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4자)

구멍 아래

엘프 왕국에 파견된 9급 공무원 · 엄선재

출장소 비상 가방에는 구급상자와 은박 담요와 머리 전등이 들어 있었다⁠. 소율은 가방을 메고 경계석 앞에 섰다⁠. 해는 아직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본부는 오늘 아침 아홉 시에 소율의 숲 출입을 막았다⁠. 경계석 안쪽은 해가 있을 때⁠, 엘프와 함께⁠. 엘프의 규칙은 아직 지킬 수 있었다⁠.

“⁠리엘 씨⁠, 동행해 주세요⁠.⁠”

리엘이 소율을 봤다⁠. 동굴 앞 궁수들을 봤다⁠. 벨렌은 이미 숲으로 뛰어든 뒤였다⁠.

“⁠동행하겠습니다⁠. 다만 해가 지면 주무관님께서는 숲에 계실 수 없으며⁠, 그때도 숲에 계시면 숲지기에게 붙잡히게 됨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알아요⁠.⁠”

리엘이 앞서 뛰었다⁠. 소율은 뒤따랐다⁠. 노란 나무가 늘어선 사백 걸음은 엘프 걸음으로 금방이었다⁠. 사람 걸음으로는 숨이 목까지 찼다⁠. 노란 줄이 끝난 데서 한참을 더 들어가자 숲이 갑자기 환해졌다⁠. 하늘을 덮던 가지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나무가 누워 있었다⁠. 둥치 둘레가 출장소 컨테이너 두 동을 붙인 것만 했다⁠. 쓰러지면서 다른 나무 셋을 꺾었고⁠, 뿌리가 하늘로 들려 흙덩이를 매단 채 소율 머리 위에서 천천히 흙을 떨궜다⁠. 뿌리가 뽑혀 나간 자리는 구멍이었다⁠. 사람 키로 일고여덟은 될 깊이였다⁠. 구멍에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이 바람에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잘린 뿌리에서 흘러나온 수액의 단내가 숨이 막힐 만큼 짙었고⁠, 이 밑에 갓 무너진 흙의 비린내와 질산 냄새와 기계 기름 냄새가 깔려 있었다⁠.

엘프들이 구멍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스무 명이 넘었다⁠. 아무도 내려가지 않았다⁠. 활을 든 숲지기들도⁠, 벨렌도⁠, 구멍 가장자리 한 발짝 앞에 서서 아래만 내려다봤다⁠. 엘드린이 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구멍 아래에서 엘프 목소리가 올라왔다⁠.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소율은 가장자리에 엎드려 아래를 봤다⁠. 흙더미 위로 굵은 뿌리 하나가 걸쳐져 있었고⁠, 이 뿌리 밑에 녹색 옷이 보였다⁠. 그리고 이 너머⁠, 구멍 바닥 한쪽 벽이 뚫려 있었다⁠. 이 뚫린 자리에서 하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여자 숲지기입니다⁠.⁠” 리엘이 말했다⁠. “⁠형 밑에서 활을 제일 잘 쏩니다⁠. 다리가 뿌리에 깔렸다고 합니다⁠.⁠”

“⁠밧줄 있어요⁠?⁠”

엘프들이 소율을 봤다⁠. 리엘이 엘프어로 옮겼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엘드린이 엘프어로 천천히 말했다⁠. 리엘이 옮겼다⁠.

“⁠뿌리 아래는 죽은 이들의 자리다⁠. 산 자가 내려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십니다⁠.⁠”

“⁠저 엘프 아니에요⁠.⁠”

소율은 비상 가방에서 머리 전등을 꺼내 이마에 둘렀다⁠. 스위치를 눌렀다⁠. 하얀 빛이 구멍 벽을 비췄다⁠. 둘레의 엘프들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섰다⁠. 숲지기 둘이 활을 당겼다⁠.

“⁠불 아니에요⁠!⁠” 소율이 두 손을 들었다⁠. “⁠불꽃 없어요⁠. 뜨겁지도 않아요⁠. 만져 보세요⁠.⁠”

엘드린이 걸어왔다⁠. 소율 앞에 쪼그려 앉아 전등 유리에 손가락을 댔다⁠. 한참을 댔다⁠. 손가락을 떼고 엘프어로 한 마디를 했다⁠. 리엘이 숨을 내쉬었다⁠.

“⁠해를 담은 물병과 같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허락하신답니다⁠.⁠”

숲지기 하나가 덩굴을 꼬아 만든 밧줄을 던졌다⁠. 소율은 이것을 허리에 두 번 감고 매듭을 지었다⁠. 리엘이 밧줄 끝을 쓰러진 나무 둥치에 감다가 멈칫했다⁠. 이 나무가 누구의 할아버지인지 아는 얼굴이었다⁠. 리엘은 둥치에 손바닥을 한 번 대고 엘프어로 짧게 말한 뒤에 밧줄을 감았다⁠.

“⁠하강 시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리엘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건 공문이 아닙니다⁠.⁠”

*

구멍 벽은 무른 흙이었다⁠. 운동화 코가 박힐 때마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머리 전등 빛 속에 잘린 뿌리들이 드러났다⁠. 잘린 면이 하얗고 축축했다⁠. 칼로 자른 면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뜯겨 나간 면이었다⁠.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따뜻해졌다⁠. 구멍 바닥에 발이 닿자 발바닥으로 온기가 올라왔다⁠. 흙 사이로 주먹만 한 돌들이 박혀 있었다⁠. 흐린 주황빛이 돌았다⁠. 온석이었다⁠.

여자 숲지기는 뿌리 아래 흙더미에 반쯤 묻혀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 굵은 뿌리에 깔려 있었다⁠. 소율의 전등 빛이 얼굴에 닿자 숲지기가 눈을 가렸다⁠. 소율은 전등을 아래로 돌렸다⁠. 숲지기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소율의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요⁠. 꺼내 줄게요⁠.⁠”

엘프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한국어로 말했다⁠. 숲지기가 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손에 힘을 풀었다⁠.

소율은 뿌리를 두 팔로 안고 들어 올렸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 허리만 한 뿌리였다⁠. 소율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렸다⁠. 구멍 바닥 한쪽 벽⁠, 아까 위에서 본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던 자리를 봤다⁠.

갱도였다⁠.

흙벽이 무너지며 드러난 갱도 단면이었다⁠. 어른 둘이 나란히 걸을 너비⁠, 바닥에 깔린 레일 두 줄⁠, 천장을 받친 갱목⁠. 천장에 매단 전선을 따라 전등이 점점이 이어졌다⁠. 한쪽은 숲 더 깊은 쪽으로⁠, 다른 한쪽은 바깥뜰 쪽으로 뻗어 있었다⁠. 바깥뜰 쪽을 따라가면 무엇이 나오는지 소율은 알았다⁠. 오늘 새벽 손바닥에 회색 물기를 묻힌 벽의 뒷면이었다⁠.

갱도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전모 전등 불빛 셋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여기 무너졌어⁠? 사람 있어⁠?⁠”

여자 목소리였다⁠. 불빛 셋이 소율의 전등 빛에 멈췄다⁠. 맨 앞의 사람은 소율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서른 중반⁠, 노란 안전모⁠, 먼지 묻은 얼굴⁠. 뒤의 둘은 스물 언저리의 남자들이었다⁠. 셋 다 한성마이닝 하청 업체 이름이 박힌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가 소율을 봤다⁠. 뿌리 밑의 숲지기를 봤다⁠. 숲지기의 귀를 봤다⁠.

“⁠엘프야⁠?⁠” 여자가 말했다⁠. “⁠진짜 엘프 처음 보네⁠. 귀가 진짜 기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다리 깔렸어요⁠?⁠”

“⁠네⁠. 뿌리가 안 들려요⁠.⁠”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막내야⁠, 잭 가져와⁠. 큰 거⁠. 빨리⁠.⁠”

남자 하나가 갱도 안쪽으로 뛰어갔다⁠. 여자는 소율 옆에 쪼그려 앉아 뿌리 밑을 손으로 더듬었다⁠. 손이 작고 마디가 굵었다⁠. 손톱 밑과 손등 주름마다 노르스름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소율은 이 손에서 이 냄새를 맡았다⁠. 질산이었다⁠. 씻어도 안 빠지게 손에 밴 냄새였다⁠.

“⁠발파 하시는 분이에요⁠?⁠”

여자가 손을 멈췄다⁠. 소율의 비상 가방에 붙은 출장소 마크를 봤다⁠.

“⁠외교부⁠?⁠”

“⁠네⁠. 마소율이에요⁠.⁠”

“⁠염시월⁠.⁠” 여자가 말했다⁠. “⁠하청 발파 기사⁠. 근데 지금 그거 얘기할 때 아니잖아요⁠.⁠”

남자가 유압 잭을 들고 돌아왔다⁠. 시월이 잭을 뿌리 밑 단단한 흙 위에 고이고 손잡이를 펌프질했다⁠. 한 번 펌프질할 때마다 뿌리가 손가락 한 마디씩 올라갔다⁠. 위에서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구멍 가장자리에서 엘프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내려왔다⁠.

뿌리가 한 뼘 들렸다⁠. 소율은 숲지기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당겼다⁠. 숲지기가 이를 악물었다⁠. 다리가 빠져나왔다⁠. 무릎 아래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소율은 비상 가방의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시월이 부목 끝을 잡아 줬다⁠. 둘은 말없이 손을 맞췄다⁠.

“⁠위에서 끌어 올려 줘요⁠!⁠” 소율이 위로 소리쳤다⁠.

밧줄 두 가닥이 내려왔다⁠. 소율과 시월이 숲지기의 허리와 가슴에 밧줄을 감았다⁠. 위에서 엘프들이 당겼다⁠. 숲지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구멍 가장자리에서 손 여럿이 숲지기를 받았다⁠. 엘프들 사이에서 낮은 소리가 터졌다⁠. 울음 같기도 노래 같기도 했다⁠.

숲지기를 맨 마지막에 받아 안은 것은 벨렌이었다⁠. 벨렌은 다친 부하를 다른 숲지기에게 넘기고 나서도 구멍 가장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구멍 바닥을 내려다봤다⁠. 소율이 아니라 이 너머⁠, 무너진 벽 사이로 뻗은 레일과 전등 줄을 봤다⁠. 소율은 이 얼굴을 올려다봤다⁠. 둘레의 엘프들은 처음 보는 것 앞에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벨렌은 그러지 않았다⁠.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길을 이미 아는 사람이 지도를 다시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벨렌은 소율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고개를 돌렸다⁠.

*

해가 졌다⁠. 구멍 위 하늘이 보랏빛으로 어두워졌다⁠. 소율은 이걸 올려다보며 알았다⁠. 이제 올라가면 소율은 숲지기에게 붙잡힌다⁠. 금요일 오전 열 시 서울의 징계 위원회에 가지 못한다⁠. 이게 오히려 나을지도 몰랐다⁠.

구멍 가장자리에 엘드린이 섰다⁠. 엘프어로 말했다⁠. 리엘이 이 옆에 서서 옮겼다⁠. 목소리가 구멍 벽을 타고 내려왔다⁠.

“⁠그 인간들을 올려 보내라⁠. 나무를 죽인 자들이다⁠. 협정대로 여왕 폐하 앞에 넘긴다⁠.⁠”

시월이 소율을 봤다⁠. 엘프어를 못 알아듣는 얼굴이었다⁠. 소율은 이 말을 옮겼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도 말했다⁠. 협정문 첫 장의 이 줄대로⁠, 나무 한 그루는 엘프 한 사람이고⁠, 숲의 법은 죽인 나무 뿌리에 죽인 자를 묶어 한 계절을 둔다⁠.

시월 뒤의 남자 둘이 얼굴이 하얘졌다⁠. 하나가 뒷걸음질했다⁠.

“⁠누나⁠, 우리 흙만 날랐잖아요⁠.⁠”

“⁠알아⁠. 가⁠.⁠”

남자 둘이 갱도 안쪽으로 뛰어갔다⁠. 안전모 불빛 둘이 흔들리며 멀어졌다⁠. 시월은 따라가지 않았다⁠. 레일 위에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소율은 구멍 위로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시킨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리엘이 옮겼다⁠. 엘드린의 대답이 내려왔다⁠.

“⁠시킨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소율의 입에서 이 이름이 맴돌았다⁠. 흰 안전모와 젖은 벽과⁠, 접착제 냄새라고 하던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러나 소율이 가진 것은 냄새와 손바닥에 묻은 회색 물기뿐이었다⁠. 지금 이 이름을 대면 엘드린은 이 이름을 원로원에 가져간다⁠. 한국 회사의 전무가⁠, 한국 정부가 막지 못하는 사람이 숲을 죽였다고⁠.

소율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엘드린이 한 마디를 더 했다⁠. 리엘이 옮기기를 망설였다⁠. 엘드린이 리엘을 봤다⁠. 리엘이 옮겼다⁠.

“⁠그 여자 손에서 그 냄새가 난다⁠. 여기까지 올라온다고 하십니다⁠.⁠”

구멍 가장자리의 숲지기들이 일제히 활을 내려 화살을 걸었다⁠. 화살촉 여럿이 구멍 아래를 향했다⁠. 머리 전등 빛 속에서 화살촉들이 반짝였다⁠. 시월은 이 반짝임을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노르스름한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저 사람들⁠, 나 올라가면 어떻게 한대요⁠?⁠”

“⁠여왕 앞에 데려가요⁠. 그다음은 아직 몰라요⁠.⁠”

“⁠그쪽은 같이 올라가요⁠?⁠”

“⁠올라가면 저도 붙잡혀요⁠. 해가 졌거든요⁠.⁠”

시월이 소율을 봤다⁠. 처음으로 이 먼지 묻은 얼굴에서 웃음 비슷한 게 비쳤다⁠.

“⁠공무원도 붙잡혀요⁠? 웃기네⁠.⁠”

시월이 밧줄을 잡았다⁠. 소율이 이 팔을 붙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올라가면⁠—⁠”

“⁠걔네 둘 다 스물두 살이에요⁠. 흙만 날랐어요⁠. 진짜로⁠.⁠” 시월이 소율의 손을 떼어 냈다⁠. 작고 마디 굵은 손이 소율의 손등을 한 번 두드렸다⁠. “⁠화약은 내가 넣었어요⁠. 내 손으로⁠.⁠”

시월이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발이 흙벽을 밟을 때마다 흙이 소율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소율은 전등을 위로 비췄다⁠. 시월의 노란 안전모가 구멍 가장자리를 넘었다⁠. 화살촉 여럿이 일제히 이 안전모로 모였다⁠.

시월이 구멍 밖으로 올라서서 두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엘드린 쪽으로 펴 보였다⁠. 노르스름한 얼룩이 머리 전등 빛에 드러났다⁠.

“⁠제가 터뜨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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