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550자)

여왕의 나무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여왕의 나무에서는 오래된 꿀 냄새가 났다⁠. 숲지기 막사에서 해 뜨기 전에 출발해 한참을 걸은 끝이었다⁠. 은껍질나무들 사이에서 이 나무만 따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둥치 둘레를 돌려면 사람 걸음으로 삼백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껍질 틈마다 빛이 새어 나왔다⁠. 나무 속이 비어 있었고⁠, 이 빈 속이 궁이었다⁠.

시월은 손목이 묶인 채 이 둥치를 올려다봤다⁠.

“⁠이게 나무예요⁠? 아파트 아니고⁠?⁠”

“⁠아파트면 엘리베이터가 있겠죠⁠.⁠”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둥치 안쪽 벽을 따라 나무 계단이 빙빙 돌며 올라갔다⁠. 계단은 깎은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스스로 그렇게 자라 있었다⁠. 반석호는 계단 서른 개째에서 무릎을 짚었고⁠, 예순 개째에서 리엘의 팔에 매달렸다⁠. 계단 꼭대기에 둥근 방이 있었다⁠. 바닥은 매끄럽게 닳은 나뭇결이었고⁠, 벽을 따라 뿌리처럼 굽은 의자들이 이어졌다⁠. 이 의자마다 엘프들이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 나뭇결이 솟아 만든 낮은 자리에 여왕이 앉아 있었다⁠.

아실리아는 작았다⁠. 엘프들은 다 키가 컸는데 여왕은 앉아 있어서인지 리엘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하얗다 못해 투명했고⁠, 무릎까지 흘러내렸다⁠. 얼굴의 주름이 나무껍질 무늬처럼 깊었다⁠. 눈만 젊었다⁠. 이 눈이 소율을 보고⁠, 시월의 손을 보고⁠, 반석호의 땀에 젖은 등산 조끼를 봤다⁠.

여왕 옆에 늙은 엘프가 서 있었다⁠. 여왕의 통역관이라고 리엘이 속삭였다⁠. 리엘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여왕이 손가락 하나로 리엘을 가리켰다⁠. 엘프어로 낮게 물었다⁠. 통역관이 한 걸음 물러섰다⁠.

“⁠폐하께서 묻기를⁠, 이 인간들의 말을 가장 오래 들은 자가 너가 아니냐고 하십니다⁠.⁠” 리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옮기게 되었습니다⁠.⁠”

*

엘드린은 여왕의 오른쪽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엘프어로 길게 말했다⁠. 리엘이 따라 옮겼다⁠.

“⁠인간이 숲 아래를 사백 걸음 넘게 팠습니다⁠. 사백 걸음을 따라 나무들이 노랗게 지고⁠, 제일 늙은 나무 하나가 쓰러졌습니다⁠. 숲지기 하나가 다리를 잃을 뻔했습니다⁠. 나무를 죽인 손은 저 여자의 손입니다⁠. 협정문은 나무를 죽인 자를 여왕 앞에 넘기라고 했고⁠, 숲의 법은 죽인 나무 뿌리에 묶어 한 계절을 두라고 합니다⁠. 지금은 가을의 문턱입니다⁠. 한 계절은 겨울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시월이 소율을 봤다⁠. 소율은 시월에게 이 말을 옮기지 않았다⁠. 시월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겨울이라는 말은 엘프어로도 겨울처럼 들렸다⁠.

여왕이 시월을 보며 엘프어로 짧게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너는 누구의 손이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시월이 묶인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하청 발파 기사 염시월이에요⁠. 반장이 화약 내주면 넣고 터뜨렸어요⁠. 밤에만요⁠. 반장이 그 위에서 시킨 걸 전했고요⁠.⁠”

“⁠그 위는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몰라요⁠. 근데⁠—⁠”

시월이 말을 멈췄다⁠. 소율은 이 멈춤을 기다렸다⁠. 어젯밤 막사에서 시월은 이 말을 하지 않았다⁠.

“⁠터뜨리는 밤마다 한 사람이 내려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노란 안전모를 쓰는데 그 사람만 흰 걸 썼어요⁠. 얼굴은 잘 못 봤어요⁠. 갱도에서는 다 머리에 전등을 다니까⁠, 마주 보면 눈이 부셔서⁠. 근데 목소리는 알아요⁠. 느릿느릿한 존댓말이에요⁠. 우리한테도 꼬박꼬박 직급 붙여서⁠. 기사님⁠, 오늘은 두 번만 하시죠⁠. 기사님⁠, 오늘은 좀 더 안쪽으로⁠. 그 사람이 정했어요⁠. 몇 번⁠, 어디까지⁠.⁠”

리엘이 옮겼다⁠. 소율은 이 말이 엘프어로 바뀌는 걸 들으며 출장소 컨테이너 안에서 들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첫날이시죠⁠, 9급이시고⁠, 주무관님이 판단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던 느릿느릿한 존댓말이었다⁠. 흰 안전모를 쓴 사람이 갱도 철문 앞에 서 있던 것도 봤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그 흰 머리쓰개를 쓴 인간을 데려와라⁠. 데려오지 못하면 이 손을 묶는다⁠, 라고 하십니다⁠.⁠”

여왕은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소율을 보며 엘프어로 물었다⁠.

“⁠인간 공무원은 무엇을 청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엘드린이 어젯밤 막사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소율은 밤새 이 대답을 생각했다⁠. 시월을 풀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시월은 정말로 화약을 넣었다⁠. 흰 안전모를 데려오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표재곤은 태백의 회사 사무실과 서울의 본부 사이에 있었고⁠, 9급 공무원 손이 닿는 데 있지 않았다⁠.

“⁠폐하께서 노란 나무를 직접 보러 가 주세요⁠.⁠”

리엘이 옮기다가 소율을 돌아봤다⁠. 방 안의 엘프들이 술렁였다⁠. 통역관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엘드린이 이를 드러내지 않고 웃었다⁠.

여왕이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왜 내가 가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노란 나무마다 숲지기 매듭이 묶여 있어요⁠. 그 매듭에 이끼가 앉아 있어요⁠.⁠”

“⁠이끼가 무엇을 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시간이요⁠.⁠”

여왕이 오래 소율을 봤다⁠. 리엘이 소율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마흔 해 동안 이 나무 밖으로 나가신 적이 없으십니다⁠. 소율은 이 말을 듣고도 눈을 내리지 않았다⁠.

엘드린이 일어서서 엘프어로 말했고⁠, 리엘이 옮겼다⁠.

“⁠인간 하나의 말에 어머니께서 나무 밖으로 나가시면 숲이 웃을 것입니다⁠, 라고 하십니다⁠.⁠”

여왕이 아들을 보며 짧게 물었다⁠. 리엘이 옮기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숲이 웃은 지 오래되지 않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의 엘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시월만 서 있었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몰라서 소율을 봤고⁠, 소율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여왕이 시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왕이 묶인 손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겨울에 뿌리에 묶이면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시월이 침을 삼켰다⁠.

“⁠죽어요⁠. 사람은 겨울 밖에서 한 계절 못 버텨요⁠.⁠”

여왕이 다시 물었다⁠.

“⁠나무는 겨울에 죽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뇨⁠. 나무는 버티죠⁠.⁠”

여왕은 이 대답을 듣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고는 시월의 손목에 감긴 덩굴 끈을 손끝으로 한 번 만지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끈은 풀어 주지 않았다⁠.

*

여왕의 걸음은 느렸다⁠. 엘프들 기준으로도 느렸다⁠. 여왕의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소율이 반석호와 출장소 사진 벽 앞에서 말다툼을 세 번은 할 시간이 걸렸다⁠. 숲길에 들어서자 엘프들이 길 양쪽에 나와 섰다⁠. 여왕이 지나가면 무릎을 꿇었고⁠, 여왕이 지나간 뒤에도 한참 일어나지 않았다⁠. 마흔 해 만이었다⁠.

반석호는 처음 한 시간은 감격해서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한 시간은 뿌리에 걸터앉아 졸았다⁠. 세 번째 한 시간에 리엘에게 물었다⁠.

“⁠리엘 씨⁠, 우리 언제 도착해⁠?⁠”

“⁠폐하께서 지금 매우 서두르고 계십니다⁠.⁠”

“⁠이게 서두르는 거야⁠?⁠”

“⁠엘프 기준으로 전력 질주이심을 알려 드립니다⁠.⁠”

행렬 맨 뒤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앳된 숲지기가 반석호의 카메라로 여왕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숲지기들이 여왕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반석호가 이 숲지기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앳된 숲지기도 엄지를 들었다⁠. 반석호가 가르쳐 준 손짓이었다⁠.

행렬이 개울을 건널 때 엘드린이 소율 옆으로 걸음을 맞췄다⁠. 숲지기들이 이 둘레를 비웠다⁠. 엘드린은 앞을 본 채 한국어로 말했다⁠. 리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어머니를 나무 밖으로 끌어낸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영광이네요⁠.⁠”

“⁠마지막이기도 할 거다⁠.⁠”

소율은 개울 돌을 밟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봄부터 아셨죠⁠. 땅 밑 일을요⁠.⁠”

엘드린이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봄에는 꽃이 핀다⁠. 인간은 꽃을 보러 숲에 오고 싶어 했지⁠. 문을 연 것은 어머니다⁠. 나는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는지 보고 있었을 뿐이다⁠.⁠”

“⁠보고만 계셨어요⁠?⁠”

엘드린이 처음으로 소율을 돌아봤다⁠. 이 눈에 무엇이 있었는지 소율은 읽지 못했다⁠. 웃음도 노여움도 아니었다⁠. 오래 계산한 끝에 답을 이미 쥔 사람의 눈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보여 주게 두는 것이 가장 빠르다⁠. 너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냐⁠?⁠”

엘드린은 걸음을 빨리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다⁠. 소율은 개울 건너편에서 운동화 속으로 스민 물의 차가움을 한참 느꼈다⁠.

해가 머리 꼭대기를 지났을 때 노란 줄의 끝이 나왔다⁠. 사백 걸음째 나무였다⁠.

여왕이 걸음을 멈췄다⁠. 노란 잎이 여왕의 투명한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여왕은 이 잎을 털지 않았다⁠. 손을 들어 둥치를 짚었다⁠. 껍질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엘프어로 나무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가 길었다⁠.

줄 가운데쯤 이 나무가 있었다⁠. 엘프 여자가 사흘 전처럼 둥치에 등을 대고 앉아 같은 가락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자가 여왕을 보고 노래를 멈추려 했다⁠. 여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는 이 옆에 섰다⁠. 여왕이 여자의 가락을 따라 불렀다⁠.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두 목소리가 한동안 같이 갔다⁠. 소율은 가사를 알아듣지 못했다⁠. 리엘이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않아도 됐다⁠. 여자의 어깨가 떨리다가 멈췄다⁠.

노래가 끝나자 여왕이 낮은 가지의 풀매듭을 봤다⁠.

“⁠폐하께서 이 매듭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리엘이 옮겼다⁠. 그리고 덧붙였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리엘은 매듭 앞에 섰다⁠. 이 매듭은 풀이 세 번 감기고 끝이 안으로 접혀 들어가 있었다⁠. 리엘은 이 매듭을 오래 봤다⁠. 형 앞에서는 말을 못 하던 엘프였다⁠. 지금 형은 여기 없었다⁠. 엘드린이 뒤에 서 있었다⁠.

“⁠어머니의 매듭입니다⁠.⁠” 리엘이 엘프어로 말하고⁠, 같은 말을 한국어로 소율에게 옮겼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저희 형제에게 가르쳐 주신 매듭입니다⁠. 세 번 감고 끝을 안으로 접어 넣습니다⁠. 숲지기들은 두 번 감고 끝을 밖으로 늘어뜨립니다⁠. 숲지기 가운데 이렇게 묶는 자는 형 하나입니다⁠.⁠”

여왕이 손가락 끝으로 매듭 위의 이끼를 쓸었다⁠. 이끼가 얇게 일어났다⁠. 여왕이 이 이끼를 손끝에 올려 햇빛에 비췄다⁠. 엘프어로 말했다⁠. 이번에는 묻는 말이 아니었다⁠. 여왕이 처음으로 묻지 않고 말했다⁠. 리엘이 숨을 들이켜고 옮겼다⁠.

“⁠이 이끼는 한 계절을 먹었구나⁠, 라고 하십니다⁠.⁠”

소율은 엘드린을 봤다⁠. 엘드린은 매듭을 보지 않았다⁠. 어머니를 봤다⁠. 엘프어로 말했다⁠.

“⁠매듭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숲지기가 아픈 나무를 보고 묶는 것은 숲지기의 일이며⁠, 그것을 언제 묶었는지는 숲지기만 안다고⁠.⁠”

“⁠그러면 숲지기에게 묻자⁠, 라고 하십니다⁠.⁠”

여왕이 다시 묻는 말로 돌아가 있었다⁠. 행렬 끝에서 엘프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벨렌이었다⁠. 숲지기 대장은 처음부터 행렬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여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등에 멘 활이 땅에 닿았다⁠.

엘드린이 걸어와 벨렌 뒤에 섰다⁠. 한 손을 벨렌의 어깨에 얹었다⁠. 주인이 개의 목덜미에 손을 얹을 때처럼 가벼운 손길이었다⁠. 벨렌의 어깨가 이 손 아래에서 한 번 굳었다⁠.

리엘이 형을 봤다⁠. 벨렌은 동생을 보지 않았다⁠.

여왕이 몸을 숙였다⁠. 이끼를 올린 손가락을 벨렌의 눈앞에 내밀었다⁠. 엘프어로 물었다⁠. 짧은 물음이었다⁠. 리엘은 옮기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였다⁠. 소율은 이 물음을 알아들었다⁠. 출근 첫날 협정문 여백에서 리엘의 연필 글씨로 본 단어가 둘 들어 있었다⁠. 언제⁠, 그리고 묶었느냐⁠.

벨렌이 고개를 들었다⁠. 여왕을 보지 않았다⁠. 어깨 위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려 엘드린을 올려다봤다⁠.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