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16자)

형의 매듭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보름 전입니다⁠.⁠”

벨렌의 목소리는 숲 바닥에 떨어지는 잎처럼 낮고 고르게 나왔다⁠. 벨렌은 엘드린을 올려다본 눈을 거두어 여왕 앞의 흙을 봤다⁠. 리엘이 이 한 마디를 옮기지 못했다⁠. 소율은 알아들었다⁠. 엘프들이 달을 셀 때 쓰는 말⁠, 보름이었다⁠.

여왕은 이끼를 올린 손가락을 거두었다⁠. 벨렌을 오래 내려다봤다⁠. 아들의 손이 아직 숲지기 대장의 어깨 위에 있었다⁠. 여왕이 엘프어로 물었다⁠. 리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묻기를⁠, 숲지기 대장의 말을 내가 의심하면 숲지기들은 누구의 말을 믿겠느냐고 하십니다⁠.⁠”

소율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이끼는요⁠?⁠”

여왕이 소율을 봤다⁠. 손끝에 남은 이끼 부스러기를 바람에 털었다⁠. 대답 대신 엘프어로 길게 말했다⁠. 묻는 말의 모양이었지만 정하는 말이었다⁠. 리엘이 한 줄씩 옮겼다⁠.

“⁠첫서리가 올 때까지 나무를 죽인 손을 묶어 두면 어떻겠느냐⁠? 그때까지 흰 머리쓰개를 쓴 인간이 내 앞에 오지 않으면⁠, 그 손이 대신 뿌리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인간 공무원은 붙잡힌 몸이나⁠, 흰 머리쓰개를 데려와야 하니 풀어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엘드린이 벨렌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긴 것은 반이었다⁠. 시월은 오늘 묶이지 않았다⁠. 그러나 첫서리에는 묶인다⁠.

“⁠첫서리가 언제예요⁠?⁠” 소율이 리엘에게 물었다⁠.

“⁠곧입니다⁠.⁠”

“⁠리엘 씨⁠.⁠”

리엘이 하늘을 봤다⁠. 손가락을 꼽았다⁠.

“⁠이 숲에서는 보름쯤 뒤입니다⁠. 엘프에게는 곧입니다⁠. 인간분들께는 매우 짧은 곧입니다⁠.⁠”

시월이 덩굴 끈에 묶인 제 손을 봤다⁠. 그러고는 소율을 보고 웃었다⁠. 이번에는 입꼬리 양쪽이 다 올라갔다⁠.

“⁠보름이면 우리 현장 한 공정이에요⁠. 해 봐요⁠, 공무원⁠.⁠”

*

리엘은 이날 밤 숲지기 막사 위 가지로 올라갔다⁠. 벨렌은 별을 등지고 혼자 앉아 활시위를 손보고 있었다⁠. 리엘은 형의 맞은편 가지에 앉았다⁠. 둘 사이에 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형 앞에서 리엘의 입은 늘 굳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형은 활을 먼저 잡았고⁠, 매듭을 먼저 배웠고⁠, 어머니를 먼저 묻었다⁠. 리엘은 형이 다 한 다음에 왔다⁠. 그래서 리엘은 인간의 말을 배웠다⁠. 형이 모르는 말이었다⁠. 이 말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엘이 입을 열었다⁠. 엘프어였는데⁠, 나오는 말이 이상했다⁠.

“⁠형님께서 금일 여왕 폐하 앞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셨음을 알려 드립니다⁠.⁠”

벨렌이 시위를 손보던 손을 멈췄다⁠. 동생을 봤다⁠.

“⁠무슨 말투냐⁠, 그건⁠.⁠”

“⁠인간의 공문 말투입니다⁠. 형 앞에서는 이 말투가 아니면 말이 안 나옵니다⁠.⁠”

벨렌이 시위를 다시 만졌다⁠. 리엘은 이 손을 봤다⁠. 풀을 세 번 감고 끝을 안으로 접어 넣어 매듭을 묶던 손이었다⁠.

“⁠그 이끼는 봄 이끼입니다⁠. 형이 봄에 묶었습니다⁠. 저도 압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끼가 매듭을 덮는 데 한 계절이 걸린다고⁠.⁠”

“⁠그래⁠.⁠”

리엘이 숨을 멈췄다⁠. 형이 그렇게 쉽게 인정할 줄 몰랐다⁠.

“⁠그러면 왜⁠—⁠”

“⁠나는 전하의 숲지기다⁠.⁠” 벨렌이 활을 무릎에 눕혔다⁠. “⁠숲지기의 맹세는 여왕 폐하께 하지 않는다⁠. 숲지기를 거느리는 분께 한다⁠. 너는 그걸 모른다⁠. 너는 통역이니까⁠. 너는 양쪽 말을 옮기면 그만이지만⁠, 나는 한쪽에 서야 한다⁠.⁠”

“⁠형은 지금 한쪽에 서서 인간 하나를 겨울에 묶으려 합니다⁠.⁠”

“⁠그 인간이 나무를 죽였다⁠.⁠”

“⁠그 인간에게 시킨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봄부터 안 자도 있습니다⁠.⁠”

벨렌이 일어섰다⁠. 가지가 휘청였다⁠. 동생을 내려다보며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엘프어로 천천히⁠, 어머니가 아이를 꾸짖을 때 쓰던 말투로 말했다⁠.

“⁠너는 인간 곁에 너무 오래 있었다⁠. 그 공무원 곁에⁠.⁠”

벨렌은 다른 가지로 뛰어 건너갔다⁠. 리엘은 혼자 남아 형이 앉았던 자리를 봤다⁠. 시위에서 끊어 낸 실 한 가닥이 거기 떨어져 있었다⁠. 리엘은 이것을 주워 손가락에 감았다⁠. 세 번 감고⁠, 끝을 안으로 접어 넣었다⁠.

이튿날 아침 리엘은 시월에게 물과 마른 열매를 가져다주러 쓰러진 나무로 갔다⁠. 시월은 거기 있었다⁠. 막사가 아니었다⁠. 밤사이 엘드린이 옮겨 놓았다고 숲지기 하나가 말했다⁠. 시월은 쓰러진 나무 둥치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고⁠, 손목의 덩굴 끈 끝이 하늘로 들린 뿌리 하나에 묶여 있었다⁠.

이 앞에서 숲지기 셋이 땅을 고르고 있었다⁠. 엘프들은 쇠날을 쓰지 않았다⁠. 나무 삽과 손으로 뿌리 아래 흙을 긁어내고⁠, 거기에 깎은 말뚝 넷을 박았다⁠. 말뚝 사이가 사람 하나가 앉을 너비였다⁠. 엘드린이 이 옆에 서서 말뚝 하나를 손으로 흔들어 봤다⁠. 단단했다⁠.

시월은 이 말뚝들을 보고 있었다⁠. 리엘이 물그릇을 내밀자 받아 마시고 입가를 소매로 닦았다⁠.

“⁠엘프 통역님⁠, 저거 내 자리죠⁠?⁠”

리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엘드린이 시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국어였다⁠.

“⁠보름이다⁠.⁠”

시월이 엘드린을 올려다봤다⁠. 묶인 손으로 말뚝 사이 너비를 가늠하는 시늉을 했다⁠.

“⁠좁네요⁠. 나 엉덩이 큰데⁠. 이왕 박는 거 한 뼘만 넓혀 주세요⁠. 보름 남았으니까 공사 기간은 충분하잖아요⁠.⁠”

숲지기 셋이 손을 멈췄다⁠. 엘드린이 시월을 오래 봤다⁠. 그러고는 리엘에게 엘프어로 물었다⁠. 이 인간이 지금 무엇을 청한 것이냐고⁠. 리엘은 한참 망설이다 사실대로 옮겼다⁠. 엘드린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에 발로 말뚝 하나를 툭 밀었다⁠. 말뚝 사이가 한 뼘 넓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지기 하나가 엘드린이 간 뒤에 말뚝 아래 흙을 손으로 고르고⁠, 이 위에 마른 이끼를 한 겹 깔았다⁠.

*

토요일 아침⁠, 문을 지나 태백 2갱으로 나오자 휴대폰이 한꺼번에 울었다⁠. 엘프 숲에서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사흘 동안 쌓인 것이 손바닥 위에서 진동으로 쏟아졌다⁠. 부재중 전화 스물세 통⁠, 문자 마흔한 개⁠, 이 가운데 열아홉 개가 반석호가 보낸 사진이었다⁠. 소율은 갱차를 기다리며 이 가운데 하나에 전화를 걸었다⁠. 본부 과장이었다⁠.

“⁠마 주무관⁠, 지금 어디예요⁠?⁠”

“⁠태백이요⁠.⁠”

“⁠징계 위원회는 어제 열 시였어요⁠. 불참이에요⁠. 위원장이 기가 막혀 하더라고요⁠. 월요일 아침까지 서울 안 오면 무단결근으로 처리해요⁠. 그다음은 직위 해제예요⁠. 알아들어요⁠?⁠”

“⁠과장님⁠, 엘프 여왕이 첫서리까지⁠—⁠”

“⁠마 주무관⁠. 나 엘프 여왕 몰라요⁠. 나는 한성마이닝 법무팀하고 차관실만 알아요⁠.⁠”

통화가 끊겼다⁠. 갱차가 왔다⁠. 소율은 갱차에 올라타 사백 미터를 올라가는 동안 반석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장님 저 태백이에요⁠. 월요일까지 안 가면 잘린대요⁠.⁠」 답이 바로 왔다⁠. 「⁠나도 경위서 세 건이야⁠. 우리 같이 잘리자⁠. 단체 사진 찍자⁠.⁠」 이 아래에 엄지를 든 앳된 숲지기 사진이 붙어 있었다⁠.

*

철암 시장 골목의 국밥집은 이십 년 전과 냄새가 같았다⁠. 돼지 뼈 우린 국물에 석탄 가루가 얹힌 듯한 냄새⁠. 비가 내렸고⁠, 골목 바닥의 물웅덩이마다 검은 막이 떠 있었다⁠. 시월이 말해 준 대로였다⁠. 해고된 하청 반장은 하청 숙소 앞 이 국밥집에서 낮부터 소주를 마신다⁠.

안쪽 탁자에 쉰 중반의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넓고 목이 굵었다⁠. 탁자 위에 소주병이 셋 비어 있었다⁠. 작업복 가슴의 하청 업체 이름 위에 누가 매직으로 줄을 그어 놓았다⁠.

“⁠반장님이세요⁠?⁠”

남자가 눈을 들었다⁠. 이 눈이 소율의 가방에 붙은 출장소 마크로 갔다⁠.

“⁠시월이 일로 왔어요⁠?⁠”

“⁠네⁠.⁠”

“⁠시월이는⁠?⁠”

“⁠엘프 여왕 앞에 있어요⁠. 첫서리까지요⁠. 그때까지 시킨 사람이 안 오면 시월 씨가 겨울 동안 나무뿌리에 묶여요⁠.⁠”

반장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탁자에 부딪혀 탁 소리가 났다⁠.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국밥을 들고 나오다 소율을 보고 멈췄다⁠.

“⁠어머⁠, 너 철암 마 씨네 손녀 아니니⁠? 마 반장님 손녀⁠?⁠”

“⁠네⁠, 안녕하세요⁠.⁠”

“⁠세상에⁠. 외교부 갔다더니⁠. 할아버지가 동네방네 자랑하셨는데⁠.⁠” 아주머니가 국밥을 소율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공짜야⁠. 근데 너 왜 저 사람이랑 앉았어⁠? 저 사람 오늘 잘렸어⁠.⁠”

“⁠알아요⁠.⁠”

반장이 국밥 그릇 너머로 소율을 봤다⁠. 아까보다 눈이 맑아져 있었다⁠.

“⁠마 반장님 손녀라고⁠? 그 양반 내가 신참 때 갱에서 뵀어⁠. 화약 냄새 하나로 불발 찾던 양반⁠.⁠”

“⁠반장님⁠, 흰 안전모 쓴 사람 누구예요⁠?⁠”

반장이 대답하려는데 국밥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표재곤이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회색 정장에 비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국밥집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소율과 반장이 앉은 탁자로 와서 빈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주머니에게 손을 들었다⁠.

“⁠여기 국밥 하나 주세요⁠. 특으로⁠.⁠”

반장의 등이 꼿꼿해졌다⁠. 소율은 이 등을 봤다⁠. 이십 년 갱에서 일한 사람이 원청 전무 앞에서 펴는 등이었다⁠.

“⁠주무관님⁠, 무단결근 사흘 남으셨죠⁠? 아니 이틀인가⁠.⁠” 표재곤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서울 가셔야 할 분이 태백 국밥집에서 우리 직원 만나시네요⁠. 전 직원인가⁠.⁠”

“⁠전무님은 왜 오셨어요⁠?⁠”

“⁠우리 반장님 퇴직 인사 드리러요⁠.⁠” 표재곤이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 반장 앞에 놓았다⁠. “⁠이십 년 고생하셨으니까⁠.⁠”

반장은 봉투를 보지 않았다⁠. 소율은 봉투를 봤다⁠. 이 두께를 봤다⁠. 퇴직 인사가 아니었다⁠.

“⁠전무님⁠, 시월 씨가 여왕 앞에서 말했어요⁠. 흰 안전모 쓴 사람이 밤마다 내려와서 몇 번⁠, 어디까지 정했다고요⁠. 느릿느릿한 존댓말로요⁠. 기사님⁠, 오늘은 두 번만⁠.⁠”

표재곤의 물수건 쥔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를 하나씩 닦았다⁠.

“⁠흰 안전모 쓰는 사람 현장에 많아요⁠. 감리도 쓰고 안전 관리자도 쓰고⁠.⁠” 표재곤은 물수건을 접어 탁자에 놓았다⁠. “⁠근데 주무관님⁠, 핵심이 그거 아닙니까⁠? 엘프가 원하는 거⁠. 시킨 사람⁠.⁠”

국밥이 나왔다⁠. 표재곤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드리면 되잖아요⁠. 시킨 사람⁠.⁠”

표재곤이 반장을 봤다⁠. 반장은 봉투를 봤다⁠. 이번에는 봤다⁠. 소율은 이 둘 사이에 무엇이 이미 오갔는지 알아챘다⁠. 표재곤이 이 국밥집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반장님⁠.⁠”

반장이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단숨에 비웠다⁠.

“⁠내가 시켰다고 하면 시월이는 풀려나는 거지⁠?⁠”

“⁠반장님이 묶여요⁠. 겨울 내내요⁠. 사람은 못 버텨요⁠.⁠”

“⁠나 갱에서 겨울 스무 번 났어⁠. 마 반장님 손녀⁠.⁠” 반장이 웃었다⁠. 소주 냄새가 훅 끼쳤다⁠. “⁠우리 아들놈 빚이 이 봉투 두 개야⁠. 하나는 오늘 받고 하나는 갔다 와서 받기로 했어⁠. 갔다 오면⁠.⁠”

표재곤이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국밥 한 숟가락을 떠서 천천히 불었다⁠.

“⁠엘프분들도 그게 깔끔하실 겁니다⁠. 현장 책임자가 직접 와서 사죄하는 거니까요⁠.⁠”

반장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린 작업복 점퍼를 들어 팔을 꿰었다⁠. 매직으로 줄 그은 하청 업체 이름이 가슴에서 펴졌다⁠. 봉투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가서 말할게⁠. 엘프들한테⁠. 내가 시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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