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52자)

해넘이 회의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뿌리 회당은 땅 위에 있었다⁠. 여왕의 나무 밑동에서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이 사람 키 몇 배 높이로 휘어 올라 둥근 벽을 이뤘고⁠, 이 벽 위로 하늘이 열려 있었다⁠. 뿌리마다 이끼가 두껍게 앉아 젖은 솜 냄새가 났다⁠. 엘프들은 뿌리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큰 회의는 뿌리 사이에서 했다⁠.

원로는 아홉이었다⁠. 잎 회의의 원로들보다도 늙었다⁠. 소율은 이 얼굴들을 보고 할아버지 장례식에 온 철암 노인들을 떠올렸다⁠. 다만 이 노인들은 사백 해 가까이 산 얼굴이었다⁠. 뿌리 벽을 따라 놓인 돌 자리에 하나씩 앉았고⁠, 가운데 빈자리를 사이에 두고 여왕이 맞은편에 앉았다⁠. 엘드린이 여왕의 오른쪽에 섰다⁠. 벨렌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숲지기들 앞줄에 섰다⁠. 붕대 끝 매듭이 두 번 감겨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다⁠.

맨 왼쪽 원로가 일어섰다⁠. 엘프어로 노래하듯 무언가를 시작했다⁠. 리엘이 소율 쪽으로 몸을 기울여 옮겼다⁠.

“⁠옆자리 원로께 인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분 할아버지 나무의 지난겨울 안부부터⁠.⁠”

여왕이 손을 들었다⁠. 원로가 노래를 멈췄다⁠. 회당 안에 숨죽인 소리가 퍼졌다⁠. 원로가 여왕을 봤다⁠. 여왕이 엘프어로 짧게 물었다⁠. 원로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리엘이 옮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늘은 인사를 건너뛰어도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원로께서 인사를 건너뛰는 것은 칠십 해 만이라고 하십니다⁠. 지난번은 북쪽 산 너머 종족과 전쟁을 정한 날이었습니다⁠.⁠”

반석호가 뿌리 벽 앞에 섰다⁠. 출장소 사무실 벽에 걸려 있던 둥근 벽시계를 안고 있었다⁠. 배터리로 가는 흰 시계였다⁠. 이 사람은 뿌리 벽의 툭 튀어나온 옹이에 시계 고리를 걸었다⁠. 초침이 째깍째깍 돌았다⁠.

원로 아홉의 눈이 일제히 이 시계로 갔다⁠.

“⁠어제 해 진 게 다섯 시 사십오 분이야⁠.⁠” 반석호가 소율에게 속삭였다⁠. “⁠내가 찍은 노을 사진 시간 보니까 그래⁠. 지금 세 시 십 분이니까 두 시간 삼십오 분 남았어⁠.⁠”

가운데 원로가 시계를 가리키며 엘프어로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시간을 보여 주는 거예요⁠.⁠”

“⁠시간을 보여 준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소율은 초침을 가리켰다⁠.

“⁠저 바늘이 한 바퀴 돌면 일 분이에요⁠. 저 바늘이 한 바퀴 돌 때마다 해가 그만큼 내려가요⁠.⁠”

원로가 시계를 오래 봤다⁠. 엘프어로 낮게 중얼거렸다⁠. 리엘이 옮기다 말고 침을 삼켰다⁠.

“⁠인간은 시간을 깎아서 벽에 걸어 두는구나⁠,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것을 치워 달라고 하십니다⁠. 깎이는 소리가 들린다고⁠.⁠”

반석호가 시계를 내리려 손을 뻗었다⁠. 엘드린이 짧게 엘프어로 받았다⁠. 리엘이 옮겼다⁠.

“⁠두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원로들도 깎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

엘드린이 회당 가운데 빈자리로 걸어 나갔다⁠. 오늘은 활을 메지 않은 빈손이었다⁠. 이 빈손이 소율에게는 활보다 무서웠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입을 열었다⁠. 말이 길었는데⁠, 리엘은 한 문장도 빼지 않고 따라 옮겼다⁠.

“⁠인간들은 숲 아래를 사백 걸음 넘게 팠습니다⁠. 처음에는 땅이 기침한 것을 지진이라 했습니다⁠. 다음에는 앵커라는 것을 박는다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굴이 서른 걸음 만에 벽에서 끝난다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일꾼 하나가 제멋대로 했다 했고⁠, 그다음에는 일꾼의 우두머리가 시켰다며 대신 죄를 지러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숲지기 대장의 피가 숲 바닥에 흘렀습니다⁠. 인간은 한 번도 처음부터 참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간을 하나하나 가르지 않겠습니다⁠. 문 앞의 인간을 모두 내몰고⁠, 동굴을 돌로 메우고⁠, 다시 오는 인간은 쏘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렇게 정해 주십시오⁠.⁠”

원로들은 눈을 감고 들었다⁠. 엘드린이 말을 마치자 몇은 눈을 뜨고 몇은 감은 채였다⁠. 소율은 엘드린이 늘어놓은 지진과 앵커와 서른 걸음과 하청과 반장을 하나씩 다시 셌다⁠.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첫 번째 거짓말은 소율의 입에서 나왔다⁠.

여왕이 소율을 보며 물었다⁠.

“⁠인간 공무원은 무엇을 말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소율은 빈자리로 걸어 나갔다⁠. 엘드린과 마주 섰다⁠. 둘 사이가 세 걸음이었다⁠. 엘드린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소율은 원로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하 말씀은 다 맞아요⁠. 첫 번째 거짓말은 제가 했어요⁠. 지진이라고요⁠. 시간을 벌려고요⁠.⁠”

리엘이 옮기다 소율을 봤다⁠.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이 옮겼다⁠. 원로들 몇이 눈을 떴다⁠.

“⁠그다음 거짓말들은 한 회사가 했어요⁠. 한성마이닝이라는 회사예요⁠. 숲 아래 따뜻한 돌을 캐서 팔려는 회사예요⁠. 오늘 숲지기 대장을 쓰러뜨린 사람도 그 회사가 돈 주고 부리는 사람이에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숲을 파라고 시킨 적은 없어요⁠. 그런데 나라가 그 회사를 막지 못한 것도 맞아요⁠.⁠”

엘드린이 엘프어로 짧게 말을 잘랐다⁠.

“⁠그 둘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십니다⁠.⁠”

“⁠전하가 숲지기를 거느리시죠⁠. 숲지기 하나가 인간 마을에 가서 사람을 쏘면⁠, 실바렌이 인간을 쏜 건가요⁠?⁠”

리엘이 옮겼다⁠. 회당 안이 조용해졌다⁠. 엘드린은 입을 다물었다⁠. 소율은 이 틈에 말을 이었다⁠.

“⁠문 앞의 인간을 모두 내몰면 회사도 나가요⁠. 그런데 갱도는 남아요⁠. 숲 아래 사백 걸음 넘는 굴이 빈 채로요⁠. 빈 굴은 무너져요⁠. 그 위의 나무들도 같이요⁠. 오늘 쓰러진 나무처럼요⁠.⁠”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인간이 제 손으로 메울게요⁠. 숲 아래 판 굴을⁠, 판 사람들 손으로⁠, 엘프분들 눈앞에서요⁠. 그리고 흰 안전모 쓴 사람을 이 자리에 데려올게요⁠.⁠”

엘드린이 웃었다⁠.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원로들을 돌아보며 엘프어로 말했다⁠. 리엘이 옮겼다⁠.

“⁠이 인간은 붙잡혔다 풀려난 몸이며⁠, 제 나라에서 곧 쫓겨날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 약속을 누가 지키느냐고⁠.⁠”

벽시계 초침이 째깍거렸다⁠. 네 시 이십 분이었다⁠.

*

반석호가 앞으로 나왔다⁠. 등산 조끼 단추를 하나 채우고⁠, 하나 남은 단추가 배 위에서 버텼다⁠. 소율 옆에 섰다⁠. 소율이 반석호를 봤다⁠. 반석호의 손이 떨렸다⁠. 이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주무관님⁠, 옮겨 줘⁠.⁠”

반석호는 원로들을 봤다⁠. 엘프어를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한국어를 또박또박 내놓았다⁠.

“⁠저는 주실바렌 대한민국 대사 대리 반석호입니다⁠. 여기 대사가 없어서 제가 대리예요⁠. 엘프어 시험 세 번 떨어졌고요⁠. 그래서 날마다 사진만 찍었습니다⁠. 사진은 통역이 필요 없으니까요⁠.⁠”

소율이 옮겼다⁠. 리엘이 엘프어로 받았다⁠. 원로들이 반석호를 봤다⁠.

“⁠우리 주무관이 한 약속⁠, 제가 대사 대리로서 같이 합니다⁠. 첫서리까지 굴을 메우고⁠, 흰 모자 쓴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못 지키면⁠.⁠”

반석호가 숨을 들이켰다⁠. 조끼 주머니 속 손이 꼼지락거렸다⁠.

“⁠못 지키면 제가 여기 남겠습니다⁠. 그 쓰러진 나무 앞⁠, 말뚝 사이에요⁠. 시월 씨 옆에요⁠.⁠”

소율은 옮기지 못하고 반석호를 봤다⁠.

“⁠소장님⁠.⁠”

“⁠옮겨⁠, 주무관님⁠. 공무원이 공무 중에 한 말이야⁠.⁠”

소율이 옮겼다⁠. 리엘이 받았다⁠. 리엘의 목소리가 중간에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원로 아홉이 모두 눈을 떴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무언가 말하려 했다⁠. 이 말을 벨렌이 막았다⁠. 숲지기 대장이 줄에서 한 걸음 나와 있었다⁠. 붕대 아래 얼굴이 하얬다⁠. 원로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리엘이 형의 말을 옮겼다⁠. 형의 말을 옮기는 건 처음이었다⁠.

“⁠오늘 회사 인간의 멱살을 먼저 잡은 것은 나입니다⁠. 그 인간은 불꽃을 쏘았고⁠, 나는 넘어지며 뿌리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피는 흘렀습니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것은 숲지기입니다⁠.⁠”

엘드린이 벨렌을 돌아봤다⁠. 벨렌은 엘드린을 보지 않았다⁠. 원로들만 봤다⁠.

*

다섯 시 삼십 분에 원로원이 정했다⁠. 가운데 원로가 일어서서 엘프어로 노래하듯 말했고⁠, 리엘이 이것을 한 줄씩 옮겼다⁠. 반석호의 시계 초침 소리가 이 노래 사이로 끼어들었다⁠.

“⁠오늘 실바렌은 인간과 싸우지 않는다⁠. 첫서리가 오기 전까지 인간은 제 손으로 숲 아래 굴을 메운다⁠. 엘프의 눈앞에서⁠. 첫서리가 오기 전까지 흰 머리쓰개를 쓴 인간을 이 회당에 데려온다⁠. 둘 중 하나라도 이루지 못하면 그날로 전쟁이며⁠, 다시 회의하지 않는다⁠. 대사 대리라는 인간은 그때 말뚝 사이에 앉는다⁠. 동굴 입구는 엘드린이 지킨다⁠.⁠”

다섯 시 사십삼 분이었다⁠. 해가 뿌리 벽 너머로 넘어가면서 마지막 빛이 시계 유리에 한 번 번쩍였다⁠. 원로들이 하나씩 일어나 회당을 떠났다⁠. 맨 마지막 원로가 시계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시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덮었다가 떼었다⁠. 초침은 계속 돌았다⁠.

엘드린은 회당을 떠나기 전에 소율 앞에 섰다⁠. 한국어였다⁠.

“⁠동굴은 이제 내 것이다⁠.⁠”

*

바깥뜰로 나오는 길에 동굴 앞을 지났다⁠. 엘드린은 회당에서 곧장 동굴로 갔던 모양이었다⁠. 동굴 입구 바위 위에 서 있던 궁수 열이 스물로 늘어 있었고⁠, 이 가운데 다섯이 동굴 안⁠, 곁굴 철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철문 앞은 보안팀장이 지키고 있었다⁠. 엘프 궁수와 보안팀장 사이가 두 걸음이었다⁠.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주무관님⁠.⁠” 보안팀장이 소율을 보고 불렀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이 사람들 밤새 이렇게 서 있는 겁니까⁠?⁠”

“⁠한 계절도 서 있을 수 있대요⁠.⁠”

보안팀장이 궁수들을 다시 봤다⁠. 허리의 전기충격기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리엘이 소율 옆에서 엘프어로 궁수들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궁수 하나가 짧게 대답했다⁠. 리엘이 옮겼다⁠.

“⁠전하의 명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이 문으로 드나드는 인간은 하나하나 얼굴을 본다고⁠. 들어간 것과 나온 것을 센다고⁠.⁠”

소율은 이 말을 오래 생각했다⁠. 엘드린은 굴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굴을 드나드는 것을 세려 하고 있었다⁠.

출장소에 돌아왔을 때는 밤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컨테이너 사무실 불이 켜져 있었다⁠. 소율은 나올 때 불을 끄고 나왔다⁠.

문을 열자 표재곤이 반석호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종이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하나는 김이 났다⁠. 일어서지 않았다⁠.

“⁠해넘이 회의라고 하던데⁠. 얘기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표재곤이 김 나는 종이컵을 소율 쪽으로 밀었다⁠. “⁠첫서리까지 굴을 메운다고요⁠. 엘프 눈앞에서⁠. 사람 손으로⁠.⁠”

“⁠전무님 손으로요⁠.⁠”

“⁠물론이죠⁠.⁠” 표재곤이 웃었다⁠. “⁠메우는 공사 저희가 하겠습니다⁠. 굴 판 회사가 메워야죠⁠. 장비도 사람도 저희밖에 없잖아요⁠. 본부에서도 한 시간 전에 그렇게 하라고 연락 왔습니다⁠. 대사 대리님이 약속하셨다면서요⁠. 지켜 드려야죠⁠.⁠”

반석호가 소율 뒤에서 숨을 멈췄다⁠.

표재곤이 일어서서 책상을 돌아 소율 앞으로 왔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마르고 깨끗했다⁠. 손톱 밑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았다⁠.

“⁠같이 하시죠⁠, 주무관님⁠. 아⁠, 월요일부터는 주무관님이 아니실 수도 있겠지만⁠.⁠”

소율은 이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을 잡지 않으면 굴을 메울 장비도 사람도 없었다⁠. 이 손을 잡으면 굴을 판 손이 엘프 눈앞에서 굴을 메웠다⁠. 이 눈이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못 보는지 소율은 출근하고 이레 동안 다 봤다⁠.

반석호가 소율의 등 뒤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잡아⁠. 일단 잡아⁠.⁠”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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