. 황후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송화 다식이라고 했다. 그 무렵 귀비는 배가 불러 있었다. 서련은 다식을 하나 집었고, 그때 연못 건너편에서 황제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귀비의 배에 손을 얹었다가 황후를 보고 웃었다. 그날 밤 서련의 침전에도 침향이 탔다. 사흘 뒤 귀비는 아이를 잃었다. 궁 안에서는 황후가 준 무엇인가가 문제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을 끝까지 덮어 준 사람이 황제였다. 서련은 그때 황제가 자기를 감싸 준다고 믿었다. 덮어 준 것은 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냉궁에 들어가서야 짐작했다.
“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하얘요.”
박 참판 댁 셋째 딸이 서련의 소매를 잡았다. 서련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천장의 덴 자리가 혀끝에 쓰라렸다. 그 쓰라림이 그녀를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연못가 바람을 좀 쐬겠습니다.”
*
연못 끝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사람 눈이 덜 닿는 자리였다. 서련이 그곳에 섰을 때, 버드나무 아래 돌의자에 좌상 진관오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연회는 딸의 몫이라 아버지는 뒤로 물러나 잉어 밥을 던지고 있었다. 살집 좋은 얼굴에 눈이 처져 늘 슬퍼 보이는 사람이었다. 남을 칠 때 우는 사람은 대개 얼굴부터 슬퍼 보였다.
“윤 판서 댁 따님이시군.”
진관오가 잉어 밥을 던지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탄핵받은 집 딸이 탄핵한 사람 집에 오다니, 담이 크구먼.”
“대감께서 탄핵하셨습니까? 상소에 대감 함자는 없던데요.”
진관오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잉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입을 내밀었다가 밥이 떨어지지 않자 도로 가라앉았다.
“상소야 대간들이 올리는 것이지. 나는 좌상이다. 좌상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리는 대간들이 올린 상소를 받아 폐하께 아뢸 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대감, 하나 여쭙겠습니다. 서북으로 가는 군량 삼천 석이 늦게 닿았다지요.”
“그렇다더군. 변방 군사들이 굶주린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진관오가 정말로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서련은 그 손가락에 눈물이 묻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 쌀은 어디서 늦어졌을까요? 서북 군량은 마포 나루에서 배에 싣는데요.”
진관오가 고개를 들었다. 처진 눈이 처음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 눈 속에서 슬픔이 빠져나가고 다른 것이 들어왔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규수가 나루 이름까지 아는구나.”
“아버지가 호조 판서이십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쌀 수레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컸습니다. 마포에서 배가 몇 척 뜨는지도 압니다. 대감께서도 마포를 잘 아시지요?”
“나는 마포에 가 본 적이 없다.”
“가 보신 적이 없는 분이 쓰시기에는 너무 정확한 이름이라서요.”
진관오가 잉어 밥 그릇을 돌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릇이 돌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는 일어서지 않고 서련을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아버님이 대명 중이시지. 대명이 길어지면 사람이 상하네. 늙은 사람은 더 그렇고. 그런 집 딸이 남의 집 연못가에서 나루 이름이나 외고 있으면, 사람들이 무어라 하겠나?”
“효녀라 하겠지요.”
“효녀는 아비를 위해 단자를 내지. 나루 이름을 외지 않고.”
서련은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인사하는 동안 그녀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했는지 셈했다. 진관오는 이제 자기가 마포를 잘 안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켰다고 여길 것이다. 오늘 밤 그 쌀은 자리를 옮길 것이다. 옮기기 전에 찾지 못하면 다시는 찾지 못한다. 서련은 일부러 그 말을 꺼냈다. 쌀이 움직여야 쌀이 어디 있는지 보인다.
*
해가 기울 무렵 연회가 파했다. 서련이 가마에 오르려는데 대문 옆 행랑 쪽에서 문하온이 걸어 나왔다. 진가 사랑채에서는 오늘 사내들의 시회가 따로 열렸고, 하온은 거기서 시를 받아 적는 서생으로 고용되어 들어가 있었다. 그는 가마 옆을 지나가면서 가마 창으로 작은 기름종이 꾸러미 하나를 밀어 넣었다.
서련은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 꾸러미를 풀었다. 손바닥만 한 밀랍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밀랍 한가운데 열쇠 하나가 눌린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꾸러미 안쪽에 하온의 글씨로 쪽지가 붙어 있었다.
“집사가 시회 중에 측간에 가면서 허리띠를 풀어 두고 갔습니다. 허리띠에 열쇠가 셋. 마포 창고 열쇠는 제일 녹슨 놈이랍니다. 사랑채에서 들은 말로는 오늘 밤 자정 무렵에 배를 띄워 쌀을 옮긴다 합니다.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좌상 대감이 연회 끝나기 전에 집사를 두 번 불렀습니다.”
“추신. 시회의 시는 다 형편없었습니다. 좌상 대감 시가 제일 형편없었습니다. 제가 받아 적다가 세 군데를 고쳐 드렸는데 아무도 모르더군요.”
서련은 밀랍을 손에 쥐었다. 가마 안이 흔들렸고, 밀랍은 손바닥 온기에 조금씩 물러졌다. 그녀는 그것이 녹아 자국이 뭉개지기 전에 얼른 기름종이로 다시 쌌다.
“도윤에게 일러라.”
가마 밖에서 걷던 홍매가 창에 귀를 댔다.
“무엇을요?”
“오늘 밤 마포에 간다고. 배 멀미 약도 챙기라고.”
“배요? 아가씨, 도윤 오라버니는 나룻배만 타도 토하는데요.”
“그러니까 약을 챙기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