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83자)

대신 가는 사람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반장의 작업복 점퍼에서 소주 냄새와 석탄 냄새가 같이 났다⁠. 쓰러진 나무 앞 숲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이 등이 엘프들 사이에서 바위처럼 넓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여왕은 이번에도 나무 밖으로 나왔다⁠. 이틀 만의 두 번째 나들이였고⁠, 엘프들은 이번에도 길 양쪽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 여왕은 구멍 가장자리가 보이는 자리에 마른 이끼를 깔고 앉았다⁠. 시월은 말뚝 넷 사이에 앉아 있었다⁠. 아직 묶이지는 않았다⁠. 손목의 끈만 뿌리에 이어져 있었다⁠.

표재곤은 반장 뒤에 섰다⁠. 이 옆에 회사 법무팀이라는 젊은 남자가 서류 가방을 안고 섰다⁠. 둘 다 엘프가 빌려준 녹색 망토를 걸쳤다⁠. 반석호가 이 둘을 찍었다⁠. 녹색 망토가 회색 정장 위에서 어울리지 않게 펄럭였다⁠.

법무팀 남자가 서류 가방을 열어 두툼한 종이 묶음을 꺼냈다⁠. 회사와 반장 사이의 합의서라고 했다⁠. 여왕이 이 종이를 오래 보더니 엘프어로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이 종이는 나무로 만들었느냐고⁠. 법무팀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둘레의 엘프들이 낮게 웅성거렸다⁠. 여왕은 더 묻지 않았다⁠. 법무팀 남자는 종이 묶음을 도로 가방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반장이 입을 열었다⁠. 리엘이 한 문장씩 엘프어로 옮겼다⁠. 소율은 이 옆에서 반장의 한국어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웠다⁠.

“⁠제가 시켰습니다⁠. 회사는 문 쪽 보강만 하라고 했는데⁠, 제가 땅속에 따뜻한 돌이 있는 걸 알고 욕심이 나서 하청 애들 데리고 숲 쪽으로 팠습니다⁠. 시월이는 제가 시킨 대로만 넣었습니다⁠. 흰 안전모도 제 겁니다⁠. 밤에는 제가 흰 걸 썼습니다⁠.⁠”

리엘이 옮겼다⁠. 엘프들이 술렁였다⁠. 여왕은 반장을 오래 봤다⁠. 시월이 말뚝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장님⁠, 노란 거 쓰잖아요⁠. 맨날⁠.⁠”

“⁠밤에는 흰 거 썼다고⁠.⁠”

반장은 시월을 보지 않았다⁠. 표재곤이 앞으로 반 걸음 나섰다⁠.

“⁠회사로서도 부끄럽습니다⁠. 현장 책임자가 직접 와서 죄의 대가를 받겠다고 하니⁠, 이걸로 정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염 기사님은 시킨 대로 한 사람이니 풀어 주시고요⁠.⁠”

엘드린이 일어섰다⁠. 소율은 무엇을 말할지 알았다⁠. 엘드린은 오늘 일이 여기서 정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 하나가 죄의 대가를 치르고 끝나면 원로원에 가져갈 것이 없었다⁠.

“⁠인간 하나가 사백 걸음을 팠느냐⁠, 라고 하십니다⁠.⁠” 리엘이 옮겼다⁠. “⁠사백 걸음의 나무가 노랗게 지는 동안 인간 하나가 그 돌을 다 캐어 어디로 가져갔느냐고⁠. 땅을 판 손이 저렇게 많은데 머리는 하나라고 하느냐고⁠.⁠”

엘드린과 소율이 같은 편에 서 있었다⁠. 엘프들도 이걸 알아챘다⁠. 엘드린이 소율을 흘끗 봤다⁠. 소율은 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거짓말을 그대로 두면 시월은 오늘 풀려났다⁠. 반장은 겨울을 말뚝 사이에서 났다⁠. 표재곤은 녹색 망토를 벗어 돌려주고 문을 지나 태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달 다른 하청이 다른 반장을 데리고 다른 구멍을 팠다⁠.

소율은 시월을 봤다⁠. 시월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나 반장님 대신 나가면 평생 잠 못 자요⁠. 그러니까 해요⁠, 공무원⁠.⁠”

소율은 반장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반장님⁠, 손 좀 보여 주세요⁠.⁠”

반장이 크고 거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고⁠, 손톱 밑에 검은 흙이 끼어 있었다⁠. 노르스름한 얼룩은 없었다⁠. 소율은 이 손을 여왕 쪽으로 돌렸다⁠.

“⁠이분은 흙 나르는 반장님이에요⁠. 화약은 안 만지셨어요⁠. 손에 그 냄새가 없어요⁠.⁠”

“⁠화약은 시월이가 만지고⁠, 나는 시키기만 했다니까⁠.⁠”

“⁠그러면 같이 내려가요⁠. 화약 넣은 자리 짚어 주세요⁠. 시키신 분이면 아시잖아요⁠. 어디까지 팠는지⁠, 어디서 터뜨렸는지⁠.⁠”

반장의 손이 소율의 손 안에서 한 번 굳었다⁠. 표재곤이 끼어들었다⁠.

“⁠주무관님⁠, 현장 책임자를 무너진 갱도에 다시 내려보내는 건 안전상⁠—⁠”

여왕이 손을 들었다⁠. 엘프어로 짧게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내려가면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반장님이 시키신 분인지 아닌지가요⁠.⁠”

여왕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이 밧줄을 허리에 감는 동안 표재곤이 몇 걸음 물러났다⁠. 소율은 이 뒷모습을 봤다⁠. 표재곤은 녹색 망토 안쪽에서 손바닥만 한 검은 것을 꺼내 입 가까이 댔다⁠. 무전기였다⁠. 엘프들은 이 검은 물건을 처음 보는 눈치였다⁠. 표재곤은 소리를 낮춰 짧게 두 마디를 했다⁠. 소율의 귀에는 끝의 한 마디⁠, 지금이라는 말만 들렸다⁠. 표재곤이 무전기를 망토 안에 넣고 돌아섰을 때 소율과 눈이 마주쳤다⁠. 표재곤은 웃었다⁠. 출장소에서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눈은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주무관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갱도는 무너진 데가 또 무너집니다⁠.⁠”

*

반장은 덩굴 밧줄을 허리에 감고 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데는 금방이었다⁠. 위에서 엘프 넷이 밧줄을 잡고 버텼는데⁠, 반장의 몸무게에 엘프 하나가 앞으로 끌려가 구멍 가장자리에 엎어질 뻔했다⁠. 엘프어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리엘이 옮기지 않았는데 반석호가 물었다⁠. 리엘이 마지못해 옮겼다⁠.

“⁠이 인간은 바위를 먹고 사느냐고 합니다⁠.⁠”

소율이 머리 전등을 켜고 뒤따라 내려갔다⁠. 구멍 바닥의 공기는 나흘 전보다 따뜻했다⁠. 무너진 벽 사이로 갱도가 한쪽은 바깥뜰 쪽으로⁠, 한쪽은 숲 안쪽으로 뻗어 있었다⁠.

“⁠반장님⁠, 화약 넣은 자리요⁠.⁠”

반장이 갱도를 둘러봤다⁠. 천장의 전등은 꺼져 있었다⁠. 소율의 머리 전등 빛만 레일 위를 쓸고 지나갔다⁠. 반장이 바깥뜰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돌아섰다⁠. 숲 안쪽으로 몇 걸음을 가다가 또 멈췄다⁠.

“⁠여기쯤⁠.⁠”

“⁠여기서 몇 번 터뜨렸어요⁠?⁠”

“⁠세 번⁠.⁠”

“⁠몇 시에요⁠?⁠”

“⁠밤에⁠.⁠”

“⁠시월 씨는 두 번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오늘은 두 번만 하시죠⁠, 했다고요⁠.⁠”

반장이 레일 위에 섰다⁠. 소율의 전등 빛이 이 얼굴을 비췄다⁠. 반장이 손으로 빛을 가렸다⁠. 이 손 그림자 밑에서 반장의 입이 몇 번 열렸다 닫혔다⁠.

“⁠마 반장님 손녀⁠.⁠” 반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화약 넣는 데는 못 가⁠. 반장이라도 흙 반장은 발파 막장에 못 들어가⁠. 거긴 시월이랑 그 사람만 가⁠. 나는 터지고 나면 흙 치우러 들어갔어⁠. 어디서 터졌는지는 흙이 쏟아진 데로 알지⁠. 근데 여기는 다 무너져서 어딘지 모르겠어⁠.⁠”

소율은 전등을 내렸다⁠. 반장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

“⁠그 사람이 누구예요⁠?⁠”

“⁠알잖아⁠.⁠”

“⁠반장님 입으로요⁠.⁠”

반장이 레일 위에 주저앉았다⁠. 점퍼 안주머니의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전무님⁠. 표 전무님이 다 정했어⁠. 몇 번⁠, 어디까지⁠. 숲 안쪽 큰 나무 밑에 돌이 제일 두껍다고 거기까지 가자고⁠. 나는 그거 위에서 말 못 해⁠. 아들놈 빚이 이 봉투 두 개라고⁠.⁠”

이때 갱도 바깥뜰 쪽 어둠 속에서 불빛 넷이 켜졌다⁠.

*

보안팀원 넷이 레일을 밟고 달려왔다⁠. 검은 점퍼에 머리 전등을 쓰고 허리에 전기충격기를 찼다⁠. 바깥뜰 쪽⁠, 철문 곁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엘프들 앞에서 굴이 끝난다던 콘크리트 벽을 지나왔다⁠. 이 벽에는 이미 사람이 드나들 길이 나 있었다⁠.

“⁠반장님⁠, 가시죠⁠. 전무님 지시입니다⁠. 무너진 갱도는 위험합니다⁠.⁠”

보안팀원 둘이 반장의 양팔을 잡았다⁠. 반장이 일어서다 말고 소율을 봤다⁠. 소율은 반장의 점퍼 자락을 잡았다⁠.

“⁠놓으세요⁠. 이분 여왕 앞에서 데려온 분이에요⁠.⁠”

“⁠주무관님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보안팀원이 소율의 손목을 비틀었다⁠. 점퍼 자락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소율은 구멍 위를 향해 소리쳤다⁠.

“⁠밧줄요⁠! 반장님 올려요⁠!⁠”

위에서 밧줄이 떨어졌다⁠. 반장 허리에 감긴 밧줄이 팽팽해졌다⁠. 위에서 엘프들이 밧줄을 끌어당겼다⁠. 반장의 몸이 구멍 벽 쪽으로 끌려갔다⁠. 보안팀원 둘이 이 다리를 붙잡고 반대로 당겼다⁠. 반장이 두 힘 사이에서 비명을 질렀다⁠. 흙이 쏟아졌다⁠.

반장의 상체가 구멍 가장자리를 넘었다⁠. 보안팀원 하나가 반장의 다리를 놓지 않은 채 밧줄을 잡고 같이 끌려 올라갔다⁠. 소율은 이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구멍 가장자리 위로 엘프들의 손과 검은 점퍼가 엉켰다⁠.

벨렌이었다⁠. 숲지기 대장이 보안팀원의 멱살을 잡아 숲 바닥으로 끌어냈다⁠. 보안팀원이 바닥을 구르며 허리춤에서 검은 손잡이를 뽑았다⁠. 파직⁠. 파란 불꽃이 튀었다⁠. 숲에 처음 들어온 불꽃이었다⁠.

벨렌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가 쓰러진 나무의 뿌리에 부딪혔다⁠. 둔한 소리가 났다⁠.

엘프들이 얼어붙었다⁠. 소율은 밧줄을 잡고 기어올랐다⁠. 손바닥이 덩굴에 쓸려 화끈거렸다⁠. 구멍 가장자리를 넘자 이것이 먼저 보였다⁠. 벨렌의 은회색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숲 바닥의 마른 잎이 이것을 빨아들였다⁠. 쇠 냄새가 수액 냄새를 덮었다⁠.

리엘이 형 곁에 무릎을 꿇었다⁠. 형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손이 붉어졌다⁠. 리엘의 입에서 엘프어도 한국어도 아닌 소리가 나왔다⁠.

보안팀원은 전기충격기를 쥔 채 엉덩이로 뒷걸음질했다⁠. 숲지기 스물의 화살촉이 이 하나를 향했다⁠. 표재곤이 이 앞을 막아섰다⁠. 처음으로 표재곤의 목소리가 빨랐다⁠.

“⁠정당방위입니다⁠. 저 엘프가 먼저 우리 직원을 잡아끌었어요⁠. 다들 보셨잖아요⁠.⁠”

아무도 이 말을 옮기지 않았다⁠. 리엘은 형의 머리를 안고 있었고⁠, 소율은 옮기지 않았다⁠.

소율은 비상 가방을 열었다⁠. 거즈 뭉치를 꺼내 벨렌의 뒤통수에 대고 눌렀다⁠. 거즈가 금방 붉게 젖었다⁠. 두 번째 뭉치를 이 위에 덧대고 붕대로 감았다⁠. 숲지기들이 활을 겨눈 채 이 손을 지켜봤다⁠. 인간의 손이 숲지기 대장의 머리에 닿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리엘이 형의 머리를 들어 붕대가 돌아갈 자리를 내줬다⁠. 형제의 손과 소율의 손이 붕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 번 스쳤다⁠.

벨렌의 눈이 떠졌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이 소율을 찾았다⁠. 이 손이 올라와 소율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엘프어로 갈라진 소리가 나왔다⁠. 소율은 이 말을 알아들었다⁠. 출근 첫 주에 리엘이 협정문 여백에 써 둔 단어들 가운데 하나⁠, 왜였다⁠.

소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붕대 끝을 매듭지었다⁠. 두 번 감고 끝을 밖으로 늘어뜨렸다⁠. 숲지기들의 매듭이었다⁠. 여왕 앞에서 리엘이 말한 그대로였다⁠. 벨렌이 이 매듭을 손끝으로 더듬고 소율의 손목을 놓았다⁠.

엘드린이 걸어왔다⁠. 벨렌을 내려다봤다⁠. 숲 바닥에 번지는 붉은 것을 봤다⁠. 손가락 끝으로 이것을 찍어 들어 햇빛에 비췄다⁠. 여왕이 이끼를 비췄던 것과 같은 손짓이었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돌아봤다⁠.

여왕이 이끼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엘드린이 숲을 향해 돌아섰다⁠. 엘프어로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 숲 끝까지 닿았다⁠. 리엘이 형을 안은 채 이 말을 옮겼다⁠. 옮기려고 옮긴 게 아니었다⁠. 입에서 그냥 한국어로 흘러나왔다⁠.

“⁠피가 흘렀다⁠. 해넘이 회의다⁠.⁠”

숲 깊은 곳에서 뿔피리가 울었다⁠. 낮고 긴 소리가 은껍질나무 사이를 지나 바깥뜰까지 굴러갔다⁠. 두 번째 뿔피리가 이 소리를 받았다⁠. 세 번째가 받았다⁠. 엘프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봤다⁠. 반석호가 휴대폰을 든 채로 소율에게 물었다⁠.

“⁠주무관님⁠, 저거 무슨 소리야⁠?⁠”

소율은 손바닥의 덩굴 자국을 내려다봤다⁠. 이 위에 벨렌의 피가 한 점 묻어 있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전쟁을 할지 말지 정한대요⁠.⁠”

9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