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47자)

매화가 늦게 피는 집

폐위된 황후의 두 번째 간택 · 백해원

문하온은 이튿날 아침 윤가 뒷문에 나타났다. 밤새 생각했는지 눈 밑이 거뭇했고, 도포 깃은 여전히 닳아 있었는데, 손에는 붓통 하나와 보자기에 싼 벼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뒷문을 지키던 늙은 하인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서련이 일러 준 대로 대답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대답했다.

“아가씨께 빚을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아, 반대인가? 아가씨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든 들여보내 주십시오.”

서련은 그를 사랑채가 아니라 별당 앞 작은 마루로 불렀다. 홍매가 차를 내오는 동안 하온은 마루 끝에 앉아 별당 지붕과 담장 높이를 눈으로 쟀다. 무엇이든 재 보는 사람이었다.

“선금은 반만 받겠습니다.”

“나머지 반은요?”

“아가씨 일이 망하면 안 받겠습니다. 망한 집에서 받아 봐야 엽전이 울고 나옵니다.”

“그럼 반은 제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값이군요.”

“그렇게 들으셨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그냥 셈이 빠른 겁니다.”

서련은 그를 아버지에게 데려갔다. 서생을 집에 들이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단자에 외조부의 함자를 쓰다 말고 막혀 있었다. 어머니 쪽 한씨 집안은 서북으로 내려간 지 오래라 종가가 멀었고, 항렬자를 확인하려면 누군가 한씨 종가의 계보를 베껴 와야 했다.

“외가 계보를 바로 베껴 올 서생을 구했습니다, 아버지. 단자에 틀린 글자가 들어가면 예부에서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내면 그 집은 성의가 없는 집이 됩니다.”

윤정겸이 딸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어제 단자를 찢던 딸이 이제는 단자에 틀린 글자가 들어갈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심보다 체면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온의 글씨 한 줄을 받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씨는 반듯하구나. 한씨 종가가 서북 길목 어디였더라. 다녀오는 데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걸어서 열흘, 나귀를 주시면 이레, 대감께서 말을 내주시면 사흘입니다.”

“그럼 나귀를 주마.”

“이레면 단자 기한을 넘깁니다, 대감.”

“그럼 말을….”

“말을 주시면 제가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윤정겸의 상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련은 웃음을 참으며 아버지 대신 결정했다. 하온은 떠나지 않기로 했다. 한씨 종가에는 서신을 보내 계보 사본을 받아 오게 하고, 그동안 하온은 사랑채에서 집안 서찰을 정리하기로 했다. 서신이 오가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이 걸렸다. 단자 기한은 이제 엿새가 남아 있었다.

*

매화는 사흘 뒤에 피었다. 밤사이 따뜻한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가자 아침에 마당의 가지마다 흰 꽃이 한꺼번에 터져 있었다. 서련은 들창을 열다가 그 꽃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지난 생에도 매화는 이 아침에 피었다. 같은 날이었다.

점심 무렵 청지기가 사랑채로 달려 들어갔다. 선비 한 사람이 매화를 보러 왔다고 했다. 강씨 성을 쓰는 공자인데, 대감과는 초면이지만 소문난 매화를 한 번만 보고 가겠다고 청했다. 윤정겸이 대문까지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님 뒤에 하인처럼 서 있는 사람이 장복수 내관이었다.

“서련아. 너, 너 단장을 하고….”

“이대로 나가겠습니다.”

“이대로라니! 그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압니다. 강 공자시지요.”

서련은 연분홍 저고리에 쪽빛 치마를 입었다. 지난 생에 입었던 옷은 다홍치마였다. 홍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나오자 서련은 고개를 저었고, 홍매는 다홍치마를 도로 장롱에 넣으며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화정은 사랑채 뒤뜰의 작은 정자였다. 정자 앞에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이 집을 지을 때 심은 나무라 밑동이 사람 허리 둘레만 했다. 나무 한쪽 가지는 몇 해 전 벼락을 맞아 검게 탄 채로 남아 있었다. 벼락 맞은 쪽에서도 꽃이 피었다. 할아버지는 그 가지를 자르지 말라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것이 피는 걸 봐야 한다고 했다.

강 공자는 그 검은 가지 아래에 서 있었다.

남색 도포에 흑립을 썼고, 허리에 찬 옥 장식 하나 말고는 꾸민 데가 없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으며, 얼굴은 서련이 기억하는 것보다 젊고 부드러웠다. 스물일곱의 황제였다. 사약을 내리던 마흔 가까운 황제는 눈가가 늘 붉었는데, 지금의 눈은 맑았다. 서련은 그 맑은 눈이 더 무서웠다.

“윤 대감 댁 따님이시오?”

“예.”

“매화가 늦게 피는 집이군요. 기다릴 줄 아는 집인가 봅니다.”

서련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지난 생의 그녀는 이 말에 얼굴을 붉혔다. 기다리면 핍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부끄러워 소매로 입을 가렸다. 그 대답을 듣고 황제가 웃었고, 그 웃음 때문에 그녀는 석 달 동안 잠을 설쳤다.

“늦게 피는 건 볕이 안 들어서입니다. 담이 높으면 꽃도 늦습니다.”

연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담장을 보았다. 윤가의 담은 정말 높았다. 할아버지가 서북 군량길을 처음 맡았을 때 도둑이 들까 봐 한 자를 더 올려 쌓은 담이었다.

“그럼 담을 낮추면 되겠군.”

“담을 낮추면 도둑이 듭니다.”

“도둑이 무서우시오?”

“담을 낮추라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정자 쪽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하온이 찻잔을 받친 소반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가 잔 받침 하나를 떨어뜨린 소리였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받침을 주워 소매로 닦고 다시 소반에 올렸다. 서련은 그를 차 시중 들 서사로 정자에 세워 두었다. 사람 보는 눈을 한 명 더 두고 싶었다.

*

정자 안에 차가 놓였다. 연휘는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고, 장 내관은 정자 계단 아래에서 하인처럼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장 내관 곁에는 덩치 큰 호위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는 서련이 다과상으로 내온 약과를 하나씩 집어 먹더니 어느새 접시를 다 비웠다. 홍매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저분은 하인이 아니신가 봐요. 하인이 약과를 이렇게 드시는 집은 처음 봐요.”

하온이 홍매 귀에 대고 말했다. 정자 안까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서련은 들었다.

“하인이 아니라 배 속에 구멍이 난 분이오. 약과를 넣으면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서 끝없이 들어가는 거요.”

장 내관이 그 순간 재채기를 했다. 정자 안에 향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하온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향이 없는데도 재채기를 하시니 하인께서는 몸이 참 귀하십니다. 귀한 몸은 바람에도 놀라지요.”

장 내관이 하온을 보았다. 그 눈이 하온의 얼굴에서 손으로 내려갔다.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에 먹이 배어 검게 굳은 손이었다. 서련은 그 눈을 보았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연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향을 빗물에 넣으셨다 들었소.”

서련은 그가 이 말을 꺼낼 줄 알았다. 그래서 대답도 미리 골라 두었다.

“귀한 것인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침향은 가라앉아야 진짜라더군. 사람도 그렇소?”

“사람은 가라앉으면 죽습니다, 공자.”

연휘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지 않고 목 안에서만 웃었다. 지난 생에 서련이 반한 웃음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 웃음 뒤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보려고 했다.

“단자 기한이 사흘 남았다 들었소. 윤 대감께서 외가 계보를 기다리신다지. 효성스러운 집이오.”

“예.”

“사흘 뒤에도 단자가 없으면 예부는 이 집을 딸을 숨긴 집으로 적어야 하오.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소. 이 집 담이 낮아지는 것도 원하지 않고.”

“그럼 공자께서 원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연휘가 서련을 똑바로 보았다. 매화 꽃잎 하나가 바람에 떨어져 찻잔 옆에 내려앉았다.

“기댈 데. 젊은 사람은 기댈 담이 필요하오. 높은 담이면 더 좋고.”

“기대시다 담이 무너지면요?”

“그럼 새 담을 쌓지.”

서련은 찻잔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게 잔을 꼭 쥐었다. 지난 생에 이 사람은 정말로 담을 새로 쌓았다. 윤가가 무너진 자리에 진가를 세웠고, 진가가 무너지자 또 다른 집을 세웠다.

“그 말씀은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기억은 좋은 것이오. 다만 너무 많이 기억하면 사람이 일찍 늙지.”

연휘가 일어섰다. 그가 정자를 나서면서 검게 탄 매화 가지를 손으로 잡아당겨 보았다. 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흰 꽃잎이 그의 어깨에 우수수 떨어졌다.

“죽은 가지에서도 피는군.”

“할아버지께서 자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나라면 잘랐을 거요. 죽은 것은 보기에 좋지 않으니.”

연휘는 정자 아래로 내려가면서 하온 앞에서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 하온이 허리를 굽혔고, 연휘는 그 굽은 등을 내려다보았다.

“글씨를 쓰는 손이군.”

“먹고살려고 쓰는 손입니다.”

“먹고사는 손이 제일 정직하지.”

*

궁으로 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연휘는 소매에 붙은 매화 꽃잎을 떼어 냈다. 꽃잎은 손끝에서 쉽게 뭉개졌고, 뭉개진 자리에서 풋내가 났다. 그는 그 냄새를 맡으며 윤가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열여섯이든 스물이든, 사가의 처녀들은 그를 보면 얼굴을 붉혔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하면서도 다 알았고, 알기 때문에 붉혔다. 윤가 딸은 붉히지 않았다. 그 여자는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지 않았다. 오래 알던 사람을, 그것도 몹시 싫어하게 된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보았다. 연휘는 그런 눈을 선황의 장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늙은 대신들이 새 임금을 보던 눈이었다.

침전에 돌아오자 장복수가 등불 심지를 낮추고 그 앞에 엎드렸다.

“폐하, 하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 집 딸은 단자를 넣지 않는다.”

“사흘이 남았습니다.”

“사흘이 아니라 삼 년을 줘도 안 넣는다. 그 눈은 그런 눈이었다.”

연휘는 창가로 가서 섰다. 궁의 매화는 사가보다 일찍 피어 벌써 지고 있었다. 마당에 진 꽃잎이 등불 빛에 회색으로 보였다.

“윤정겸을 탄핵할 상소를 올리게 하라. 서북 군량이 늦게 닿는다고 호조를 치면 된다. 좌상에게 맡겨.”

“폐하, 윤가를 꺾으시면 서북 길이….”

“꺾으려는 게 아니다. 무릎을 꿇리려는 거다. 무릎 꿇은 집은 딸을 보낸다.”

장복수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가 들었다. 그는 일어서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황제의 그림자로 오래 산 사람이 머뭇거리는 일은 드물었다.

“한 가지 아뢸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정자에서 차를 나르던 서사 말입니다. 좌상 댁에서 상소 초안을 옮겨 쓰게 하는 서생과 생김이 같았습니다. 남문 밖 필사방의 문가라는 자입니다.”

연휘가 돌아섰다. 등불이 그의 얼굴 한쪽만 비추었다.

“그 서생이 윤가에 있다고?”

“예. 그리고 소인이 듣기로, 그 서생은 남의 글씨를 쓴 사람보다 더 똑같이 흉내 낸다 합니다.”

연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그 상소는 그 서생이 옮겨 쓰게 해라. 제 손으로 쓴 상소가 제 주인 집을 치게.”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