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148자)

귀뚜라미 이름은 좌상

폐위된 황후의 두 번째 간택 · 백해원

문하온이 별당 들창을 두드린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바람이 차서 매화 꽃잎이 마당에 흩어져 있었고, 하온의 갓 위에도 꽃잎 두어 장이 붙어 있었다. 그는 들창 너머로 둘둘 만 종이 한 묶음을 내밀었다.

“좌상 댁 일입니다. 필사방 주인이 오늘 저녁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글씨값을 깎지 않았습니다. 깎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지요.”

서련은 등잔을 끌어당겨 종이를 펼쳤다. 거친 초서로 휘갈긴 상소 초안이었다. 호조 판서 윤정겸이 서북으로 보낼 군량 삼천 석을 제때 보내지 않아 변방 군사가 굶주리고 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장마다 ‘굶주린다’는 말이 세 번씩 들어 있었다. 서련은 그 말투를 알았다. 지난 생에 좌상 진관오가 편전에서 울면서 하던 말투였다. 그 사람은 남을 칠 때 꼭 울었다.

“제가 이걸 옮겨 쓰지 않으면 필사방 주인은 다른 서생에게 줄 겁니다. 제가 쓰면 적어도 이 상소가 언제 올라가는지는 압니다. 그런데 아가씨.”

하온이 들창틀에 팔을 얹었다. 등잔 불빛이 그의 길쭉한 얼굴 아래쪽을 비추었다.

“아가씨 일을 하기로 한 지 사흘 만에, 제가 제 손으로 아가씨 아버님을 치는 상소를 쓰게 생겼습니다. 이게 아가씨가 말한 판입니까?”

“예.”

“예?”

“옮겨 쓰십시오. 한 글자도 고치지 말고.”

하온이 서련을 오래 보았다. 그는 종이를 다시 말아 쥐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 종이 끝이 구겨졌다.

“고치지 말라고요. 아버님이 대명하시게 됩니다. 집 안에 갇혀서 벌을 기다리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압니다. 상소가 안 올라가면 폐하께서는 다른 칼을 꺼내십니다. 그 칼은 제가 모르는 칼입니다. 저는 아는 칼을 맞겠습니다.”

“아가씨는 사람을 참 무섭게 쓰십니다.”

“궁에서 배웠습니다.”

하온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서련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워 담지 않았다. 하온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종이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들창에서 물러나다가 돌아섰다.

“제가 쓴 상소가 올라가는 날, 아가씨 얼굴을 보러 오겠습니다. 그 얼굴이 무슨 얼굴인지 봐야 이 일을 계속할지 정하겠습니다.”

*

상소는 이틀 뒤에 올라갔다. 조회가 끝나기도 전에 의금부 도사 하나가 나졸 넷을 데리고 윤가 대문 앞에 섰다. 대감은 죄가 정해질 때까지 대문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어명이었다. 나졸 둘이 대문 양쪽에 창을 세우고 섰고, 대문 앞길을 지나던 장사치들이 걸음을 늦추어 그 창날을 구경했다.

윤정겸은 관복을 벗고 흰 도포 차림으로 사랑채 마루에 꿇어앉았다. 대명하는 신하는 그렇게 앉아 궁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법이었다. 그는 반나절을 그렇게 앉아 있었고, 해가 기울자 딸을 불렀다.

서련이 사랑채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경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벼루가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먹물이 경상 가장자리로 흘렀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향을 버리고 단자를 찢어서 이리 됐다.”

“압니다.”

“알면서 그랬느냐?”

“알면서 그랬습니다.”

윤정겸의 상투가 흔들렸다.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서려다 대명 중이라는 것이 생각났는지 도로 앉았다. 그 엉거주춤한 꼴이 우스워서, 마루 끝에서 지켜보던 홍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도 단자를 넣으면 폐하께서 거두실 거다. 상소 하나쯤은 한마디로 거두실 수 있는 분이다.”

“단자를 넣으면 이번엔 상소를 거두시고, 열 해 뒤엔 아버지 목을 거두십니다.”

“열 해 뒤에 무엇이 어찌 된다는 거냐! 너는 왜 자꾸 열 해 뒤를 말하느냐?”

서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흰 도포 소매에 먹물이 튀어 있었다. 지난 생에 아버지가 서북으로 귀양을 떠나던 날도 흰 도포를 입었다. 그때 소매에 묻은 것은 먹이 아니라 의금부 마당의 흙이었다.

“외가 계보는 아직이냐?”

“열흘은 걸린다 했습니다.”

“기다리지 않겠다. 외조부 항렬은 내가 짐작으로 쓰겠다. 틀리면 틀린 대로 내지. 단자 기한이 내일이다.”

“아버지.”

“나가거라. 대명하는 사람 앞에서 딸이 서 있는 것도 죄다.”

*

서련은 그날 밤 다시 오라비의 도포를 입었다. 이번에는 갓끈을 턱 밑에서 단단히 매었고, 홍매가 뒤에서 걸음이 나아졌다고 말해 주었다. 하온은 대문 밖 골목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소가 올라간 날 얼굴을 보러 오겠다던 사람이었다.

“무슨 얼굴인지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우는 얼굴은 아니더군요. 그래서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귀뚜라미 싸움 구경이요.”

정서왕 경저는 도성 서쪽 성벽 아래에 있었다. 서북을 다스리는 정서왕이 선황과 약조를 맺을 때 세자를 도성에 보내 살게 했는데, 말이 좋아 경저지 볼모가 사는 집이었다. 담 밖에 금군 넷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마다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담 안에서는 사내들의 고함이 밤하늘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물어! 물어 버려!”

“좌상 이놈, 다리를 벌려! 다리를!”

하온이 걸음을 멈추고 서련을 보았다. 서련은 웃음을 참으며 경저의 옆문을 두드렸다. 문지기가 엽전 한 꿰미를 받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귀뚜라미 판에 돈을 걸러 오는 도성 한량들은 다 그렇게 들어간다고 했다.

안마당에 등불이 열 개쯤 걸려 있었고, 그 한가운데 넓적한 질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릇 안에서 귀뚜라미 두 마리가 더듬이를 세우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질그릇 둘레에 술 냄새 풍기는 사내들이 쪼그려 앉아 있었고, 그 중 한 사내가 비단 도포 앞섶을 풀어 헤친 채 귀뚜라미를 지푸라기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웃음이 헤프게 걸린 사내였다.

서북 정서왕의 세자 소경이었다. 지난 생에 서련은 그를 딱 한 번 보았다. 영희 10년 겨울, 서북 번왕에게 처음 반역의 혐의가 씌워지던 날, 경저 담 밖으로 내걸린 그의 목을 가마 안에서 보았다.

“자, 다음 판! 「좌상」 대 「장 내관」이다. 걸 사람 걸어!”

사내들이 와 웃었다. 서련은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덩치가 큰 쪽이 「좌상」이었고, 다리가 가늘고 더듬이를 자꾸 떠는 쪽이 「장 내관」이었다. 세자가 「장 내관」의 등을 지푸라기로 건드리자 그 귀뚜라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놈은 겁이 나면 몸을 떱니다. 재채기를 하는 것 같지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하온이 서련 옆에서 낮게 말했다.

“아가씨, 이 집은 목이 몇 개입니까? 금군이 담 밖에 서 있는데 귀뚜라미 이름을 저렇게 짓습니까?”

“목이 하나뿐이니 저렇게 짓는 거지요. 하나뿐인 목은 아낄 데가 없습니다.”

서련은 소매에서 엽전 한 꿰미를 꺼내 질그릇 앞에 놓았다.

“「좌상」이 집니다.”

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눈이 서련의 갓끈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울대가 없는 목이었다.

“덩치가 저렇게 큰데 진다고?”

“덩치만 크고 제 다리로 싸우지 않습니다. 남의 다리를 빌려 싸우지요.”

세자가 지푸라기를 내려놓았다. 판이 시작되었다. 「좌상」이 먼저 달려들었고, 「장 내관」이 몸을 떨며 물러났다. 사내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장 내관」이 몸을 낮추어 「좌상」의 뒷다리를 물었다. 큰 귀뚜라미가 뒤집혔다. 판이 끝났다.

엽전을 잃은 사내들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세자는 서련이 건 엽전과 딴 엽전을 한데 모아 그녀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손을 휘저어 사내들을 내보냈다.

*

등불 몇 개가 꺼진 안마당에 세 사람만 남았다. 세자는 술병을 들어 병째 한 모금 마시고 서련에게도 내밀었다. 서련은 받지 않았다.

“호조 판서 댁 따님이시지. 오늘 조회에서 아버님이 탄핵을 받으셨다던데, 그 딸이 밤에 사내 옷을 입고 볼모 집에 귀뚜라미 노름을 하러 왔다. 이걸 담 밖의 금군이 알면 내 목하고 아가씨 아버님 목하고 둘 다 날아가겠군.”

“그래서 담 밖이 모르게 왔습니다.”

“무슨 일로.”

“저하의 혼처가 되겠습니다.”

세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술에 사레가 들려 한참을 기침했다. 하온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려다가 서련의 눈치를 보고 손을 거두었다.

“간택령 중에 혼처라니. 열여섯에서 스물하나 처녀는 다 궁에 바치는 철에 말이오.”

“선황께서 저하의 부왕과 맺으신 약조가 있습니다. 서북 번왕가의 혼서는 황실 혼사와 같은 급이라 간택령도 넘습니다. 신부 집이 혼서를 손으로 받는 순간 혼인이 섭니다.”

세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빠져나갔다. 그는 그 약조를 알았다. 볼모로 사는 그가 하루도 잊지 않는 약조였다. 그러나 그 약조를 서북 밖의 사람 입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약조를 왜 아오?”

“아버지가 호조 판서이십니다. 서북으로 가는 쌀이 우리 집 수레로 갑니다.”

“그건 이유가 안 되지. 아가씨가 내 혼처가 되면 그 날로 황제의 적이 되는 거요. 왜 그런 짓을 하오?”

“황제의 처가가 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니까요.”

세자가 서련을 보았다. 술기운이 걷힌 눈이었다. 한량의 헤픈 웃음 아래에 그런 눈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서련은 지난 생에 몰랐다.

“그럼 나도 하나 묻겠소. 내가 아가씨를 왜 믿어야 하오? 오늘 아버님이 탄핵받은 집이오. 제 아비 하나 못 지키는 집 딸과 혼서를 쓰면 서북은 웃음거리가 되오. 내 부왕께서는 웃음거리를 싫어하시오.”

“무엇을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탄핵부터 뒤집어 오시오. 그걸 해내면 부왕께 매를 띄우지.”

세자는 질그릇 안의 귀뚜라미 「장 내관」을 손바닥에 올려 서련에게 내밀었다. 귀뚜라미는 손바닥 위에서 또 몸을 떨었다.

“이놈은 가져가시오. 딴 값이오. 겁 많은 놈이 이기는 걸 처음 봤소.”

*

돌아오는 길에 서련은 귀뚜라미를 담은 대나무 통을 소매에 넣고 걸었다. 통 안에서 작은 다리가 대나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은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성벽 그림자가 끝나는 데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상소를 옮겨 쓰면서 이상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좌상 대감이 직접 쓰신 초안이었습니다. 그 어른 글씨는 획 끝을 늘 왼쪽으로 꺾지요. 그런데 군량이 굶주리는 변방 얘기를 하다가, 쓸 필요가 없는 나루 이름이 한 번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포 나루요. 저는 그 줄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옮겼습니다. 아가씨가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 하셔서.”

서련은 걸음을 멈추었다. 서북으로 가는 군량은 마포 나루에서 배에 실렸다. 삼천 석이 늦게 닿았다면, 그 쌀은 아직 마포 어딘가에 있었다.

“쓴 사람이 그 나루를 너무 잘 아는 겁니다.”

하온이 말하고는 갓을 고쳐 썼다. 그의 갓 위에 붙어 있던 매화 꽃잎은 어느새 다 떨어지고 없었다.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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