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557자)

백 년짜리 회의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숲지기 막사의 밤은 추웠다⁠. 소율은 은박 담요를 반으로 찢어 시월에게 반을 줬다⁠. 둘은 죽은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았다⁠. 손목은 묶이지 않았다⁠. 숲지기들은 시월의 손목만 덩굴 끈으로 기둥에 맸다⁠. 나무를 죽인 사람이었다⁠.

“⁠밤에만 터뜨렸어요⁠.⁠” 어둠 속에서 시월이 말했다⁠. “⁠낮에는 엘프가 듣는다고⁠. 근데 그저께 낮에 한 번은 위에서 급하다고 해서⁠.⁠”

“⁠위가 누구예요⁠?⁠”

“⁠반장이 전해요⁠. 반장 위는 몰라요⁠. 하청이 원청 높은 사람을 알 일이 있나⁠.⁠”

시월이 은박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담요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숲지기 하나가 그쪽을 돌아봤다⁠.

“⁠이거 뭐 우주 담요 같은 거죠⁠? 엘프들이 자꾸 쳐다보네⁠.⁠”

“⁠해를 담은 이불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럼 나 지금 해 덮고 있는 거네⁠.⁠” 시월이 코로 웃었다⁠. “⁠우리 엄마가 들으면 좋아하겠다⁠.⁠”

*

잎 회의는 숲 한가운데 키가 제일 큰 나무 아래에서 열렸다⁠. 나무 둘레에 이끼 덮인 돌 다섯 개가 둥글게 놓였고⁠, 돌마다 엘프 원로 하나가 앉았다⁠. 머리가 다 하얬다⁠. 리엘이 소율의 귀에 대고 설명했다⁠. 숲의 일은 이 다섯이 정한다⁠. 전쟁과 문은 여왕의 나무 밑동 뿌리 회당에 모이는 원로원이 정하고⁠, 여왕은 이 둘 사이에 선다⁠.

원로들은 이미 회의 중이었다⁠.

“⁠지금 무슨 회의를 하고 계세요⁠?⁠”

리엘이 귀를 기울였다가 대답했다⁠.

“⁠북쪽 개울 위의 나무다리를 고칠 것인지⁠, 새로 놓을 것인지⁠, 그대로 둘 것인지에 대한 회의입니다⁠.⁠”

“⁠언제부터요⁠?⁠”

“⁠문이 열리기 전부터이니⁠, 이 년 남짓입니다⁠.⁠”

“⁠결론은요⁠?⁠”

“⁠고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다리 쪽 나무의 의견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소율이 다시 물으려는데 원로 하나가 손을 들었다⁠. 다리 회의를 잠깐 멈추겠다는 뜻이라고 리엘이 옮겼다⁠. 잠깐은 달이 한 번 차고 기우는 사이였다⁠. 다음 원로들은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다섯이 차례로⁠, 각자의 할머니 나무와 할아버지 나무의 안부까지 물었다⁠. 한 시간이 걸렸다⁠.

반석호는 이 한 시간 동안 원로들을 다 찍었다⁠. 카메라는 앳된 숲지기에게 빌려준 그대로여서 휴대폰으로 찍었다⁠. 본부는 아침 일곱 시에 반석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엘프 쪽 연락은 반 소장만 한다⁠. 그리고 회사 대표가 해명할 수 있게 동행하라⁠. 반석호는 출장소 커피 믹스 스무 봉지와 보온병 두 개를 들고 이 지시대로 동행했다⁠.

원로들은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씩 마셨다⁠. 그러고는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다⁠. 맨 오른쪽 원로가 엘프어로 길게 말했다⁠. 리엘이 웃음을 참고 옮겼다⁠.

“⁠흙을 끓인 물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한 잔 더 달라고 하십니다⁠.⁠”

*

표재곤은 원로들의 둥근 자리 맞은편에 섰다⁠. 정장 위에 엘프가 빌려준 녹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숲에 들어올 때 걸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옆에 보안팀장이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섰다⁠.

“⁠한성마이닝 전무 표재곤입니다⁠. 먼저 회사를 대표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리엘이 옮겼다⁠. 원로들이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다⁠. 사과를 받는 끄덕임이 아니라 들었다는 끄덕임이었다⁠.

“⁠저희 회사는 문 쪽 암반을 보강하는 공사만 하청 업체에 맡겼습니다⁠. 그 하청 업체가 계약에 없는 발파를 했습니다⁠. 저 사람이 그 업체의 발파 기사입니다⁠. 회사는 오늘 아침 그 하청 업체와 계약을 끊었습니다⁠. 일한 사람 전원 현장에서 내보냈습니다⁠.⁠”

시월의 어깨가 한 번 움찔했다⁠. 소율은 시월이 갱도 안쪽으로 보낸 두 남자를 생각했다⁠. 흙만 날랐다던 스물두 살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무에 대한 보상입니다⁠.⁠”

보안팀장이 상자를 열었다⁠. 금괴 넷이 나무 상자 안 검은 천 위에서 빛났다⁠. 원로들이 몸을 숙여 들여다봤다⁠. 가운데 원로가 엘프어로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이 노란 돌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나무가 이것을 먹느냐고⁠.⁠”

“⁠이건⁠, 인간 세계에서 아주 귀한 겁니다⁠.⁠”

“⁠귀한 것을 나무 밑에 묻으면 나무가 다시 사느냐고 물으십니다⁠.⁠”

표재곤의 입이 잠깐 열린 채 멈췄다⁠. 반석호가 이 표정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회의 나무 아래에 크게 울렸다⁠. 표재곤이 반석호를 돌아봤다⁠. 반석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기록용입니다⁠.⁠”

엘드린이 원로들의 둥근 자리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금괴 상자를 발끝으로 밀어 표재곤 쪽으로 돌려놓고 엘프어로 말했다⁠. 리엘이 옮기는 동안 원로들은 눈을 감고 들었다⁠.

“⁠인간들은 셋이 왔다⁠. 하나는 땅을 기침하게 한 여자⁠, 하나는 노란 돌을 들고 온 남자⁠, 하나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말을 옮기는 여자⁠. 셋은 서로를 탓하지만 같은 문으로 왔다⁠. 숲의 법은 나무를 죽인 손을 묻는다⁠. 손은 저기 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뿌리에 묶자고 청하신답니다⁠.⁠”

가운데 원로가 눈을 떴다⁠. 오늘이라는 말에 다섯 원로가 동시에 엘드린을 봤다⁠. 엘드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원로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젓고⁠, 다른 원로가 엘프어로 짧게 대답했다⁠. 리엘이 옮겼다⁠. 해 지기 전에 정하는 일은 피가 흐른 일뿐이며⁠, 이 일에는 아직 엘프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고 했다⁠. 엘드린의 턱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소율은 앞으로 나섰다⁠. 붙잡힌 몸이었지만 잎 회의는 붙잡힌 자의 말도 듣는다고 리엘이 전해 줬다⁠.

“⁠시월 씨⁠, 손 좀 보여 주세요⁠.⁠”

시월이 묶인 손을 들었다⁠. 덩굴 끈 아래 손등과 손톱 밑에 노르스름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소율은 이 손을 원로들 쪽으로 돌렸다⁠.

“⁠이 얼룩은 화약을 손으로 오래 만진 사람한테 생겨요⁠. 씻어도 안 빠져요⁠. 이분은 발파 기사가 맞아요⁠. 그런데 발파 기사는 화약을 직접 사지 못해요⁠. 화약은 아무나 사고팔 수 없는 물건이에요⁠. 땅 주인 회사가 들여놓고⁠, 그걸 내줘야 쓸 수 있어요⁠.⁠”

리엘이 옮겼다⁠. 원로들이 표재곤을 봤다⁠.

“⁠전무님은 그저께 저한테 앵커를 박는 공사라고 하셨어요⁠. 화약은 안 쓴다고요⁠.⁠”

“⁠저는 하청이 화약을 썼는지 몰랐습니다⁠.⁠”

“⁠그럼 회사 화약은 어디 있어요⁠?⁠”

“⁠회사가 왜 화약을⁠—⁠”

표재곤이 말을 멈췄다⁠. 소율은 이 멈춤을 봤다⁠. 회사가 화약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하면 하청이 어디서 화약을 구했는지 설명해야 했다⁠. 들여놓았다고 하면 앵커 공사가 거짓이 됐다⁠. 표재곤은 둘 중 어느 쪽도 고르지 않고 금괴 상자를 닫았다⁠.

“⁠시월 씨⁠, 화약 어디서 받았어요⁠?⁠”

“⁠동굴 오른쪽 구석⁠. 쇠 컨테이너⁠. 반장이 열쇠로 열어서 꺼내 줘요⁠.⁠”

*

동굴 오른쪽 구석의 쇠 컨테이너는 사람 키보다 조금 높았다⁠. 녹색 페인트 위에 「⁠한성마이닝⁠」 로고가 찍혀 있었다⁠. 문에 자물쇠가 셋 달려 있었고⁠, 컨테이너 둘레에 「⁠화기 엄금⁠」 표지판이 넷 붙어 있었다⁠.

엘프들이 동굴 안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동굴 입구를 막고 선 엘드린의 궁수들이 길을 열었다⁠. 원로 다섯 가운데 하나가 따라왔다⁠. 제일 젊다는 원로였는데⁠, 걸음은 소율의 할아버지보다 느렸다⁠. 리엘이 원로의 팔을 부축했다⁠. 엘드린과 벨렌이 뒤에⁠, 표재곤과 보안팀장이 맨 뒤에 섰다⁠.

“⁠열어 주세요⁠.⁠”

보안팀장이 표재곤을 봤다⁠. 표재곤은 컨테이너를 보지 않고 엘드린을 봤다⁠. 엘드린은 활을 등에 멘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동굴 입구 쪽에서 궁수 열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 있었다⁠.

“⁠엘프 앞에서 화약고를 여는 건 안전 규정 위반입니다⁠.⁠” 표재곤이 말했다⁠.

“⁠그럼 이게 화약고인 건 맞네요⁠.⁠”

반석호가 컨테이너 앞에서 「⁠화기 엄금⁠」 표지판을 찍었다⁠. 찰칵⁠. 다음 자물쇠 셋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소장님⁠.⁠” 표재곤이 낮게 말했다⁠.

“⁠기록용입니다⁠. 아 이거 좋다⁠, 자물쇠 셋⁠.⁠”

표재곤이 눈을 감았다 떴다⁠. 보안팀장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보안팀장이 허리의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셋을 골라 차례로 돌렸다⁠. 문이 열렸다⁠.

냄새가 먼저 나왔다⁠. 소율이 경계석 틈에서⁠, 철문 틈에서⁠, 시월의 손에서 맡은 냄새의 뿌리였다⁠. 컨테이너 안에 갈색 종이 상자가 선반마다 쌓여 있었다⁠. 앞줄 상자들은 테이프가 뜯겨 반쯤 비어 있었다⁠. 뒷줄 상자들은 테이프가 새것이었다⁠. 상자 옆면마다 「⁠한성마이닝⁠」 이름과 날짜가 찍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맨 뒷줄 상자의 날짜는 9월 4일이었다⁠. 굴착 장비가 들어온 날이었다⁠.

원로가 컨테이너 앞에 서서 상자들을 오래 봤다⁠. 엘프어로 소율에게 물었다⁠. 리엘이 옮겼다⁠.

“⁠이것이 땅을 기침하게 한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네⁠.⁠”

“⁠이것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소율은 상자의 스티커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리엘이 이 글자를 엘프어로 읽어 원로에게 옮겼다⁠. 원로가 표재곤을 돌아봤다⁠.

표재곤이 망토 앞섶을 여몄다⁠. 표재곤의 목소리는 처음 출장소에 왔을 때처럼 차분했다⁠.

“⁠회사 자재는 맞습니다⁠. 정상 공사용으로 들여놓은 거예요⁠. 하청이 그걸 계약에 없이 빼돌려서 쓴 겁니다⁠. 회사도 피해자입니다⁠.⁠”

리엘이 이 말을 옮기다 멈췄다⁠. 소율을 봤다⁠.

“⁠이 말을 그대로 옮겨도 되는지 여쭙니다⁠. 엘프어에는 피해자라는 단어가 나무를 잃은 쪽에만 쓰입니다⁠.⁠”

“⁠그대로 옮겨 주세요⁠.⁠”

리엘이 옮겼다⁠. 이때 동굴 안쪽 문 쪽에서 발소리가 몰려왔다⁠. 보안팀원 넷이 작업복 차림의 남자 여럿을 앞세우고 걸어왔다⁠. 다들 가방을 메거나 안고 있었다⁠. 하청 업체 사람들이었다⁠. 계약을 끊었다는 이 사람들이 지금 문 쪽으로⁠, 태백으로 내보내지고 있었다⁠. 이 무리 가운데 어젯밤 갱도에서 잭을 들고 뛰어오던 앳된 얼굴이 있었다⁠. 이 남자가 컨테이너 앞에 선 시월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누나⁠!⁠”

보안팀원이 남자의 등을 밀었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섰다⁠.

“⁠누나⁠, 우리 잘렸어요⁠. 반장님도요⁠. 누나는 어떻게 돼요⁠?⁠”

시월이 묶인 손을 들어 보였다⁠. 웃으려고 했는데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나는 여왕님 만나러 가⁠. 가서 우리 엄마한테 말해⁠. 나 출장 길어진다고⁠. 병원비 이번 달 거는 통장에 있다고⁠.⁠”

보안팀원이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청 사람들이 푸른 빛의 문 쪽으로 사라졌다⁠. 문을 지나는 순간 이들의 등이 물에 잠기듯 일렁였다가 없어졌다⁠. 표재곤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원로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원로는 표재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드린에게 고개를 돌려 길게 말했다⁠. 엘드린이 짧게 대답했다⁠. 리엘이 두 말을 이어 옮겼다⁠.

“⁠원로께서는 이 일이 잎 회의가 정하기에 너무 크다고 하십니다⁠. 잎 회의로 정하려면 몇 해가 걸릴 것이라고⁠. 엘드린 전하께서는⁠, 그러면 어머니께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

해 질 녘에 여왕의 전령이 막사로 왔다⁠. 은빛 나뭇잎 모양 장식을 가슴에 단 늙은 엘프였다⁠. 전령은 막사 한가운데에서 엘프어로 노래하듯 말했다⁠. 리엘이 이 노래를 한국어로 옮기다가 공문 말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이게 맞는 말투였다⁠.

“⁠여왕 폐하께서 인간 공무원 마소율과 나무를 죽인 인간 염시월을 내일 해 뜰 무렵 여왕의 나무로 부르심을 알려 드립니다⁠.⁠”

시월이 소율을 봤다⁠.

“⁠여왕 앞이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소율이 대답하기 전에 막사 위 가지에서 엘드린이 내려섰다⁠. 시월의 묶인 손을 봤다⁠. 노르스름한 얼룩을 봤다⁠. 그러고는 소율 앞에 섰다⁠. 이번에는 리엘을 거치지 않았다⁠. 한국어였다⁠. 쇠 맛이 난다던 말을 엘드린은 천천히⁠,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

“⁠내일⁠, 어머니 앞에서⁠. 나는 숲의 법을 청한다⁠. 뿌리에 묶는다⁠.⁠”

엘드린이 시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율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청할 거냐⁠?⁠”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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